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10일(주일) 1부 예배, 오전 7시 30분 / 2부예배 오전 11시
대림절 둘째주일
성경본문 : 시편 146편 9~10절
제 목 :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하나님!
■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오늘 창조절 열 셋째 주일, 정성과 사랑으로 예배 드리시는 모든 성도들 위에 귀한 찬양을 주께 올린 시온찬양대 위에, 연로하시거나 병상에 있으신 분들과 유튜브로 예배를 드리시는 모든 분들 위에 흘러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대림절 둘째주일이고 성서주일이면서 인권주일이기도 합니다.오늘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이 말씀 중에 우리 모두에게 주시고 동시에 나에게 주신 말씀이 분명 있으리라 믿고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래 전인가 지난 번 미국으로 목회하기 위해 떠난 제 아들 목사가 전도사였을 때 고양이 새끼 하나를 데리고 왔습니다. 아들친구가 전도사인데 교회 뜰안에다 들고양이가 새끼 한 마리를 낳아 놓고 어디로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끙끙 울고 있는 새끼 고양이를 데리고 있다고 해서 아들이 자기가 키우겠다고 데려온 것입니다. 저는 강아지는 좋아하지만 고양이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보통 개는 인간을 주인으로 생각하고 자신과 주인이 수직관계로 생각하면서 따르는데 비해 고양이는 자기와 인간이 수평적 대등한 인격이라고 여기고 자신과 인간을 일대일로 생각하며 별로 인간을 따르려 하지 않습니다. 그 고양이 새끼를 데려오자 저는 눈이 가려워 비비게 되고 코에서 재채기가 계속 나고 콧물이 계속 줄줄 흘렀습니다. 고양이털 알레르기가 생긴 것입니다. 안되겠다고 그 고양이를 내보내라고 했더니 아들은 만일 내보내면 자기도 함께 나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아들을 내보낼 수 없고 어쩔 수 없이 한 집에 살 수 밖에 없었는데 아들은 그 새끼고양이 집도 지어주고 고양이 장난감도 사가지고 오고 놀이터도 만들어주고 고양이를 기르는 책들도 사가지고 오고 먹을 것을 잔뜩 사가지고 와서 키우는데 완전히 새끼고양이의 에미애비 이상이었습니다. 제일 처음에는 새끼 고양이가 싫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들이 왜 고양이를 데리고 왔을까 애미에비도 없는 그 새끼를 그냥 길거리에 놓아두면 죽을텐데 하는 짠한 마음으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고양이도 하나님의 피조물이잖아요? 어찌 보면 우리가 인간과 고양이이지만 하나님의 동료 피조물인데! 피조물이 삐쭉 말라서 거의 빈사상태에 있는 것을 보고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데려온 거지요! 그 마음이 소중하다고 느끼게 되자 고양이털 알레르기를 견디겠다는 마음도 생겼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있었던 짠하게 여기는 마음과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시고 긍휼하게 여기시는 마음과는 뭔가 공통점이 있을 것입니다.
■ 우리가 짠하게 여기는 그 마음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며 원래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심정에서부터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라는 피조물 존재들의 아버지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존재를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아버지나 어머니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나깨나 온 피조물을 자상하게 돌보시는 어머니 같으신 분입니다. 어느 신학자는 하나님 우리 어버이시여! 그렇게 부르자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어버이로서 우리 인간존재를 내려다 보시고 어버이와 같은 애잔한 맘으로 우리를 돌보시고 기르십니다. 오늘 성경 시편 146편 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를 붙드신다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들을 붙드신다 하지 않고 고아와 과부를 붙드신다 하실까요? 이는 왜 예수님께서 비유의 말씀에서 목자가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섰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뜻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아흔아홉은 이미 우리 안에 안전하게 있기 때문에 잃어버릴 염려가 없기 때문에 굳이 찾아 나설 필요가 없습니다. 잃은 양은 홀로 떨어져서 늑대와 이리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는 위험에 처해 있기때문에 보호가 필요한 잃은 양을 먼저 찾아나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들을 돌보시지만 그중에서도 연약한 것, 상처입은 것, 온전치 못한 것, 따로 떨어져 홀로 있는 소외된 것들을 더 유난하게 돌보십니다. 왜 그렇게 그들만을 편애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라면 똑 같은 사랑을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저희 어머니에게 여섯 자식이 있습니다만 가만히 살펴보니까 어머니는 자식들 여섯에게 똑같은 사랑을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잘 되는 자식은 잊어버리고 잘 안되는 자식, 방황하는 자식, 아픈 자식에게 온통 사랑을 퍼부으셨습니다. 만일 어머니가 아픈 자식을 내버려두고 안아프고 잘 나가는 자식만을 좋아하고 보살핀다면 그는 우리가 부르는 어머니는 아닌 것입니다. 그것이 어머니가 가지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편애를 통해서 보편애를 보편적인 사랑을 실현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가지고 게시는 균형감각입니다.
