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태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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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16일 주현절 둘째주일, 여신도주일 / 누가복음 15장 11~24절 /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가자! / 작천교회
2025-12-09 15:49:18
배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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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16일(주일) 오전 7시 30분(1부), 11시(2부) 주일낮예배(129) 
주현절 둘째주일 여신도주일 / 요셉인재육성장학금 수여 작천교회 

성경본문 : 누가복음 15장 11~24절  
제    목 :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가자! 

■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가 지키는 전국여신도주일에 주님의 존전에 나아온 모든 여신도 회원님들과 모든 성도님들 위에 하늘의 평강이 함께 하시고 지난주 목요일에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고(故) 진옥순 집사님의 영혼 위에와 모든 유가족들 위에 하늘의 위로가 함께 하시며 오늘 2부예배시 2022년 최초로 요셉인재장학금을 받게 될 우리 교회 모든 자녀들 위에 이 시간 실시간으로 유튜브로 이 예배실황에 참여하여 예배드리는 범 작천가족들 위에 임마누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지난주 목요일인 13일에 우리 교회 여신도들 중 한 분이시고 12구역 구역장이시고 마상진 집사님의 부인이자 우리 마경열집사님과 문혜영 집사님의 모친이신 우리 진옥순 집사님이 81세의 일기로 하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지지난 주에 진옥순 집사님이 전화를 해오셨습니다. “목사님! 어째야쓰까라우! 우리 마을사람들이 코로나가 무섭다고 교회를 못다니게 해라우!” 해서 마을사람들과는 충돌하지 마시고 시기를 기다리시고 전화로 기도를 해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한 주 못나오셔서 심방가서 마상진집사님과 진옥순 집사님과 예배를 드렸습니다. 용기를 내시라고 그리고 무릎에 힘을 내셔서 짱짱하게 교회에 나오시라고 도가니탕 재료를 사가지고 갔습니다. 그리고 제가 제주에 집회인도차 갔을 때 소천소식을 들었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집사님은 동네사람들에게 식사대접을 하려고 준비하셨다가 심장을 멈추어진 것 같습니다. 제가 우리 진옥순 집사님의 심정 속으로 들어가보면 분명 그랬을 것입니다. 동네사람들이 코로나가 무섭다고 교회를 못나가게 하니 그 동네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서 앞으로도 코로나가 계속될 것인데 동네사람들과 잘지내서 교회를 나갈 수 있는 환경을 좀더 나아지게 해보고자 하는 가운데 그런 대접을 하실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동네사람들의 쑤자가 많았고 준비할 것도 많았는데 그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준비하려고 하니 여든 하나이신 우리 집사님의 심장에 무리가 왔던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 진옥순 집사님이 크게 보면 하나님의 집에 나가는 환경을 보다 잘되게 하기 위해서 힘쓰신 그 노력을 가상하게 보셨을 것이고 더더욱 우리 집사님의 영혼을 인도하여 하늘나라에 살도록 이미 여호와이레 해 주셨을 줄로 믿습니다. 오늘 예배에 나아온 마상진 집사님과 3남 1녀 유자녀손들을 주 예수님의 사랑으로 성령님의 위로로 함께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 교회는 오늘 요셉인재장학금을 수여합니다. 작천교회는 2022년을 시작점으로 하여 매년 요셉인재장학금을 수여할 예정이고 오늘 2부 예배 시간에 인재장학금을 수여합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에 창세기의 요셉과 같은 인재들이 육성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임경용 장로님을 위원장으로 시무장로님들을 위원으로 하는 요셉인재육성위원회를 만들고 매년 우리 교회에서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하도록 하였습니다. 오늘 목회서신인 아가페플러스와 함께 나누어 드린 봉투는 교회 안내대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교회에 요셉과 같은 인재가 육성되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언제나 봉투에 1000원이라도 봉헌해 주시면 그것이 겨자씨가 되어 우리 작천교회에서 자라나는 인물들이 앞으로 겨자나무로 성장하여 새들이 깃들일 수 있는 큰 나무로 거목으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헌금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 오늘 제가 택한 본문과 제목은 정확하게 1년전인 2021년 1월 17일 주일에 그때가 전국여신도주일이었습니다만 제가 설교강단에 설교할 때 단 한명의 성도인 제 집사람만이 성전에 출석하여 예배를 드릴 때 선포한 말씀입니다. 그 당시는 코로나가 너무 심각하게 퍼져나가서 전국의 모든 교회가 대면예배를 드리지 못할 때였고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가정예배로 드릴 때였습니다. 