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태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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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4일 종려주일 / 이사야 53장 4~6절 / 고통에 따른 인간의 네 가지 반응 / 작천교회
2025-12-28 14:52:37
배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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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4일(주일) 1부예배, 오전 7시 30분 / 2부예배 오전 11시 
주일낮예배 / 종려주일 / 한국기독교장로회 광주남노회 작천교회

성경본문 : 이사야 53장 4~6절    
제    목 : 고통에 따른 인간의 네 가지 반응

■ 할렐루야! 오늘 종려주일에 주님의 몸된 작천교회에 나아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리시는 모든 성도님들 위에 예수님의 평화가 흘러 넘치시길 축원합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꺽어들고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환영하였던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종려주일 이후로 예수님께서는 잡히시고 조롱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피흘리시고 말할 수 없는 천애의 고통을 당하시고 그리고 죽으시는 일련의 과정을 겪으시게 됩니다. 종려주일과 그 이후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고통이고 예수님의 고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깔아놓고 호산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호산나를 외쳤던 사람들은 얼마 안 가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무리들로 돌변합니다. 우리들의 죄악이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통을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선케 만들어 예수님께서는 속죄양으로 십자가 고통과 죽음을 받게 하시고 우리의 피와 같은 붉은 죄를 용서하시기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는 하나님 아버지의 우리를 향한 사랑의 확증이요 우리에게는 속죄와 구원으로 나타났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한 주간을 우리는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종려주일은 고난주간으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이 시간 고통에 따른 인간의 네 가지 반응을 살펴봄으로써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과 고통이 우리에게 주는 뜻을 탐구해 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지금으로부터 4년 전에 코로나19로 성전에 나오지 못하고 가정예배를 드렸을 때 나누었던 말씀입니다.금번 종려주일에 다시금 그 뜻과 의미를 새롭게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 지난 20세기에 인류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인물이 있다면 그것이 긍적적이건 부정적이건 막론하고 한 사람은 칼 막스로 공산주의의 이론를 기초놓은 사람이요 다른 한 사람은 지그문트 프로이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이란 생물학저 심리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은 회피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쾌락의 원리라 이름하였습니다. 인간의 본능적 자아인 이드는 항상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은 당하지 않으려고 하고 쾌락과 즐거움을 끊임없이 추구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왜 인간의 본능과는 반대로 행하셨을까요? 십자가는 인간의 죄악이 만들어 놓은 고통의 가장 꼭지점에 있는 가장 큰 고통인데 그 십자가를 받으시고 왜 보통사람이 추구하는 쾌락과는 상관없이 사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 시간 인간이 인간의 고통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려 보겠습니다. 제가 중학교 다녔을 때 중국 무협지에 몰두했습니다. 교통비가 당시 20원이었는데 그걸 아껴 무협지를 빌려서 학교 가는 길이 철도길을 걸어가면서 무협지를 보았는데 그 내용은 대체로 같은 시나리오를 가졌습니다. 주인공 부친이나 스승이 어떤 절세무공의 무사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합니다. 그것을 어린 나이에 다락에서 몰래 원수가 부모나 스승을 죽이는  모습을 숨죽여 보게 됩니다. 나중에 심산유곡에 있는 절세무공을 가진 도상를 찾아가 무공을 연마합니다. 그 이후에 하산하여 원수를 찾아가 처참하게 그를 죽이고 부모님의 무덤에 찾아가 울면서 원수를 갚았다고 아뢰는 것으로 무협지가 끝납니다. 요지가 뭐냐하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입니다. 보복과 복수입니다. 한마디로 나에게 내 가족과 스승에게 고통을 준 이에게 철저한 보복을 하여 정의를 이루는 것으로 소설이 끝납니다. 나에게 고통을 준 이에게 나도 더 큰 고통으로 되갚아 준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복수를 하면 어떻게 됩니까? 피는 또 피를 부르고 폭력이 더 큰 폭력을 부르게 되어 점점 세상은 생지옥이 되고 고통이 더 많아져 갑니다. 산상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보복하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고통을 통해서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까? 