■ 부모에게 만일 아홉 자식이 있는데 한 자식이 아프다고 하면 부모의 모든 관심과 신경은 안 아픈 자식에 대한 것은 잊어버리고 그 아픈 자식에게 온갖 정성이 쏟아지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부모가 어버이로서 갖는 균형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인 박노해의 시 중에는 이런 시가 있습니다. “몸의 중심은 심장이 아니다 / 몸이 아플 때 아픈 곳이 중심이 된다 / 가족의 중심은 아빠가 아니다 / 아픈 사람이 가족의 중심이 된다 / 총구 앞에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고 / 양심과 정의와 아이들이 학살되는 곳 / 이 순간 그곳이 세계의 중심이다” 그렇게 보면 우리 세계의 중심은 러시아와 우쿠라이나의 전쟁으로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으로 부모와 자식을 잃은 이들, 상처를 입어 고통을 당하는 이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 우리 어버이께서 당신이 만드신 이 세상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의 가슴은 부모를 잃은 고아들에게 가 있으셨고 재해와 재난으로 신음하고 있는 이들에게 가 있으셨고 남편을 잃은 과부에게 가 있으셨을 것입니다. 과부가 남편없이 고통으로 밤을 지새우며 신세를 한탄하며 울 때 우리 하나님은 그 밤을 함께 지새우며 함께 우시고 고아가 애비에미 없이 고통스런 나날들을 보낼 때 우리 하나님의 가슴도 미어지는 것 같으셨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쫓겨나 광야에서 죽으려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짠하게 여기시고 하갈에게 나타나 물을 주시고 큰 나라로 만들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성경에 나타난 우리 하나님은 서러워하는 자와 함께 울고 아파하는 자와 그 아픔을 함께 나누시는 참으로 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 세상에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가짜 신들이 많습니다만 그 신들 중에 대표적인 것이 희랍의 신화에서 나오는 신들은 - 결국 그것들이 다 꾸며놓은 우상들이겠지만 - 그들이 만들어 놓은 신은 천상에서 자기네들끼리 즐기지 인간사 따위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고통을 당하든 눈물을 흘리던 땅 아래에서 밥을 짓든 죽을 쓰던 신경을 끄고 삽니다. 인간의 고통이나 아픔에 무슨 맘이 움직인다든지 하지 않습니다. 절대평정을 가지고 있고 도무지 세상일 따위에 움직이거나 흔들리지 않는 신입니다. 성경에 계시되신 울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가냘프고 여린 애잔한 마음을 지니고 계십니다. 고아들이 엄마아빠가 없이 울 때 남편을 잃고 애절하게 울 때 그 울음소리를 들으시고 잠 못 이루시고 가슴에 아픈 상처구멍이 생기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러나 고아와 과부들을 그냥 바라만 보시고 그냥 아파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붙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왜 여호와께서 고아를 왜 붙드실까? 우리가 어떤 사람을 붙들게 됩니까? 쓰러지기 때문에 붙들게 됩니다. 고아가 누구입니까?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었거나 없는 이입니다. 왜 고아가 쓰러집니까? 아버지 어머니도 없으니까 의지할 데 전혀 없으니까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쓰러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시고 붙들어 주십니다. 어떻게 붙들어 주실까요? 하나님이 친히 고아들의 어버이가 되어 주시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남편없는 자들의 과부들의 보호자가 되어 주십니다. 시편 68편 5절입니다.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하나님은 거룩한 처소에 계시면서도 자신을 인간세계와 차단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항상 관심은 자신이 만든 피조물 중에 고통당하고 아픔이 있는 이들을 특별히 고아와 과부에게 쏠려 있는 것입니다. 과부들이 힘있는 자들에 의해 송사를 당할 때 재판장이 되시어 바른 판결을 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초월하여 계시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 속에서 아픔을 함께 느끼시는 인애 안에서 나타나는 거룩의 빛입니다.
