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사람과 땅 사람
- 달란트 비유를 통해 보는 두 개의 길 -
마태복음 25:14~30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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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반되게 해석되는 달란트 비유
성경에 많은 비유가 있지만 달란트의 비유(마25:14~30)만큼 상반되게 읽혀지는 경우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에 대한 해석은 크게 ‘전통적(傳統的) 읽기’와 ‘전복적(顚覆的) 읽기(뒤집어읽기)’로 나뉩니다. 전통적(傳統的) 읽기는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널리 전해지는 해석으로, 충성스럽고 성실한 제자도를 강조하는 입장입니다. 대체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능력을 잘 활용해야 더 큰 능력과 상을 받는다는 내용으로 해석됩니다.
한편 전복적(顚覆的) 읽기는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주인의 모습과 하나님의 모습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달란트를 차별해서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출발점 자체가 불공정하다는 것입니다. 정당한 소득 이상을 남긴 종을 칭찬하는가 하면,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모습”(25:24)이야말로 착취자의 모습이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이자 수입을 강권했다는 점(25:27) 등은 전통적인 하나님 상과 아주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 달란트의 비유야말로 오늘날 자본주의의 폐해를 정당화하는 가장 비복음적이며, 반그리스도적인 것이라는 견해까지 있습니다.
전복적 읽기는 전혀 다른 면으로 해석을 해나가기도 합니다. 이제까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여겨졌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의 것을 착취하지 않은 이유로 죽임을 당하는 세 번째 종에게서 평화의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자는 입장입니다. 전복적 읽기는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보다 누가복음의 므나 비유(눅 19:11~27)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시도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달란트 비유는 하늘 사람과 땅 사람의 비유
이러한 전통적 해석이나 전복적 해석과 다르게 달란트 비유는 하늘 사람과 땅 사람의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과 자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비유이며, 모든 것이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과 소유와 자아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 하나님 나라 문턱에서 좌절하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놓고 기도와 찬송으로 하나님 나라를 준비했던 성도들과, 때로는 스데반 집사님처럼 빛의 삶을 살아갔던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동시에 ‘아나니아와 삽비라’(행5:1~11)처럼, 어리석은 부자(막10:17~22)처럼 소유의식과 자신의 세상에 갇혀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비유입니다.
맡긴 달란트가 금인가 은인가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가면서 종들을 불러 자신의 소유를 맡겼습니다. 각기의 능력에 따라 첫 번째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 두 번째 종에게는 두 달란트, 그리고 마지막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헬라어 성경에 이 달란트가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이 받은 달란트가 금인지, 은인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저 다섯 달란트를 주었다고 할 뿐입니다.
다만 세 번째 종이 받은 것은 은(알귀리온)이었다고 기록합니다(마25:18, 27). 물론 ‘알귀리온’이 ‘돈’이라는 뜻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금이라고 한 것은 지나칩니다. 새번역이나 잘 알려진 영역본들(NRSV, NIV)도 금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다섯 달란트’라고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금 다섯 달란트’(14절)를 주었다고 번역된 개역개정역은 향후 수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주인을 위해 ‘곧바로’ 일을 한 첫 번째 종
다섯 달란트를 맡은 종은 그 돈을 받자마자 ‘곧바로’ 일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은 ‘곧바로’(유데오스)라는 말을 통해 첫 번째 종의 신속한 행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유데오스는 신약에 36회 나오는데,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즉각적인 순종, 하나님 나라에 대한 즉시적 수용, 또는 예수님께서 명하심에 따른 지체 없는 기적 등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 이들은 ‘곧바로, 즉시’(유데오스)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마4:20) 예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실 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하시니 ‘곧바로,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해졌습니다.(마8:3)
첫 번째 종은 모든 것을 하나님 위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달란트를 받은 ‘즉시로’ 주인을 위하여 일을 시작합니다(마 25:16). 개역개정역에는 그가 장사를 했다고 하나, 헬라어 원문에는 그가 단지 ‘일을 했다’(에르가조마이)고 할 뿐입니다. 단, 누가복음에는 ‘장사하다’(프라그마튜오마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개역개정역 마태복음에 장사를 했다고 번역한 것은 누가복음 본문(눅 19:13, 15)을 참고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는 망설이거나 주저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자기의 것이란 본래 없기 때문입니다. 이익을 남긴 후 그 이익의 지분에 대한 갈등이 전혀 없습니다. 성경은 ‘곧바로’라는 표현은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 첫 번째 종에게서 온전히 이루어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두 배의 이익에 대하여
