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태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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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17일 대림절 셋째주일 / 마태복음 4장 14~16절 / 빛을 비추러 오신 예수님! / 작천교회
2025-12-09 15:16:25
배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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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17일(주일) 1부 예배, 오전 7시 30분 / 2부예배 오전 11시 
대림절 셋째주일      

성경본문 : 마태복음 4장 14~16절        
제    목 : 빛을 비추러 오신 예수님!

■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오늘 대림절 셋째 주일, 정성과 사랑으로 예배드리시는 모든 성도들 위에 귀한 찬양을 주께 올린 시온찬양대 위에, 연로하시거나 병상에 있으신 분들과 유튜브로 예배를 드리시는 모든 분들 위에 흘러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대림절 셋째 주일입니다. 세계 각 교회의 전통으로는 대림절에는 첫째 주일에는 초 하나를 켜고 둘째 주일에는 초 두 개를 켜고 넷째 주일에는 초 네 개를 켜게 됩니다. 그래서 대림절 셋째 주일은 오늘 주보에 초 세 개를 켜 놓은 것을 싣었습니다. 교회력으로는 아직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하늘에서 들리던 소리가 바로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였습니다. 이 시간 잠시 자리에서 일어서서 돌아다녀도 좋습니다. 평소에 약간 서먹서먹한 사람이 있었다면 찾아가서 “땅에는 평화”하고 안아주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성도들을 찾아가서 “땅에는 평화” 하고 안아주시기를 바랍니다. 꼭 안아주면서 그 사람에게 예수님의 평화가 깃들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 오늘 성경본문 마태복음 4장 16절입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여기서 “흑암”과 “큰빛”은 서로 대조가 됩니다. 흑암이라 하였을 때 단지 어두움이 아닙니다. 아주 캄캄한 어두움입니다. 큰 빛도 그냥 빛이 아닙니다. 아주 크고 환한 빛입니다. 흑암과 큰 빛이 서로 만나면 어떻게 됩니까? 홍코너에 “큰빛선수”가 나타나고 청코너에 “흑암선수”가 나타나 서로 싸워 타이틀매치를 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흑암선수가 단연 KO패를 당하게 됩니다. 흑암과 큰 빛은 서로 싸울 것이 없습니다. 큰 빛이 나타나면 아무리 그 어둠이 흑암이라고 해도 그 큰 어둠은 자연히 없어지고 소멸되는 것이니까 그렇습니다. 흑암이 무엇입니까? 성경 맨 처음에 나오는 흑암이라는 말은 창세기 1장 2절에 나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그러나 이 창세기의 흑암은 오늘 마태복음에 나오는 흑암이 아닙니다. 흑암이 어디에 있습니까? 단지 해가 없고 단지 촛불이 없어 어둠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흑암은 인간세계 안에 있는 흑암입니다. 

■ 인간세계 안에 있는 흑암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미움과 싸움의 흑암입니다. 남을 미워해 본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가 죽도록 미울 때 내 심령의 명도는 점점 낮아지면서 점점 더 캄캄함 속으로 가서 마침내 더 이상 캄캄할 수 없는 흑암에 들어가게 됩니다. 미움이 좀 더 커지면 증오로 가고 증오가 점점 커지면 그것은 싸움으로 가고 싸움이 점점 커지면 전쟁으로 갑니다. 미음과 증오는 마음의 차원이지만 싸움과 전쟁은 그것들이 밖으로 터져 나오는 차원입니다. 미움이 점점 더 큰 싸움으로 가고 분쟁으로 가고 전쟁으로 갈 때 세상은 점점 캄캄해져 갑니다. 지금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흑암 속에 있으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도 흑암의 캄캄함 속에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세계는 그야말로 미움과 싸움이 넘치던 세상이었습니다. 힘이 있으면 죽이고 힘이 없으면 증오를 품고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로마제국은 압도적인 무력과 칼로 죽이고 그 밖의 백성들은 미움과 증오의 흑암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미움과 싸움의 악순환이 세상을 캄캄하게 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절망과 고통의 흑암입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느껴질 때 앞이 캄캄함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백성들은 희망이 없었습니다. 로마제국에 세리들에게 이중과세를 당합니다. 종교세를 내야 하였습니다. 일용할 양식이 없습니다. 침략당하여 주권도 없습니다. 젊은이들은 로마제국에 항거하여 계속 죽어갑니다. 살맛이 나지 않았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1세기의 상황을 쓰면서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길거리에 유리방황하는 노숙자가 많았으며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도 허다하였으며 많은 백성들이 나병을 비롯한 각종 질병을 지니고 있었고 여인들은 가족들을 먹여살리고자 몸을 팔아야 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나라 그중에서도 땅의 거민들이라 하는 암하렛츠들은 그야말로 지옥과 같이 고통스런 삶을 살았습니다. 절망의 흑암입니다.  

