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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셉 이야기가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섭리(창 45:1~8, cf. 창 50:15~21) 
등록자 김이곤 (대구노회,한신대학교,목사) 등록일 2010.03.23

설교자를 위한 구약읽기-역사서(21)

족장사(族長史)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의지(救贖意志)(창 12:1~50:26)

김이곤(한신대학교 명예교수)

요셉 이야기가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섭리

(창 45:1~8, cf. 창 50:15~21)

(도입)

요셉 이야기(창 37~50장, 38장은 제외)는 아브라함 이야기(창 12~25A)와 야곱 이야기(창 25B~36)와는 그 문학형식이 매우 다른 하나의 독립된 문학양식(novella)을 갖추고 있다. 즉 요셉 이야기는 여러 독립된 전승 자료들의 편집이 B아니라B 각각 그 시작과 끝을 뚜렷이 하는 “독립된 장면”을 가지고 있는, 이른 바, 막(幕)과 장(場)을 가지면서도 일관된 연결흐름을 갖고 있는 “단편소설 유형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요셉 이야기는 현대 문학비평학자들이 비판하듯이 그렇게 그 본질에 있어서 허구적이고 순수 개인적인 “픽션”이라는 의미로 이해하여서는 성서의 현실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단지 그 문학형식이 “전승의 산물”이 아니라(5대 자료의 편집물도 아닌) 한 개인 저자의 문학저작이라는 점에서 그렇게 분류될 뿐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뿐만 아니라, 그 중심주제에 있어서도, 아브라함-야곱 이야기 군(群)과는 구별된다.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는 “완전한 믿음”을 중요시하고 야곱 이야기에서는 “형제갈등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지만, 그러나, 이 요셉 이야기는 그들과는 전혀 그 성격이 다른, 이른 바, B<인간의 눈엔 감추어진 “신비한 신(神)의 섭리(攝理)” 문제 >B에 전적으로 관심하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요셉에 관한 기록은 비록 “단편소설”(novella)의 문학형태라는 “옷”을 입고는 있으나, 그 옷만 보아서는 물론 안 되는 것이다. 즉 강보 보다는 강보에 싸인 아기 예수를 바라보아야 하듯이, 그 문학(novella)의 옷을 입고 있는 내용, 즉 B하나님의 역사적 섭리행위와 그 섭리에 대한 요셉의 신앙 고백적 응답B이 무엇인지를 먼저 잘 주목해 보고 그 다음에는 독자들로 하여금 이 신앙 고백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하는 데 해석학적 노력을 다하여야할 것이다.

(본문주해)