그때 전하였던 말씀인데 오늘은 다시금 그때 상황을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어떤 집에 아버지와 두 아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둘째 아들이 그 집을 나가고 싶어 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몫을 달라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합니까? 그냥 선선히 나누어 주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마도 집을 떠날 때 박건호가 작사하고 가수 민해경이 부른 "내 인생은 나의 것" 그 노래를 휫바람 부르면서 떠났을 것입니다. 가사가 이렇습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 그냥 나에게 맡겨 주세요/ 내 인생은 나의 것/ 나는 모든 것 책임질 수 있어요” 그렇게 떠났는데 어찌 되었습니까? 자수성가하여 금의환향하여 돌아왔습니까? 아닙니다. 가지고 간 모든 돈은 바닥이 나서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주머니에 천원짜리 한 장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탕자는 예전에 돈을 맘껏 뿌려대던 여자들에게 가서 돈을 좀 꿔 달라하였지만 매정하게 등 돌아서서 “이제는 돈도 없는 것이!” 깔아 뭉갭니다.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인심도 흉흉해져서 구걸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간신히 취직했는데 돼지치는 일을 했는데 임금도 제대로 주지 않고 일만 죽도록 시키고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를 먹으려 해도 주인이 그것마저도 주지 않습니다. 절대절망의 상황에서 탕자는 고개숙이고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기 시작합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수많은 여자들에 둘러쌓여서 온갖 주지육림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만장의 만용을 부리면서 돈을 뿌려대면서 살았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 없는 밑바닥 막장인생이었습니다. 탕자는 처절한 인간실존의 상황에서 절망으로 내몰린 비관적인 처지에 절망하지 아니하고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을 합니다. 본문 17절에서 19절에 나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일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다 하고” “이에 스스로 돌이켜”란 말은 발상을 새롭게 전환한 것이죠! 전환하여 어떻게 합니까? 20절입니다. “이에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 탕자가 돌아가자 아버지가 둘째를 어떻게 대하였습니까? 첫 반응이 “네 이놈 꼴도 보기 싫다! 그 많은 돈을 다 어떻게 하고 이렇게 상거지꼴로 나타났느냐? 오랜 세월 피땀 흘려 번 돈을 네게 주었는데 그래 그 피 같은 돈을 술 퍼마시고 노름하고 여자들에게 다 상납해버려! 난 너 같은 아들 둔 적이 없다! 당장 내 앞에서 꺼져버려라! 그렇게 하고 종들을 시켜 막대기로 두둘겨 패 버립니까?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아들이 돌아가기 전 생각했던 대로 탕자를 품꾼의 하나로 받아들여 주었습니까? 아닙니다. 20절입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버지가 아들을 맞이할 때 아들이 아버지에게 무릎을 꿇고 발이 손이 되도록 잘못했다고 빌었을 때 그제서야 용서를 했습니까?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 전에 동구밖에서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멀리서 돌아오는 아들을 보자마자 달려가서 아들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하였습니다. 아들이 용서를 구하기 전 이미 돌아오는 것을 보고 거기서 마음으로 용서를 다 해버린 것입니다. 아니 용서만 한 것이 아닙니다. 봅시다. 이런 아버지 앞에서 아들은 울면서 말합니다. 21절입니다. “아들이 이르되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둘째 아들이 그렇게 말하자 아버지가 어떻게 합니까? 아버지는 종들을 시켜 해 준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둘째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셋째는 발에 신을 신기고 넷째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다 잔치를 벌이게 합니다. 죽었다가 살아온 아들이니 잔치를 벌여도 크게 벌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자식이 아무리 잘못해도 자식이 아버지께로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을 용서하고 그가 다시 온 것을 기뻐하고 잔치를 벌이시는 분이십니다. 찬송가 527장에 그런 가사가 있습니다.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 주 어찌 못 담당하고 못 받으시리요 우리 주의 넓은 가슴은 하늘보다 넓고 넓어!” 이 찬송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아버지의 가슴을 하늘 아버지의 가슴에 대입시켜 노래한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큰 죄를 지었을지라도 아무리 진홍같이 주홍같은 죄를 지었을지라도 인간이 그 죄를 뉘우치고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가면 하늘 아버지는 모든 죄들을 용납하시고 다 사하여 주시고 용서해 주신다는 것이 성서적인 증언입니다. 

