2024년 1월 21일(주일) 1부예배 오전 7시 30분 / 2부예배 오전 11시
주현절 셋째주일
성경본문 : 마태복음 26장 6~13절
제 목 : 그를 기억하리라!!
■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오늘 대림절 셋째 주일, 여신도주일에 정성과 사랑으로 예배드리시는 모든 성도들 위에 귀한 찬양을 주께 올린 시온찬양대 위에, 연로하시거나 병상에 있으신 분들과 유튜브로 예배를 드리시는 모든 분들 위에 흘러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제가 스마트폰에서 틱톡을 눌렀는데 티벳 불교의 고승 한 분이 영어로 무슨 말을 하였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One day / You and I are going to leave this world. And we will be nothing / but just memories. So let’s make sure / to leave good memories / in hearts of people.”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이고 단지 사람들의 기억에서 만이 남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사람들 마음에 좋은 기억으로 남도록 합시다!”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죽는다고 해도 <나>라는 흔적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남긴 사랑이나 좋은 행적들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남아 있는 것이니 이 땅에 살 때 사람들 마음속에 좋은 기억으로 남자는 뜻입니다. 지난주에 식탁에 앉았는데 노트에 아내가 적어 놓은 시 한 편이 있었습니다. 제목이 “지나가는 모든 곳에”였고 그 시를 지은 이는 박노해 씨였습니다. “인생은 날마다 지나가는 것 / 날마다 세상 속을 지나가고 / 날마다 사람 속을 지나가고 / 지나는 모든 곳에 / 이익과 인정을 얻어내지 않고는 /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 지나는 모든 곳에 / 빛과 온기를 전해주지 않고는 /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 지나온 것이 내 인생 / 나는 누굴지나 여기 서 있나 / 나는 무얼 주며 나아가고 있나” 박노해 시인이 이 시를 통해 의도하는 바가 있습니다. 사람들마다 지나가는 인생을 살고 있는데 두 가지 인생을 대비한 것 같습니다. 나 아닌 주변의 존재들에게 빛과 온기를 전해주면서 지나가는 좋은 사람이 있고 오직 나만의 이득과 유익을 위해 살다가 지나가는 그렇고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묻습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에게 무슨 빛을 비추이며 온기를 전해주며 지나왔나?를 묻고 있습니다. 티벳 불교의 고승이 말한 것이나 박노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실 하나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너는 함께 살았던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면서 살아왔나를 너 자신에게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따뜻한 빛을 비추이고 온기를 주면서 살았는가 아니면 내 유익만을 위해 바득바득 허겁지겁 살아왔나를 묵상해 보라는 것입니다.
■ 누군가 저에게 좋아하는 노래가 뭐냐고 묻는다면 김남주 시인이 작시하고 가수 안치환이 부른 노래 중 한 노래를 꼽을 것입니다. 가사가 이렇습니다. “흘러 흘러서 물은 어디로 가나 / 물 따라 나도 가면서 물에게 물어본다 / 건듯건듯 동풍이 불어 새봄을 맞이했으니 / 졸졸졸 시내로 흘러 조약돌을 적시고 / 겨우내 낀 개구쟁이의 발 때를 벗기러 가지 / 흘러 흘러서 물은 어디로 가나 / 물 따라 나도 가면서 물에게 물어본다 / 오뉴월 더운 날에 가을을 만났으니 / 돌돌돌 도랑에 흘러 농부의 시름 덜고 / 타는 들녘 벼 포기를 적시러 가지” 노래가사를 봅시다. 물이 흐르는데 그냥 흐르지 않습니다. 흐르면서 조약돌을 적셔주며 흐릅니다. 개구쟁이 발때도 벗겨 주며 흐릅니다. 돌돌돌 도랑에 흘러서 타는 들녘 벼포기를 적시면서 농부의 시름을 덜어주면서 흐릅니다. 그저 그냥 무심코 흐르는 것만이 아니라 뭔가 유익함을 주고 뭔가 긍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흐릅니다. 저와 성도 여러분! 인생을 지나오면서 또 지나가면서 또 흐르면서 흘러가면서 언젠가 떠나갈텐데 사람들에게 무슨 기억을 이웃과 주변에 무슨 영향을 남기고 있습니까? 사람들에게 어떤 기억을 남기고 있습니까? 과연 저와 여러분들은 흘러 흘러서 타는 들녘 벼포기를 적셔서 농부의 시름을 덜어주는 삶을 살았습니까? 아니면 사람들에게 오만가지 민폐 끼치고 근심꺼리를 안겨주면서 살았습니까? 가끔씩 내 인생을 스톱시켜서 지나온 자리 되돌아보며 나는 주변에 무슨 기억을 남기고 무슨 영향을 주고 살아왔는가 나 자신에게 진실하게 엄정하게 추상같이 묻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 본문에 등장하는 두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어 보겠습니다. 예수님과 어떤 여인입니다. 이때가 언제냐 하면 예수님께서 잡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였습니다.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식사하시는 예수님 머리에 부었습니다. 왜 그 여인이 부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의 이스라엘 나라의 어떤 풍속과 문화가 있었을 것입니다. 매우 비싼 향유를 부어 드리는 일은 무척 중요한 분이나 무척 존귀하신 분에게 최고의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추측하기를 이 여인의 이름이 막달라 마리아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있는 일곱 귀신을 쫓아내주신 여자입니다. 