우리의 본문은 “요셉 이야기”라는 전체 줄거리 중에서 그 B“결론”B에 해당하는 부분(창 45:1~8; cf. 50:15~21)이다. B요셉B은 이스라엘의 대표적 족장,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열한 번째 아들로서 야곱-레아/실바/빌하 사이에서 태어난 소생들(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단, 납달리/갓, 아셀/잇사갈, 스불론)과는 구별되는 야곱-라헬의 소생(요셉, 베냐민)이다. 야곱은 라헬을 레아보다 더 사랑하였기 때문에(창 29:18), 라헬과의 사이에 태어난 요셉(그리고 베냐민)을 늘그막에 낳았다(열한 번째로 낳았다)고 하여 다른 아들들보다 더 사랑하고 편애하였다(창 37:3). 그리하여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샀다(창 37:4;). 그래서 요셉의 배다른 형들은 요셉을 극도로 미워하여 이집트로 왕래하는 미디안(이스마엘) 상인들(노예상들)에게 은 스무 냥에 팔아넘겼다[人身賣買]. 이러한 방식으로 요셉은 이집트로 가게 되었다(창 37:28). 그러나 이 불행스러운 “악”(惡)이 도리어 하나님의 이스라엘(야곱 가문) 구원 섭리(攝理)의 주요 도구(道具)가 되었다. 이 역설(逆說)이 바로 다름 아닌 요셉 이야기의 저자(지혜인 서클)가 그의 이야기 구성의 중심요소로 사용한 그 신학적 중심 소재(素材)였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그의 역사 섭리의 도구로 인간을 이용하셨다. 하나님은 요셉의 불행스러운 역사의 고비 고비에서 함께 하셔서 그를 돌보아주셨다(창 39: 3,21,23). 예컨대, 이집트 고위관리(창 39장에서 말하는 “saris”는 “내시”를 가리킴)인 “보디발”이라는 이름(“태양신 ‘레’[Re]가 준 아들”이라는 의미를 가짐)을 가진 내관[內侍]의 아내로부터 받은 성(性)유혹을 이겨낸 일이라든지(창 39:1~20), 또 감옥에 갇혔을 때도 죄수 신분이었지만 오히려 간수장으로부터 특별한 신임을 받은 일이라든지(창 39:21~23), 등등의 기적적인 역경극복(逆境克復)은 모두 “하나님의 돌보심의 B섭리B”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로 인하여 히브리인 노예라는 비천한 신분의 요셉이 감히 일약 나이 30세(창 41:46)에 이집트 전역을 통치하는 “총리”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것이다(창 41:40~46). “총리”라는 말은 여기서는 주석의 과정에서 추론한 것이다. 그러한 추론 해석의 가능성은 창 41:40의 “바로의 백성이 요셉의 명령(말)에 B복종하게 하겠다.B”라는 말(“yishshaq”)과 창세기 41장 43절의 “사람들이 ‘물러나라!’(abrekh에 대한 새번역; 그러나 개역개정에서는 ‘엎드리라!’라고 번역함)라고 외쳤다”라는 외래어로 보이는 낯선 히브리어의 사용과 창세기 41장 42~43절에서 바로가 요셉에게 행한 의전적인 행위, “바로의 인장(옥새) 반지를 요셉의 손가락에 끼우고 바로의 수레에 버금가는 수레를 요셉에게 내어준 행위” 등을 통하여 인식할 수 있다. 이러한 요셉의 총리등극은 “요셉”을 통한 하나님의 이스라엘 구원사의 제1단계가 완료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요셉의 총리등극과 더불어 즉각 야곱 가문(이스라엘)이 중동의 혹심한 살인적 흉년으로부터 살아남는 구원이 이루어진 것은 B아니B었다. 요셉과 그의 형제들 사이에 끼어있는 “정리해야 할 것”, 즉 과거 요셉에게 행한 B과오를 형들이 뉘우치고 회개함으로서 형제갈등이 청산되는 일B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 일은 이스라엘 구원사가 나아가야 할 제2단계의 과제였다. 이 일은 하나님의 인간구원 역사에 있어서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즉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의 특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요셉은 하나님의 구원사의 “도구”로 참여하여 하나님을 대리해서 형들을 B시험(test)B하는 일을 하였다. 이 시험의 재료는 “B고난B”(苦難)이었다. 인간은 이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보고 또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요셉은 이 “고난”의 재앙 속에서 능히 하나님의 현존을 인식하고(창 39:3,21,23 등등) 그러므로 그는 이 고난 속에서 언제나 “침묵”(=이스라엘 賢者의 주요 德目)할 수 있었다. 이 “고난”이라는 시험재료가 이제는 요셉으로부터 그의 형들에게로 옮아갔다. 순수하게 단순히 양식을 구하러 왔지만 형들은 첩자라는 억울한 혐의를 받는다. 이 첩자의 혐의를 벗어나기 위하여서는 형제 “시므온”이 볼모로 잡히고(창 42:24) 형들은 이 “고난” 앞에서 드디어 과거를 뉘우치게 된다(창 42:21~22). 그러나 이 뉘우침이 곧 그들의 회개를 입증하는 것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요셉이 형들의 이러한 뉘우침을 보고 잠시 물러가 “울고 돌아 왔다”(창 42:24)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형들의 이 뉘우침이 적어도 동생 요셉에 대한 참회에 이르게 하는 방아쇠(trigger) 역할을 한 것임은 사실이다. 이 방아쇠가 결정적으로 당기어진 것은 과거 요셉을 죽음 대신에 차라리 노예-상(奴隸-商)에게 팔자고 제안하였었던(창 37:26~27) 바로 그 당사자인 “유다”가 자진하여 동생 베냐민의 “생명 담보-자”(擔保-者, pledger)가 되겠다고 나서고(창 43:9), 또 때가 오자 약속대로 베냐민을 위하여 대신 책임을 지고 “담보-자”가 되는 “B감동적 탄원 제출 행위B”(창 44:18~34)를 실행함으로 이루어졌다. 이 유다의 탄원이 감동적 설득력을 가지게 된 것은, 과거, 동생 B요셉에게 행한 형들의 잘못을 결정적으로 뉘우치는 대목B(창 44:27부터) 때문에 이루어졌다. 요셉은 이 탄원을 듣고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새 번역; 그러나 개역 개정역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라고 번역) 주위의 시종(侍從)들을 물리치는 소리를 크게 지른 후(창 45:1) 큰 소리로 울었다(창 45:2). 즉 화해가 이루어졌고 형들은 마침내 이 어려운 B시험을 통과B하게 되었던 것이다.

