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등학생 시절, 어쩌다 한나절 짝꿍을 했던 급우가 했던 말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모든 것을 직접 경험할 필요가 없단다”
공부에 전념했던 그가 선의를 가지고 진지하게 조언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 같은데요. “간접경험으로도 충분한, 잡다한 일에 시간 낭비하지 말고 공부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전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언젠가 그의 근황을 친구에게 물어보니 S대 교수로 있다고 하더군요. 역시!
당시에는 이 조언의 진가를 몰랐습니다. 인생이 뭔지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 중의 하나가 “그때는 왜 몰랐을까?” 아닌가 싶어요.
뒤늦게나마 “간접경험”에 대한 이 기념비적 발언을 써먹는 상황은 여행 관련입니다. “실제 여행”과 “TV 여행 프로그램” 사이가 “직접경험 / 간접경험” 관계이니까요. 마음 편히 여행하기가 쉽지 않은, 저의 처지를 합리화할 때마다 실제 여행과 TV 여행 프로그램이 경험론적으로 큰 차이가 없음을, 오히려 세계 구석구석을 ‘구경’할 수 있는 장점이 TV에 있다는 것을 강조해 왔습니다.
2.
실제 여행과 TV 여행 프로그램에 대해 교조화된 저의 생각을 한순간 깨뜨리는 일이 지난 주중에 있었습니다. 운전 중 듣는 EBS 라디오에 박성호라는 여행작가가 나왔는데요. 간접경험에 대해 툭 한마디를 던졌습니다. “간접경험의 약점은 <고통의 부재>인 것 같습니다”
부연을 하지 않았지만 이런 의미였을 겁니다. 예를 들어, 아마존에서 촬영을 할 때 그곳에서 직접경험하는 자들이 겪는 더위와 해충의 괴롭힘 등등의 고통은 화면에 담기는 과정에서 그 생생함이 사라지고 ‘관념화’되어 전달되지요. 한여름에 냉방이 잘 된 자동차에서 차창 밖의 풍경이 가을처럼 느껴지는 것과 같은 착각이 시청자들에게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3.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도 이 관계를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아무리 체감하려고 해도 관념화된 이 간접경험은 ‘고통의 부재’로 다가옵니다. 전도사 시절, 헌혈을 위해 먼 곳의 대학병원에 가서 검사를 하고 와서, 적합 판정을 받은 후 다시 가 헌혈을 한 적이 있습니다. 환자는 10대 남학생이었는데요. 헌혈 후 병실에 방문했을 때 고통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안타까워 그 고통을 저도 느껴보려고 애를 썼지요. 그런데 저에게 고통이 재현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고통인지 ‘알’ 수도 없었고요. 우리는 근본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것 같아요. 개체(個體)의 한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생생히 느껴보려는 시도에 내재된 이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저는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그 방법을 알려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자기 십자가”입니다. 자기 십자가라는 직접 경험을 통해 우리는 예수 십자가와 공명(共鳴)할 수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가 십자가의 도(道)에 합류하는 요긴한 통로인 셈입니다. 공명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제자이고요.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7)
이러한 신앙생활을 잘 표현하고 있는 찬송이 457장(갯세마네 동산의)입니다. “갈보리 산 올라간 주를 생각할 때에 나의 받는 괴롬을 비교할 수 없으리. 십자가를 지고서 주를 따라 가리라”(3절)
[註]
- 주일찬양집회와 새벽기도회 말씀새김은 총회 묵상집 <말씀과 삶>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낭독설교를 할 때도 있으나 보통은 정리해서 구두로 전달하며, 특별히 새롭게 작성하기도 합니다. 어제 주일찬양집회에서는 제가 준비했습니다.
- 사진은 8월 25일(월) 저녁 7시 15분경, 잠시 보였던 풍경입니다. 맑은 날이었는데 구름 한 줄기가 물 흐르듯 남쪽에서 북상하다가 예배당 위에서 석양 빛을 받아 저런 풍광이 나왔습니다. 사진 제목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입니다.
번호 | 제목 | 작성자 | 등록일 | 조회수 | 첨부 파일 |
---|---|---|---|---|---|
554 | “자기 십자가”의 의미 | 신솔문 | 2025-09-08 | 16 | |
553 | 하늘이 파랗기 위한 조건 | 신솔문 | 2025-09-07 | 17 | |
552 | [창조절기 예화] 두견이의 '위대한 비행' | 신솔문 | 2025-08-25 | 65 | |
551 | 이사야 40:31과 ABBA의 "치퀴티타" | 신솔문 | 2025-08-22 | 97 | |
550 | ABBA의 "The way old friends do" | 신솔문 | 2025-08-08 | 177 | |
549 | 세 본문 설교: 7월 27일 "슬기로운 인생" | 신솔문 | 2025-07-25 | 164 | |
548 | "프랭크퍼트"의 <개소리에 대하여> | 신솔문 | 2025-07-16 | 100 | |
547 | [詩] 저께 맡기라신다 | 신솔문 | 2025-07-04 | 109 | |
546 | [말삶] 요셉의 눈물(창 43:26-31) | 신솔문 | 2025-06-27 | 114 | |
545 | [말삶] 두 이성(理性)의 조화(삼상 24:1-7) | 신솔문 | 2025-06-26 | 100 | |
544 | [말삶] 바리새인의 오류(신 9:1-6) | 신솔문 | 2025-06-25 | 107 | |
543 | [말삶] 형통한 삶(렘 22:13-17) | 신솔문 | 2025-06-24 | 108 | |
542 | 세 본문 설교: 5월 25일 "적극적인 신앙생활" | 신솔문 | 2025-05-23 | 170 | |
541 | "사랑한 후에"(들국화)의 신앙적 배경 | 신솔문 | 2025-05-09 | 188 | |
540 | 표적 설교와 ‘일반 선거인의 관점’ | 신솔문 | 2025-05-07 | 19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