■ 세 번 째는 죄악의 흑암입니다. 악을 행하고 죄를 지을 때 우리는 점점 어두컴컴함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죄악을 범할 때 우리는 환한 빛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됩니다. 창세기 아담과 이브로부터 시작하여 가인과 아벨로 이어지는 역사, 그 역사는 노아의 홍수로 이어지고 소돔과 고모라로 갑니다만 인간의 역사는 점점 더 죄악의 농도와 밀도가 짙어지고 편만해지는 역사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인간의 죄악이 극심하게 활동한 역사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합력하여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때였습니다. 네 번째 흑암은 죽음과 지옥의 흑암입니다. 이 세상의 가장 큰 흑암은 죽음의 흑암입니다. 죽음 이후의 지옥의 흑암입니다. 지옥은 어두컴컴한 곳입니다. 죽음을 생각할 때나 죽음을 맞이할 때 흑암을 경험합니다. 세상의 죽음처럼 세상 바깥의 지옥처럼 더 큰 흑암이 없습니다. 

■ 예수님은 흑암이 가득한 이 세상에 큰 빛으로 오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이 땅에 성탄하셔서 미움의 흑암을 용서와 사랑의 큰 빛으로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십자가에 못박은 이들을 향하여 뭐라 하셨습니까? 이 저주받을 놈들아! 너희들은 영영 지옥불에 들어가리라!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십자가상에서 피와 눈물을 흘리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누가복음 23장 34절). 모든 죄악에 물든 이들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다 십자가의 피로써 용서하시고 사하여 주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이 땅에 성탄하셔서 절망과 고통의 흑암을 소망의 큰 빛으로 밝히셨습니다.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누워 있어서 절망 가운데 있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시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절망밖에 없었던 38년 된 병자에게 소망의 빛을 밝혀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통의 흑암으로 찌들린 이들에게 평안의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30절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 

■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이 땅에 성탄하셔서 죽음으로 인한 흑암을 부활과 영생의 큰 빛으로 밝히셨습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고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인생들에게 오셔서 부활과 영생의 빛을 비추이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에서 2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죽음은 흑암입니다. 죄 지은 자에게는 지옥의 흑암입니다. 그러나 부활과 영생은 천국의 밝은 빛입니다. 계시록 22장 5절입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 나라에는 어둠은 없고 주 하나님께서 빛이 되시어 비추이기 때문에 어둠이란 들어설 자리가 없는 곳입니다.   

