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4일(주일) 1.2부합동예배 오전 11시, / 주현절 다섯 째주일
성경본문 : 창세기 1장 25~31절
제 목 :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주현절 다섯째 주일, 설명절 주일로 지키는 작천교회 모든 성도들 위에 귀한 찬양을 주께 올린 시온찬양대 위에, 연로하시거나 병상에 있으신 분들과 유튜브로 예배드리시는 분들 위에 오늘 작천교회 예배에 참예하신 강진군의회 김보미 의장님 위에 흘러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강진군의 발전을 위해 가장 많이 수고하시는 분이 강진원 군수님과 김보미 군의회 의장님이십니다만 강진 발전의 두 축 중에 한 분이 오셨습니다. 성도 여러분들이 기도하실 때 우리 모두가 사는 이 강진군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강진군의 발전과 번성을 위해 썩어지는 밀알과 같이 헌신하시는 강진원 군수님과 김보미 의장님을 위해서 더욱 기도의 손길을 모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주 토요일이 우리나라 전통 설 명절입니다. 우리의 전통은 자녀손들이 외지로 나가있다가도 명절이 오게 되면 비록 멀리 있다 하더라도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고 선물도 드리는 절기가 명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창조주이시라면 내가 이 땅에 존재하게 됨의 뿌리인 부모님을 찾아와 감사를 드리는 절기가 바로 명절입니다. 더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명절이란 해와 달의 조화로운 운행에서 만들어졌는데 해와 달을 만드시고 그것들의 조화에 의해서 년과 달과 날이 만들어지는 것이니 원초적으로는 명절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나라는 존재가 있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니 명절은 우리 육신의 부모님께도 감사를 드리는 절기이지만 보다 근원적으로는 보다 본질적으로는 우리 존재를 있게 하시고 우리 존재와 더불어 있는 고마운 존재들을 만들어 주신 하늘 아버지께 감사드리는 절기가 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 오늘 본문 창세기 1장에는 계속 반복되는 문장의 구조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보시기에 좋았다!”는 반복구조입니다. 창세기 1장 4절을 보겠습니다.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보셨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좋게 느끼심이 뒤따른 것입니다. 10절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렇게 하여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보시고 좋았더라!”가 몇 번 나오느냐 하면 4절, 10절, 12절, 18절, 21절, 25절, 31절까지 일곱 번에 걸쳐서 나옵니다. 일곱 구절들은 구조가 똑같은데 유독 31절 만큼은 약간다릅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아니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심히”가 들어가 있습니다. 심히 좋았다는 것은 보시고 감탄하셨다는 것인데 누가 만들어 놓고 누가 감탄하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하나님께서 감탄하신 것이니 하나님께서 자화자찬하신 것인데 우리 하나님께서 무미건조하신 것이 아니라 뭔가 흥이 있으시고 리듬이 있으시고 감수성이 아주 예민하신 분이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세 가지 행동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첫 번째 만드시고난 다음에 보시고 두 번 째 하나님이 보시고 세 번째 하나님께서 뭔가를 느끼시면서 감탄하시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면 우리의 모습을 따라서 하나님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눈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불꽃같은 눈이 있으셔서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두 눈이 있어 보게 되는 시각기능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을 보는 눈과 시각기능이 있으신 것입니다. 시각기능만 있으신 것이 아니라 무엇을 보시고 그것을 좋다고 느끼시는 마음이 있으신 것입니다. 마음은 뭔가를 느끼는 감성기능인데 하나님께서는 눈의 시각기능도 있으시고 마음의 감성기능도 있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에게 보는 눈이 있고 느끼는 마음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부단히 보고 계시고 부단히 그 본 것을 느끼고 계시다는 것을 항상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 우리가 무언가를 보았다 합시다. 이것이 눈의 망막을 통하여 시신경에 시각정보가 전달되고 그 정보는 0.001초도 안 되어 중앙 뇌로 전달이 되어 본 것에 대한 느낌이 만들어집니다. “좋다!”, “나쁘다!”, “그저 그렇다!”, “새롭다”, “구태의연하다!” “천편일률적이다” 등등의 느낌이 형성됩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느낌은 언제나 똑같지 아니하였습니다. 창세기 1장에 4, 10, 12, 18, 21, 25, 31절에 하나님의 느낌이 담겨 있지만 4절에서 25절에 이르는 6번의 느낌은 같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입니다. 