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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영

손과 손아귀 (출 4:1~7)

이태영 (군산노회,수산교회,목사) 2017-11-01 (수) 09:08 7년전 3760  

 

모세29.jpg


손과 손아귀


모세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려주시다 -


 

4:1~7


 1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것을 땅에 던지라 하시매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을 내밀어 그것을 잡으니 그의 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5 이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6 여호와께서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에 나병이 생겨 눈 같이 된지라 7 이르시되 네 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이 본래의 살로 되돌아왔더라

 


*****


문제의 제기 - 모세의 지팡이 이야기를 어떤 눈으로 볼 것인가

 

출애굽기 4 1절에서 17절은 모세의 소명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7절까지는 지팡이,’ 그리고 10절부터 17절은 을 소재로 말씀을 전개합니다. 8절과 9절은 표적에 대한 말씀으로, ‘지팡이에 관한 이야기(1~7)에 관한 이야기(10~17)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모세의 지팡이와 뱀, 그리고 나병에 걸렸다가 깨끗하게 된 모세의 손에 대한 이야기는 대체로 놀라운 이적을 행하신 하나님께 해석의 촛점을 맞춥니다. 그리고 부르심을 받은 모세가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과정에 의미를 둡니다. 뱀을 보고 무서워서 도망을 한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뱀의 꼬리를 잡은 모습은 모세가 지도자로서의 충직함과 대담성을 말해준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손이 나병에 걸렸다가 다시 깨끗해지는 과정은 향후 이스라엘 백성을 치유하고 성결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주시는 사건으로 봅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41절에서 7절까지의 내용을 이렇게만 보는 것은 다소 부족함이 느껴집니다. 모세는 계속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시겠다는 말씀을 들으면서도 자신의 부족함을 들어 사양을 하고(3:11), 하나님의 이름을 물으면서 완곡하게 거절합니다(3:13). 그리고 모세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둘러대기도 합니다(4:1). 자신이 말을 잘 하지 못한다고 핑게를 댈 뿐 아니라(4:10), 나중에는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시라고 발뺌을 합니다(4:13).


  8개의 ‘손’과 1개의 ‘손아귀’


  본문은 모세의 에 대한 말씀을 전할 때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7절까지 을 뜻하는 말 야드는 모두 여덟 번 나오는데(2, 4-2, 6-3, 7-2), 특이하게도 4절에서는 손바닥또는 손아귀를 뜻하는 말 카프가 등장합니다. 개역개정역을 비롯한 우리말 성경은 이러한 구분을 하지 않고 모두 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이점은 영역본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 원문에서 카프’(손아귀)야드’() 가운데에 넣어 특별히 사용하고 있음을 유의해서 봐야 합니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카프’(손아귀)가 주는 의미가 매우 중요합니다. ‘카프’(손아귀)는 소명받은 자로서 모세의 모습을 잘 표현할 뿐 아니라, 손과 지팡이와 관련된 이야기(1~4)와 나병 걸린 손에 관한 이야기(5~7)을 이어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카프(손아귀)와 주도권 


카프는 손바닥 중에서 우묵한 곳을 가리키는데, 때로 권세지배의 뜻으로도 사용됩니다(왕하 20:6, 대하 30:6, 32:11, 71:4, 6:3, 38:6, 60:14, 12:7, 15:21). 우리말에도 장악(掌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본래 손바닥이라는 뜻이지만, 무엇을 손에 넣는다는 뜻이 되어 지배, 세력을 쥠이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카프가 주도권의 개념이 있다고 볼 때, ‘손바닥이라는 말보다는 손아귀가 좀더 그 뜻을 생생하게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던진 지팡이의 방향 


우리는 모세의 손과 손아귀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서 흥미있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을 따라 지팡이를 땅에 던졌을 때, 지팡이의 방향을 어떻게 해서 던졌을까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가능성이 있겠지만, 대체로 세 가지 유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팡이가 굵은 쪽과 가느다란 쪽이 있는 것을 감안 할 때, 첫 번째 가능성은 굵은 쪽을 하나님 앞에 향하게 한 경우입니다. 두 번째 가능성은 지팡이를 하나님과 모세 사이에 수평하게 한 것이며, 세 번째 가능성은 굵은 쪽을 모세를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모세 지팡이02-7a.jpg

모세가 지팡이의 머리 쪽을 자기 앞으로 향하게 하다

 

