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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품의 어머니 예수

이기영 (전남노회,,목사) 2018-05-22 (화) 15:27 5년전 2179  

넓은 품의 어머니 예수

잠언 24:3-4, 누가복음 19:1-10

2018520

 

 

1. 일찍이 동양 최고의 기서라는 중국의 산해경은 우리 민족을 학식과 덕망이 높은 군자나라라 하여, 심지어 동양의 대 스승 공자도 자기 백성의 바르지 못하고 썩은 것을 분개하며 우리 민족 안에 와 살고 싶다 했습니다. 군자를 호양부쟁이란 말로 표현했으니, 이는 우리 민족이 관대하고 예의 바르며 청렴하고 박애심이 많은 자존의 백성이라 본 것입니다. 이 덕목을 합하면 산해경에 있는 것과 같이 어질 ’()의 백성임을 칭송한 말입니다. 따라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치리의 도로 삼았기에, 이런 성품의 사람들은 그 가정을 바로 이끌고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리기에 온 세상을 평화롭게 한다는 게 공자의 생각이었습니다. 이에 많은 동방의 여러 나라 사람들이 우리를 칭송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양의 문명비평가인 아놀드 토인비도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족 제도를 가지고 있다고 칭찬했습니다. 이는 많은 나라 사람들이 한국인의 품성과 가정, 그 가족관계 등을 부러워했음을 뜻합니다. 5월은 계절의 여왕, 가정의 달이며 좋은 기념의 날이 끼어 있기에 오늘은 예수님은 넓은 품의 어머니와 같은 분이시라는 메시지를 나누어 볼까합니다.

 

 

2. 생의 지혜를 추구했던 잠언은 가정에 대한 다음의 말씀을 선언합니다. “지혜가 있어야 집이 일어서고 이해가 있어야 집이 튼튼하다. 지식이 있어야 온갖 귀하고 아름다운 보화가 방마다 가득 찬다.”(잠언 24:3-4) 가정이 튼튼하게 서고 온갖 귀한 것들로 가득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 가족 단위의 핵심인 부부들이 지혜(wisdom)와 이해(understanding)와 지식(knowledge)3요소를 갖추어야 합니다. 지혜는 신앙인이 추구하는 제일의 소원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가지는 생의 슬기며, 이들은 지혜의 가르침대로 삽니다. 이해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생의 지혜는 물론, 가정과 자녀를 포함한 가족과 부부의 상대에 대한 바른 이해를 다 포괄합니다. 이런 이해가 부부와 가족들에게 있을 때엔, 그 가정은 튼튼하고 자녀들은 훌륭하게 자라며 아름다운 가정이 됩니다. 여기에 배움과 다양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게 될 때엔, 이 땅의 가사와 생업도 틀림없이 올바르게 경영하기에 이런 자들의 가정은 온갖 귀하고 아름다운 보화들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는 경험적인 고백이요 확증을 가진 진리입니다.

 

 

3. 가정에서 어머니의 위치는 존귀합니다. 성서는 이런 여인의 존귀함을 칭송하며 누구든 이토록 어진 어머니와 아내를 가진 가정은 복되고 행복하다고 선언합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다.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이 핍절치 아니하겠으며(잠언 31:10-11). 그 자식들은 일어나 사례하며 그 남편은 칭찬하기를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여러 여자보다 뛰어나다 하리라.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주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을 인하여 칭찬을 받으리라”(잠언 31:28-31). 우리는 세계 어디에서나 자비로운 어머니의 상이 점차 사라지는 오늘날 잠언의 이런 현숙한 어머니를 보고 싶어합니다. 하늘이 주신 어머니,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이 깨닫게 하기 위해 주셨다는 어머니의 마음이 한없이 그립고 절실합니다.

시인 김지하는 이상적인 여인, 어머니상과 그 소중함을 그의 여성 예찬론에서 아주 인상 깊게 표현했습니다.

여자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인류의 반 아닙니까? 인류의 반이 무엇입니까? 생명을 몸소 낳는 출산자요, 기르는 양육자요, 감싸는 보호자요, 가르치는 교육자요, 식구를 질긴 동아리로 매어 하나로 만드는 매체요, 어머니는 온 가족의 마음의 안식처요, 남자의 벌이가 시원치 않을 때에는 막벌이꾼이요, 아주 영 시원치 않을 때에는 몽땅 가로막아 생계를 꾸려가는 생명의 병참 사령관 아닙니까? 살림, 곧 살리는 일이 여자의 일이요, 살림살이 바로 살리는 일을 자기 삶으로 사는 것이 바로 여자니 생명운동이 바로 여자의 일 아닙니까?

 

현대인은 인류가 오래 동안 이상하던 어머니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때문에 남녀를 창조한 하나님은 이 역사에서 어머니의 마음을 가진 현숙한 여인을 더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잠언은 이런 현숙한 여인을 ‘1백년을 한결같이 남편과 자식과 가족들을 돌보며 열심히 사는 여인으로 묘사합니다. 이런 어머니는 자기 가족을 넘어 이웃의 불쌍한 사람들까지 손을 뻗치고 돌보기에 사람들의 칭송과 존망이 온 도성에 편안합니다. 이런 어머니의 삶이란 쉽지 않으나 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인은 가능하며, 비록 나이 늙어 아름다운 미색은 쇠퇴할지라도 마음 깊은 존경은 더할 뿐이라 합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고백했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무릎에서 하나님을 배웠고 어머니의 눈물과 기도는 나를 탕자의 길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했다하나님은 나를 살리기 위해 우리 어머니를 먼저 보내셨고,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도하시어 어머니의 품속의 학교에서 자라게 했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 어머님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무한히 찬양합니다.” 또한 모든 훌륭한 남편도 잠언의 고백과 같이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는가.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다.” 우리 어머니들은 이런 현숙한 여인이 되고, 남편과 자녀된 자들은 이런 우리의 어머니와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우리의 가정이 천국으로 회복되도록 기도하며 정성을 다해 보십시다.