■ 우리 하나님이 천지와 우주만물을 만드신 분이잖아요! 우주에는 수천억개가 아닌 수천조개 별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지구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의 적은 점에 불과할텐데 그 적은 점 중에서도 더 보이지 않은 까마득한 점과 같은 인간 그 중에서도 똑별난 왕들과 제사장들과 권력자들도 아닌 저들이 지극히 눈꼽의 때만큼 여기지도 않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 이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신명기 24장 19절에서 21절입니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후 그 남은 것은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이 말씀은 천사가 한 말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온 우주 그 넓고 광활한 우주를 만드신 위대하신 우리 하나님께서 얼마나 피조물들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들을 살피시는 그 가슴이 얼마나 섬세하시고 참으로 애잔하고 참 따습지 않습니까? 온 우주를 만드신 광대무비하신 하나님이 지극히 적은 피조물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을 그것도 불쌍하고 버려진 이들을 돌보시려고 감람나무 포도나무 밭의 곡식까지 남은 것 하나까지를 배려하시는 그 하나님의 가슴은 참으로 인정미가 넘치고 따습지 아니합니까? 오늘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나그네들의 하나님이시라고 증언합니다. 본문 시편 146편 9절 상반절에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표현에는 “나그네”를 “객”이라고도 합니다. 헬라어로 ‘나그네’란 ‘파레피데모스'라는 말로 ‘외국인, 거류인, 체류자를 의미합니다. 나그네는 낯선 땅에서 영구적으로 혹은 일시적으로 거주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은 원래 갈대아 우르라는 고향에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본토를 떠나 하나님 지시하신 곳으로 옮겨가며 살았으니 다시금 갈대아 우르로 돌아가지 아니하였으니 나그네로서 삶을 산 것입니다. 그 후손들인 아브라함 이후의 이삭과 야곱 이후에 이스라엘 족속들이 이집트 애굽에 옮겨 가서 살았으니 나그네에서 나그네로 옮겨가서 살은 것입니다. 나그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겠습니까? 정처없이 가는 곳에 무슨 집이 있겠습니까? 먹을 것이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물이나 제대로 나오겠습니까? 외부에서 강도의 위협 각종 해충들도 곤충들의 위협 등등도 있지 않습니까? 무슨 필요적절한 의료진이 있겠습니까? 바람불고 비가 와도 막아줄 것도 변변한 것들이 없습니다. 나그네로 살기에는 참으로 고통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나그네 설움”이라는 노래도 있지 않습니까?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욱마다 눈물이 고였다” 하나님은 나그네들의 설움을 아시고 계시고 이들이 눈물로 부르짖을 때 하나님도 함께 우시면서 이들의 하나님이 되셔서 대책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신명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법전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이제는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조한 내용 중에 하나가 나그네들을 잘 보살펴 주라고 합니다. 왜 잘 보살펴야 되는지 그 이유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예전에 나그네였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가 나그네였을 때 잘 보살펴 주었으니 너희도 너희 땅에 나그네들로 온 이들을 잘 보살펴 주어라 하신 것입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였을 적이 있습니다. 며느리였을 적의 설움을 생각하고 시어미가 되었을 때 며느리를 잘 돌보라는 말씀과도 일맥상통할 것입니다.