그런데 31절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보시기에 그냥 좋은 것이 아니라 심히 좋았다 하였습니다. 이는 무엇입니까? 만물을 바라볼 때 좋았다고 느끼셨지만 자신을 닮은 사람을 지으시고 난 다음 심히 좋았다고 더 강하게 좋음을 느끼신 것입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으십니다. 좋다고 느끼시고 난 다음에는 좋았더라 말씀까지 하십니다. 보고 느끼고 그 느낌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의 느낌이 좋다! 혹은 너무 좋다! 두 가지 느낌 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창세기가 장을 더해갈수록 하나님의 느낌들이 점점 다양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들을 한 번만 보시고 그 다음에는 만물을 보시기를 그만두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은 것들을 계속 바라보고 계시다는 것을 창세기를 통해서 성경의 각 책을 통해서 느낄 수 있습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 시대의 사람들을 보시고 자신의 느낌을 나타내십니다. 창세기 6장 5절에서 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의 눈과 하나님의 마음이 동시에 작동합니다. 보시고 계신다는 말씀이 한 번 나옵니다만 한 번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줄곧 지켜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느낌이 연속으로 표현이 됩니다. 악하다고 보시고 죄악이 가득하다고 보셨습니다. 여기서 보면 두 번 “한탄”이란 단어가 나오고 “근심”이란 말이 한 번 나옵니다. 이는 무엇이냐 하면 인간들이 사는 꼬락서니를 보고 하나님의 느낌이 매우 안 좋으셨던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을 좀 더 세밀하게 읽어보면 무엇이 보이느냐 하면 하나님의 시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온 우주만물에 흩어져 있지 않고 하나님의 시선은 거의 인간에게만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환한 빛을 보시기도 하고 아름다운 산천초목을 보시기도 하였는데 인간을 만드신 연후에 하나님의 시선은 계속 인간이라는 채널에 거의 고정되어 있고 집중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 139편에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세심하게 인간을 보고 계시는 줄 알 수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앉고 서는 것도 보시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도 아시고 계시고 내가 자리를 옮겨 지구 반대편에 갈지라도 거기서도 하나님의 시선은 나를 떼지 않고 보고계시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인간을 보실 때에는 보시고 난 다음에 반드시 하나님의 느낌이 뒤따릅니다. 노아의 시대의 사람들을 보고서는 무척 안 좋다는 느낌을 말씀하셨고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을 보고서도 무척 안 좋다는 느낌을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고 느끼시고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는 행동으로 그들을 물과 불로 심판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사람과 사물만 보여지는 것만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도 보십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다윗이 자신은 백향목 궁전에 사는데 여호와 하나님은 그저 천막에 계시니 내가 하나님의 집을 좋게 지어드리면 어떻겠느냐 하고 나단 선지자에게 말하자 나단 선지자가 하나님께 말씀을 올렸더니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성전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지만 다윗이 그 마음만 먹고 있는 것만으로도 생각만으로도 다윗을 한량없이 복을 내리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십니까?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한 어떤 느낌을 가지시고 그 느낌을 자신의 종에게 가감없이 말씀하십니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도 느낌이 있으십니다. 그 느낌을 가지고만 계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자신의 눈물로 적시고 옥합을 깨서 향유를 부었습니다. 사람들이 웅성웅성대자 예수님께서 옆에 있던 시몬에게 무어라 하셨습니까? 누가복음 7장 44절에서 46절입니다.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는 무척 서운하고도 섭섭한 느낌을 가지고 계셨고 옥합을 깨서 향유를 바친 여인에게는 무척 좋은 느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라고 해서 그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감정을 가지고 대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좋다고 느끼시기도 하고 섭섭하다고 느끼시기도 한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하나님,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을 면밀히 지켜 보시면서 동시에 느낌을 가지시고 섭섭한 것은 섭섭하다고 표현을 하시고 환대를 받으시면 기분이 무척 좋으셔서 적극적으로 표현하셨습니다.