 

 

4. 신약성서에 하나님 또는 예수님을 여성의 이미지로 표현한 한 구절을 발견합니다. 동전 한 닢을 잃어버려 그것을 찾고자 애쓰는 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15:8-10) 이 여인이 하나님이자 곧 예수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여인들은 시집갈 때 급할 때나 소중한 일에 쓸 용도로 동전 몇 닢 정도 가져가는 모양입니다. 형편에 따라서 두 닢도 가져가고 열 닢도 가져가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말 못할 상황에 요긴하게 쓰기 위하여 부모들이 챙겨주는 돈일 것입니다. 이렇듯 귀한 돈 한 닢을 잃어버렸습니다. 너무도 안타까워 여인은 온 방바닥을 기어 다니며 찾고자 혈안이 되었습니다. 잃은 것 찾고자하는 이 여인을 일컬어 성서는 우리 죄인을 찾고자하는 하나님이자, 예수라고 비유한 것입니다.

삭개오의 본문을 통해 동전 한 닢을 찾는 이의 심정, 즉 우리 어머니의 마음을 예수에게서 발견해 보고자 합니다. 키 작은 삭개오 이야기는 유년 주일 학교 시절에 배웠고, 또 유년 주일 학교 교사 시절 가르쳤습니다. 어버이 주일 가정의 달에 이 본문을 다시 읽게 되어 의미가 새롭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였습니다. 당시에 세리는 로마의 앞잡이요, 어려운 동족들에게서 세금을 더 많이 거둬들여서 로마에 상납하고, 그 중에서 자기의 몫을 챙겼으니, 부자였으나 동족의 미움과 원한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동족으로부터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한 외로움에 사무친 존재, 그가 바로 삭개오였습니다. 이렇듯 삭개오는 외롭고 괴로웠으며 누군가가 언제라도 다가와 손을 내밀어 주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자기를 붙들어 줄 따뜻한 손, 다시금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해 줄 넉넉한 사람을 마음속으로 간절히 고대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이런 넉넉한 품이 필요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마치 큰 나무에 새들과 벌레들이 깃들 수 있듯이 상처받고, 외롭고, 쉼이 필요한 사람에게도 그들이 거할 만한 넉넉한 품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한 가정 안에서 그런 역할은 아버지보다는 언제든 어머니의 몫입니다. 어머니는 새와 벌레들이 깃든 큰 나무와도 같은 존재임이 틀림없습니다. 어느 순간 삭개오는 넉넉한 품을 지녔다고 하는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말 예수를 마음속으로 그리워하게 되었지요. 자기 마을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잠을 이룰 수 없을 만큼 기뻤고 설레었을 것입니다. 정작 예수가 마을에 왔을 때 키 작은 그는 사람들에 둘러싸인 예수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근처의 뽕나무 위로 올라가는 일이었지요. 예수를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외로움과 상처가 치유될 것만 같아서였습니다. 그 때 예수의 눈길이 주변을 에워싼 뭇사람이 아니라 뽕나무에 오른 삭개오에게 향했고 그의 절박한 마음을 읽으셨습니다.

사실 어머니만이, 모성적인 품만이, 상처받은 자녀를 먼저 품을 수가 있습니다. 이 경우 예수는 어머니였습니다. 모성적 감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면 혼돈의 시끄러움, 그 많은 군중 속에서 외로운 삭개오를 발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삭개오의 마음, 그의 삶의 지난(至難) 한 과정과 아픔을 누구보다 먼저 보았던 것이지요. 그리고는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라. 오늘 내가 네 집에 머물겠다.” 주변 사람들은 예수가 로마의 앞잡이, 동족을 배반한 죄인의 집에 들어간다고 수군거렸지만 예수는 언제나 고뇌하는 사람을 품에 안으셨습니다. 가난한 민중에게, 상처받고, 외롭고,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누군가의 손길을 바라는 사람에게 넓은 품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그가 죄인이든 로마의 앞잡이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사실 예수께서 이런 사람에게 넓은 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스스로 온갖 고통과 상처와 아픔을 가슴에 품고 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자기만을 챙기는 사람, 나만을 강조하는 사람에겐 넓은 품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넓은 품이 결코 그 사람의 몫이 될 수가 없는 것이지요.

 

 

5. 도덕경을 쓴 노자는 예수가 목수로 사셨던 것처럼 일생을 옻나무를 심어 그 옻나무에서 옻액을 내어 파는 일로 자기의 생계를 꾸렸습니다. 옻나무를 보면서 어머니 예수의 삶이 다시 떠올려 집니다. 옻나무에서 진한 채액을 내뽑는데, 채액은 여러 제품들을 썩지 않고 광택이 나도록 만드는 용도로 사용됩니다. 채액은 반드시 상처와 고통을 통해서만 흘러나오지요. 그러나 그로부터 나온 채액은 모든 것을 아름답고 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상처 없이는 채액이 나오지 않는 법, 채액을 빼앗긴 옻나무는 상처투성이로 다른 나무에 비해 일찍 겨울나무가 되어버리지요. 그런 나무를 일컬어 우리는 십자가라 부릅니다.

메타노이아’(metanoia)라는 말은 회심이란 뜻입니다. 흔히 메타노이아죄를 회개하라는 말로 이해하고 있지만 본래 그것은 네 생각의 방향을 올바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삶 자체가 천국이 된다는 것입니다. 천당이란 말은 성서에 없습니다. 토속적 종교들 영향 속에 생겨난 민간신앙적인 태도일 뿐입니다. 예수는 현세든 내세든 어떤 공간, 장소에 매달리는 생각을 부정합니다. 지금 달리질 것을, 지금 새롭게 시작할 것을 말하며 그런 삶의 태도를 통해서 천국이 찾아올 것을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예수가 말씀하는 천국의 의미입니다. 예수는 화석화된 유대교, 성전 중심의 유대교, 영토 중심의 로마와 달리 근본적으로 새로워지는 인간을 천국의 주체로 세웠습니다.

예수는 삭개오의 마음을 알고 그를 당신의 품에 안았습니다. 예수의 품에 안긴 사람이라면 세상을 보고 사물을 보는 눈 역시 달라져야 옳습니다. 삭개오의 집에 머물렀던 예수는 그 집에 구원을 선포했습니다.

삭개오는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습니다. 이러한 삭개오의 회개의 고백을 들으신 다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19:9-10).