첫 번째 종은 두 배의 이익을 남깁니다. 전복적인 해석은 두 배의 이익이 너무나 크다고 생각합니다. 정상적으로는 두 배를 남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두 배를 남기기 위해서 당시 팔레스타인 상황에서는 착취하거나 부당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은 문자의 표현에 얽매일 때 빠질 수 있는 함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달란트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비유일 뿐입니다. 비유는 경우에 따라 과장되기도 하고 축소가 되기도 하며 단순화의 과정을 거칩니다. 두 배라는 표현을 너무 진지하게 보면 자칫 초점을 혼동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두 배를 남겼다는 것을 통해 당시 팔레스타인 사회의 모순을 엿볼 수 있는 단서가 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달란트 비유에서 두 배를 남겼다고 하는 것의 강조점은 첫 번째 종이 열심히 노력한 결과라는 점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배’라는 수량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두 배든 세 배든, 아니면 다섯 배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므나의 비유에서는 열 배를 남기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열매는 삼십 배도, 육십 배도, 심지어 백 배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마13:23, 막4:20).
하늘 사람으로서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 -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사람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에 임하는 첫 번째 종의 자세입니다. 이 종은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숨 쉬고, 일하고, 살아가는 모든 영역이 하나님 나라의 영역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자신이 다섯 달란트를 갖고 두 배를 벌었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역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단 1세겔도 자신의 지분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은 하나님 나라 중심으로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상징합니다. 심지어 이들은 순교의 제단에 목숨을 내놓으면서도 자신들이 피해를 보거나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자신들의 생명조차도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종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 있지도 않았기에 드릴 것도 없고 헌신할 것도 없는 하나님 나라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드릴 것이 있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봉헌이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고 자신의 것을 드린다는 말도 적합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그저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기쁨과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간다는 즐거움 뿐입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 종들이 주인에게 하는 말도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두 배를 남겼으니 드린다고 하지 않고 그저 ‘보소서’(막25:20, 22)라는 감탄사만 말하고 있는 점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대목이라 생각됩니다.
신실한 종들에게 주어진 하늘의 상
주인은 첫 번째 종에게 상을 내립니다. 첫째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합니다. 둘째로, 작은 일에 충성했으니 더욱 많은 것을 맡기겠다고 말합니다. 셋째로 자신의 즐거움에 참여하도록 합니다(마25:21). 이 세 가지 상은 두 번째 종에게도 똑같이 주어집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종에게 주어진 것은 물질적인 보상이나 높은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일체감,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기쁨과 즐거움이 주어진 것입니다. 모든 삶에 있어 전적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그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는 하늘 사람으로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땅 사람으로서 세 번째 종의 모습 – 소유의식과 자아에 사로잡힌 사람
그런데 이에 비해 세 번째 종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소유의 개념 속에서 보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아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입니다. 그는 주인의 것과 자신의 것을 철저하게 구별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어디까지가 주인의 것인지, 그리고 어디까지가 자신의 것인지에 대해 치밀하게 계산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는 종이지만 끊임없이 자기의 지분을 생각합니다. 그는 주인의 일이라 하더라도 자신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으면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의 삶에 있어 모든 동기는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주인으로부터 한 달란트를 받습니다. 그는 다른 두 종과는 달리 땅을 파고 주인의 은전을 감추었습니다(마25:18). 땅에 주인의 은전을 감추었다는 것은 그가 땅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감추다는 말 ‘크륍토’는 ‘매장하다’는 뜻도 있지만 ‘숨기다, 비밀로 하다’의 뜻도 갖고 있습니다.
그가 재물을 감춘 것은 누구를 의식해서일까요? 일반적인 추측을 할 때 두 가지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첫째는 도둑입니다. 그 돈을 도둑으로부터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주인입니다. 주인에 대한 불평과 불만인 것입니다. 그런데 두 가지 가능성 중에서 후자의 가능성이 짙어 보입니다.