■ 신학대학을 다닐 때 목회학을 가르치신 박근원 교수님께서 “이제마의 사상의학(四象醫學)”을 말씀하시면서 들었던 비유가 기억에 남습니다. “아이 넷이 주인 몰래 남의 밭에서 밤을 따고 있었는데 한 아이는 나무에 올라 열심히 밤을 따고 있고 한 아이는 밤을 따는데 멀거니 지켜보고 있고 다른 아이는 떨어뜨려 주는 밤을 열심히 까고 있습니다. 마지막 한 아이는 밤이 떨어질 때 밤이 여기 있고 저기 있다고 가르쳐 주는 아이가 있습니다. 갑자기 주인이 나타났습니다. 이때 나무에 올라가 밤을 따는 아이는 현장에서 체포되는데 이 아이가 소양형 인간입니다. 주인이 나타났을 때 멀거니 지켜보고 서 있다가 잡혀간 아이는 소음인형 인간입니다. 밤나무 밑에서 열심히 밤을 깠는데 주인이 나타났을 때 깐 밤도 챙기지 못하고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간 아이가 바로 태음형 인간입니다. 밤 까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막상 주인이 나타났을 때 깐 밤만 얼른 챙겨서 도망간 이가 태양형 인간이라 하였습니다. 어떤 상황에 따라 각각의 형의 인간들이 대처하는 양식이 네가지로 다른 것입니다. 이 시간 인간이 고통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네 유형으로 한 번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나는 어디에 속할까 헤아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 첫째 유형 : 남에게 고통을 주는 인간의 유형입니다. 언젠가 고속버스를 탔는데 검은 정장에다가 검은 리본을 멘 두 사람이 맨 앞자리에 탔습니다. 둘이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아이고 그 인간, 내 형님뻘 되지만서두 아주 잘 가부렀써! 진작 가부러써야 되는디! 술로 다 말아 쳐먹고 마누라와 새끼들한테 빚만 허벌나게 남겼제!!” 그러자 옆에 있는 사람이 “그런데 우리 형수님은 슬픈 표정 하나도 없데!!” 그러자 다시 말을 받습니다. “아! 새끼들도 눈물 한방울 안흘리잖어!” 대화를 들으면서 돌아가신 분이 어떤 삶을 살았었는지 짐작이 갔습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사는 인간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이를 고통가격형 인간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내가 승진하기 위해서라면 내가 올라가기 위해서라면 다른 동료들을 무자비하게 밟고 올라가는 그런 인간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나의 행복과 쾌락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기꺼이 고통당하게 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그런 인간이 있습니다. 세월호로 인해 참으로 수백의 목숨을 희생되었는데 그때 그 선장과 같이 자기 혼자만 살기 위해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킨 사람이 대표적이고 일찍 대처하였으면 다 살 수 있었는데 박근혜 정부는 너무도 무능하게 무책임하게 대처하여 너무 많은 꽃다운 아이들이 죽어갔습니다. 지난 홍수 때 해병대 꽃다운 젊은이들이 희생되었는데 해당 부대의 사단장은 자신이 대통령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장병들을 사지로 내몰았고 이의 진실을 파헤치고자 하는 박정훈 대령을 보직해임하고 해당 사단장은 면책하였고 이종섭 국방장관은 위증을 하여 대통령지시를 감추었고 대통령은 그를 호주대사로 임명하여 도피하도록 하였습니다. 아주 어두운 구석에서 가장 악한 일을 대통령과 국방장관이 자행한 것입니다. 젊은 청년들을 죽이면서 자기들은 서로 죄없다 하면서 살아남으려 하는 이 정권은 금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들이 단죄해야 옳습니다. 이 비윤리적이고 반생명적인 정권이 내놓은 후보들에게는 단 한 표도 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도 고통가격형 인간들이 많습니다. 스승인 예수님을 은돈 30냥에 팔아넘긴 가룟 유다도 고통가격형 인간이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뭐 저 따위가 하나님의 아들이야” 하고 비웃고 조롱하고 희롱하는 이들도 고통가격형 인간입니다. 