■ 누가복음 15장에 나타난 탕자의 비유에는 두 가지 관전 포인트가 있습니다. 하나의 포인트는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많이 지었지만 아버지의 가슴은 넓고도 넓어서 나를 받아들여 주시고 용납해 주실 거야! 하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갑니다 하면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탕자의 결단이 결국에는 탕자의 처지와 상황을 180도 바꿔지게 합니다. 두 번째 관전 포인트는 하늘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의 가슴입니다. 인간실존의 고통에 대하여 고통에 대하여 깊고 깊은 글을 썼던 팀 켈러 목사님은 탕자의 비유에서 탕부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탕자라 할 때 재산이나 물질을 마구 낭비하는 이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아들은 재산을 마구 낭비한 탕자였고 그 탕자의 아버지는 자식에 대한 사랑을 마구 낭비하는 탕부였는데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그 하나님을 탕부 하나님이라 불렀습니다. 장자에 보면 대붕이라는 새가 나옵니다. 대붕은 큰 새인데 한 번 날개짓을 하면 십만 팔천리를 날아간다고 하는 전설적인 새입니다. 대붕이 하루 종일 피곤하게 날아도 하늘은 끝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의 가슴이 바로 그렇게 하늘보다도 넓고도 넓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흉악한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 인간이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가면 하늘 아버지께서 용납하지 못하고 받아드리지 못할 죄가 없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는 우리 인간실존에 대해서 정확하게 해당합니다. 인간이 하나님, 하늘 아버지를 떠나게 되면 그것은 단지 하나님과의 거리를 멀리하는 정도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게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생은 점점 비참해지고 빈약하고 쇠약해지며 초라하고 쓸모없는 인생으로 전락하다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결국에는 아궁이에 던저져서 불에 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존재뿌리가 생명수되신 하나님과 멀어져 있으면 우리 인생은 말라버리게 되고 결국 죽게 됩니다. 둘째 아들 탕자도 그리하였습니다. 아버지를 떠날 때 당장은 잘 사는 것과 같고 웰빙을 누리는 것 같이 보였지만 그 인생에 흉년이 찾아오고 그 인생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어지고 결국은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조차도 먹을 수 없는 처지로 몰락하고 맙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으로부터 자주독립선언을 하고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당장에는 즐거이 노래를 부르게 되겠지만 나중에는 돈도 떨어져 나가고 친구도 떨어져 나가고 모든 관계가 끊어지고 생명은 경각에 달리게 됩니다. 