■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느낌은 단지 느낌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느낌 다음에 따르는 뭔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여인을 무척 기뻐하시고 예수님은 여인에게 다섯 가지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7장 47절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여인이 지은 죄를 다 사하여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7장 50절입니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여인에게 구원의 은총을 내려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4장 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여인을 칭찬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4장 9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그 여인의 행한 일도 말하여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리라 하였습니다.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드렸을 때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보시고 가슴에 뜨거운 정성과 사랑을 느끼시고 그 여인을 칭찬하시고 죄사함과 구원의 은총도 내려 주시고 그 여인을 대대로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여인에 대한 느낌이 곧 말할 수 없는 축복으로 연이어진 것입니다.
■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보시고 느낌이 최고로 좋은 이가 누구입니까? 스바냐 선지자입니다. 스바냐 선지자를 보시고 느끼시고 그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스바냐 3장 17절입니다. 도대체 스바냐가 어떻게 살았길래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노래까지 불러 주시겠다 하신 것일까?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한 인생을 보시고 매우 기뻐하시고 단지 좋았더라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흥겨운 노래를 불러 주시겠다고 한 사람은 단 한 사람 스바냐 선지자뿐입니다. 보시고 느끼시고 얼마나 감동하셨으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으로서 체면을 생각지 않으시고 노래까지 불러 주시겠다고 하는 것입니까?
■ 하나님이 인생들을 보고 계시다는 데는 여러분도 동의하시지요? 하나님이 날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계시다고 믿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창세기의 요셉입니다. 그래서 그 요셉을 닮겠다고 우리 교회는 요셉이라는 이름만 두 사람이 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 장군의 아름다운 아내가 유혹해 왔을 때 그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만일 이 유부녀와 침대에서 뒹굴고 있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이 지켜보신다면 얼마나 나에 대해서 실망하실까 생각하니 끔찍하였습니다. 그래 유혹해왔을 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말하며 거부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 하였을 때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실시간으로 날 보고 계심을 늘 깨어 의식하고 사는 것입니다. 라틴어로 me vidit deus입니다. 하나님 날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신앙 중의 신앙은 나와 항상 함께 하시고 계시다는 임마누엘 신앙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날 돕기 위해 어려운 지경에서 날 탈출시켜주시기 위해서만 임마누엘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범사에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내가 나쁜 짓을 하거나 좋은 일을 하거나 내가 잠을 자거나 내가 깨어 있을 때에도 언제나 옆에 계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우리의 수준에서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뭇 생명체들을 보시면서 그 중에 있는 나를 보시겠지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실 때는 지구상의 인간들이 지금 한 80억명이 있는데 80억명 중의 한 사람으로 n분의 1로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나를 보실 때 그저 일대 일(1:1)로 보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주의를 기울여 나를 일대 일(1:1)로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느냐고 하지만 그러기에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이고 그러기에 우리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임마누엘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그렇게 표현하시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바로 일대 일로 만나 주시는 하나님이시오 그 하나님은 남용환 장로의 하나님이시오 남영선 안수집사의 하나님이시며 남상록 성도의 하나님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 내가 신앙생활을 할 때 꼭 알아야 할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는 날 일대 일로 지켜 보시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날 보시고 나에 대한 어떤 느낌을 가지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느끼시는 느낌은 그 순간이 지나면 없어져 가는 것이 아니라 가슴 속에 차츰 새겨져 가고 축적되어 갑니다. “쟤만 보면 나는 노래를 부르고 싶어!”