다른 주석학자는 이 여인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인데 예수님께서 여인을 용서하시고 구출해 주신 그 여인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에서는 그 여인 이름이 명시되어 있지 않고 그저 한 여자라고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깊은 은혜를 받았고 사랑을 받았던 여인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이 여인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나와 있는데 이 여인이 향유 300데나리온 어치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하였습니다. 1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일당이니 한 10만원을 받는다고 합시다. 300데나리온은 3,000만원 정도 될 것입니다. 굉장히 값비싸고 향기로운 기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향유는 문헌에 의하면 이스라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도산으로 최고급수입품이며 입니다. 그것도 그냥 혼합물이 아니라 “순나르드”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여성들이 일상생활에서 쓰는 것이 아니라 신주단지처럼 모셔놓았다가 절박한 순간에 내어 쓰는 그 어떤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토록 중요한 향유이기에 귀중한 옥합에 담아 놓았을 것입니다. 왜 그런 귀한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께 아낌없이 쏟아부었을까? 의문이 생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 여인은 누구였을까? 여기서 잠시 궤도를 벗어나 여자들의 일반적인 심리를 연구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친다고 합니다. 이 말은 틀린 말입니다. 여성에게 나쁜 인식을 주는 것이니 쓰지 말아야 합니다. 그 반대로 말해야 합니다. 여자가 한번 사랑하게 되면 눈보라 치는 얼음산 위에서도 그 얼음을 녹이는 훈풍이 되고 온기가 됩니다.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 모든 것을 바치게 됩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은 분명 예수님께로부터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여인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많은 죄를 용서받았는지 고칠 수 없는 질병을 고침받았는지 본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옥합을 깨서 향유를 붓는 행위를 통해 이 여인이 얼마나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어느 정도 느끼고 알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어찌 보면 그 향유가 300데나리온 어치라고 했는데 양이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만일 여인에게 600데나리온의 향유가 있었다고 해도 300데나리온 어치만 붓고 나머지 반은 아껴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 모조리 아낌없이 예수님께 부어드렸을 것입니다. 만약 순 나-드 향유보다도 훨씬 더 귀한 향유가 있었다고 해도 여인은 그것을 다 부어 바쳤을 것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었습니다.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 오늘 본문에서 향유와 여인은 동일화(identify)되어 있습니다. 여인이 향유이고 향유가 여인입니다. 옥합이 여인이고 여인이 옥합입니다. 그러므로 여인이 향유를 예수님께 부음은 수천만원 상당의 고급스러운 향수를 부은 것이 아닙니다. 이미 여인이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자신의 전 존재를 다 부어 바친 것입니다. 전 존재를 부어 바쳐 헌신한 것이요 사랑한 것입니다. 본문 26장 8절에 보면 여인이 향유를 부었을 때 제자들이 분개했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화를 내어 서로 말하기를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을 도울 수 있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제자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가룟 유다가 아닐까 추정해 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예수님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가장 우선적인 사업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의 설교”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찬양대의 찬양”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전도”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사회봉사”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교회교육”이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교회가 밖으로 나가서 세상과 사회에 어둠을 밝히는 것이 급선무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관을 짓는 계획하고 있습니다만 물론 지역사회봉사나 전도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넘버원은 우리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이고 그 이상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있어서 우리의 교회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 예수님 사랑하는 일이고 이 이상을 넘어가는 것들이란 결코 없어야 합니다.