■ 성경이 증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는 고아들의 아버지 하나님이시오 과부들의 하나님이시오 나그네들의 하나님이십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물론 사회적인 약자요 불쌍한 이들입니다만 무엇보다도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입니다. 비빌 언덕도 없고 바람막이도 없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들 의지할 데가 없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전적인 의지가 되어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들 곁에 임마누엘 하셔서 기댈 언덕이 되어주시고 피할 바위와 피난처가 되어주시고 아버지가 되어주시고 어머니가 되어주셨습니다. 요셉을 보세요? 얼마나 시련의 풍파가 몰려왔습니까? 형들이 죽이려 하지요! 구덩이에 쳐넣어졌지요! 애굽으로 종으로 끌려갔지요! 보디발의 아내가 모함하여 감옥에 갔지요! 캄캄한 감옥에서 삼년이상을 보냈지요!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요셉의 의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구덩이에서 꺼내 주셨지요! 감옥에서도 사랑을 받게 해 주셨지요! 하는 일마다 형통하게 해 주셨지요! 하늘의 지혜로 꿈풀이 해몽을 하게 해주셨지요! 나중에 총리대신이 되게 해 주셨지요! 하늘의 예지로 당시 고대근동의 온 백성들을 기아에서 벗어나게 해 주셨지요! 하나님은 요셉의 전적인 의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증조 할아버지도 원조나그네요 할아버지도 나그네요 아버지도 나그네요 자신도 타향땅 나그네에서 이집트 나그네로 살아갔는데 그 나그네의 하나님이 되어주셔서 당시로서는 대 애굽 제국의 총리대신이 되게 해 주셨으니 그리고 온 백성을 살리게 하는 일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창세기는 우리 하나님께서 나그네들의 하나님임을 더욱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성경의 시대 안에서만이 아니라 성경의 시대 밖에서도 여전히 오늘 우리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십니다. 오늘의 시대에도 역시 우리 하나님은 여전히 나그네와 피난민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 민족의 사람이 아닌 다른 민족의 사람들이 와 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로 와 있으며 우리 농촌총각과 결혼하여 살고 있는 이주민들도 적지 않습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의 하나님이신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함께 살고 있는 특별히 이 땅 250만 이주민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사록 있는 이주민들은 약 250만명으로 이중 등록 외국인은 1,279,904명이다. 이는 대한민국 국민의 4.9%에 해당하는 숫자인데, 우리나라 인구 비례로 볼 때, 다문화 국가에 거의 진입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제 다문화사회요 다문화 국가입니다. 이들은 이주 노동자, 결혼 이주자, 외국인 유학생, 탈북민, 중국동포, 난민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문화사회 초기에는 한국교회가 이주민들에게 도움을 주면서 선교를 했지만 지금은 정부와 지자체가 민간 차원에서 체계적인 복지혜택을 줌으로써 이제 차츰 다문화사회가 정착되고 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경우는 비자가 끝나면 돌아가는데 한국에서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든지 기업주에게서 여러 어려움을 당하였다면 저들이 대한민국에 악선전을 해대고 인터넷이나 SNS 상에서도 한국에 대하여 악플을 달지만 이들이 한국에서 많은 혜택을 입게 되면 대한민국을 오히려 선전하고 한국상품을 소비하기도 합니다.
■ 우리 작천에도 적지 않은 이들이 이주해서 살고 있습니다. 베트남에서 오신 여자 분들은 우리나라 총각들과 결혼해서 살고 있으며 필리핀이나 태국, 캄보디아 등지의 여러 나라에서 와서 이곳에서 벼농사나 마늘 농사를 하는 농삿일을 거들기도 하고 있어서 이곳저곳에서 만나게 됩니다. 지난번 우리 작천지역사회봉사관 부지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도 태국에서 온 분이 있었습니다. 우리 작천교회 성도들은 우리 작천마을 사람들은 이들이 성경적으로 보면 나그네들인데 이들을 성경말씀대로 잘 대해 주도록 노력하고 힘써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들 나그네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차별없이 대해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들 나그네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기도입니다. 1. 단일 문화에 익숙한 한국 사회가 다문화 사회에 빠르게 적응해야겠고, 다문화에 수용적인 나라가 돼서 법적인 제도와 전반적인 상황들이 이주민 정착과 선교에 용이하게 이뤄지도록 하시옵소서! 2. 생계문제로 입국한 이주민들이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의 복을 누리게 하시고, 특히 무슬림 이주민들이 복음으로 변화되게 하시옵소서. 3. 한국 교회가 '나그네'를 보호하고 공의로 보살피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되새기며, 이주민들을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섬기는 이주민 사역자들과 교회들이 많아지게 하시옵소서! 4. 이주민을 위한 맞춤형 신앙 교육과 영육 문제에 적극 대응하는 선교 전략과 선교 사역이 이뤄지게 하시옵시고, 제3국가에 역 파송 선교사가 되어, 현지 선교사들의 헌신된 동역자가 되게 하시옵소서! 등등 우리는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사랑하면서 대해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점점 없어져 갑니다만 예전에 이주노동자들이 이 땅에 들어와서 참으로 열악한 노동의 현장에서 인권이 무시되고 저임금으로 시달리고 자녀들의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건강이 손상당해도 의료혜택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고 불법체류자라고 임금도 주지 않고 죽도록 일만 시키고 발음이 이상하다고 차별하고 묘하게 따돌리고 그래서 참으로 뼈아픈 눈물을 흘리는 이주 노동자들과 이주민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일들은 나그네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무척 싫어하시는 일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레위기의 정신과 같이 저들을 내 형제와 자매로 생각하고 받아드리고 저들을 차별하고 박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슴으로 따뜻하게 맞이해 주기를 참으로 바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론 우리 앞에 외국인 노동자의 모습으로 이주민의 모습으로 오고 계시는지 모릅니다. 도움을 바라는 모습으로 불쌍한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가 과연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지 우리가 과연 성경 말씀 그대로 사는지를 두 눈으로 지켜보고 계시는지도 모릅니다.