■ 예수님은 이 땅에 성탄하셔서 흑암 중에 있는 이 세상에 큰 빛을 밝히셨습니다. 미움과 싸움의 흑암을 사랑과 평화의 큰 빛으로 비추이셨습니다. 절망과 고통의 흑암을 소망과 평안의 큰 빛으로 비추이셨습니다. 죄악의 큰 흑암을 용서와 구원의 큰 빛으로 비추이셨습니다. 죽음과 지옥의 흑암을 부활과 천국의 큰 빛으로 비추이셨습니다. 세상은 세월이 갈수록 점점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미움과 싸움의 악순환, 절망과  고통의 악순환, 죄와 악의 악순환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 악순환의 굴레에서 벗어날 자가 없었습니다. 벗어날 수 없음이야말로 흑암의 악순환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보복하는 세상만이 아니었습니다. 눈은 눈으로만 보복한다면 그것은 당시 정의에 속한 일이었습니다. 눈 하나를 빼면 오냐 내 눈을 빼! 하면서 그 눈을 뺀 사람의 두 눈을 다 빼내고 그의 팔과 다리를 다 짤라 내버리고 결국 죽여버리는 철저한 보복을 합니다. 그러면 보복을 당하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그 집안의 모든 사람들을 다 죽여버립니다. 영화 "지붕 위의 바이올린"에서 주인공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 것이 이 세상을 장님으로 그리고 이빨이 없는 세상으로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에는 희망은 없고 절망의 캄캄함만 있었습니다. 이런 절망과 고통의 악순환 속에 예수님 오신 것입니다. 알버트 쉬바이쩌 박사가 쓴 역작 “역사적 예수의 탐구”에 보면 그런 얘기가 나옵니다. 산 위에서 거대한 눈뭉치가 굴러 내려와 더 큰 거대한 눈뭉치가 되어 수많은 사람을 죽여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한 사람이 거대한 눈뭉치가 굴러내려 오는 앞 길에 서서 나무십자가를 들고 있다가 충돌하여 몇바퀴를 돌다가 피가 범벅이 되면서 멈췄습니다. 알버트 쉬바이쩌는 눈뭉치가 굴러내려와 더 큰 눈뭉치가 되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죄와 악의 악순환이라 보고 이 악순환을 십자가에 매달려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그 희생으로 멈추게 한 이가 바로 예수님이라 하였습니다. 십자가로 미움과 보복의 악순환, 고통과 죽음의 악순환을 끊으신 것입니다. 

■ 예수님은 자신만 큰 빛을 밝히시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예수님은 큰 빛을 비추이면서 우리에게도 너희는 빛이라 하시며 그 빛을 비추라 하셨습니다. 그 빛은 착한 행실의 빛이 될 수 있고 그 빛은 사랑과 용서의 빛이 될 수 있고 그 빛은 평안과 안식의 빛이 될 수 있고 그 빛은 믿음과 소망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빛은 나의 유익을 줄이고 대신 이웃의 유익을 늘리는 자기 헌신과 봉사의 빛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빛은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내 중심성에서 벗어나오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성탄절을 맞이하고 기다리고 성탄예배를 드리고 성탄감사헌금을 드리고 성탄절에 성탄선물들을 교환하고 성탄절에 함께 공동식사를 하고 성탄절에 가족들과 모여서 식사를 하고 그렇게만 끝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성탄을 맞이하는 자세가 아닐 것입니다. 성탄절을 의미있게 맞이하는 일은 내가 내 생활 속에서 조그마한 빛이라도 비추이는 일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세상에 빛을 비추러 오셨듯이 내가 세상에다가 빛을 비추이는 일을 하지 못할지라도 내 사는 이웃과 주변에라도 아니 그것이 동네와 마을이라도 해도 좋고 내가 신앙생활하는 교회와 성도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저 조그마한 촛불이라도 빛을 비추이는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먼저 용서하고 내가 먼저 손을 내미는 일은 성탄의 빛을 밝히는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이런저런 일로 조그마한 일로 틀어졌다면 설령 그가 51% 잘못했고 내가 49% 잘못했다 하더라도 내가 먼저 찾아가서 손을 내밀고 잘못했다고 하면서 화해하는 것입니다. 

■ 소천하신 조귀순 권사님께서는 자신과 소원하여 교회에 나오지 않은 이를 찾아가셨습니다. 제가 작천교회에 부임하였을 때 장기간 결석하였던 이들 중에 조귀순 권사님과의 관계가 틀어져서 안 나오신 분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두 분 사이의 전후관계를 살폈을 때는 조귀순 권사님께서 크게 잘못한 것은 없었습니다만 제가 조 권사님께 그 말씀을 드렸을 때 “목사님! 목사님 말씀대로 순종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23절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 말씀을 하시면서 목사님! 그 분에게 같이 가십시다! 해서 딸기 한 박스를 사가지고 가서 집에서 문을 두드리고 나오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나쁜 년입니다. 내가 죽일 년입니다. 내가 전적으로 잘못했습니다. 이제는 화를 푸시고 함께 작천교회를 섬기십시다!” 해서 그분이 다시금 나오게 되셨습니다. 조귀순 권사님은 담임목사를 통해 전후관계를 알게 되었을 때 전적으로 예수님 말씀을 따라 자신이 먼저 잘못했다고 빌고 자신이 먼저 손을 내민 것입니다. 이는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성탄의 빛을 바로 용서의 빛을 밝힌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서로 용서하고 산다면 이웃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덮어주면서 산다면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고 산다면 그것은 결코 인간관계 속에 들어있는 조그마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셨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성탄정신을 밝히는 빛이 된 것입니다. 

