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요한복음 14:25-31

지난주에는 예레미야의 소명기사를 통해서 <성령께서 던지신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하나님께 소명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셨지만, 소명자는 ‘성령에 의해 이 세상에 던져진 사람들’로서 때론 고난과 아픔의 현실을 맞이하기도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소명 받은 이들에게 주시는 아픔은 능히 감당할 만한 아픔이며, 소명을 잘 감당하려면 창세 전부터 소명 받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독교는 이웃사랑의 종교입니다만, 자기를 진정 사랑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이웃사랑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기정체성과 하나님께 소명 받은 자신을 진정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생활의 첫걸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 6.25민족화해주일

오늘은 성령강림후 셋째주일이며, 6.25민족화해주일입니다. 36년의 일제강점기 이후 해방을 맞이한 우리 민족은 불행하게도 1950년 6월 25일, 동족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3년간의 전쟁 후 분단되어 67년의 세월을 서로 반목하며 살아오고 있습니다.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국은 지난 67년 동안 분단 때문에 수많은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와야 했습니다.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남한도 ‘반공’이라는 분단이데올로기 때문에 지금도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독재자들은 분단된 상황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남북한 민중들을 억압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사용했고, 주변 강대국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남북한의 분열된 상황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서 37장 17절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민족에게 이뤄지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경전처럼 떠받들던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나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이 아주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 정의의 전후 맥락에는, 건강한 판단능력을 흐리게 하여 현실도피적인 삶을 살게 하는 ‘종교’라는 의미가 있는데, 자기들 편한 대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만 취하여, 닥치는 대로 교회와 기독교인들을 탄압했습니다.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공격의 대상이 되었던 이유는, 일제강점기에 항일독립운동에서 큰 역할을 했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뭉치면 세력화되어 자신들을 위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유신체제하에서는 간첩사건들이 수없이 많이 조작되었는데 1975년에는 김기춘 주도하에 ‘한신대 간첩조작사건’이 이뤄졌고, 전병생, 나도현, 김명수 학생은 고문 끝에 간첩활동을 했다는 자술서를 쓰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교단 목사들인 그들은 최근에서야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지난 21일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유신을 선포한 이후 그에 대해 반대하는 이들은 모조리 공산주의자로 몰고 간첩으로 몰아 사형에 처할 때마다 박근혜 정권시절 비서실장을 했던 김기춘은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이들이 수십 년 동안 권력의 중심에서 힘을 발휘했으니 블랙리스트 같은 후진국형의 국정농단도 가능했던 것이고, 공산주의들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당했던 이들은 ‘빨간색’만 보아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적개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터이니 그것이 통했던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분단된 이후 지금까지도 서로에 대한 이런 적개심은 개선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종북, 빨갱이’라는 단어가 활개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평행선을 달리는 것은 우리 민족에게 좋을 것이 하나도 없으며, 서로 증오하면서 살아감으로 남북한 민중들이 감내해야 하는 아픔이 너무 크기 때문에 교회가 나서서 평화통일을 위해 힘쓰고,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것이 ‘6.25민족 화해주일’입니다.
■ 인류의 최대 관심사