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이상이 되어서는 안되며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만일 이 1순위,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잃는다면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 향유를 부은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나는 분명히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과연 그렇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단지 기억될 뿐만 아니라 복음으로 기록되어져서 세대와 세대로 전달되어져 1세기에서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성경을 읽는 사람들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이렇고 저런 경험들이나 정보들은 다 세월이 지나가면 잊혀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나중에까지 뇌리에 기억되고 가슴에 기록되는 것은 사랑하고 사랑받은 경험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으로부터 한없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사랑을 예수님께서는 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을 가슴 속 깊이 기억하였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말씀하시기를 복음을 전하여지는 곳마다 그 여자가 행한 일이 전파되어져서 기억하게 되리라 하였는데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2000년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도 역시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분명 여인의 사랑과 헌신이 기억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여인의 헌신을 누가 제일 처음 기억하였습니까? 예수님께서 기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이 부어드린 것이 단지 향유만이 아니라 자신의 전 존재를 바쳐 헌신한 것임을 아셨습니다. 사람은 사랑받은 만큼 기억한다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전 존재를 바쳐 사랑하고 헌신한 그 여인을 가슴 속 깊이 새기셨고 각인하셨습니다. 그저 가슴에 새기시고 각인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여인이 하는 행위를 보시고 그 여인의 가슴 속 사랑을 느끼시고 뜨겁게 감격하시고 감탄하시고 감동하시고 감읍하셔서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인이 한 일도 전해질 것이다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슴 속에 기억된다 함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누구이십니까? 이 땅에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삼위일체가 되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에서 여인이 한 일은 단지 주변 사람들에게만 기억되고 끝났다면 세월의 모래바람에 의해서 뒤덮여 졌을 것이며 아무도 그 여인의 헌신을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 여인의 헌신과 사랑은 성자 예수님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초대교회 성도들만이 아니라 1세기에서부터 21세기에 이르는 지구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여인의 헌신과 사랑을 기억하여 가슴에 새기는 실로 경이로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 오늘도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로 현존하십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값주고 피로 사신 자신의 몸인 교회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셨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심은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입니다. 이 교회를 눈동자와 같이 삺치시고 적자와 같이 보살피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집에 나아와 하는 일들을 아주 예민하게 유심히 지켜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을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시기에 그렇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기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그 교회를 출입하는 성도들에게 모든 초점이 선택적으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가슴속에 새겨진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 여신도들이 있습니다. 두 분만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 분은 제가 20여년 전에 이 강진지역에서 목회할 때 한 여장로님이십니다. 그 장로님의 남편도 장로님이신데 정미소를 하고 있습니다. 그 여 장로님이 집사였을 때 일입니다. 자기 정미소에서 나온 쌀기울이 나오는 것을 모으고 또 모아서 그것을 팔고 거기에다가 자신의 용돈을 그때 돈으로 5천원씩을 모으고 또 모았습니다. 아이를 업고 다니면서 안 먹고 안 입고 안 쓰고 악착같이 모아 그것으로 강진읍교회에 정확하게 오리쯤 되는 곳에 계산교회를 세웠습니다. 또 십리쯤 되는 곳에 한 교회를 세우는데 건축비 거의 전액을 헌금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그 여 집사님은 남편과 함께 강진시찰회 내에 일곱 개 교회를 세우는데 크게 역할을 하셨습니다. 그 여집사님이 권사가 되고서부터 교회 안에서 새로운 일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교회에서 초상이 날 때마다 제일 먼저 나타나서 누구든지 꺼려하는 시체 염을 도맡아서 하였습니다. 옛날에는 목회자가 시신의 염을 하였습니다만 지금은 장례식장에서 알아서 하여 목회자가 염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 여 장로님은 장례가 나면 시체염이라면 도맡아서 하였습니다. 