■ 우리가 성탄절을 보낼 때마다 뭔가 우리에게 남는 것 하나가 있어야 합니다. 이제 대림절 셋째주일이고 다음 주면 대림절 넷째주일이고 그 다음 주일이면 성탄주일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대림절과 성탄주일을 그저 그냥 그렇게 지나가게 하면 안될 것입니다. 대림절과 성탄절이 지나간 다음 여러분의 삶에 무엇을 조그마한 것 하나라도 남게 할 것입니까? 이렇게 하면 안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흑암 속에 큰 빛을 비추이신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큰 빛은 아니지만 우리는 조그마한 촛불이라도 밝힐 수 있습니다. 악보의 쉼표와 같은 “쉼”이라는 책에 조그마한 빛을 밝히는데 도움이 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입니다. 한 부인이 식료품 가게에 와서 성탄절 만찬에 아이들을 먹일 수 있을 만큼만 식료품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돈이 얼마나 남아 있느냐 주인이 물으니 “남편이 전쟁에 나가 죽어서 기도밖에는 정말 아무 드릴 것이 없습니다” 대답하였습니다. 기가 막힌 표정으로 물끄러미 쳐다본 주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당신의 기도를 써서 주시오! 그러면 그 무게만큼 식료품을 주겠소! 그러자 놀랍게도 부인은 접혀진 노트장을 주머니에 꺼내더니 주인에게 건네주면서 ”우리 어린애가 아팠는데 옆에서 병간호하며 기도를 적어두었지요“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읽어보지도 않은 채 주인은 구식 저울의 추를 놓은 곳에 기도가 적힌 종이를 놓고는 자 이 기도가 얼마 치의 식료품의 무게가 되는지 한번 달아 봅시다.”하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빵 한덩어리를 놓았는데도 저울은 꼼짝을 안했습니다. 다른 식료품을 올려놓았는데도 저울은 움직일 기미가 없자 주인은 더욱 당황하였습니다. 주인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저울에 더 이상 올려놓을 수 없으니 이것을 봉지에 담아 가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그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 부인이 돌아가고 나서 주인은 저울이 고장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해마가 성탄절이면 그때 일이 생각났습니다. “그때 일이 우연의 일치였을까? 왜 그 부인이 미리 기도를 써 가지고 왔을까? 왜 그 부인이 저울이 고장났을 때 왔을까? 그 부인이 적은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주여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그때 주인의 마음 속에 속삭이는 조용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그 부인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셨고 하나님은 자기에 식료품을 전달을 지시하신 것이라고“ 그 후 식료품 주인은 해마다 성탄절이 되면 식료품을 상자에 가득 담아 동네에서 가장 어려운 가정 현관 문 앞에 조용히 갖다 놓았습니다】 우리는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빛을 밝힐 수 있습니다. 주님이 빛이 되시니까 주님으로부터 그 빛을 옮겨 받을 수 있습니다. 한 마디 말의 위로의 빛을 밝힐 수 있습니다. 나에게 잘못한 이에게 숨호흡 한 번 크게 쉬고 용서해주는 용서의 빛을 밝힐 수 있습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그것이 필요한 이웃에게 주는 나눔의 빛도 밝힐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손에 있는 것을 내 입으로 먹어 내 위장 속을 채울 때 그것은 물질적인 것입니다만 내가 내 손에 있는 빵을 굶주린 아이나 나그네에게 나누어 줄 때 그때 그 빵은 영적인 질료로 변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말씀도 나누시고 사랑도 나누시고 십자가상에서 물과 피를 다 흘려 생명을 주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 우리 교회는 지난 주일부터 성탄절을 기다리면서 제단 옆에 성탄트리를 제작하였고 지금 이 순간에도 반짝거리고 있습니다. 제단에 성탄트리에 반짝반쩍 거리니까 성탄분위기가 나는 것 같아 참으로 좋았고 우리 주님께서도 기뻐하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강진군기독교연합회에서도 성탄트리를 버스터미널 가까이에 세웠는데 강진군에 속한 여러 교회 목사님들과 강진군수이신 강진원 장로님을 비롯한 여러분들이 참예하여 성탄절 트리의 불을 밝혔습니다. 강진군기독교연합회장이신 변남식 목사님께서는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성탄하셔서 흑암 속에서 큰 빛을 밝히셨는데 우리도 오늘 성탄트리를 밝힌 것처럼 우리 강진군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빛을 밝히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제 토요일 오후에 학장교회 박미미 목사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작천교회 장로님과 권사님과 집사님들이 오셔서 학장교회 성탄트리를 제작하여 반짝반짝하게 빛나게 해 주셨다고 너무너무 고마워하였습니다. 