드디어 이 시험이 통과되자, 요셉 이야기가 목적한 바, <내레이터(narrator)의 신학적 내레이션(narration) 전개(展開)>가 이루어진다. 우리 본문(창 45:1~8)인 이 거룩한 드라마의 결론부가 바로 이 구원사신학적 내레이션이다. 이 내레이션 전개가 바로 이 요셉 이야기가 말하려는 바의 최종목표였다. (그러므로, 창 50:15~21은 창 45:1~8을 보완하는 제2내레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

B1~3절;B 요셉은 형들의 뉘우치는 모습을 보면서 혈육의 정을 억제하지 못한다. 창 42:24와 43:30~31에서 (두 번씩이나) 눈물을 감추며 억지로 그 분출하는 정(情)의 표출을 주위 사람들에게 감추어왔던 요셉은 이젠 (세 번째로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기(총리) 앞에 도열(堵列)해 있는 시종들을 물러나게 한 다음, 형제들 앞에서 “B소리 내어 울었다B.” (waithten 'eth-qolo bibhki)고 하였다. 3단계의 점층적 감정표출이 극적 효과를 크게 높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울음소리는 마침내 이집트인들에게 들렸고 또 바로의 궁에까지 들렸다. 복음의 내레이션이 이방인들에게까지(!) 전달된 셈이다. 그러나 점층적 감정표출의 절정에서 나타난 바, 자기 정체를 밝히는 말, 즉 “B내가 요셉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아직도 살아계십니까?B”('ani yoseph ha‘od 'abhi hay)라는 말은 오히려 “격앙된 분위기의 전환(雰圍氣 轉換, anticlimax)작용”을 하면서 드라마 종극(終劇)의 “내레이션”을 이끌어낸다.

요셉이 이렇게 형제들에게 자기의 정체를 밝히자 (사망의 어둠을 향해 생명구원의 밝은 빛이 너무 갑자기 비치게 되자) 형제들은 모두 놀라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하고 공포에 질려버렸다. 히브리어 “니버할루”(nibhhalu)는 “너무 놀라 온 몸이 얼어붙은 상태가 되었음”을 표현한다. 요셉이 여기서 야곱을 “B내 아버지B”라고 한 것은, 비록 관용적(慣用的) 표현이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요셉 이야기를 과거 족장역사와 연결시키는 구원사신학적 기능(J기자의 개입?)을 한다. 즉 요셉 사건은 과거 족장시대를 통하여 진행되어 온 야훼 하나님의 구원사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말하자면, 요셉의 역사가 하나의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감히 하나님의 이스라엘 구원사의 “돌쩌귀” 기능을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B4절B; “B이리 가까이 오십시오. … 나는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B” 이미 위에서 자기의 정체를 밝힌 후에 나온 이 중복(?)된 것 같은 말은 “서로 다른 두 자료의 결합”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그래서 이 혼란스러운 느낌을 피하기 위하여 미드라쉬(Midrash Bereishit Rabba)는 특이한 해석을 붙인다. 즉 이 말은 형들을 “가까이” 불러들여 자신도 형들과 마찬가지로 “할례”를 받은 동족(同族)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일을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다소 기발한(fanciful) 해석이기는 하나, 그러나 여기서는, 더 큰 구원사의 문맥에서 볼 때, 이 4절 하반절의 표현은 오히려 형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처절한 보복이 있을 것에 대한, 이른 바, 가슴을 멎게 할 만한 불길한 예고를 하는 것과 같은 말로 들릴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지는 말은 그러한 불길한 예감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한 “하나의 신학적 진술”로서 복음적 “구원의 말씀”이었다.

