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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설교>하나님의 회심 
등록자 김주한 (광주노회,한신대학교,목사) 등록일 2011.06.13

**본 설교문은 총회본부의 요청으로 작성된 총회선교주일(2011. 6. 12) 설교문입니다.  

성경: 요나서 3:1-10, 요한 일서 1:5-9

제목: 하나님의 회심

설교: 김 주한 목사(한신대 교수, 교회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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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회선교주일을 맞아 선교현장에서 사역하고 계시는 동역자님들께 하나님의 위로와 인도하심의 손길이 충만하길 기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두 군데 성경 말씀을 읽었습니다. 이 본문을 토대로 ‘하나님의 회심’이란 관점에서 ‘선교’의 주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요나서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니느웨 성으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다시스(오늘날 스페인)로 도망가려 했습니다. 니느웨 성은 지금의 이라크 티그리스 강 북쪽으로 40킬로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도시로서 당시 앗수르제국의 수도였습니다. 주전 8세기 요나 시대에 니느웨 성은 대단히 번창한 중심 도시였습니다. 당시 이 성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은 당대 최고를 자랑했습니다.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는데, 성곽의 길이만도 약 13킬로미터여서 성 한 바퀴 도는 데만 꼬박 3일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성 높이가 30미터로 건물 20층 높이였고, 성벽 위로 여섯 대의 쌍두마차가 달릴 수 있을 정도로 성벽 폭이 넓었습니다. 중국의 만리장성은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니느웨 성은 외부에서 침입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철옹성 같은 단단한 요새였습니다. 이렇게 단단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니느웨 도시는 그야말로 소돔과 고모라 성 못지않게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그곳 사람들이 얼마나 죄를 많이 지었는지 요나서 1장 2절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악이 내 앞에까지 이르렀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표현은 사람들의 죄악이 갈 때까지 다 갔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죄악이 가득한 도시에 요나는 우여곡절 끝에 도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4절). 그런데 이게 왼 일입니까? 니느웨 사람들이 왕으로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죄를 참회하며 회개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사십 일 후에 성을 심판하겠다’는 본래의 계획을 바꾸어(“뜻을 돌이켜”, 10절) 재앙을 내리시지 않고 니느웨 성읍 사람들을 구원하십니다. 니느웨 백성들의 ‘회개’와 하나님의 ‘회심’(“마음을 돌이키심”, 9절)이 동시적으로 일어납니다. 심판에서 구원으로의 전환! 하나님의 돌이키심! 바로 요나서가 우리에게 전하려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요나서에는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뜻을 돌이키신다’ 이런 말이 다섯 차례나 나옵니다. 여기서 ‘돌이키신다’의 히브리어는 ‘슈브’인데, 그 의미는 ‘~로 방향을 돌리다, 돌아서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백성들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거두시고 ‘뜻을 돌이키시고 마음을 돌리십니다.’ 심판하시겠다는 마음을 돌이키셔서 니느웨 사람들을 구원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얼굴을 보게 됩니다. 저 마르시온적인 하나님의 이미지, 즉 하나님은 분노하시는 재판관이 아닙니다. 칼을 들고 죄인의 목을 치는 사형집행관이 아닙니다. 본래의 계획을 거두시고 죄악에 찌들어 있는 니느웨 성읍 백성들조차도 구원하시려는 의도야말로 하나님사랑의 가장 격렬한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죄가 두려운 것은 죄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 죄가 인간을 마비시켜 하나님을 무서운 폭군으로 보게 한다는 점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미움과 증오의 전선을 형성하게 만듭니다. 이 때 하나님은 범법자를 심문하고 처형하는 대심문관으로 우리 앞에 등장합니다. 사랑과 자비로운 하나님의 얼굴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또 하나의 본문 요한이 전한 복음에서 우리는 사랑에 못 이겨 아들을 십자가에 내 놓은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얼굴을 발견합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우리의 죄는 오직 그리스도의 슬픔과 고난, 그리고 그분의 보배로운 피로서만 사해진다고 말입니다.(7절). 그리스도의 피는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희생시킴에서 오는 것이며, 그 희생의 동기는 바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있습니다. 요한은 계속해서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9절) 주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결코 ‘죄가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의 말은 우리가 ‘의인인 동시에 여전히 죄인’(마르틴 루터는 1515년 로마서 강해에서 ‘항상 의로운 동시에 항상 죄인’이란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 의하여 의롭다고 인정받지만, 여전히 죄와 싸워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란 ‘의롭게 여김 받은 사람’이지 ‘의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의인이 아니라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죄를 초월해 있다거나 또한 윤리적인 책임을 회피해도 된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용서받은 죄인’의 신분으로서 그리스도인과 하나님과의 사귐은 빛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5-7).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죄의 왕국으로부터 사죄의 왕국으로 이주한 사람이며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옮겨진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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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나서와 요한의 본문에서 우리가 묵상해 보아야 할 몇 가지 주제들이 있습니다. 먼저 죄의 고백(혹은 회개)과 하나님 구원의 상관성입니다. 요나서도 요한의 본문도 모두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의 죄에 대한 회개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논리적인 순서로 볼 때 회개나 죄의 고백이 하나님의 용서보다 앞서야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 그 순서는 정반대입니다. 즉 회개나 죄의 고백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회개를 이루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좀 더 세게 밀고 들어가면 인간이 마음을 돌이키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마음을 돌이키신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사랑의 본질은 ‘인간의 회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회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여 마음을 바꾸시지 않는데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내가 아무리 누군가를 향하여 사랑을 하고 싶어도 상대방이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용서’가 있기 전에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있었습니다. ‘인간의 믿음’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있었습니다. ‘인간의 회심’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회심’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구원의 역사에서 모든 것의 출발이요 마침입니다.
  