이는 진실로 상처투성이 삭개오가 예수의 넓은 품에 어린아이처럼 안긴 것, 그 자체가 이미 구원이었습니다. 구원이란 자기가 진정으로 살고 싶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삭개오는 로마의 앞잡이 세리로 살던 삶을 청산했습니다. 자기의 소유를 이웃들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것보다 더 값진 부활을, 구원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바로 삭개오와 같이 그런 사랑을 받은 존재들이 우리들이고, 우리 자녀들이고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성서는 우리가 구원될 수 있음을 이런 방식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6. 삭개오에 대해서 다른 각도에서 상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삭개오는 유대인 사회에서 소외당한 사람으로서 돈 모으는데서 보람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언제나 고독하고 불안했습니다. 그러니 그는 사회에서 빈척 받고 가정에 농성한 내 가정 제1주의자로 지낼 밖에 없었습니다. 로마의 세리라는 직업은 스스로도 긍지를 느끼는 직위가 아니었습니다. 동족에게 미안했습니다. 그러나 돈을 벌어서 내 가정이라도 잘 살게 해야 한다고 그는 수치와 소외를 참아가며 그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는 내향적인 가정을 꾸몄습니다. 자기와 자기 가정을 빈척하고 멸시하는 유대인 사회에 섞일 필요도 없고 그럴 의욕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사회를 발견하고 그들에게 자기와 가지 가정을 개방했습니다. 그의 관심은 밖으로 향했습니다. 그의 가정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에서 기쁨과 보람을 느꼈습니다. 자기에게는 억울하게 다른 사람에게는 네 곱이나 보상해서 그와의 화해를 청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이 집에 구원이 임했다고 선언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이란 낭만주의적이고 자기폐쇄적인 행복, 내향적이고 타계적인 신앙의 만족에서 맴도는 일이 많습니다. ‘마이홈’(my home)주의가 하나님의 축복인 줄만 압니다. 나라도 국민도 친구도 자기 자신도 팔아가면서 그 댓가를 내 가정에 쌓아두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관심을 내 가정에 집중시키고 가정이 즐거우면 또 다시 무엇을 요구하리오!’하는 식이 됩니다. 나라 일이 내게 무슨 상관이냐 합니다. 불균형과 불평등한 사회이어서 어두움(chaos)이 지배하는 데 이르렀는데도 속수무책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단호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해라. 의에 주리고 목마름 같이 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가정은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고 하나님의 의가 서게 하기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마이홈가정 제1주의에서의 출애굽(Exodus)을 예수는 암시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점에서 철저했습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 가정은 이 점에서 뚜렷한 바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7. 하나님이 최초에 인간을 창조할 때에도 자기의 형상을 따라 존엄한 인간 남녀를 다같이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니라”(1:27-28).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2:24-25). 창조기사입니다. 예수는 바로 이 말씀을 인용하며 너희는 이 말씀을 읽지 못했는가 합니다. “이러한 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19:5-6)고 선언합니다. 결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남녀를 차별하거나 우열로 보신 일이 없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동등한 인간으로 가르치며 대했습니다. 다만 남편이나 아내는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며 좋은 남편좋은 아내가 되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는 (마태복음 19:13-15) 어린이들에게는 무조건 축복했습니다. “하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하고 말했습니다. 어린이에게도 원죄가 있다는 등 하는 신학적인 얘기가 끼어 들 여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가정에서의 어린이는 예수에게 무조건 축복받는 천국 백성이라는 점을 그리스도인은 엄숙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8. 가정의 달, 어버이 주일을 보내면서 세상을 보는 우선순위가 조금은 달라졌으면 합니다. 중요한 것을 중요하게 보고, 자기가 원하고 바라는 삶을 살 수 있는 경험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참으며, 더 많이 베풀고, 스스로 넓은 품이 되어야겠습니다. 새와 벌레들이 모이는 나무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넓은 어머니 예수의 품에 안겨 본 감각으로 아니 어린 시절 어버이 품에 안겼던 그 기억으로 자신의 왜소한 품을 넓게 만들어야 합니다. 쓸쓸하고 외로운 이들과 벗이 되어 사는 삶을 결심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왜소한 틀을 넓힐 수 있다면 이것은 어버이 주일; 가정의 달이 주는 선물이자 일생을 성녀 (거룩한 어머니)로 살았던 우리들의 어머니가 간절히 바라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의 품을 넉넉하게 넓히는 가정의 달, 어버이 주일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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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품의 어머니 예수

잠언 24:3-4, 누가복음 19:1-10

2018520

 

 

1. 일찍이 동양 최고의 기서라는 중국의 산해경은 우리 민족을 학식과 덕망이 높은 군자나라라 하여, 심지어 동양의 대 스승 공자도 자기 백성의 바르지 못하고 썩은 것을 분개하며 우리 민족 안에 와 살고 싶다 했습니다. 군자를 호양부쟁이란 말로 표현했으니, 이는 우리 민족이 관대하고 예의 바르며 청렴하고 박애심이 많은 자존의 백성이라 본 것입니다. 이 덕목을 합하면 산해경에 있는 것과 같이 어질 ’()의 백성임을 칭송한 말입니다. 따라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치리의 도로 삼았기에, 이런 성품의 사람들은 그 가정을 바로 이끌고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리기에 온 세상을 평화롭게 한다는 게 공자의 생각이었습니다. 이에 많은 동방의 여러 나라 사람들이 우리를 칭송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양의 문명비평가인 아놀드 토인비도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족 제도를 가지고 있다고 칭찬했습니다. 이는 많은 나라 사람들이 한국인의 품성과 가정, 그 가족관계 등을 부러워했음을 뜻합니다. 5월은 계절의 여왕, 가정의 달이며 좋은 기념의 날이 끼어 있기에 오늘은 예수님은 넓은 품의 어머니와 같은 분이시라는 메시지를 나누어 볼까합니다.