정치적으로 공모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들 사두개인들 서기관들도 고통가격형 인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창으로 옆구리를 푹 찌른 그 인간도 고통가격형 인간입니다. 혹 저와 여러분의 삶 중에는 고통가격형의 내면화된 가치관으로 남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내 삶의 편린들은 없습니까? 우리 안에는 남에게 수없는 고통을 안겨 주면서 나는 즐거움을 느끼거나 편안함을 느끼는 고통가격형의 모습들은 없습니까? 있다면 금번 고난주간에 하나님 앞에 다 내어 놓고 하나님께 속죄의 은총을 달라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 둘째 유형 : 남이 고통당할 때 무심한 인간의 유형입니다. 남이 고통당할 때 나는 제3 자로서 눈꼽만큼도 털끝만큼도 손톱만치도 아무런 고통을 당하거나 일말의 아픔을 느끼지 않는 무척 점잖으신 인간들이 있습니다. 혹은 남이 피 흘리며 고통당할 때 “얼씨구나! 구경거리 생겼네!” 남의 고통을 강 건너 불 보듯이 보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거기까지만 해도 그런대로 봐줄 수 있는데 남이 고통당할 때 그것을 나의 기회로 여기는 이들도 제법 많아지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반장아이가 감기몸살로 학교에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몇몇 아이들이 동전을 모아 과자를 사가지고 병문안가게 되었습니다. 부반장 아이에게 함께 가자고 하였습니다. 부반장 아이가 쏘아부칩니다. “걔가 안 나오면 내가 반장될 텐데! 뭣 하러 내가 가니?” 이 아이에게 다른 애의 고통은 나에게 다시올 수 없는 기회인 셈입니다. 성경에도 비슷한 예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5절 상반절을 보겠습니다. “백성들은 서서 구경하는데...”. 이때가 언제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이 박히고 십자가가 세워져서 양손과 양발에서도 피가 줄줄 흘러나와 땅을 검붉게 적시고 있는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고통의 꼭지점에 있었을 때 바로 먼 산의 진달래 구경하듯이 구경하는 족속들이 당시에 적지 않았습니다. 남의 고통을 보거나 즐기면서 하등 나의 아픔으로 느끼지 않은 인간들을 통칭하여 고통무관형의 인간이라 작명해 보겠습니다. 요즘 모텔에 가면 종이 같은 막대들이 비치되어 있습니다. 카운터에서 “요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물어보았더니 “임신인지 아닌지”를 테스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아이 캔 테스트(I can test)” 같은 것인데 막대에 오줌을 묻혀 보라색 선이 두 개 나타나면 임신이요 보라색 선이 한 개 나타나면 임신이 아닌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도 한번 여러분이라는 존재 자신을 “아이 캔 테스트" 해 보시기 바랍니다. 상대방의 고통을 보았을 때 얼른 나라는 존재의 막대를 그 고통의 상황에 묻혀 보고 내가 조금이라도 아파하는지 아니면 그저 재미있는 구경으로 느끼는지 별반 관심없어 하는지 테스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만일 상대방이 당하는 고통에 불쌍한 맘을 가지고 나도 역시 쪼금은 아프다든지! 짠한 마음이 눈꼽만큼 생겨 눈물이 나올려고 한다든지! 한다면 여러분의 존재막대는 ”더 인간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표시해 주는 것이요, 만일 상대방의 아픔을 보고 있을 때 너무도 아파서 눈물이 철철 흐르고 견딜 수 없는 슬픔에 쌓여 있을 때 나는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인간“인 것으로 표시됩니다. 만일 상대방의 고통을 보면서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지! 한다든지, 내 마음이 정말 잎새에 이는 바람 한 점 없이 미동도 없다면 나는 ”덜 인간적인 더 짐승적인 인간“인 것입니다. 