요나와 요한은 이 사실을 미리 알아차렸습니다. 무엇을 알아차렸다는 말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것임을”(욘 3:2)알았다는 말이며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요일 1:9)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아! 이제야 알겠습니다. 요나가 왜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가려 했는지를. 피지배국의 백성으로서 당시 지배세력이었던 앗수르제국의 중심도시에 가기를 꺼려했을 거라는 정치적인 이유를 들 수도 있습니다. 또한 구원의 기회를 저들에게도 줄 수 없다는 유대인들의 이방 민족에 대한 배타주의적인 태도를 말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니느웨로 가기를 주저했던 진짜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뜻을 돌이켜”(마음을 바꾸어) 내리시기로 했던 재앙을 거두실 분이심을 알고 있었기에 요나는 자기의 선포가 거짓으로 탄로날까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요나는 이미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고 선포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데 말입니다. 이게 왼 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셔서” 재앙이 아니라 구원을 선물하십니다. 요나의 입장이 난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예언이 한순간에 거짓으로 판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참예언자가 아니라 거짓예언자로 사람들에게 낙인찍혀 버린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요나는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키셔서 구원하실 거라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에 자신이 거짓예언자로 오해받는 것이 두려워(혹은 싫어서) 도망을 갔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과 관련하여 또 하나 우리가 생각해 볼 부분이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그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획득할 수 있을까)보다는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시게 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전자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무슨 업적이나 공로를 쌓아야 하는 걸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선물을 무슨 공적이나 선행에 비례하여 베풀지 않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이제 아무런 선행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절대적이요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힘입은 사람들은 그 결과로써 당연히 사랑의 행위가 뒤따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공적이나 선행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은 사람의 결과요 열매이지 사랑을 받기 위한 전제조건이 아닙니다. 따라서 선교(혹은 전도)의 목표는 인간을 변화시켜 사랑받을 만한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드는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에 대한 혜량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을 지옥으로 보내시기로 했던 마음을 바꾸셔서 십자가 안에서 인간을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신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지 무슨 요구나 명령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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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나서와 요한의 두 본문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구원의 의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요나가 아무리 니느웨 사람들이 심판 받기를 은근히 바라면서 거기로 가기를 주저했다할지라도 로마제국이 아무리 이교도들로 넘쳐났다할지라도 하나님은 이미 그들과 사랑의 교제를 할 채비를 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죄악이 가득하여 어둠 속에 있다할지라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의 가능성은 우리로 하여금 절망을 넘어 소망을 갖도록 해 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이러한 사랑을 받은 존재입니다. 사랑받은 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또한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힘 때문에 우리는 세상과의 사귐도, 그리스도인의 사회적인 책임도 가능합니다.