그 이유는 달란트 비유의 전체적인 맥락을 볼 때 세 번째 종과 주인의 팽팽한 긴장 관계가 계속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돌아 와서 결산을 할 때 세 번째 종은 주인의 돈을 땅에 감춘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는 데서 모으는 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었나이다.”(마25:24~25)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구절들
달란트 비유를 읽는 데 있어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대목 중의 하나가 이 구절입니다. 주인에 대한 표현이 매우 가혹하게 착취하는 자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에 대한 세 번째 종의 이러한 묘사는 “내 돈을 땅에 묻어만 두지 말고 이자라도 받도록 했어야 합니다.”(마25:27)는 취지의 말과 “있는 자는 받아서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25:29)는 내용의 말과 함께 많은 혼란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동족으로부터 이자를 받도록 하는 일은 율법에서 금지하는 일일 뿐 아니라, 강자를 옹호하는 빈익빈부익부 현상을 당연시하고 뒷받침하는 듯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땅 사람에게 보여지는 하나님의 모습
그러므로 주인에 대한 종의 표현과 주인의 말은 달란트 비유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굳은 사람이며,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는 데서 모으는”(마25:24) 주인에 대한 종의 표현은 객관적인 평가가 아니라 종이 갖고 있는 생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심거나 헤친다는 말은 모두 농사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용어입니다. ‘심지도 않고 거둔다’는 말은 씨앗을 뿌리지도 않고 곡식을 가져간다는 뜻이 있습니다. 또한 ‘헤치지도 않고 모은다’는 말은 타작 마당에 추수한 곡식을 널지도 않고 알곡을 빼앗아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세 번째 종은 주인을 불로소득하는 착취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도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도 않는 데서 모은다
세 번째 종의 말은 맞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과연 불로소득하는 분일까요? 사람이 씨앗을 뿌리고 가꾸며 추수한 곡식을 널 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알곡만 냉큼 가져가시는 분일까요? 어떤 면에서는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적어도 소유의식에 사로잡힌 땅의 사람이 보면 하나님은 그렇게 보일 것입다.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여 이익을 남긴다고 가정해 봅니다. 그리고 정해진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내 목숨을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익은 누구의 것이 되겠습니까? 결국 그것은 내 것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내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면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몇 배, 몇 십 배의 이익을 남긴다고 해도 결국은 하나님 나라에 모두 귀속되는 것이지, 내 것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지 않겠습니까?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한다고 내가 죽은 후에 해도 결국 하나님이 모든 것을 거두어 간다고 하면 하나님이야말로 불로소득하는 분 아니겠습니까? 내 지분에 대한 보장도 없고, 내 것이 되지 않을 바에야 내가 무슨 이유로 이 돈을 늘이는 데 고생을 하며 땀을 흘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내 돈을 취리하는 이들에게 맡겼어야 합니다
주인이 세 번째 종을 심하게 책망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이 달란트가 네 소유의 돈이었다면, 네가 그 이익을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면, 너는 최소한 이자라도 추구하지 않았겠느냐?”는 질책인 것입니다. 주인이 “내가 심지도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도 않는 곳에서 모은 줄 알았더라면 마땅히 내 돈에 취리하는 자들에게 맡겨서 원금과 이자를 함께 받도록 했어야 했다.”(마25:27)고 말한 것은 이해타산에 밝은 세 번째 종의 사악함을 지적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주인이 볼 때 세 번째 종은 참으로 무익한 종입니다. 하나님 나라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종입니다.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 생각할 뿐, 하나님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악한 종입니다. 이러한 종은 하나님 나라에 해만 끼칠 뿐입니다.
있는 자는 더 받아 풍족해지고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긴다
결국 주인은 세 번째 종이 갖고 있는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갖고 있는 종에게 주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무릇 있는 자는 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25:29) 이 말은 마가복음 4장 25절의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는 말씀과 아주 유사합니다. 특히 ‘없는 자’에 대한 후반부의 말씀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똑같습니다.
이 말씀을 경제적인 차원에서 해석하는 것은 이 또한 문자에 붙잡히는 일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를 설명하시는 과정에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천국의 관점에서 볼 때, 있는 사람이 더 받게 될 것들은 많이 있습니다. 믿음도 신실하게 믿는 이에게 더 풍성한 믿음이 더해집니다. 오직 하나님 나라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이에게는 소망도 더해지고, 사랑도 더해집니다. 더 큰 사명도 주어지며, 더 큰 즐거움과 기쁨이 더해져 갈수록 풍성해집니다.