학장교회는 우리 강진시찰회 내의 교회입니다. 학장리에 있는 교회로서 교인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1907년에 세워진 역사가 117년 되는 교회입니다. 박미미 목사님께서 성도들을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잘 이끌고 계십니다. 이 교회의 형편을 알고 있는 우리 교회 장로님과 권사님들과 안수집사님 총 4분이 가셔서 금번 우리 교회 성탄트리를 만든 노우하우를 가지고 학장교회에 모든 재료들을 가지고 가서 성탄트리를 세워 반짝반짝 빛나게 해 준 것이고 박미미 목사님은 지금까지 그런 성탄트리를 해 본 적이 없는데 너무도 기쁘고 감사하여 전화해 온 것입니다. 학장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우리 예수님께서 무척 기뻐하실 일들을 한 것입니다. 저는 이것 역시 예수님의 성탄의 빛을 밝혀 드린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지난 주간 특별히 서울과 경기도에 거처하고 있는 병상에 계신 분들, 조도님권사님, 채춘애권사님, 엄화점권사님과 광주에 입원해 계시는 이안심권사님과 김행란집사님, 김소례권사님을 찾아 뵈옵고 성도 여러분들이 써 주신 성탄카드와 성탄선물들을 나누어 드렸는데 모두가 너무도 기뻐하셨고 성도 여러분들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 분들에게 성탄의 빛을 미리 비추인 것입니다. 특별히 성탄카드를 받고 감격해 하셨는데 성도 여러분들이 쓴 성탄카드가 바로 성탄의 빛이 되었던 것입니다. 다음 주 화요일 19일에는 강진기독교연합회에서는 우리 강진에 있는 군부대 3대대와 여단에 가서 피자를 비롯한 먹을 것들을 가지고 예수님의 성탄축하 선물을 가지고 갈 예정입니다. 저는 강진경찰서 경목입니다만 20일에는 강진경찰서에서 수고하시는 경찰들과 함께 성탄트리에 점등하고 떡국을 나누고자 합니다. 이 일은 큰 일들은 아닙니다만 예수님의 성탄의 기쁨을 조금이라도 지역사회와 나누는 일이 될 것이며 성탄의 빛을 희미하게 나마 밝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 오늘은 예배 시간에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이주신앙가족들에게 성탄선물을 나누고자 합니다. 베트남을 친정으로 하고 있는 성도님들에게 성탄선물을 조그만 선물들을 준비하였습니다. 따밥국선교회와 제2여신도회는 현금으로 준비했습니다. 따밥국 선교회는 지금까지 성도들이 선교헌금을 한 것을 모은 것이고 제2여신도회는 새우젓을 판매하고 얻은 수익금을 교회에 목적헌금으로 봉헌한 것입니다. 제3여신도회는 여러 선물들을 준비하였습니다. 교회는 현금과 약간의 선물들을 준비하였습니다. 편지는 직접 베트남어로 썼습니다. 작천교회가 보내는 것들도 예수님의 성탄의 빛을 비록 희미하게나마 밝히는 것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생명의 빛을 비추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화해의 빛을 밝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진리의 빛을 밝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평화의 빛을 밝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용서의 빛을 밝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은혜의 빛을 밝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사랑의 빛을 밝히셨습니다. 이제는 저희가 예수님의 빛을 비추어야 할 차례입니다. 이제는 저희 작천교회 성도들이 주님으로부터 빛을 받아 사랑과 화해와 용서와 진리와 생명의 빛을 밝힐 차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맘을 그렇게 먹는다면 얼마든지 우리의 삶의 주변에서 빛을 밝힐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을 나눔으로써 빛을 밝힐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맘만 먹으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셨듯이 용서의 빛을 화해의 빛을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조그마한 손길로만으로도 나눔과 섬김의 빛을 밝힐 수 있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맘만 보태고 힘을 더하면 우리 주변에서 주님으로 받은, 주님으로부터 받았던 그 풍성한 사랑을 나누면서 빛을 밝힐 수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우리에게 빛을 더 비추어 주십시오 우리에게 더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기도하기 전에 이미 우리가 받았던 은혜와 복을 가지고 주변과 이웃에게 빛을 비추일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빛이 되어 빛을 비추일 때 주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는 말씀이 저희 가운데 이루어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작천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주님의 빛이 되어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와 마을이 조그맣게라도 좀더 환하게 좀더 밝게 되어지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은총의 하나님 아버지! 