하는 스바냐와 같은 인생도 있고 “쟤는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야! 참으로 진실해!” 다윗과 같은 사람도 있고, “쟤는 입술로만 나를 존경하지 마음과 생각은 나와 멀리 떨어져 있어!” 이사야 시대 사람들과 같은 사람도 있고, “쟤는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는 가룟 유다와 같은 인생도 있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인생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날 일평생 동안 지켜보시고 어떤 일정한 느낌이 만들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내가 분명히 인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보시고 느끼신 느낌을 만일 유형별로 정리해 본다면 어떻게 될까? 우선 첫 번째는 “보시기에 좋았더라” “좋았더라 型”이 있습니다. 두 번 째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심히 좋았더라 型”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개정판 성경에는 보통이라는 말이 네 번 나옵니다만 “그저 그렇더라! 형”도 있습니다. 네 번째는 성경에 “보시고 한탄하였더라!”는 말이 나오는데 “한탄하였더라 型”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지켜 보고 계시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보고 계실 때 나는 어떤 형이라고 생각되십니까? 자 이렇게 분류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보시면서 후회막급하시고 한탄하였더라 후회한탄형을 5등급이라고 해 봅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차갑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그저 그렇더라형을 4등급이라고 해 봅시다. 여기서 한 등급이 조금 나아지는 것은 보시기에 좋았더라형을 3등급이라고 해 봅시다.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지는 것은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형을 2등급이라고 해봅시다. 여기에서 한참 더 올라가서 보시기에 좋은 정도를 떠나서 하나님께서 보시고 너무도 좋아서 노래를 부르셨더라형을 1등급이라고 해 봅시다. 우리 작천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어디에 해당하십니까? 저는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냐 하면 내 신앙생활이 하나님 보시기에 점점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보시고 느끼시는 등급을 한 등급이라도 아니 반 등급이로라도 올려 보시려 애쓰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내 신앙등급이 현재 5등급 이하라고 한다면 올해 내가 대오각성을 하고 땀흘리고 결사적으로 노력을 하고 기도하고 힘써서 4등급으로라도 올라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도 여러분들이 평가하기를 내가 한탄하였더라 형인 5등급이라면 적어도 그저 그렇더라 형으로 한 등급이라도 끌어올리고 내가 그저 그렇더라 4등급이라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3등급으로 끌어 올려서 내 신앙의 등급을 끌어올리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삶의 모습과 믿음의 양태를 보시고 너무도 좋아서 노래를 부르신다면 더할 나위가 없게 될 것입니다.
■ 여러분은 이 세상을 물론 여러분들의 건강을 중요시여길 것이고 여러분의 가족들을 중요시 여길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자라면 내 피부가 안티에이징으로 가야 하는데 이 화장품을 쓸 것인가 저 브랜드를 애용할 것인가를 소중히 여길 것입니다. 여러분이 남자라면 여전히 나를 능력있게 보이게 하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일에 이런 저런 노력과 물질을 쏟아 부을 것입니다. 여기에다가 여러분이 가지고 계시는 재산 즉 동산과 부동산을역시 중요시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살면서 인생을 살면서 저와 여러분이 가장 중요시하고 금쪽과 같이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도 나와 함께 임마누엘 하시면서 나를 보고 계시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느낌을 소중히 여기시고 그 느낌을 좋게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땀을 쏟아야 합니다. 그것 이상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보시고 무엇을 느끼시고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가는 거기 내 인생의 모든 것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의 행복과 웰빙에 머물지 아니하고 내 삶을 영원한 생명으로 잇대어지게 하는 것과 결정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관리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인맥관리, 재산관리, 이미지관리, 피부관리, 건강관리 등등 이 관리가 잘되어야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이미지 관리를 내 편에서 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실 것이냐에 대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이미지가 좋게 하나님의 마음 속에 맺혀지게 되기를 관리하는 것입니다. 