 

 

2. 생의 지혜를 추구했던 잠언은 가정에 대한 다음의 말씀을 선언합니다. “지혜가 있어야 집이 일어서고 이해가 있어야 집이 튼튼하다. 지식이 있어야 온갖 귀하고 아름다운 보화가 방마다 가득 찬다.”(잠언 24:3-4) 가정이 튼튼하게 서고 온갖 귀한 것들로 가득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 가족 단위의 핵심인 부부들이 지혜(wisdom)와 이해(understanding)와 지식(knowledge)3요소를 갖추어야 합니다. 지혜는 신앙인이 추구하는 제일의 소원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가지는 생의 슬기며, 이들은 지혜의 가르침대로 삽니다. 이해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생의 지혜는 물론, 가정과 자녀를 포함한 가족과 부부의 상대에 대한 바른 이해를 다 포괄합니다. 이런 이해가 부부와 가족들에게 있을 때엔, 그 가정은 튼튼하고 자녀들은 훌륭하게 자라며 아름다운 가정이 됩니다. 여기에 배움과 다양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게 될 때엔, 이 땅의 가사와 생업도 틀림없이 올바르게 경영하기에 이런 자들의 가정은 온갖 귀하고 아름다운 보화들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는 경험적인 고백이요 확증을 가진 진리입니다.

 

 

3. 가정에서 어머니의 위치는 존귀합니다. 성서는 이런 여인의 존귀함을 칭송하며 누구든 이토록 어진 어머니와 아내를 가진 가정은 복되고 행복하다고 선언합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다.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이 핍절치 아니하겠으며(잠언 31:10-11). 그 자식들은 일어나 사례하며 그 남편은 칭찬하기를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여러 여자보다 뛰어나다 하리라.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주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을 인하여 칭찬을 받으리라”(잠언 31:28-31). 우리는 세계 어디에서나 자비로운 어머니의 상이 점차 사라지는 오늘날 잠언의 이런 현숙한 어머니를 보고 싶어합니다. 하늘이 주신 어머니,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이 깨닫게 하기 위해 주셨다는 어머니의 마음이 한없이 그립고 절실합니다.

시인 김지하는 이상적인 여인, 어머니상과 그 소중함을 그의 여성 예찬론에서 아주 인상 깊게 표현했습니다.

여자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인류의 반 아닙니까? 인류의 반이 무엇입니까? 생명을 몸소 낳는 출산자요, 기르는 양육자요, 감싸는 보호자요, 가르치는 교육자요, 식구를 질긴 동아리로 매어 하나로 만드는 매체요, 어머니는 온 가족의 마음의 안식처요, 남자의 벌이가 시원치 않을 때에는 막벌이꾼이요, 아주 영 시원치 않을 때에는 몽땅 가로막아 생계를 꾸려가는 생명의 병참 사령관 아닙니까? 살림, 곧 살리는 일이 여자의 일이요, 살림살이 바로 살리는 일을 자기 삶으로 사는 것이 바로 여자니 생명운동이 바로 여자의 일 아닙니까?

 

현대인은 인류가 오래 동안 이상하던 어머니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때문에 남녀를 창조한 하나님은 이 역사에서 어머니의 마음을 가진 현숙한 여인을 더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잠언은 이런 현숙한 여인을 ‘1백년을 한결같이 남편과 자식과 가족들을 돌보며 열심히 사는 여인으로 묘사합니다. 이런 어머니는 자기 가족을 넘어 이웃의 불쌍한 사람들까지 손을 뻗치고 돌보기에 사람들의 칭송과 존망이 온 도성에 편안합니다. 이런 어머니의 삶이란 쉽지 않으나 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인은 가능하며, 비록 나이 늙어 아름다운 미색은 쇠퇴할지라도 마음 깊은 존경은 더할 뿐이라 합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고백했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무릎에서 하나님을 배웠고 어머니의 눈물과 기도는 나를 탕자의 길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했다하나님은 나를 살리기 위해 우리 어머니를 먼저 보내셨고,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도하시어 어머니의 품속의 학교에서 자라게 했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 어머님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무한히 찬양합니다.” 또한 모든 훌륭한 남편도 잠언의 고백과 같이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는가.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다.” 우리 어머니들은 이런 현숙한 여인이 되고, 남편과 자녀된 자들은 이런 우리의 어머니와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우리의 가정이 천국으로 회복되도록 기도하며 정성을 다해 보십시다.

 

 

4. 신약성서에 하나님 또는 예수님을 여성의 이미지로 표현한 한 구절을 발견합니다. 동전 한 닢을 잃어버려 그것을 찾고자 애쓰는 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15:8-10) 이 여인이 하나님이자 곧 예수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여인들은 시집갈 때 급할 때나 소중한 일에 쓸 용도로 동전 몇 닢 정도 가져가는 모양입니다. 형편에 따라서 두 닢도 가져가고 열 닢도 가져가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말 못할 상황에 요긴하게 쓰기 위하여 부모들이 챙겨주는 돈일 것입니다. 이렇듯 귀한 돈 한 닢을 잃어버렸습니다. 너무도 안타까워 여인은 온 방바닥을 기어 다니며 찾고자 혈안이 되었습니다. 잃은 것 찾고자하는 이 여인을 일컬어 성서는 우리 죄인을 찾고자하는 하나님이자, 예수라고 비유한 것입니다.

삭개오의 본문을 통해 동전 한 닢을 찾는 이의 심정, 즉 우리 어머니의 마음을 예수에게서 발견해 보고자 합니다. 키 작은 삭개오 이야기는 유년 주일 학교 시절에 배웠고, 또 유년 주일 학교 교사 시절 가르쳤습니다. 어버이 주일 가정의 달에 이 본문을 다시 읽게 되어 의미가 새롭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였습니다. 당시에 세리는 로마의 앞잡이요, 어려운 동족들에게서 세금을 더 많이 거둬들여서 로마에 상납하고, 그 중에서 자기의 몫을 챙겼으니, 부자였으나 동족의 미움과 원한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동족으로부터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한 외로움에 사무친 존재, 그가 바로 삭개오였습니다. 이렇듯 삭개오는 외롭고 괴로웠으며 누군가가 언제라도 다가와 손을 내밀어 주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자기를 붙들어 줄 따뜻한 손, 다시금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해 줄 넉넉한 사람을 마음속으로 간절히 고대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이런 넉넉한 품이 필요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마치 큰 나무에 새들과 벌레들이 깃들 수 있듯이 상처받고, 외롭고, 쉼이 필요한 사람에게도 그들이 거할 만한 넉넉한 품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한 가정 안에서 그런 역할은 아버지보다는 언제든 어머니의 몫입니다. 어머니는 새와 벌레들이 깃든 큰 나무와도 같은 존재임이 틀림없습니다. 어느 순간 삭개오는 넉넉한 품을 지녔다고 하는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말 예수를 마음속으로 그리워하게 되었지요. 자기 마을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잠을 이룰 수 없을 만큼 기뻤고 설레었을 것입니다. 정작 예수가 마을에 왔을 때 키 작은 그는 사람들에 둘러싸인 예수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근처의 뽕나무 위로 올라가는 일이었지요. 예수를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외로움과 상처가 치유될 것만 같아서였습니다. 그 때 예수의 눈길이 주변을 에워싼 뭇사람이 아니라 뽕나무에 오른 삭개오에게 향했고 그의 절박한 마음을 읽으셨습니다.