   광주 선교의 아버지요 전설적인 사회사업가로 알려진 오방 최흥종 목사님은 원래 동네에서 알아주는 ‘왈패’였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성질이 괴팍했던 최흥종을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최흥종에게 삶의 전환기가 찾아왔습니다. 목포에서 의료 선교사로 활동하던 포사이드(W.H. Forsythe)가 광주에서 활동하던 동료 선교사 오웬을 치료하기 위해 영산포 나루터에 내려 광주로 갈 때 최흥종이 안내를 맡게 되었습니다. 광주로 가는 도중에 나병에 걸려 걷지도 못하는 한 가련한 여인이 구걸을 해 왔습니다. 포사이드 선교사는 그 나병환자를 말에 태워 광주로 데리고 가서 직접 품에 안아 요양소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옮기던 중 그 나병환자 손에 쥐어 쥔 지팡이가 땅바닥에 내뒹굴었습니다. 포사이드가 최흥종에게 외쳤습니다. “미스터 최! 그 지팡이를 좀 집어줘요.” 그러나 최흥종은 지팡이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미스터 최! 잡아도 괜찮아요. 어서 집어 줘요.” 끝내 최흥종은 그 지팡이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날 밤 이후 최흥종의 고민은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최흥종은 무등산 골짜기에 집을 짓고 나병환자들과 함께 살면서 치료를 받도록 도왔습니다. 한국 최초의 나병 전문요양원인 광주 나병원(지금은 ‘여수 애양원’)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습니다.

   한국교회 선교 초창기 우리나라에 와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풍토병에 걸려 죽은 수많은 선교사들이 있습니다. 본국에서 편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이 자기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위험이 뒤따르는 이국땅을 찾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세상 한 복판에서 이웃과 세상에 다시 돌려주기를 바랐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기장교단은 한국 선교 초창기 캐나다선교사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캐나다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한국으로 건너와 함경도와 북간도 지역을 선교의 주 무대로 삼게 된 동기는 서른 네 살에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매켄지 선교사 때문이었습니다. 매켄지는 한국최초의 개신교회가 세워졌던 황해도 소래지방에 들어와 선교를 하다 고열로 여러 번 고생하다가 죽었습니다. 매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캐나다 교인들은 매켄지가 사랑했던 조선을 위한 헌금을 시작했고 이후 백 여명의 선교사들이 참여한 캐나다장로교회의 ‘함경도’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매켄지 선교사의 희생은 선교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던 셈입니다. 캐나다 선교사들은 빈민구제 활동, 병자들 돌봄, 교육사업 등을 활발히 전개하여 사회선교에도 앞장섰습니다. 오늘날 우리교단의 사회선교 역량은 아마도 캐나다 선교사들의 이러한 신앙유형으로부터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사랑을 돌려주어야 하는 사랑의 책임을 진 사람이요 세상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며 살아가야 하는 세상을 위한 사제들입니다. 요즘 한국교회가 공신력이 크게 실추되어 이런 저런 비난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좀 깨어있다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은 마치 그러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인양 말하는 것을 접할 때마다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감기 걸렸다고 해서 그 사람을 죽으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설령 중병에 걸렸다해도 수술해서 고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우리의 행실이 악독하여 하나님 앞에 이르렀을 지경이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실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오늘의 아픔을 내일의 희망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믿음과 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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