■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을 때 어떤 일들이 연이어 일어납니까?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됨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아담과 이브가 수치스럽고 부끄러워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을 가리우게 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자신이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이고 소외와 분리를 느끼게 됩니다. 다음에는 아담과 이브 사이에 좋던 관계가 끊어지게 됩니다. 한때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하였다가 나중에는 선악과를 따먹은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리게 됩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절단나게 됩니다. 그 담에는 자연과의 관계가 절단납니다. 땅이 더이상 소출을 잘 내주지 않게 되고 뼈아픈 노동과 고통을 통해서야 소출을 간신히 얻게 됩니다. 또 무슨 관계가 끊어집니까? 시간과 생명과의 관계가 끊어집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 하였습니다. 시한부 인생이 된거죠!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니까 저들이 맺고 있는 제반 관계들이 늦가을 낙엽이 떨어지듯이 우수수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인간이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하였다가 신세 망치게 되자 아이쿠 큰일났구나! 하고 황급히 하나님께 돌아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늦었다고 생각하고 돌아가는 순간이 가장 빠른 때가 됩니다. 모든 것이 다시 회복됩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탕자가 아버지와 하늘에 죄를 지었다고 하고 다시금 아버지께로 돌아가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든 것들이 일거에 다 회복되었습니다. 아들됨도 회복되었지요! 반지도 끼게 되었고 신발도 신게 되었고 살진 송아지 고기도 먹게 되었고 집안에서 잔치도 벌이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들이 되살아나면서 웰빙을 누리고 살게 되었습니다. 신세 확 펴지게 된 것이죠!.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모든 것들이 다 단절나고 끊어지게 되지만 하나님과 연결되면서 모든 것들이 다시금 되살아나게 됩니다. 

■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개인과 인생에 있어서도 웰빙을 누리지 못하고 궁핍과 흉년이 들고 말할 수 없는 막장에서 고통을 당할 뿐만 아니라 결국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되지만 이는 꼭 개개의 인간실존에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좀더 거시적으로 보면 인류의 문명에게도 동일한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경에서 최초의 문명이라고 할 수 있는 문명이 창세기 11장에 있는 인간들이 시날 평지에 모여 바벨탑을 쌓던 때였습니다. 예전에는 그저 간신히 집만 짓고 살았었는데 이제는 기술이 발달하여 높은 탑을 쌓을 수 있는 문명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인류가 왜 바벨탑을 쌓으려 한 것입니까? 바벨탑 사건 이전에 창세기 6장 노아의 홍수사건이 있습니다. 노아의 후손들은 선조로부터 하나님께서 사십날 사십주야로 비를 내려 인류가 거의 멸절되었던 경험을 입에서 입으로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 시껍한 역사적 사실을 듣고 인간들이 무슨 생각을 하였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홍수를 왜 일으키셨겠어? 인간의 죄악이 이 땅에 가득 차게 되니까 노아와 후손들만을 빼고 멸망시키셨으니 우리가 제2의 홍수를 당하지 않으려면 결코 노아시대 사람들과 같이 죄악을 범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어?” 이렇게 생각하였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때 시날 평지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런 정도의 그까짓것 죄악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 자기가 인간들을 만들어 놓고 홍수로 싹 멸절을 시키다니! 도대체 어떻게 무자비하게 하나님이 그럴 수 있는거야!” 하면서 시날 평지의 인간들은 “어디 한 번 해보자! 하나님이 다시 우리의 죄악 때문에 제2의 노아의 홍수를 일으킨다하여도 우리가 멸망당하지 않도록 탑을 높이 높이 쌓아버리자! 우리는 지금 벽돌과 그것들을 짱짱하게 붙일 수 있는 역청을 개발해 놓아 높이 높이 집을 지을 수 있잖아! 아무리 홍수가 쏟아지게 내려도 하늘 끝까지 탑을 쌓으면 그 물이 쳐들어오지 못할꺼야! 그러면 제까짓껏 아무리 하나님이라고 해도 우리를 어쩌지는 못할꺼야! 그러면 그때 우리 인간들은 하늘을 향해 용용죽겠지 약올라 죽겠지! 하면서 혀를 쏙 내밀면 되는 것이라고!” 그때 당시 사람들 중에 리더격인 한 사람이 제안을 하자 모두가 아멘하고서 우리는 감히 하나님에게 도전을 해서 하나님을 한번 이겨보자는 마음으로 하나로 뭉쳤고 결국 바벨탑을 쌓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저들을 제2의 홍수로 멸망시키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노아에게 무지개를 보여주시면서 다시는 물로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지키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뒤죽박죽해 놓으심으로써 뿔뿔히 흩어지게 만드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아무리 이기려고 하고 인간이 하나님 없이 문명을 건설하려고 하고 인간이 하나님을 안중에 두지 않고 공산주의네! 자본주의네! 하면서 인간의 이데올로기로 유토피아를 건설하고 이상향을 만들려 하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내려다보시고 가소롭게 여기시고 그런 하나님 없는 문명을 단숨에 산산조각이 나게 하시고 단 한 순간에 흩어버리시는 것입니다. 