언젠가 아주 뜨거운 여름이었는데 교회 성도 중에 102세 되신 분이 소천하셨을 때 그 집에 찾아갔는데 장로님은 땀을 흘려가면서 알코올 스폰지로 시신의 염을 하고 계셨는데 가만히 보니까 땀이 줄줄 흘러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하지 않고 찬송을 부르면서 하셨습니다. “내 주 예수 주신 은혜 한없건만 나 주 앞에 드린 것은 참 적으니 주 예수여 내 정성을 받으소서!” 세상에 그 장로님은 1년에도 수십 사람씩 소천하는데 그때마다 찬송을 부르면서 그 어려운 일들을 기쁨으로 감당해 오신 것입니다. 저는 장로님께서 시신의 염을 하는 모습들이 지워질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그 교회를 떠나 교단 총무가 되어 각 교회들에서 초청을 받아 설교할 때마다 그 여장로님의 헌신의 삶을 소개하였습니다.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장로님의 그 헌신은 제가 잊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도 매년 명절이 오면 선물을 들고 그 장로님을 찾아가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또 한 분은 우리 교회 데오-글로리아관이 세워졌을 때 건축기금 전액을 헌금하신 권사님과 집사님이십니다. 지금은 소천하셨습니다만 권사님의 남편 집사님은 몸이 안좋으셨는데 생전에 두 분은 합의하여 성경의 어떤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샀었을 때 그 향유값과 비슷한 금액을 건축을 위해 아낌없이 소리없이 내놓으셨습니다.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바쳤을 당시에도 두 분다 몸이 무척 안좋으셨느니까 그 돈을 교회에다가 바치는 대신 아낌없이 활용하여 좀 더 좋은 의료혜택도 받고 좀 더 보약도 사먹고 생명을 활성화시키는 일들에 투자하였더라면 그렇게 일찍 가시지 않았을 텐데! 하는 그런 가정도 해 보았습니다. 두 분은 합의하여 그 돈으로 불건강한 자신들의 몸을 돌보기 보다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돌보기 위해 아낌없이 자신들의 이름을 밝히기를 원치 않고 바치신 것입니다. 제가 알게 되어 신신부탁을 하여 두 분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말씀드린 분들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하신 일은 비단 그 해당교회의 목사였던 저에게만 기억되었던 것만이 아닙니다. 주의 종의 가슴 속에 깊게 기억되었을 때는 동시에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우리 예수님의 가슴에도 깊게 새겨지셨을 것이라 믿습니다. 주님의 종의 가슴에 기억됨이 없이 주님의 가슴에 기억됨도 없기 때문입니다.
■ 처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언젠가는 불원간에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요즘은 이 세상 이별하면 화장장에서 다 태워버리니까 뭐 남는 것이 있겠습니까? 이 땅에서는 재만 남겠지요! 그 재도 몇 십년 흐르면 다 없어지고 흙으로 분해되고 해체됩니다. 성경말씀대로 흙에서 난 것 흙으로 돌아가리라 하셨는데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는 우리 모습은 형체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고 우리에 대한 기억만 남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 땅을 떠날 때 남은 사람들에게 그래도 좋은 기억, 그래도 상큼한 기억을 남기고 멋있고 샤프하게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를 창립하셨던 김영승 장로님처럼,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시다가 좋은 믿음의 유산을 남시기고 가셨던 조귀순권사님처럼, 조은심권사님처럼 조자형집사님처럼 좋은 기억을 남기고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박노해 시인이 써 놓은 시처럼 인생이란 날마다 지나가는 것인데 지나가면서 자기중심적인 악취를 풍기고 지나가지 아니하고 뭔가 나 아닌 다른 존재에게 빛과 향기를 뿌리고 온기를 전해주면서 향기를 풍기면서 지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날에도 향내를 묻히지 않습니까? 만일 우리가 인생을 사는 것이 물이 되어 흐른다고 한다면 흐르면서 그저 무심코 흐르는 것이 아니라 돌돌돌 도랑에 흘러 타는 들녘 벼포기를 적셔 농부의 시름이라도 덜어주면서 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저 무심코 흐르는 것이 아니라 하다못해 개구쟁이 발 때라도 씻어주면서 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나 아닌 다른 존재에게 해악을 끼치고 걱정과 염려를 끼치기보다는 뭔가 뭔가 굉장하고 크고 많게는 아니지만 무척 조그맣게라도 유익을 끼치고 선한 영향력을 주면서 존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나 아닌 타존재에게 물과 기름이 섞일 때 서로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는 존재가 되지 말고 뭔가 나 아닌 다른 존재를 시원하게 하고 따스하게 하고 나아지게 하고 환해지게 하고 맑아지게 하고 기쁘게 하고 즐거워지게 하는 존재로 존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이왕지사 존재한다면 내가 세상에서 살다가 가는 것이 뭔가 보람의 자취를 남기고 의미를 생산하고 가치를 제작하는 그런 기억에도 남고 그런 영향력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 존재에는 목적이 있겠습니다만 내 존재가 존재하는 목적에 의해 이끌려 가는 존재로 존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존재를 존재케 하신 그 고마우신 분에게 뭔가 만드신 보람을 가득히 안겨드리면서 존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라는 존재를 존재케 하시는 그분, 영원한 존재자이시고존재 그 자체이신 분 앞에서 내가 어떻게 존재해야 그 존재자를 기쁘게 해드릴까를 생각하고 그런 방향으로 가야 하겠다 그렇게 가끔씩이라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본문 마태복음에 나타난 한 여인은 예수님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옥합을 깨서 향유를 바침으로 예수님의 가슴에 깊게 새겨지고 기억되지 않았습니까? 