사실 어머니만이, 모성적인 품만이, 상처받은 자녀를 먼저 품을 수가 있습니다. 이 경우 예수는 어머니였습니다. 모성적 감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면 혼돈의 시끄러움, 그 많은 군중 속에서 외로운 삭개오를 발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삭개오의 마음, 그의 삶의 지난(至難) 한 과정과 아픔을 누구보다 먼저 보았던 것이지요. 그리고는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라. 오늘 내가 네 집에 머물겠다.” 주변 사람들은 예수가 로마의 앞잡이, 동족을 배반한 죄인의 집에 들어간다고 수군거렸지만 예수는 언제나 고뇌하는 사람을 품에 안으셨습니다. 가난한 민중에게, 상처받고, 외롭고,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누군가의 손길을 바라는 사람에게 넓은 품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그가 죄인이든 로마의 앞잡이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사실 예수께서 이런 사람에게 넓은 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스스로 온갖 고통과 상처와 아픔을 가슴에 품고 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자기만을 챙기는 사람, 나만을 강조하는 사람에겐 넓은 품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넓은 품이 결코 그 사람의 몫이 될 수가 없는 것이지요.

 

 

5. 도덕경을 쓴 노자는 예수가 목수로 사셨던 것처럼 일생을 옻나무를 심어 그 옻나무에서 옻액을 내어 파는 일로 자기의 생계를 꾸렸습니다. 옻나무를 보면서 어머니 예수의 삶이 다시 떠올려 집니다. 옻나무에서 진한 채액을 내뽑는데, 채액은 여러 제품들을 썩지 않고 광택이 나도록 만드는 용도로 사용됩니다. 채액은 반드시 상처와 고통을 통해서만 흘러나오지요. 그러나 그로부터 나온 채액은 모든 것을 아름답고 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상처 없이는 채액이 나오지 않는 법, 채액을 빼앗긴 옻나무는 상처투성이로 다른 나무에 비해 일찍 겨울나무가 되어버리지요. 그런 나무를 일컬어 우리는 십자가라 부릅니다.

메타노이아’(metanoia)라는 말은 회심이란 뜻입니다. 흔히 메타노이아죄를 회개하라는 말로 이해하고 있지만 본래 그것은 네 생각의 방향을 올바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삶 자체가 천국이 된다는 것입니다. 천당이란 말은 성서에 없습니다. 토속적 종교들 영향 속에 생겨난 민간신앙적인 태도일 뿐입니다. 예수는 현세든 내세든 어떤 공간, 장소에 매달리는 생각을 부정합니다. 지금 달리질 것을, 지금 새롭게 시작할 것을 말하며 그런 삶의 태도를 통해서 천국이 찾아올 것을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예수가 말씀하는 천국의 의미입니다. 예수는 화석화된 유대교, 성전 중심의 유대교, 영토 중심의 로마와 달리 근본적으로 새로워지는 인간을 천국의 주체로 세웠습니다.

예수는 삭개오의 마음을 알고 그를 당신의 품에 안았습니다. 예수의 품에 안긴 사람이라면 세상을 보고 사물을 보는 눈 역시 달라져야 옳습니다. 삭개오의 집에 머물렀던 예수는 그 집에 구원을 선포했습니다.

삭개오는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습니다. 이러한 삭개오의 회개의 고백을 들으신 다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19:9-10).

이는 진실로 상처투성이 삭개오가 예수의 넓은 품에 어린아이처럼 안긴 것, 그 자체가 이미 구원이었습니다. 구원이란 자기가 진정으로 살고 싶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삭개오는 로마의 앞잡이 세리로 살던 삶을 청산했습니다. 자기의 소유를 이웃들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것보다 더 값진 부활을, 구원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바로 삭개오와 같이 그런 사랑을 받은 존재들이 우리들이고, 우리 자녀들이고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성서는 우리가 구원될 수 있음을 이런 방식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6. 삭개오에 대해서 다른 각도에서 상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삭개오는 유대인 사회에서 소외당한 사람으로서 돈 모으는데서 보람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언제나 고독하고 불안했습니다. 그러니 그는 사회에서 빈척 받고 가정에 농성한 내 가정 제1주의자로 지낼 밖에 없었습니다. 로마의 세리라는 직업은 스스로도 긍지를 느끼는 직위가 아니었습니다. 동족에게 미안했습니다. 그러나 돈을 벌어서 내 가정이라도 잘 살게 해야 한다고 그는 수치와 소외를 참아가며 그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는 내향적인 가정을 꾸몄습니다. 자기와 자기 가정을 빈척하고 멸시하는 유대인 사회에 섞일 필요도 없고 그럴 의욕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사회를 발견하고 그들에게 자기와 가지 가정을 개방했습니다. 그의 관심은 밖으로 향했습니다. 그의 가정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에서 기쁨과 보람을 느꼈습니다. 자기에게는 억울하게 다른 사람에게는 네 곱이나 보상해서 그와의 화해를 청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이 집에 구원이 임했다고 선언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이란 낭만주의적이고 자기폐쇄적인 행복, 내향적이고 타계적인 신앙의 만족에서 맴도는 일이 많습니다. ‘마이홈’(my home)주의가 하나님의 축복인 줄만 압니다. 나라도 국민도 친구도 자기 자신도 팔아가면서 그 댓가를 내 가정에 쌓아두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관심을 내 가정에 집중시키고 가정이 즐거우면 또 다시 무엇을 요구하리오!’하는 식이 됩니다. 나라 일이 내게 무슨 상관이냐 합니다. 불균형과 불평등한 사회이어서 어두움(chaos)이 지배하는 데 이르렀는데도 속수무책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단호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해라. 의에 주리고 목마름 같이 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가정은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고 하나님의 의가 서게 하기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마이홈가정 제1주의에서의 출애굽(Exodus)을 예수는 암시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점에서 철저했습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 가정은 이 점에서 뚜렷한 바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7. 하나님이 최초에 인간을 창조할 때에도 자기의 형상을 따라 존엄한 인간 남녀를 다같이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니라”(1:27-28).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2:24-25). 창조기사입니다. 예수는 바로 이 말씀을 인용하며 너희는 이 말씀을 읽지 못했는가 합니다. “이러한 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19:5-6)고 선언합니다. 결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남녀를 차별하거나 우열로 보신 일이 없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동등한 인간으로 가르치며 대했습니다. 다만 남편이나 아내는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며 좋은 남편좋은 아내가 되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는 (마태복음 19:13-15) 어린이들에게는 무조건 축복했습니다. “하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하고 말했습니다. 어린이에게도 원죄가 있다는 등 하는 신학적인 얘기가 끼어 들 여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가정에서의 어린이는 예수에게 무조건 축복받는 천국 백성이라는 점을 그리스도인은 엄숙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8. 가정의 달, 어버이 주일을 보내면서 세상을 보는 우선순위가 조금은 달라졌으면 합니다. 중요한 것을 중요하게 보고, 자기가 원하고 바라는 삶을 살 수 있는 경험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참으며, 더 많이 베풀고, 스스로 넓은 품이 되어야겠습니다. 새와 벌레들이 모이는 나무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넓은 어머니 예수의 품에 안겨 본 감각으로 아니 어린 시절 어버이 품에 안겼던 그 기억으로 자신의 왜소한 품을 넓게 만들어야 합니다. 쓸쓸하고 외로운 이들과 벗이 되어 사는 삶을 결심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왜소한 틀을 넓힐 수 있다면 이것은 어버이 주일; 가정의 달이 주는 선물이자 일생을 성녀 (거룩한 어머니)로 살았던 우리들의 어머니가 간절히 바라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의 품을 넉넉하게 넓히는 가정의 달, 어버이 주일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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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품의 어머니 예수