성탄하시어 이 땅에 빛을 밝히신 진리의 빛과 은혜의 빛과 화해의 빛과 사랑의 빛과 영생과 구원의 빛을 밝히신 주 예수님을 깊이 묵상합니다. 주 예수님께서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이제는 저희 차례입니다. 계속해서 저희가 주 예수님의 밝혀 달라고 하기보다는 저희가 성숙한 지경으로 나아가서 저희가 사는 주변과 동네와 이웃에 주 예수님의 빛을 밝히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과 같이 큰 빛을 밝히지 못하지만 참으로 어두워져 가는 이 세상에서 조그마한 빛이라도 밝히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저희로 인해 세상이 조금이라도 밝아지고 환해 지며 저희로 인해 세상이 조금이라도 맑아지고 새로워지게 하여 주옵소서! 평강의 주로 오신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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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25년 10월 25,26일 CPBC 평화방송 라디오 지구촌구호개발연대 인터뷰 배태진 2025-11-12 40
4431 2022년 2월 27일 주현절 여덟째주일, 에스더 기도주일 / 사도행전 13장 16~22절 /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지도자 / 작천교회 배태진 2025-12-09 23
4430 2022년 2월 20일 주현절 일곱째주일 / 누가복음 12장 6~7절 / 머리털까지도 세신 바 되었으니! / 작천교회 배태진 2025-12-09 28
4429 2022년 2월 13일 주현절 여섯째주일, 신학교육주일 / 창세기 26장 1~5절 / 네 아비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 작천교회 배태진 2025-12-09 19
4428 2022년 2월 6일 주현절 다섯째주일 / 시편 146편 1~5절 /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 작천교회 배태진 2025-12-09 21
4427 2022년 1월 30일, 주현절 넷째주일 / 창세기 37장 13~17절 / 효도를 잘한 요셉 / 작천교회 배태진 2025-12-09 27
4426 2022년 1월 23일 주현절 셋째주일 / 마태복음 13장 33절 /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그리스도인 / 작천교회 배태진 2025-12-09 23
4425 2022년 1월 16일 주현절 둘째주일, 여신도주일 / 누가복음 15장 11~24절 /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가자! / 작천교회 배태진 2025-12-09 22
4424 2022년 1월 2일 새해주일 제직임명식 / 디모데전서 4장 6~10절 /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 / 작천교회 배태진 2025-12-09 14
4423 2021년 12월 31일 송구영신예배 / 빌립보서 4장 6~7절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 작천교회 배태진 2025-12-09 18
4422 2023년 12월 31일 송구영신예배 / 스바냐 3장 17절 /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 작천교회 배태진 2025-12-09 25
4421 2023년 12월 31일 성탄절 첫째주일 / 시편 100편 1~5절 / 성전에 가는 목적은? / 작천교회 배태진 2025-12-09 24
4420 2023년 12월 25일 성탄절 감사예배 / 요한복음 3장 16절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작천교회 배태진 2025-12-09 28
4419 2023년 12월 24일 대림절 넷째주일 / 에베소서 4장 25~32절 / 용서하며 우리 살리라! / 작천교회 배태진 2025-12-09 20
4418 2023년 12월 17일 대림절 셋째주일 / 마태복음 4장 14~16절 / 빛을 비추러 오신 예수님! / 작천교회 배태진 2025-12-09 36
4417 2023년 12월 10일 대림절 둘째주일 / 시편 146편 9~10절 /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하나님! / 작천교회 배태진 2025-12-0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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