■ 세계 제1-2차 세계대전 이전에 인간들은 바벨탑 시대의 사람들과 같이 상당히 닮아 있었던 점이 있었습니다. 그때 당시에 인간들에게 낭만주의 진보주의 이성주의 계몽주의 물결들이 파도치고 굽이쳤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을 잘 활용하면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 인간이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는 것이다! 보아라 우리는 인간의 정신과 이성을 사용하여 하늘을 날라다니는 비행기도 만들고 바다 속에 잠수함으로 다닐 수 있고 인간은 문명을 발전시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인간이 계몽하고 또 진보하면 인간은 얼마든지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의 천국을 만들 수 있다고 학자들과 문명학자들은 외쳐댔습니다. 인간에 대한 낙관주의가 유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인간은 그 자랑스런 이성을 사용하여 만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세계 제1-2차 대전을 일으켜 인간이 인간을 수억 수천만명을 미사일과 폭탄으로 탱크로 죽이고 불에 태워 죽이고 가스실에 보내 유대인 600만명을 학살하고 지들이 만들어 놓은 문명을 폭격하여 불에 태우고 다 철저히 파괴하지 않았습니까? 1-2차 세계대전 이후에 그런 사상이 나타납니다. 인간의 인간성에 대한 철저한 절망이 나타납니다. 인간이 이성과 계몽하여 문명을 발전시켜 만드는 것은 파괴와 비참 뿐이다는 절망과 허무주의가 남게 된 것입니다.  

■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코로나-19 감염병이 무엇입니까? 이 감염병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있습니까? 이 감염병으로 인해 지금 세계에서는 확진자가 3억 107만명 확진되었고 사망자는 거의 600만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확진자는 거의 70만명이 확진되었고 사망자는 6천여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감염병은 계속 진화하여 오늘날에는 오미크론이라는 변종이 나타나 기존의 백신들을 무력화시켜나가고 있습니다. 이 감염병은 너무도 급속하게 퍼져나갑니다. 방역당국이 이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기 때문에 장사도 제대로 할 수 없고 어디를 들어가려고 해도 백신접종 확인이 안되면 들어갈 수가 없고 걱정과 근심으로 스트레스로 인해 사로잡혀 죽는 이들도 많고 사람들도 서로간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확진이 되면 너무도 고통스럽다고 합니다. 왜 이런 전염병이 무섭게 퍼져나가는 것입니까? 무엇이 가장 문제입니까? 보다 근원적으로 왜 이런 감염병이 창궐하게 되는 것입니까? 한마디로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질서를 무너뜨리고 탐욕스럽게 더 많이 차지하고자 더 생산하고 더 개발하고 더 마구 자연을 몰살시키고 있는 가운데 이 감염병이 나타났습니다. 지금 세계 과학기술자들이 하는 짓들이 무엇입니까? 21세기에 과학과 문명이 더욱 발전하면서 인간들이 하려는 일들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만드신 생명이라는 선악과를 따 먹는 일을 하려 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영역인데 인간들이 하나님의 영역에 침투해 들어가 인간생명을 인위적으로 만들고 복제하려고 합니다. 인간들은 늑대와 개와 양은 이미 복제하는 기술을 읽혀서 그 기술을 발전시켜서 이제는 인간생명을 복제하여 하나님만이 인간과 생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도 개도 만들고 양도 만들고 늑대도 만들었으니 이제는 인간생명은 왜 못만드는 것인가 하고 과학계에서 그런 시도를 하고 있는 참이었습니다. 유전자를 뚝딱뚝딱 변형시켜 슈퍼 옥수수를 만들고 인간의 유전자와 돼지 유전자를 교배시켜 제3의 종의 생물을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감히 창조자의 자리에 앉아서 있을 수 없고 할 수 없는 일들을 감행한 것입니다. 이는 바벨탑을 쌓는 일보다도 훨씬 더한 악한 일들을 한 것입니다. 또한 인간들은 무한한 쾌락을 누리기 위해 자연을 마구 남벌하고 막개발하고 난개발하여 하나님의 창조하신 아름다운 자연을 무참히 황폐화시키고 있습니다. 중국 우한시에서 감염병 바이러스가 나타나게 된 것도 그곳 과학연구소에서 유전자를 조작하고 변이바이러스를 만들어 내려던 연구를 하였던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21세기의 인간들을 바라보시고 아마도 분명히 바벨탑을 쌓으려 했던 시대의 사람들을 보시고 그 바벨탑을 흩으려 하셨던 것처럼 우리 21세기 인간들이 하는 짓들과 꼬락서니를 보시고 분명 창세기 11장에서 하신 것처럼 이 땅에 내려오셔서 역사하시던지 인간이 창조질서를 교란시켜 자업자득으로 인간이 당하는 일들을 지켜보고 계실 것입니다. 11장 6절 하반절입니다.