잠언 24:3-4, 누가복음 19:1-10

2018520

 

 

1. 일찍이 동양 최고의 기서라는 중국의 산해경은 우리 민족을 학식과 덕망이 높은 군자나라라 하여, 심지어 동양의 대 스승 공자도 자기 백성의 바르지 못하고 썩은 것을 분개하며 우리 민족 안에 와 살고 싶다 했습니다. 군자를 호양부쟁이란 말로 표현했으니, 이는 우리 민족이 관대하고 예의 바르며 청렴하고 박애심이 많은 자존의 백성이라 본 것입니다. 이 덕목을 합하면 산해경에 있는 것과 같이 어질 ’()의 백성임을 칭송한 말입니다. 따라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치리의 도로 삼았기에, 이런 성품의 사람들은 그 가정을 바로 이끌고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리기에 온 세상을 평화롭게 한다는 게 공자의 생각이었습니다. 이에 많은 동방의 여러 나라 사람들이 우리를 칭송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양의 문명비평가인 아놀드 토인비도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족 제도를 가지고 있다고 칭찬했습니다. 이는 많은 나라 사람들이 한국인의 품성과 가정, 그 가족관계 등을 부러워했음을 뜻합니다. 5월은 계절의 여왕, 가정의 달이며 좋은 기념의 날이 끼어 있기에 오늘은 예수님은 넓은 품의 어머니와 같은 분이시라는 메시지를 나누어 볼까합니다.

 

 

2. 생의 지혜를 추구했던 잠언은 가정에 대한 다음의 말씀을 선언합니다. “지혜가 있어야 집이 일어서고 이해가 있어야 집이 튼튼하다. 지식이 있어야 온갖 귀하고 아름다운 보화가 방마다 가득 찬다.”(잠언 24:3-4) 가정이 튼튼하게 서고 온갖 귀한 것들로 가득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 가족 단위의 핵심인 부부들이 지혜(wisdom)와 이해(understanding)와 지식(knowledge)3요소를 갖추어야 합니다. 지혜는 신앙인이 추구하는 제일의 소원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가지는 생의 슬기며, 이들은 지혜의 가르침대로 삽니다. 이해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생의 지혜는 물론, 가정과 자녀를 포함한 가족과 부부의 상대에 대한 바른 이해를 다 포괄합니다. 이런 이해가 부부와 가족들에게 있을 때엔, 그 가정은 튼튼하고 자녀들은 훌륭하게 자라며 아름다운 가정이 됩니다. 여기에 배움과 다양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게 될 때엔, 이 땅의 가사와 생업도 틀림없이 올바르게 경영하기에 이런 자들의 가정은 온갖 귀하고 아름다운 보화들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는 경험적인 고백이요 확증을 가진 진리입니다.

 

 

3. 가정에서 어머니의 위치는 존귀합니다. 성서는 이런 여인의 존귀함을 칭송하며 누구든 이토록 어진 어머니와 아내를 가진 가정은 복되고 행복하다고 선언합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다.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이 핍절치 아니하겠으며(잠언 31:10-11). 그 자식들은 일어나 사례하며 그 남편은 칭찬하기를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여러 여자보다 뛰어나다 하리라.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주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을 인하여 칭찬을 받으리라”(잠언 31:28-31). 우리는 세계 어디에서나 자비로운 어머니의 상이 점차 사라지는 오늘날 잠언의 이런 현숙한 어머니를 보고 싶어합니다. 하늘이 주신 어머니,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이 깨닫게 하기 위해 주셨다는 어머니의 마음이 한없이 그립고 절실합니다.

시인 김지하는 이상적인 여인, 어머니상과 그 소중함을 그의 여성 예찬론에서 아주 인상 깊게 표현했습니다.

여자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인류의 반 아닙니까? 인류의 반이 무엇입니까? 생명을 몸소 낳는 출산자요, 기르는 양육자요, 감싸는 보호자요, 가르치는 교육자요, 식구를 질긴 동아리로 매어 하나로 만드는 매체요, 어머니는 온 가족의 마음의 안식처요, 남자의 벌이가 시원치 않을 때에는 막벌이꾼이요, 아주 영 시원치 않을 때에는 몽땅 가로막아 생계를 꾸려가는 생명의 병참 사령관 아닙니까? 살림, 곧 살리는 일이 여자의 일이요, 살림살이 바로 살리는 일을 자기 삶으로 사는 것이 바로 여자니 생명운동이 바로 여자의 일 아닙니까?