인류의 역사에서 최대 관심사는 ‘기아, 역병, 전쟁’이었습니다. 21세기 초를 살아가는 인류는 완전하진 않지만, 이 최대 관심사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한 결과 ‘기아, 역병, 전쟁’은 이전과 비교하면 괄목할 만한 개선을 이뤘습니다.
오늘날 세계에는 자연적인 기근은 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미, 모든 인류에게 적절한 영양분을 공급할 수 있는 식량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기근의 문제로 시달리는 것은 정치적인 이유와 강대국이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이유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기아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과식입니다. 2010년도에 영양실조로 사망한 이들은 100만 명 정도인데 반하여 비만으로 사망한 사람은 300만 명이며, 2014년 통계에서는 영양실조로 8억 5천만 명의 사람들이 고생하고 있지만, 과체증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은 21억 명 이상으로 나타났습니다. 역병의 경우, 흑사병이 돌았을 때에 유라시아 인구의 1/4가 사망했던 반면에 에이즈나 신종바이러스 에볼라 등이 창궐했지만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으며 의학적인 발달은 역병이 신의 저주의 영역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전쟁은 ‘인간의 폭력’의 영역인데, 농경사회에서는 인간의 폭력에 의한 죽음이 15%에 달했지만, 20세기 초에는 5%로 극감했고, 21세기 초에는 1%에 머물고 있습니다. 2012년 전 세계 사망자 수는 5,600만 명이었는데 그중에서 62만 명이 폭력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전쟁으로 12만 명이 사망했고, 범죄로 사망한 이들이 50만 명입니다. 반면에 80만 명이 자살을 했고, 150만 명이 당뇨병으로 사망했으니 설탕이 폭력보다 더 무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2010년 보고서는 더 놀라운데 비만과 그와 관련된 질병 사망자가 300만 명인데 반하여 테러 때문에 사망한 이들은 7,697명이었으니, 보통 사람들에게는 알카에다 보다 coke가 훨씬 더 위험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코카 골라나 설탕 등을 무서워하기보다 알카에다(IS), 전쟁을 더 무서워합니다. 여기에는 기업의 상술도 한몫하지만, 테러의 본질이 쇼(Show)에 있고, 쇼라는 것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공포심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지난 10년간 중동에서 일어나 일에 대해서 ‘유발 하라리’는 이런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테러범들은 ‘도자기 가게를 부수려는 파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파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도자기 가게를 부술 수 없습니다. 이때 파리는 황소를 찾아내서 귓 속에 들어가 윙윙거리면 화가 난 황소가 도자기 가게를 부수는 것이지요. 이슬람근본주의(IS)는 자기 힘으로 사담 후세인을 제거할 수 없자 9.11테러로 미국을 도발합니다. 그러자 미국은 IS대신 중동의 도자기 가게를 파괴한 것입니다. 도자기 가게가 폐허로 변하지 그곳에서 파리가 판치듯 IS가 판을 치게 된 것이지요. 그들은 쇼를 통해서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인류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해 끊임없이 도발적이고 자극적이고 잔인한 폭력들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이 고리를 끊으려면, 그들의 쇼에 냉담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도발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 평안, 평화, 샬롬(SHALOM)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의 말씀 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분단으로 말미암은 전쟁의 공포와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테러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의 불안정성 등으로 우리는 늘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 속에서 전전긍긍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평화는 히브리어로 ‘샬롬(shalom)’이며, 헬라어로는 ‘에이레네(eirene)’입니다. 샬롬과 에이레네는 완전함, 하나 됨, 조화, 번영, 건강, 충만이라는 뜻이며,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에서 형성된 내적인 조화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까지 미친 상태를 의미합니다.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 개인의 심리적인 평화의 상태, 정치나 무력에 의한 평화(Pax-Romana)아니며 사랑과 화해로 이룬 평화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평화라는 말이 오늘 요한복음 본문에 있는 평안이라는 단어와 동의어가 되고, 의미적으로는 구원, 복음, 언약의 성취 등이 ‘샬롬과 에이레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평안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근심이나 두려움’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우리는 근심과 걱정에 머물게 하고,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런 상태에 지속해서 머물러 있다는 것은 아직 우리에게 하나님의 평화가 온전히 이뤄지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끊임없는 경쟁을 강요당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불어 살아감이 아닌 경쟁은 우리의 삶을 평안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함으로 내몹니다. 마치 알카에다 같은 테러집단이 잔인한 쇼를 통해서 공포심을 유발하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불안’이라는 것은 ‘공포’를 먹고 살아가는 법입니다. 불안은 늑대와 같아서 우리의 삶을 파괴합니다. 이 불안이라는 늑대를 물리치는 방법은 ‘불안이라는 늑대’에게 밥을 먹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극복해야 할 부정적인 것들의 속성은 대부분 그들 스스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먹이를 주기 때문에 자라는 것들입니다.
‘어느 늑대에게 밥을 줄 것인가?’라는 인디언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음에 두 마리의 늑대가 살고 있는데 그들 사이에는 늘 전쟁이 벌어집니다. 첫 번째 늑대는 ‘악’입니다. 분노와 부러움과 질투와 후회와 탐욕과 교만과 죄책감과 공포와 열등감, 거짓말, 헛된 자존신, 우월감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두 번째 늑대는 ‘선’입니다. 기쁨과 평화, 사랑, 희망, 겸손, 박애, 공감, 진실, 관대함, 믿음 등으로 가득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누가 이겨요?”
“네가 누구에게 밥을 주느냐에 달려있단다.”

보혜사, 도우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이 세상이 주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이 평안함에 거하고자 한다면 온갖 ‘두려움과 근심’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온갖 어려움을 다 당한 분이시지만, 두려움과 근심 속에서 살아가지 않으셨습니다. 그 방법은 31절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의 명령대로 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우리는 두려움과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두려움과 근심을 벗어나려면 경쟁에서 이겨야만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근심과 두려움을 극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경쟁하면 할수록 두려움과 근심은 커질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세상이 주는 평화와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의 계절입니다. 도우시는 그분은 우리에게 “나의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하시며 다가오십니다. 그 평안을 여러분 안에 모시고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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