세 가지 가능성이 모두 열려 있습니다. 이 외에도 지팡이를 대각선으로 놓을 수도 있을 것이며, 모세의 옆으로 던졌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 어떻게 던졌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세 가지 유형 중에 어느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에서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던져진 지팡이는 하나님과 모세의 중간에 위치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지팡이를 놓고 하나님과 모세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가장 가능성있는 유형으로 세 번째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지팡이의 손잡이 부분, 굵은 부분을 자신의 앞에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는 모세가 던진 지팡이가 뱀으로 변했을 때, “모세가 놀라서 도망을 했다”(4:3)는 데 있습니다. 개역개정역에는 모세가 피했다고 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누스도망하다, 달아나다의 뜻을 갖습니다. 모세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도망했다면, 지팡의 머리 부분이 뱀 머리가 되고, 그 뱀의 얼굴을 보고 놀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개역성경은 모세가 뱀 앞에서라고 했지만, 원문은 얼굴’(판님) 앞에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 앞에 있는 지팡이의 머리 부분이 갑자기 뱀의 얼굴이 되자 그것을 직면하고 놀라서 도망한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뱀으로 변한 지팡이를 하나님께서 잡으라고 말씀하실 때, “꼬리를 잡으라”(4:4)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꼬리를 잡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모세가 지팡이를 땅에 던질 때 머리쪽이 자신에게 향하도록 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도권을 상징하는 지팡이 


하나님 앞에 놓인 지팡이는 주도권을 상징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지팡이를 땅에 던지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지팡이의 굵은 쪽을 자신을 향하게 함으로써 주도권을 포기하지 않으려한 것입니다. 사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지팡이를 들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모습입니다. 모세는 이미 신발을 벗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신발을 벗을 때(3:5) 지팡이도 함께 내려놓았어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 맨발로 서면서 한편으로는 지팡이는 들고 있는 부자연스러운 모습이 된 것입니다. 


손아귀로 뱀의 꼬리를 꽉 움켜쥐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던진 지팡이를 뱀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뱀이 된 지팡이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지팡이를 잡되, “꼬리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손을 내밀어 뱀의 꼬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손 안에서 뱀은 다시 지팡이가 됩니다.

성경은 이때 매우 특별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지팡이의 꼬리를 잡은 모세의 ’(야드)을 다른 곳과는 다르게 손아귀’(카프)라고 말합니다. 뱀이 모세의 손 안에서 지팡이가 되었는데, 모세는 계속해서 그 지팡이의 꼬리 부분을 손아귀로 꽉 틀어쥐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지팡이의 꼬리 부분을 쥐고 있으니 지팡이의 머리쪽은 이제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제 지팡이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계속해서 지팡이의 꼬리 부분을 손아귀로 꽉 잡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은 다른 곳에서는 모두 ’(야드)를 사용하는데 여기에서만 손아귀’(카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을 내밀어 잡으라고 했는데 모세가 손아귀로 잡는 것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요?

이 질문은 모세가 뱀의 꼬리를 잡는 모습에서 똑같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뱀의 꼬리를 꽉 잡으라’(아하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뱀의 꼬리를 꽉 움켜잡습니다’(하자크). 둘 다 꽉 잡는다는 뜻이 있지만, ‘하자크는 본래 (하게) 하다, 강하게 되다는 뜻이 있습니다. ‘아하즈보다 그 의미가 더 강합니다. 


모세는 지팡이의 꼬리 부분을 왜 손아귀로 잡고 있는가 


이 본문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 중의 하나는 모세의 신실한 믿음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원래 뱀을 잡을 때는 꼬리를 잡으면 위험합니다. 뱀의 목을 누르고 머리 부분을 제압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뱀의 꼬리를 꽉 잡으라’(아하즈)고 하셨을 때, 모세가 뱀의 꼬리를 꽉 움켜잡은’(하자크) 것은 순종하는 믿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담대한 믿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세의 이러한 자세가 그동안 보여주었던 모습과 일치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모세는 아직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능성을 넓혀서 모세가 신실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뱀의 꼬리를 꽉 잡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충직한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순종하지 않는 것은 겸손으로 봐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화를 내시는 모습(4:14)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겸손하다고 해서 분노하시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3장에서 4 17절까지의 소명기는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명쾌하게 순종하지 못하는 모습을 일관되게 보여 줍니다. 이 과정에서 손과 지팡이의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갑자기 손아귀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손아귀라는 말을 통해 모세의 어떤 모습을 보여주려 하는 것일까요? 