하지만 소유의식과 자아에 갇혀 사는 땅의 사람은 갈수록 빈약하게 됩니다. 믿음도 약해지고 소망도 상실되며 사랑도 시들어 갑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명은 온 데 간 데 없이 없어지고 세상의 근심과 걱정, 슬픔만이 남게 됩니다.
땅 사람이 가게 되는 곳 - 어두운 땅 속
세 번째 종은 세 가지 벌을 받습니다. 첫 번째 징벌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선고입니다. 세 번째 종에게는 ‘게으르다’(마 25:26)고 질책을 받습니다. 이 말은 첫 번째 종이 보여주었던 ‘곧바로’의 모습과 대조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으르다고 번역된 헬라어 형용사 ‘오크네로스’는 ‘꺼리다, 주저하다, 망설이다’는 뜻을 가진 동사 ‘오크네오’에서 나온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앞에 두고 망설이고, 주저하는 것은 땅의 권세의 포로가 된 사람들이 갖는 상징적인 모습입니다.
두 번째 징벌은 주인으로부터 받은 한 달란트를 빼앗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소명과 직분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그 종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라는 심판을 받습니다. ‘바깥 어두운 데,’ ‘슬피 울며,’ ‘이를 간다’는 것(25:30)은 모두 죽음의 이미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인정하지 않고 소유의식에 집착하여 땅의 사람이 갈 곳은 결국 ‘땅속’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돈을 묻어 감추어 놓은 어두운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 어리석은 종은 결국 자신의 세상에 욕심을 부리다가 자신이 말한 대로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의 므나 비유에서 어리석은 종은 돈을 수건에다 싸놓는데, 그 수건도 죽음의 이미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수건을 뜻하는 말 ‘수다리온’은 죽은 나사로를 쌌던 수건(요 11:44)과 동일하게 쓰이고 있다는 점을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늘 사람과 땅 사람
달란트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두고 사는 하늘 사람과 자아와 소유의식에 붙들려 살아가는 땅 사람에 관한 비유입니다.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은 철저하게 하나님 나라 중심으로 사는 사람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소유나 지위에 대한 이해관계를 갖지 않고 살아갈 뿐 아니라, 이제 곧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찬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자기의 것이 없습니다. 본래 자기 것이 있다는 생각조차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역이요,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아갈 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함을 가장 큰 기쁨으로 생각하며, 일체 감사와 일체 은혜로 사는 사람입니다. 초대교회의 스데반 집사처럼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상황에서도 예수를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세 번째 종은 정반대의 사람입니다. 그는 끊임없이 소유에 집착하고, 지위에 붙들려 있으며, 자아에 얽매여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하며 자신의 지분을 생각합니다. 철저하고 치밀하게 계산합니다. 그가 살아가는 삶의 동기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익입니다. 신앙이라고 해서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하여 신앙을 갖습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있으면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도 거부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신을 필요로 하는 것이 우상의 본질이라고 할 때(출 32:23), 그는 철저하게 우상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교회 공동체 내부에 있는 하늘 사람과 땅 사람
초대교회 공동체는 철저하게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이 보여주었던 신실한 믿음을 바탕으로 세워졌습니다. 로마제국의 엄청난 박해를 견디어 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신실한 종처럼 오직 하나님 나라만을 생각하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공동체 내부에는 다양한 이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갈등하고 망설이다가 결국은 믿음의 대열을 이탈하는 이들도 젂지 않았을 것입니다. 소유의식과 자아에 사로잡혀 하나님 나라의 문턱에서 좌절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 없습니다. 세 번째의 악하고 게으른 종은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인격을 갖고 살아갑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지 못한 아간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유의식과 자아가 끊임없이 우리를 하나님 나라 앞에서 ‘주저하게 하고 망설이게’(오크네로스, 마25:26)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에게 손을 내미십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피로 죄인은 우리를 성화시키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삶을 ‘곧바로’(유데오스, 마25:16) 내 던지는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이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지금 이 시각에도 우리의 손에는 달란트가 들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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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과 목회' (2013년 가을호)에 실린 원고를 일부 수정하고 보완해서 여기에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