보통 권력기관에 있는 사람들은 최고권력자의 느낌을 아주 예민하게 살핍니다. 권력자들은 자신이 모시는 최고 권력자가 자신에 대하여 혹시 느낌을 털끝만큼이라도 상하지 않았는지 그 느낌 하나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을 일거에 상실할 수 있다고 봅니다. 국민의 힘이라는 당과 이 정부의 관리들은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의 마음에 좋은 상이 맺혀지도록 그야말로 견마지로를 다합니다. 국회의원이라면 공천권을 지고 있는 분이고 자신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부하직원들이 수십만명이고 그 다루는 예산이 수십조원인데 그런 좋은 자리를 최고 권력자의 느낌 하나에 일거에 상실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에 대한 최고 권력자의 느낌을 좋게 하려고 얼마나 노심초사합니까? 하물며 세상 티끌같은 존재인 권력자에게도 그렇게 하는데 내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계시고 내 존재 이후의 존재, 내 생명 이후의 생명을 맡아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나를 향한 느낌이 좋도록 잘 관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를 향한 느낌 하나에 나의 영생과 구원 나의 행복과 형통, 나의 성공과 형통이 거기 달려있지 않습니까? 요셉은 하나님 보시기에 자신의 이미지를 무섭도록 잘 관리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실시간으로 내려다 보신다고 믿었고 최고의 미녀가 옷을 벋고 달려 들어도 하나님 보시기에 범죄하지 않겠다고 뿌리치고 나가지 않습니까? 그런 요셉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선히 여기시고 그를 높이 올려 대이집트 제국의 총리대신으로 올려놓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사울왕을 보시고 언짢게 여기시고 그의 왕위를 빼앗아 다윗에게 주지 않으셨습니까? 보통 사람들은 다니는 직장에서 조금만 윗상사라도 나를 향한 이미지 관리는 잘해 나가면서 왜 나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고 내 부귀영화와 내 영원한 생명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의 느낌을 내가 우리가 관리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인식하고 있건 인식하지 않고 살건 간에 매 순간과 일상을 우리 하나님께서 실시간으로 초미의 관심을 가지고 나를 지켜보시는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나를 향한 느낌이 순간순간 하나님의 가슴 속에 각인이 되고 새겨지고 있습니다. 새겨지는 느낌들은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여 보시기에 좋았더라!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든지 하는 어떤 일정한 느낌이 오롯하게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부터 내 이미지 관리를 좀더 잘하고 삽시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고 계시는데 바로 그 이미지 관리를 세심하게 챙기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내가 무슨 일을 해야 내가 어떤 처신을 해야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나님께서 나에 대한 느낌을 좋게 가지실 것인가를 예민하게 살피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내 피부관리가 내 인생에 중요한 것의 average 평점이 300이나 500이라고 한다면 내가 하나님의 가슴 속에 감동으로 감탄으로 맺혀지는 일은 그 average 평점은 300억이 되고 500억이 된다는 것을 가슴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나를 향한 내 존재를 향한 하나님의 느낌을 좀 더 환해지도록, 좀 더 밝아지도록, 좀 더 뿌듯해지시도록, 좀 더 즐거워지고 기뻐지도록 나에 대한 이미지가 UPGRADE 되도록 올려 나가고 관리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 작천교회 성도들을 만날 때마다 느낌이 참으로 좋습니다만 우리 하나님께서도 우리 작천교회 성도들을 보시고 느낌이 참으로 좋으시리라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작천교회 한 성도 한 성도를 보실 때마다 오늘 창세기 1장 31절에 있는 그대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형이 되시어 아니 좀더 나아가 우리 작천교회 성도들을 스바냐 선지자와 같이 노래를 부르고 싶을 정도가 되도록 여러분의 삶의 이미지, 여러분의 신앙생활의 이미지를 철저히 관리해 나가시고 여러분의 일상생활과 신앙생활을 보시고 색다른 느낌을 가지게 되고 여러분의 삶을 보시고 우리 하나님께서 감동과 감격의 느낌표가 끊어지지 않게 되기를 우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은총의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보시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느끼심을 알았습니다. 저희 인생들이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면서 살게 하여 주옵시고 하나님께서 보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그런 인생이 되기를, 하나님께서 스바냐의 인생을 보시고 기쁜 노래를 부르셨듯이 저희 인생이 스바냐의 인생과 같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옵니다. 저희 인생이 원래 하나님 지으신 바 그 목적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심히 기쁘시게 하는 인생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존귀하신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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