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그렇게 똑같이 생각하시고 흩으시거나 방관하시거나 무엇인가 역사하고 계심을 우리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 노아의 홍수 사건과 같이,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과 같이 제1-2차 세계대전과 같이 우리는 이 시대에 창궐하고 있는 코로나-19 감염병의 사태를 성서적이고 시대적인 표징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19 감염병이 더욱 확산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이것들이 하나님의 뜻과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퍼져나가면서 분명한 멧세지를 던지고 있는데 “너희가 지금 잘못 가고 있다!”고 예언적 경고를 던지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는 서둘러 가는 발길을 멈추고 서서 우리 시대의 문명을 깊이 통찰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나타난 표징들을 통해서 깊고 깊은 영적인 통찰을 얻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 코로나-19 감염병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깨우쳐야 하고 무엇을 느껴야 하고 무엇을 행동해야 하겠습니까? 언젠가 그런 만화를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집안에 들어섰는데 수도꼭지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와 온 집안에 물이 넘치고 있었습니다. 근데 어떤 어른인듯한 사람이 그릇으로 물을 퍼담아 바깥으로 퍼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어린아이가 생각합니다. “왜 우리 아빠는 바보같이 먼저 수도꼭지를 잠그고 그 다음에 물을 퍼내려 하지 아니할까? 그러면 헛수고를 안 해도 될텐데!!” 그렇습니다. 우리는 물론 마스크도 쓰고 방역도 철저히 하고 온도체크도 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도 동시에 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인류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 저는 오늘 코로나-19 감염병 사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이 성경 호세아서에 있다고 믿습니다. 6장 1절 말씀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과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오늘 우리 인류와 문명은 하나님을 백안시하고 하나님 없는 문명을 개발하려 했던 모든 시도들을 하나님 없는 문명을 반성하고 회개하고 다시금 창조주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때 근본적인 해결과 치유가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지은 모든 잘못을 회개하고 인간이 자신들의 이성과 예지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영역을 차지하려던 시도를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고 이제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따르고 은총의 하나님 앞에 손들고 나아갈 때 거기에서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시고 치유하시고 도로 낫게 해 주시는 은총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탕자가 만일 계속해서 이방 땅에 남아 있었더라면 그는 거기서 고통만 당하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발상을 전환하여 그래 아버지께로 가자고 결단하고 돌아갔을 때 거기서 구원이 있고 생명이 있고 모든 것이 회복되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 인류와 문명은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만이 거기에 살길이 있고 산 소망이 있고 거기에 구원과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충분히 잘 살 수 있다는 마음, 하나님 없이 유토피아를 꿈꾸고 이상향을 건설하고자 하는 헛된 시도를 분토와 같이 버리고 오직 하늘 아버지의 품 안에서만 모든 질병이 회복되고 치유된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가던 길을 돌이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 거기서 모든 것이 해결되고 치유되고 회복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병든 세상을 고치는 길은 무슨 백신에 있는 것도 아니요 철저한 방역에 있는 것도 아니요 사회적 거리두기를 더 멀리 두는 것도 아니라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와 인간과 문명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날마다 주를 섬기며 언제나 주를 기리고 그 사랑 안에서 살면서 딴 길로 가지 맙시다” 