■ 셋째 유형 : 남이 고통당할 때 조금이라도 그 고통을 나누려 하는 인간의 유형입니다. 이 유형은 상대방이 고통당할 때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함께 느끼면서 그 고통을 나누려 하고 조금이라도 누그러 뜨려주려 하거나 나 역시 안타깝고 애끓는 마음이 되거나 짠한 마음이 되어 눈물을 흘리는 인간형입니다. 이런 인간의 유형을 고통분담형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안도현 시인의 시 “우물”에 고통분담형의 가치관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잘 산다는 것은 / 세상 안에서 더불어 출렁거리는 일 / 누군가 목이 말라서 / 빈 두레박이 천천히 내려올 때 / 서로 살을 뚝뚝 떼어 거기에 넘치도록 담아주면 된다 / 철철 피 흘려주는 헌신이 아프지 않고 / 슬프지 않은 것은 / 고여 있어도 어느 틈엔가 새 살이 생겨나 그윽해지는 / 그 깊이를 우리 스스로 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고통가격형 인간들이 저 하늘의 별만큼 많고 고통무관형의 인간들은 저 바다의 고기수와 같이 많아지는 가운데 고통분담형의 인간은 먹구름 가운데서도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처럼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고 계실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조끔이라도 덜어드리려 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8절입니다. “그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그중 한 사람이 누구인 줄 모릅니다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 이 사람은 예수님이 고통당하신 것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를 부어서 막대기에 꽂아 가지고 십자가 앞으로 달려가 예수님께 마시게 하였습니다. 해면이란 바다에서 나오는 것인데 마치 스폰지와 같아서 물을 많이 흡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포도주는 당시 마취제와 같이 쓰여졌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는 모습을 보고 너무도 가슴 아파서 예수님의 저 아픔을 내가 조금이라도 줄여드릴 수 없을까? 동네로 달려가서 예수님 십자가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긴 막가지를 준비하고 해면을 끝에다가 떨어지지 않도록 실로 묶어서 거기에다가 마취제인 신포도주를 철철 넘치게 부어서 십자가 밑으로 가서 막가지를 올리고 예수님 입에 가까이 대서 마시게 하였습니다. 물론 신포도주를 많이 마신다고 해도 십자가에서 당한 고통을 많이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천분지 일이나마 만분지일이나마 줄여드리기 위하여 가슴 미어터지는 안타까운 맘으로 그같이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입술을 대어 그것이 신포도주임을 아시고 인류를 대속하시기 위해 남김없이 고통을 당하시고자 마시지 않으셨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그가 고통을 덜어드리려고 한 갸륵한 일을 가슴 속 깊이 뼈 속 깊이 담아 놓으셨을 것입니다. 

■ 넷째 유형 : 남이 당할 고통을 내가 대신 당하는 인간의 유형입니다. 남이 고통을 당하려 할 때 그 고통을 내가 대신 당하고 대신 당하겠다고 나서는 인간입니다. 우리는 심청전에서 심청이 공양미 삼백석을 바쳐 자신을 인당수에 바쳐 아비의 눈을 뜨게 하지 않았습니까? 자신은 기꺼이 죽음으로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는 이것은 대속적인 죽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2001년 일본 유학도중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고 스물여섯에 세상과 이별한 한국청년은 이수현 씨의 삶이 영화화되었지만 그는 자신의 생명을 죽여서 타인의 생명을 살린 참으로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를 고통전담형 인간이라 이름하겠습니다. 이런 유형의 인간은 눈을 씻고 보아도 거의 찾아 볼 수 없거나 다만 역사 속에 기록으로만 존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고통전담형의 모습을 봅니다. 이수현 씨는 단 한 사람을 위해 대신 죽음을 당하였지만 성경은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53장 4절에서 5절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 독일 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에 저항하다가 죽은 본회퍼 목사님은 예수님의 삶을 단 한마디로 정리했습니다. 타자를 위한 인간(Being for others!)  

■ 이 시간 저와 성도 여러분들은 이 네가지 중에 어떤 유형이십니까? 여기 계신 여러분들은 나는 대체적 경향성으로 볼 때 어떤 유형의 인간인지, 고통가격형인지 고통무관형인지 고통분담형인지 고통전담형인지 한번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 살고있는 세상에 네 유형의 사람들이 존재합니다만 인류역사를 살펴보면 20세기와 21세기 초반부에 인간이 인간을 가장 많이 죽였던 때입니다. 고통가격형 인간들이 너무도  많았던 때였습니다. 남이 고통을 당하는데 나는 쾌락을 누리는 사람을 새디스트 정신병자라고 하는데 그런 인간유형들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많아져 가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고통무관형 인간들도 무시못할 정도로 많아져 가고 있습니다. 니가 고통을 당하는 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는 것이죠! 이에 비하여 이웃의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사람들은 있기는 하지만 풀밭에서 네 잎 클로버를 찾는 것과 같이 한참 찾아야만 겨우 발견하거나 점점 적어져 가고 있습니다. 