지팡이의 주도권을 포기하지 않는 모세 


우리는 여기에서 지팡이의 상징성에 깊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주도권을 상징하는 지팡이 자체에 해석의 열쇠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하시니 모세는 말씀에 순종합니다. 뱀의 꼬리를 잡습니다. 잡되, 꽉 움켜잡습니다. 뱀은 모세의 손에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지팡이가 된 후에도 모세는 계속해서 지팡이의 꼬리를 ‘손아귀’로 꽉 움켜쥐고 있습니다.

모세가 움켜잡은 지팡이는 이미 모세의 지팡이가 아닙니다. 본래는 모세의 지팡이였지만, 뱀이 되었다가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이 지팡이는 이제 하나님의 지팡이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갖는 지팡이입니다. 출애굽기 420절은 모세가 애굽으로 갈 때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지팡이이기 때문에 모세가 꼬리를 잡는 것이 당연합니다.

문제는 모세가 꼬리 부분을 꽉 움켜쥐는 데 있습니다. 모세가 지팡이의 꼬리 부분을 꽉 움켜쥔 것은 하나님의 지팡이이기 때문에 거룩하고 소중했기 때문일까요? 그 지팡이를 들고 애굽으로 가야하기 때문에 이전보다 사명감이 더 커졌기 때문일까요? 아직은 아닐 것입니다. 모세는 아직도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모세가 지팡이의 꼬리 부분을 꽉 움켜쥐고 있는 것은 이 지팡이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아니라 내 지팡이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모세는 지팡이의 머리쪽이 하나님께 넘어갔음에도 아직 주도권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팡이의 꼬리쪽을 손아귀로 쥐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갖는 것에 대해 아직 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세 번 거절할 뿐 아니라( 3:11, 13, 4:1),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주도권을 지키기 위하여 세 번 집착을 보인 셈입니다. 첫째, 신발을 벗었음에도 지팡이를 계속 손에 쥐고 있는 것(4:2), 둘째, 지팡이의 머리쪽을 자신에게 향하게 한 것(4:3), 셋째, 지팡이의 꼬리 부분을 ‘손아귀’로 꽉 잡고 안간힘을 쓰는 것(4:4)입니다. 


모세를 끝내 붙드시고 변화시키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주도권을 손에서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손이 문제가 있다고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모세의 손에 대한 주도권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주시기로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손을 품에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품에 넣었다가 손을 내어보니 나병이 걸렸음을 알게 됩니다(4:6).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다시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본래의 살로 돌아오게 됩니다(4:7). 모세의 주도권이라는 측면에서 모세의 손을 볼 때, 41절에서 4절까지의 지팡이 이야기와 5절에서 6절까지의 나병에 걸린 손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연결고리가 4절의 손아귀’(카프)라는 점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모세의 손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전의 지팡이가 모세의 지팡이가 아닌 것처럼, 이제 모세의 손은 모세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이 된 것입니다. 모세의 손이 죽고, 하나님의 손이 되었다는 것은 이전의 모세가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따라 살던 모세를 죽이고 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아직도 하나님께 자신의 주도권을 내어드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신의 입에 문제가 있다고 핑게를 댑니다(4:10). 그리고 다른 사람을 보내라고 포기 선언을 합니다(4:1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그대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모세를 단단히 붙드셨습니다. 모세가 자신의 손아귀로 지팡이의 꼬리 부분을 꽉 움켜쥐었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손아귀로 모세를 더더욱 단단히 붙드셨습니다. 거룩한 소명으로부터 도망하려던 모세는 결국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소명받은 자에게 주도권이란 본래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모세의 이야기는 소명받은 자의 이야기입니다. 소명받은 자가 겪는 아주 솔직하고 정직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른다고 하는 우리들도 사실은 우리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거부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하면서도 내가 주도권을 갖고 살아가려 합니다. 말로는 예수님의 뒤를 따른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내가 앞서 가면 하나님께서 내 뒤에서 따라오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고심하고 내가 결정하며 내가 행동에 옮길 때, 주님께서 나를 지지해주고 밀어주시기를 원할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출애굽기 4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은 우리의 약함과 어리석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대화를 하면서도 자기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내어드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세가 바로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성경은 소명받은 자로서 모세의 고뇌와 두려움을 조금도 감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모습을 통해 우리를 진실하게 보도록 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킴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제물로 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도록 이끕니다.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소명받은 자의 주도권이란 본래 없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모든 삶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며 사명을 감당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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