세상 사람이 기억하고 세상에 무엇인가를 남기고 이웃과 주변에 영향력을 주고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우리 주 예수님의 가슴 속에 깊게 새겨지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삶이 오늘 본문에 나온 여인처럼 주님의 가슴에 깊게 새겨진다면 우리 삶은 더 바랄 나위가 없게 될 것입니다. 주 예수님의 가슴에 그 여인처럼 새겨진다면 더 이상 우리가 무엇을 더 바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기억해 주심으로 족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랑이신 우리 예수님의 가슴에 그 가슴 안에 있는 사랑에 모든 것들이 다 담겨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예수님의 가슴에 우리의 존재가 조금이라도 기억되어진다면 그 안에 우리의 삶이 바라고 소망하는 바가 다 있지 않겠습니까? 그 안에는 주 예수님으로부터 뜨겁게 사랑받는 것도 물론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신독(愼獨)이라 하여 홀로 있을 때도 누군가 나를 보고 있는 듯이 법도와 예의있게 행동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항상 주 예수님께서 나를 보고 계신다고 실제로 믿으면서 오늘 마태복음의 여인처럼 주님의 가슴에 깊게 새겨지고 주님께서 감동으로 기억하신 바 되는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저 관습적으로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아와 깨우침이 없이 신앙생활하기보다는 나의 하루하루의 삶이 주님의 가슴이 미동이라도 떨리고 움직여지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내 평소의 삶을 지켜보시고 주님께서 내가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의 생활을 지켜보시고 조용히 주님의 가슴을 감동으로 물결치게 하는 그런 일들을 나의 일상의 생활에서 아주 조그마한 것부터 한번 만들어 보십시다. 작천교회 새벽기도 운행을 하시는 한 장로님께서 비가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해 오셨습니다. 태워 오시는 분이 두 세 분 밖에 안됩니다. 새벽기도에 참여하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인데 새벽기도 운행하는 일은 훨씬 더 어려운 일입니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한 분 집사님께서 새벽기도의 운행을 나누어 맡아서 하고 계십니다. 제가 그 집사님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런 어려운 일을 하게 되셨느냐고 했더니 제가 교회에서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는데 제가 할 수 있는 그런 조그마한 일이라도 해야지요! 하셨습니다. 그 대답을 듣고 가슴에 잔잔한 감동의 물결이 밀려왔습니다. 교회에서 공동식사를 준비하는 일이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한 달에 한번씩 공동식사를 하기로 했는데 그렇게 하게 된 배후에는 한 분 여집사님이 자원하여 하시겠다고 하여 시작된 일입니다. 그것이 큰 일이 아닐는지 모르지만 저에게 있어서는 그런 일들이 옥합을 깨서 향유를 바치는 어떤 여인과 같은 헌신으로 느껴졌고 은은한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가슴에 감동의 쓰나미까지는 아니더라도 감동의 폭풍우까지는 아니더라도 감동의 잔잔하고 은은한 물결 정도는 일으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시간 제가 아는 복음성가 가사 하나를 나눔으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당신의 그 섬김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 당신의 그 겸손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 당신의 그 믿음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 당신의 그 충성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 주님이 기억하시면 족하리 예수님 사랑으로 가득한 모습 / 천사도 흠모하는 아름다운 그 모습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 당신의 그 순종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 당신의 그 사랑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 당신의 그 찬송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 당신의 그 헌신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 주님이 기억하시면 족하리 불타는 사명으로 가득한 모습 / 천사도 흠모하는 아름다운 그 모습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 기도) 은총의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희의 삶이 저 마태복음에 나오는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드린 여인처럼 주님의 가슴에 길이 기억되기를 원하옵니다! 저희의 삶이 존재하고 있어 타 존재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해 주시고 저희 삶이 있어서 주님의 마음을 감동케 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 여신도들이 그런 빛나는 삶을 살게 하시고 우리 남신도들이 그런 향기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작천교회 모든 성도들이 오늘 성경본문에 나오는 옥합을 깨서 향유를 부은 여인을 천분지 일이나마 만분지 일이나나 닮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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