■ 저는 고통과 인간의 네 가지 유형과 상관하여 네 가지 말씀을 드리고 마치고자 합니다. 첫째는 여러분은 결코 고통가격형의 인간이 안되도록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여러분 속에 있는 부정적으로 내면화된 가치관을 닦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고통을 당하였을 때 나에게 고통을 준 그에게 앙갚음하기 위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아주거나 아니면 내가 받은 고통을 따블로 아니면 따따블로 되돌려주는 보복형 인간형으로는 안 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며느리 때 당한 고통을 내가 시어머니가 되어 내가 며느리 때 당한 고통을 돌려준다든가 내가 쫄병 때 당한 고통을 내가 고참이 되어 내 쫄병이 된 이들에게 돌려준다던가 하는 삶은 보복적인 삶으로는 그런 삶에서는 결코 향기가 나지 않습니다. 독하고 역겨운 냄새만 날 뿐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고통과 관련하여 여러분들이 예수님과 같이 남의 고통을 모두 다 전담하여 모든 십자가를 지는 고통전담형의 인간이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앞으로 힘이 있게 될 때 돈을 가지게 될 때 그 가진 힘으로 남에게 눈물 흘리게 하거나 남에게 보복하거나 고통을 안겨주는 사람이 되거나 힘이 있다고 그 힘으로 갑질을 하거나 고통가격형 인간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혹 내 속에 남을 공격하면서 남에게 해꼬지를 하면서 내가 즐거워지는 습성이 있다면 그런 죄된 습성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시고 성령께서 그런 악한 습성을 제거해 주시라고 기도를 올리시기 바랍니다. 
 
■ 둘째는 여러분이 고통을 당했다면 내가 과거에 어떤 형태로든지 고통을 당했다면 내 고통의 경험을 붕대로 하여 상대방의 상처를 싸매어주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과거에 고통당한 기억이 있다면 그 고통이 얼마나 쓰라렸는지 그 무게를 가늠해 보고 고통당하는 사람을 본다면 그도 역시 내가 당한 그 쓰라림을 느끼겠구나 하고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의 아픔을 위로하고 그 아픔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가지려고 애쓰는 사람, 보다 인간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쫄병이었을 때 고참에게 당하였다고 나에게 쫄병이 생겼을 때 그 고통을 안겨주는 사람은 참으로 저급하고 비인간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며느리 시절에 시어머니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면 내가 시어머니가 되었을 때 그 고통을 기억해 내곤 적어도 내 며느리에게는 좋은 기억을 안겨주어야지, 며느리가 잘못하더라도 잘 가르치고 선대해 주는 것이 시어머니이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고통을 받고 고통을 주기도 하는 세상에서 내가 받은 고통을 돌려주지 아니하고 내가 고통을 받았을 때 그 고통의 무게를 상기하면서 상대방이 고통을 당할 때 내 고통으로서 그 고통을 싸매어주는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목디스크로 한동안 마음 속으로 그리고 특별히 하한쪽 팔에 찌르는 가시와 같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 중에 목디스크로 고통당하는 이가 있을 때 그 아픔을 다시금 느끼면서 더욱 뜨겁게 기도하게 됩니다.   

■ 셋째, 이 땅에 있는 고통의 총량이 어느 정도 무게인줄 모르지만 여러분들이 존재하고 있어서 이 땅의 고통의 총량 중에서 1mmg이라도 줄여지도록 애쓰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노래가 있습니다. 하나도 모르면서 둘을 알려고 애쓰며 살지! 뭔가 애쓰는 삶은 아름답습니다. 에릭 디킨슨의 시 한편을 묵상하겠습니다. “내가 만일 애 타는 가슴 하나 달랠 수 있다면 / 내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 / 내가 한 생명의 아픔을 덜어줄 수 있거나, / 괴로움 하나 달래 줄 수 있다면, / 헐떡이는 작은 새 한 마리 도와 / 둥지에 다시 넣어줄 수 있다면, / 내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 뭔가 나 아닌 다른 이의 고통을 그것이 설령 작은 새의 미미한 고통일지라도 덜어주는 인생은 결코 헛된 인생이 아니다 그 말입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들이 한 생명의 고통을 줄여주는 그것이 로빈새 한 마리를 둥지로 돌아가게 하는 그런 가슴에 따뜻함을 지닌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먹구름 속에서도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이 되기를 바랍니다. 작천교회 성도 여러분들이 조금이라도 동시대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신음하는 신음소리를 예민하게 듣고 그들의 아픈 가슴 속에 들어가 보려고 하고 그들의 아픔을 백분지 일이나마 느끼면서 눈물을 흘리는 애잔한 마음, 짠한 마음을 지니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 마지막으로 여러분이 사랑으로 이웃과 고통을 함께 나누면서 살 때 거기서 여러분은 사랑의 하나님을,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려 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이 있지만 사랑할 때 그 