B5-8절B: 이 부분은 요셉 이야기 전체를 해석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신학적 진술”로 구성되어 있다. 아마도 요셉 이야기의 저자가 말하려는 가장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우선 형들의 불길한 예감을 지워주는 말로 말문을 연다. 이러한 분위기 전환을 위하여 사용되는 수사형태는 “붸앗타”(we‘athtah), 즉 “그러나 이제는!”(But now!)이라는 도입어구(導入語句)의 사용이고 그리고 성서가 자주 사용하는 「이중 인과구조(因果構造: double system of causation)」의 구문형태다. “B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도 하지 마십시오. (ki)당신들은 나를 이곳으로 팔아넘겼기 때문에 [걱정하시]겠지만, (ki)그러나 하나님은(!) 형님들을 살리기(구원[救援]하기) 위하여 ’ 당신들보다 앞서 나를 [이리로] 보내셨기 때문입니다.B” 요셉은 여기서 인간역사 속에서 움직이는 하나님의 손, 즉 ①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사건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②인간매체(人間媒體; human agency)를 통하여서도 또한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해 가시는 하나님의 이중적 섭리(①+②)의 손길을 능히 보아왔고 또 지금도 보고 있다는 심오한 종교적 확신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②의 경우처럼, B인간매체를 이용하시는B 하나님의 신묘불측(神妙不測)한 역사 섭리를 역사-설화 기술(記述)의 중심소재로 사용하는 것은 창세기 설화에서는 요셉설화가 가진 주요 특성이다.

인간은 피를 나눈 형제도 노예로 팔아넘기는 악(惡)을 행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악”(惡)을 오히려 “선”(善)으로 바꾸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창 50:20). “B(ki)당신들은 나를 이곳으로 팔아넘겼기 때문에 [걱정하시]겠지만B,” 이라는 요셉의 언급은 형들(인간들)의 악한 범죄를 선(善)으로 바꾸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방식에 대한 신앙을 전제(前提)한 언급이다. 일종 선과 악을 동일하게 다루며 마치 공깃돌놀이를 하시듯 홀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이른 바, “유일신 신앙”(monotheistic faith)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cf. 사 45:6-7; 시 139:12). “B그러므로 실제로는B”(8절,we‘athtah; so = but now) 요셉을 노예로 팔아 이집트로 넘기는 그 일이란 형들이 저지른 일이 B아니라(!)B 오히려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엘로힘”)이라는 신명(神名) 사용은 E기자의 전매(專賣)용어라기보다는 “섭리” 또는 “운명”과 같은 보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며 총체적인 일을 총괄하시는 “큰 신”(神)의 총칭으로 사용한 것으로서 J기자의 표현(!) 속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용어라고 볼 수 있다.