□ 이제 우리는 함께 간절히 기도해야 할 제목이 있습니다. 이 땅과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해 달라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면서 창조질서에 순복하면서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일입니다. 하나님 없는 바벨탑과 같은 우리 문명이, 탕자와 같은 우리 문명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코람데오 문명”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우겨 쌓임을 당해도 하늘을 향하여 하소연할 수 있는 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우리 여신도회 회원들을 포함하여 우리 모든 작천교회 성도들이 하늘 아버지께서 내가 이 땅을 고칠지라 하셨으니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주여! 이 땅을 고쳐 주소서! 이 병든 땅을 고쳐 주소서!” 간절히 중보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새길을 내려 주시고 생명의 길, 치유의 길, 새 출발의 길로 열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는 단순히 코로나에 걸리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에서 좀 더 성숙한 지경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이 기도를 나로부터 시작합시다. 먼저 나부터 내 생활에서부터 철저히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내 삶이 하나님의 뜻에 따르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우리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 눈물로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 눈물의 기도를 받으시고 그 민족을 구원해 주시고 살려 주시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눈물로 기도할 때 우리 의 병든 문명과 회복할 수 없는 역사와 인류를 치유하고 살릴 수 있습니다. 우리 여신도들이 먼저 중보기도를 드림으로 그 기도들이 누룩씨가 되어 부풀어 오르게 하십시다. 반드시 우리 은총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찢으셨으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다시금 낫게 해 주실 날을 정하시고 우리에게 코로나-19 바이러스들로부터 해방과 자유의 카이로스를 은총의 선물로 내려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그 중보기도를 시작하는 순간 우리를 사랑하시는 은총의 하나님께서 올해 2022년에 반드시 모든 것을 치유하시고 낫게 하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은총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이미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회복하시는 은총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도) 은총의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보다 깊이 살피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질서를 저희 모두가 순복하고 따르게 해 주옵시고 이 땅의 인간과 문명이 탕자와 같이 하나님의 품을 박차고 나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잇사온데 이제는 회개하고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물결이 생겨나게 하여 주옵소서! 참으로 엄혹한 코로나_19 감염병, 이 위기의 상황 속에 저희 하나님의 자녀들이 저희 여신도들이 저희 남신도들이 먼저 무릎꿇고 이 땅과 문명을 하나님 앞에 부탁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뉘우치게 하여 주옵시고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가는 방향에서 돌이켜 이제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해 주옵시고 동시에 이 병든 땅을 고쳐 주옵시고 회복의 은총으로 역사하여 주옵소서! 저희 여신도와 남신도들이 이 땅을 중보하며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올 때 역사하여 주옵소서! 저희들부터 보다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옵소서! 이 땅에 사는 모두가 천부여 의지없어서 손들고 주님 앞에 나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구원과 생명이신 우리 예수님 존귀하신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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