사랑의 원주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 뵈옵게 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하면 자연히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분을 만나게 됩니다. 여러분이 이웃의 고통을 나누려 할 때, 이웃의 고통을 보고 짠한 마음이 들고 그 고통을 쬐끔이라도 줄여주려 할 때 우는 자와 함께 울 때 바로 그때는 사랑할 때이며 바로 그때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 뵈옵게 됩니다. 이 시간 테제 음악 중 한 가사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우비 카리타스 데싸무어, 우비까리타스 데우스 이비 에스트”(Ubi Caritas Desamore Ubi Caritas Deus ibi est)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은혜의 주님 거기 계시네” 금번 종려주일에 이 땅에 살면서 고통당하는 이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면서 조금이라도 그 고통을 줄여가려고 하고 예수님께서 대신 우리의 죄짐을 지셨듯이 여러분들도 서로 남의 짐을 대신 지시는 삶을 살아보려고 애쓰면서 그래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라고 하나님의 사랑의 원주 안에 있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은총의 하나님! 예수님께서 저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 고통을 깊게 생각해 보는 종려주간과 고난주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사랑이신 하나님을 예수님 십자가 안에서 만나게 해 주시옵소서! 저희들 모두가 조금이라도 이웃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며 저들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따뜻한 가슴을 지니며 살게 되기를 원합니다. 저희가 남이 지고 있는 짐을 대신 질 수 있는 용기를 허락하여 주옵시고 저희로 예수님 가신 길을 뒤따르게 해 주옵소서! 저희 가슴 속에 십자가 사랑으로 가득 채워 주시옵소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고통을 덜어드렸던 어떤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사랑하면서 사는 순간은 바로 하늘 아버지의 은총의 품 안에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를 참 사랑하시어 우리 죄를 대속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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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0 2024년 4월 28일 부활절 다섯째주일 / 창세기 8장 20~22절 / 노아의 예배 정신 / 작천교회 배태진 2025-12-28 62
4479 2024년 4월 21일 부활절 넷째주일 / 시편 37편 1~4절 /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 작천교회 배태진 2025-12-28 49
4478 2024년 4월 14일 부활절 셋째주일 / 마태복음 5장 13~16절 / 너희는 세상의 소금  / 작천교회 배태진 2025-12-28 47
4477 2024년 4월 7일 부활절 둘째주일 / 여호수아 24장 14~18절 / 너희가 오늘 택하라!! / 작천교회 배태진 2025-12-28 51
4476 2024년 3월 31일 부활주일 / 로마서 8장 31~39절 / 넉넉히 이기느니라!! / 작천교회 배태진 2025-12-28 49
4475 2024년 3월 24일 종려주일 / 이사야 53장 4~6절 / 고통에 따른 인간의 네 가지 반응 / 작천교회 배태진 2025-12-28 56
4474 2024년 3월 17일 사순절 다섯째주일 / 베드로전서 4장 8절 /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 작천교회 배태진 2025-12-28 68
4473 2024년 3월 10일 사순절 넷째주일 / 요한계시록 14장 12~13절 / 권사님! 우리 장복례 권사님!! / 작천교회 배태진 2025-12-28 43
4472 2024년 2월 25일 사순절 둘째주일 / 이사야 53장 1~7절 / 십자가! 나 항상 생각할 때에 / 작천교회 배태진 2025-12-28 55
4471 2024년 2월 18일 사순절 첫째주일 / 창세기 26장 1~5절 / 말씀에 순종하는 신실한 일꾼 / 작천교회 배태진 2025-12-28 51
4470 2024년 2월 11일 주현절 여섯 째주일, 신학교육주일 / 마가복음 4장 30~32절 / 겨자씨와 겨자나무 / 작천교회 배태진 2025-12-28 59
4469 2024년 2월 4일 주현절 다섯째주일 / 창세기 1장 25~31절 /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 작천교회 배태진 2025-12-28 64
4468 2024년 1월 28일 주현절 넷째주일 / 시편 90편 1~12절 /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 작천교회 배태진 2025-12-28 81
4467 2024년 1월 21일 주현절 셋째주일 / 마태복음 26장 6~13절 / 그를 기억하리라!! / 작천교회 배태진 2025-12-28 83
4466 2024년 1월 14일 주현절 둘째주일 / 태복음 7장 9~11절 / 하늘 아버지의 마음 / 작천교회 배태진 2025-12-28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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