 

현대인은 인류가 오래 동안 이상하던 어머니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때문에 남녀를 창조한 하나님은 이 역사에서 어머니의 마음을 가진 현숙한 여인을 더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잠언은 이런 현숙한 여인을 ‘1백년을 한결같이 남편과 자식과 가족들을 돌보며 열심히 사는 여인으로 묘사합니다. 이런 어머니는 자기 가족을 넘어 이웃의 불쌍한 사람들까지 손을 뻗치고 돌보기에 사람들의 칭송과 존망이 온 도성에 편안합니다. 이런 어머니의 삶이란 쉽지 않으나 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인은 가능하며, 비록 나이 늙어 아름다운 미색은 쇠퇴할지라도 마음 깊은 존경은 더할 뿐이라 합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고백했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무릎에서 하나님을 배웠고 어머니의 눈물과 기도는 나를 탕자의 길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했다하나님은 나를 살리기 위해 우리 어머니를 먼저 보내셨고,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도하시어 어머니의 품속의 학교에서 자라게 했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 어머님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무한히 찬양합니다.” 또한 모든 훌륭한 남편도 잠언의 고백과 같이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는가.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다.” 우리 어머니들은 이런 현숙한 여인이 되고, 남편과 자녀된 자들은 이런 우리의 어머니와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우리의 가정이 천국으로 회복되도록 기도하며 정성을 다해 보십시다.

 

 

4. 신약성서에 하나님 또는 예수님을 여성의 이미지로 표현한 한 구절을 발견합니다. 동전 한 닢을 잃어버려 그것을 찾고자 애쓰는 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15:8-10) 이 여인이 하나님이자 곧 예수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여인들은 시집갈 때 급할 때나 소중한 일에 쓸 용도로 동전 몇 닢 정도 가져가는 모양입니다. 형편에 따라서 두 닢도 가져가고 열 닢도 가져가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말 못할 상황에 요긴하게 쓰기 위하여 부모들이 챙겨주는 돈일 것입니다. 이렇듯 귀한 돈 한 닢을 잃어버렸습니다. 너무도 안타까워 여인은 온 방바닥을 기어 다니며 찾고자 혈안이 되었습니다. 잃은 것 찾고자하는 이 여인을 일컬어 성서는 우리 죄인을 찾고자하는 하나님이자, 예수라고 비유한 것입니다.

삭개오의 본문을 통해 동전 한 닢을 찾는 이의 심정, 즉 우리 어머니의 마음을 예수에게서 발견해 보고자 합니다. 키 작은 삭개오 이야기는 유년 주일 학교 시절에 배웠고, 또 유년 주일 학교 교사 시절 가르쳤습니다. 어버이 주일 가정의 달에 이 본문을 다시 읽게 되어 의미가 새롭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였습니다. 당시에 세리는 로마의 앞잡이요, 어려운 동족들에게서 세금을 더 많이 거둬들여서 로마에 상납하고, 그 중에서 자기의 몫을 챙겼으니, 부자였으나 동족의 미움과 원한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동족으로부터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한 외로움에 사무친 존재, 그가 바로 삭개오였습니다. 이렇듯 삭개오는 외롭고 괴로웠으며 누군가가 언제라도 다가와 손을 내밀어 주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자기를 붙들어 줄 따뜻한 손, 다시금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해 줄 넉넉한 사람을 마음속으로 간절히 고대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이런 넉넉한 품이 필요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마치 큰 나무에 새들과 벌레들이 깃들 수 있듯이 상처받고, 외롭고, 쉼이 필요한 사람에게도 그들이 거할 만한 넉넉한 품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한 가정 안에서 그런 역할은 아버지보다는 언제든 어머니의 몫입니다. 어머니는 새와 벌레들이 깃든 큰 나무와도 같은 존재임이 틀림없습니다. 어느 순간 삭개오는 넉넉한 품을 지녔다고 하는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말 예수를 마음속으로 그리워하게 되었지요. 자기 마을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잠을 이룰 수 없을 만큼 기뻤고 설레었을 것입니다. 정작 예수가 마을에 왔을 때 키 작은 그는 사람들에 둘러싸인 예수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근처의 뽕나무 위로 올라가는 일이었지요. 예수를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외로움과 상처가 치유될 것만 같아서였습니다. 그 때 예수의 눈길이 주변을 에워싼 뭇사람이 아니라 뽕나무에 오른 삭개오에게 향했고 그의 절박한 마음을 읽으셨습니다.

사실 어머니만이, 모성적인 품만이, 상처받은 자녀를 먼저 품을 수가 있습니다. 이 경우 예수는 어머니였습니다. 모성적 감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면 혼돈의 시끄러움, 그 많은 군중 속에서 외로운 삭개오를 발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삭개오의 마음, 그의 삶의 지난(至難) 한 과정과 아픔을 누구보다 먼저 보았던 것이지요. 그리고는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라. 오늘 내가 네 집에 머물겠다.” 주변 사람들은 예수가 로마의 앞잡이, 동족을 배반한 죄인의 집에 들어간다고 수군거렸지만 예수는 언제나 고뇌하는 사람을 품에 안으셨습니다. 가난한 민중에게, 상처받고, 외롭고,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누군가의 손길을 바라는 사람에게 넓은 품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그가 죄인이든 로마의 앞잡이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사실 예수께서 이런 사람에게 넓은 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스스로 온갖 고통과 상처와 아픔을 가슴에 품고 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자기만을 챙기는 사람, 나만을 강조하는 사람에겐 넓은 품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넓은 품이 결코 그 사람의 몫이 될 수가 없는 것이지요.