■ 저는 참으로 감사한 것은 우리 교회 안에도 이주민들이 있음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우리 김영문집사님과 엄애순권사님은 며느리가 베트남 사람으로 이 동네로 시집 왔는데 그 며느리인 김영 성도는 지금 어린이주일학교에 언제나 딸과 아들 수아와 현수와 함께 나와 믿음의 생활을 잘하고 있습니다. 김영문집사님과 엄애순권사님은 아들이 소천한 이후에 베트남인인 며느리와 두 손주손녀가 살 집을 이곳에 잘 지어주었고 수아와 현수를 잘 키우는 며느리를 지극히 사랑하고 아끼면서 살고 있습니다. 또 우리 교회 민병훈 집사님은 베트남인인 부인인 판티 빛 융을 지극히 사랑하면서 살고 있고 지난 해에는 딸 송이를 낳아 잘 키우고 있습니다. 민병훈 집사님의 어머니 성주미 성도는 손녀딸을 지극히 사랑하며 키우고 있습니다. 강유래 권사님은 베트남인 며느리 한이가 이곳 작천에 오면 반드시 작천교회에 나와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김도성 집사님과 김혜경 장로님은 마늘농사를 하거나 여러 농삿일을 할 때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일을 하는데 저들과 호흡을 잘 맞추어 가면서 일을 하여 그 노동자들이 자기들의 마음을 알아주는 김도성 집사님과 김혜경 장로님과 일을 하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고 합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우라 작천교회 성도님들은 대부분 외국인 노동자들과 이주민들을 가족과 같이 대하고 때로는 가족 이상으로 사랑하고 대하는 것을 생각할 때 참으로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 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매년 성탄절을 앞두고 이주가정이 된 분들의 친정인 나레에 주로 베트남이 되겠습니다만 성탄선물을 보내는 일을 몇 년 째 해왔습니다. 그래서 성탄선물을 살 수 있는 비용과 포장하는 비용과 보내는 비용들을 후원해 왔습니다. 교회는 그 비용의 일부를 대고 작천교회 여신도회에서는 새우젓을 팔아서 남긴 이익금을 전액 헌금해 주시어 이 일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작년 같은 경우는 우리 교회는 믿음의 이주가정들이 친정인 베트남을 방문하고 오는 데 비행기표 일부를 지원한 바 있습니다. 올해는 교회는 다음 주에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성탄선물을 보낼 수 있도록 지원을 해 드릴 예정입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의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사는 이주민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고 동시에 이주민으로서 우리 교회 성도들이 된 김영 성도님, 판티 빛 융 성도님, 한 성도님의 하나님이 되어 주셔서 오늘날 저는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시리라 믿습니다. 이사야 41장 10절부터 13절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라” 우리 모두는 우리 곁에서 살고 있는 이주민들에게 좋으신 하나님과 선한 목자되신 좋으신 예수님을 보여주시는 좋은 이웃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저들 이주민들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을 우리가 보여주는 친절과 사랑에서 만난다는 것을 언제나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초대교회가 예수님을 보여주었듯이 우리 작천교회 성도들을 통해서 선함과 인자함을 통해서 우리 작천 동네와 마을에 사는 이주민들이 우리 좋으신 예수님을 알게 되고 만나게 되고 믿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은총의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온 세상 우주만물을 만드신 만주의 주이시면서 지극히 적은 이들의 하나님이 되심을 감사드립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의 하나님께서 저희 이주민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심에 감사드리옵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저희가 먼저 낯선 이땅에 온 저들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저희가 예수님의 가슴을 저들에게 보여주게 하시고 저희가 저들을 맞아드려 함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살게 하시고 저희가 이 땅에 사는 이주민들의 좋은 이웃이 되어 살게 하여 주옵소서! 저희가 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며 저희가 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로 풍겨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의 삶의 모습 속에서 저들이 예수님을 알고 만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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