요셉을 그의 형들보다 “B앞서B” 이집트로 보내셨다고 하는 이 “B앞서B”라는 언급은, 실제로, 요셉 자신의 가문 전체를 요셉 자신을 뒤따라 이집트로 내려오게 하려는 요셉의 의지를 처음으로 언급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언급은 요셉 이야기 전체의 문맥에서 보면, 인간 역사를 홀로 이끄시는 하나님께서 이미 오래 전에, 즉 형들이 아우 요셉을 미워하고 또 이집트로 팔아넘기는 일을 하던 그 때부터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하신 일이라는 의미로 언급한 것이라고도 하겠다. 우리의 본문에서는 후자의 의미가 더 중심적이다. 이러한 문맥에서 보면, 우리 본문은 요셉을 예수 그리스도의 선 주자(先 走者; forerunner)라고 보는 기독교의 유형론적인 해석의 길(특히 예수를 철저히 하나님으로부터 인류구원을 위하여 미리 보냄을 받은 자라고 해석하는 길)을 열어놓고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구원섭리 경륜에 사용하신 하나님의 구원사적 “도구”는 여기서는 둘이다. 즉 ①인간 역사 속에 “고난”을 심으시는 일과 ②인간 생명을 살리시려는 의지를 끝내 고집하시는 일, 이 두 가지다. ①의 경우는 4절 상반 절과 5절 상반 절, 그리고 6절에서 언급되고 있고 ②의 경우는 4절 하반 절과 5절 하반 절, 그리고 7절에서 언급되어 있어서 ①과 ② 사이에는 엄격한 동의평행을 이루고 있다. 즉 ①에서는 인간을 매개로하여 “고난”을 도구로 하용하시는 하나님의 역사(役事)가 통일되게 나타나고 있고 ②에서는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생명살림”의 의지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문학구성은, 실로, 매우 주목할 만하다. 6절은 “B이 땅에 흉년이 들은 지가 이태가 됩니다. 앞으로도 다섯 해 동안은 밭을 갈지도 못하고 거두지도 못합니다.B”라고 하여 “고난”(苦難/逆境)을 도구로 한 구원역사(救援役事)가 한 편에서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고난(苦難)은 어디까지나 “통과”하는 것이다. 역사(歷史)의 마무리 역사(役事)는, 7절에서 삼중 반복어법으로! 강조하고 있듯이, “생명살림”의 역사(役事)이다. 즉 “B하나님이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형님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 살아남게 하시려는 것(세에릿트)과 ⓑ형님들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는 것(레하하욧트), 그리고 ⓒ우리에게 크나큰 구원을 베푸시려는 것(리플레타 께돌라), 그것일 뿐 입니다.B” ⓐⓑⓒ의 삼중 언어로 된 동의반복법(同意反復法)은 논의의 여지없이 중요성을 강조하는 어법이다. 하나님의 인류구원역사(人類救援歷史)를 주도하는 힘은 어디까지나 <B하나님의 생명살림의 의지B>이다. 즉 그의 인류구원의지이다. 역설적으로 인간 고난(苦難)을 주요 매체로 사용하시는 성격의 구원의지(救援意志)이다.

그러므로 우리 본문의 신학적 내레이션이 내린 최종결론을 담고 있는 이 8a절이, 감히, 출애굽기 15장 18절에 버금가는 “구원사의 송영”(doxology of Heilsgeschichte)으로 나타난 것은 당연하다. “B그러므로/ 나를/ 이리로/ 보내신 이는/ 당신들이-아니요./ 단지/ 하나님이십니다!B”(붸앗타/로-앗템/쉐라흐템/오티/헨나/키/하엘로힘). 실로, 이 본문의 결어(結語)는 역사(歷史)의 주인은 힘 가진 인간들이 B아니요B 단지 힘없는 자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이실 뿐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歷史)는 힘 가진 자들의 악(惡)에 의하여 주도(主導)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악(惡)을 선(善)으로 바꾸어서라도 인류역사를 구원해 내시려는 하나님에 의하여서만 주도(主導)될 뿐이다.

(도출) : 요셉을 통하여 들려 온 “새로운 소식”

요셉을 통하여 들려온 “새로운 소식”(창 45: 4b~8a)은, 요약한다면, B<하나님의 역사 섭리는 부조리하게 보이는 인간 역사 “안에서,”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인간사와 “함께,” 그리고 불완전한 인간행위들 “배후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향해 중단되지 않고 나아가, 마침내, 우리들 죄인들에게는 경이적(驚異的)인 한 “놀라움 속에서 성취된다.>B라고 하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신비한 구원사의 유일한 주인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의 행위들, 그것이 선이든 악이든, 그 인간들의 행위들을 통하여서(!) 자신의 [인간구원의] 목적을 이루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역사 섭리는 결코 초자연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철저히 B인간의 자율성B을 존중하는 역사 섭리이다. 그러나 그 어떠한 아름다운 휴머니즘이라고 할지라도 그 휴머니즘보다는 B하나님의 <생명살림(인간구원)>의 뜻B이 더 우위에 있다. 이러한 증언은 제2이사야가 이스라엘의 긴 고난의 역사를 신학적으로 반성하면서 선포한 신탁(神託; oracle)의 말씀, 즉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사 55:8-9)>라는 말씀과 정확히 상응한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제2이사야가 증언한 하나님이나 요셉 설화가 증언한 하나님이나 간에, 그 하나님은 감추어져 계신 분(Deus absconditus)이시다(출 33:20). 그 감추어져 계신 그 분이 바로 다름 아닌 B구원의 하나님B이시다(사 45:15).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안에서 “포착키 어려운 하나님의 현존”(elusive Presence)을 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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