 

 

5. 도덕경을 쓴 노자는 예수가 목수로 사셨던 것처럼 일생을 옻나무를 심어 그 옻나무에서 옻액을 내어 파는 일로 자기의 생계를 꾸렸습니다. 옻나무를 보면서 어머니 예수의 삶이 다시 떠올려 집니다. 옻나무에서 진한 채액을 내뽑는데, 채액은 여러 제품들을 썩지 않고 광택이 나도록 만드는 용도로 사용됩니다. 채액은 반드시 상처와 고통을 통해서만 흘러나오지요. 그러나 그로부터 나온 채액은 모든 것을 아름답고 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상처 없이는 채액이 나오지 않는 법, 채액을 빼앗긴 옻나무는 상처투성이로 다른 나무에 비해 일찍 겨울나무가 되어버리지요. 그런 나무를 일컬어 우리는 십자가라 부릅니다.

메타노이아’(metanoia)라는 말은 회심이란 뜻입니다. 흔히 메타노이아죄를 회개하라는 말로 이해하고 있지만 본래 그것은 네 생각의 방향을 올바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삶 자체가 천국이 된다는 것입니다. 천당이란 말은 성서에 없습니다. 토속적 종교들 영향 속에 생겨난 민간신앙적인 태도일 뿐입니다. 예수는 현세든 내세든 어떤 공간, 장소에 매달리는 생각을 부정합니다. 지금 달리질 것을, 지금 새롭게 시작할 것을 말하며 그런 삶의 태도를 통해서 천국이 찾아올 것을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예수가 말씀하는 천국의 의미입니다. 예수는 화석화된 유대교, 성전 중심의 유대교, 영토 중심의 로마와 달리 근본적으로 새로워지는 인간을 천국의 주체로 세웠습니다.

예수는 삭개오의 마음을 알고 그를 당신의 품에 안았습니다. 예수의 품에 안긴 사람이라면 세상을 보고 사물을 보는 눈 역시 달라져야 옳습니다. 삭개오의 집에 머물렀던 예수는 그 집에 구원을 선포했습니다.

삭개오는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습니다. 이러한 삭개오의 회개의 고백을 들으신 다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19:9-10).

이는 진실로 상처투성이 삭개오가 예수의 넓은 품에 어린아이처럼 안긴 것, 그 자체가 이미 구원이었습니다. 구원이란 자기가 진정으로 살고 싶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삭개오는 로마의 앞잡이 세리로 살던 삶을 청산했습니다. 자기의 소유를 이웃들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것보다 더 값진 부활을, 구원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바로 삭개오와 같이 그런 사랑을 받은 존재들이 우리들이고, 우리 자녀들이고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성서는 우리가 구원될 수 있음을 이런 방식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6. 삭개오에 대해서 다른 각도에서 상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삭개오는 유대인 사회에서 소외당한 사람으로서 돈 모으는데서 보람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언제나 고독하고 불안했습니다. 그러니 그는 사회에서 빈척 받고 가정에 농성한 내 가정 제1주의자로 지낼 밖에 없었습니다. 로마의 세리라는 직업은 스스로도 긍지를 느끼는 직위가 아니었습니다. 동족에게 미안했습니다. 그러나 돈을 벌어서 내 가정이라도 잘 살게 해야 한다고 그는 수치와 소외를 참아가며 그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는 내향적인 가정을 꾸몄습니다. 자기와 자기 가정을 빈척하고 멸시하는 유대인 사회에 섞일 필요도 없고 그럴 의욕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사회를 발견하고 그들에게 자기와 가지 가정을 개방했습니다. 그의 관심은 밖으로 향했습니다. 그의 가정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에서 기쁨과 보람을 느꼈습니다. 자기에게는 억울하게 다른 사람에게는 네 곱이나 보상해서 그와의 화해를 청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이 집에 구원이 임했다고 선언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이란 낭만주의적이고 자기폐쇄적인 행복, 내향적이고 타계적인 신앙의 만족에서 맴도는 일이 많습니다. ‘마이홈’(my home)주의가 하나님의 축복인 줄만 압니다. 나라도 국민도 친구도 자기 자신도 팔아가면서 그 댓가를 내 가정에 쌓아두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관심을 내 가정에 집중시키고 가정이 즐거우면 또 다시 무엇을 요구하리오!’하는 식이 됩니다. 나라 일이 내게 무슨 상관이냐 합니다. 불균형과 불평등한 사회이어서 어두움(chaos)이 지배하는 데 이르렀는데도 속수무책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단호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해라. 의에 주리고 목마름 같이 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가정은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고 하나님의 의가 서게 하기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마이홈가정 제1주의에서의 출애굽(Exodus)을 예수는 암시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점에서 철저했습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 가정은 이 점에서 뚜렷한 바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7. 하나님이 최초에 인간을 창조할 때에도 자기의 형상을 따라 존엄한 인간 남녀를 다같이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니라”(1:27-28).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2:24-25). 창조기사입니다. 예수는 바로 이 말씀을 인용하며 너희는 이 말씀을 읽지 못했는가 합니다. “이러한 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19:5-6)고 선언합니다. 결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남녀를 차별하거나 우열로 보신 일이 없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동등한 인간으로 가르치며 대했습니다. 다만 남편이나 아내는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며 좋은 남편좋은 아내가 되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는 (마태복음 19:13-15) 어린이들에게는 무조건 축복했습니다. “하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하고 말했습니다. 어린이에게도 원죄가 있다는 등 하는 신학적인 얘기가 끼어 들 여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가정에서의 어린이는 예수에게 무조건 축복받는 천국 백성이라는 점을 그리스도인은 엄숙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8. 가정의 달, 어버이 주일을 보내면서 세상을 보는 우선순위가 조금은 달라졌으면 합니다. 중요한 것을 중요하게 보고, 자기가 원하고 바라는 삶을 살 수 있는 경험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참으며, 더 많이 베풀고, 스스로 넓은 품이 되어야겠습니다. 새와 벌레들이 모이는 나무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넓은 어머니 예수의 품에 안겨 본 감각으로 아니 어린 시절 어버이 품에 안겼던 그 기억으로 자신의 왜소한 품을 넓게 만들어야 합니다. 쓸쓸하고 외로운 이들과 벗이 되어 사는 삶을 결심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왜소한 틀을 넓힐 수 있다면 이것은 어버이 주일; 가정의 달이 주는 선물이자 일생을 성녀 (거룩한 어머니)로 살았던 우리들의 어머니가 간절히 바라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의 품을 넉넉하게 넓히는 가정의 달, 어버이 주일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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