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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 목회 지향한 공동 목회 꿈꾸다!

관리자 2011-05-09 (월) 10:11 12년전 2968  
입력 : 2011년 04월 30일  뉴스앤조이
담임목사인 아내의 사부(?)가 된다는 것

 

<뉴스앤조이>에 칼럼을 쓰다가 바쁘다는 이유로 칼럼을 한두 번 미루게 된 것이 근 3년이 넘게 칼럼을 쓰지 못했다. 정말 죄송하고 죄송한 일이다. 얼마 전 <뉴스앤조이> 편집자로부터 다시 칼럼을 꼭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용기를 내어 다시 칼럼을 쓰기로 한 지 또 한 달이 지났다. 오늘은 스스로 마감날이라고 생각하고 마감일을 꼭 지켜 원고를 송고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해인교회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는 것에는 꽤나 큰 용기가 필요했다. 가장 큰 어려움은 해인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귀한 지면을 할애를 받을 만한가 하는 생각이 앞섰고, 혹시나 해인교회를 미화시키는 결과를 낳지 않을까 싶어 두려웠다. 해인교회에 대하여 아무리 객관적인 이야기를 쓰려고 해도 그것은 결과적으로 필자에 의해 해인교회의 여러 모양이 취사선택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필자가 꿈꾸는 해인교회상을 반영하게 될 것이다. 어쨌든 필자는 여러 고민 끝에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3년 전 글을 이어 갈 생각이다.

   
 
  ▲ 해인교회의 담임목사는 나의 아내 김영선 목사다. (사진 제공 이준모)  
 

지금 해인교회의 담임목사는 나의 아내 김영선 목사다. 김영선 목사는 숙명여대를 졸업할 즈음에 감리교청년연합회에서 활동을 하다가 감리교 신학대학원(M. Div)에 진학했다. 그때는 목사가 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다만 감리교청년연합회에서 성서위원회 활동을 하는 중에 신학 공부의 필요성을 절절하게 절감하여 신학대학원에 진학했을 뿐이다. 그런데 남편이 기장 목회자였기 때문에 기장 교회를 섬기게 되었고, 어찌하다 보니 해인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아내는 지금도 자신은 피할 수만 있다면 담임목회를 하고 싶지는 않다고 할 정도로 다른 곳에 비전이 있지만, 남편과 교회의 처지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동역하는 것이라고 한다.


2003년 말이었다. 기장 교단이 사회복지 시설이 점점 늘어 가면서 이를 관리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선 전담 부서가 필요하게 되었고, 현장에서 사회복지 운동을 하던 김광수 목사나 정상시 목사를 포함한 민중 교회 목회자들이 교단에 강력하게 요구하여 전담 부서로 복지선교부가 생겼다. 그런데 문제는 전담 부서가 생겼지만 총회 본부에 들어가서 일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처음에는 김광수 목사가 일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으나 끝까지 사양하는 바람에 내가 추천되었다. 그러나 나 역시 사정은 현장을 떠날 수가 없었다.


이미 해인교회는 '내일을여는집'을 세워 노숙인쉼터, 쪽방상담소, 가정폭력상담소, 공부방 등 직원만 해도 20여 명 가까이 될 정도로 사업 규모가 작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인교회도 점차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었다. 교회도 처음으로 이제 막 장로를 피택한 상태였다. 또한 총회 직원이 된다는 것은 담임목사직을 사임하는 것이니, 내 사직은 해인교회가 불안정한 상태로 빠질 위험이 있었다. 몇몇 나를 아끼는 인천 노회의 선배 목회자들도 반대했다. 나는 교회 사정을 들어 민중 교회 측 제안을 몇 차례 거절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민중 교회들이 이제껏 교단의 전담 사회복지 부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해 놓고, 사람을 내놓으라고 하니 이제 와서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느냐며 나를 압박해 왔다. 여러 민중 교회 동료들보다는 내가 조건이 좋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내가 해인교회의 담임을 하면 되고, 비교적 다른 민중 교회들보다 해인교회가 그나마 안정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정말 괴로운 몇 날이 흘러갔다. 결국 아내가 나의 처지를 배려해서 '이것도 하나님의 푸쉬(push)'라고 받아들이자며 어려운 결정을 해 주었다. 아내는 비록 나의 사임이 형식적이고, 내가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공동 목회를 하면 된다는 생각에 큰 결정을 해 준 것 같다.


그러나 인천 노회가 주관하는 해인교회의 담임목사 임직식이 거행되고, 해인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장로가 선출된 조직 교회가 되는 순간의 현장은 내게도 부러움 그 자체였다. 민중 교회가 조직 교회로 발돋움하고, 유난히 여성 목회자가 많았던 해인교회가 여성 목회자를 조직 교회의 담임목사로 세우는 순간이었기 때문에 많은 여성 목회자들이 참여하여 축하해 주었다. 여성 목회자들은 내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며 충고를 해 주기도 하고, 농담으로 담임목사 김영선 목사의 사모가 아닌 사부로서의 역할을 잘하라고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 아내의 '변신'은 우리 집 모두의 생활 패턴에 큰 영향을 주었다. 내가 담임일 때는 몰랐지만 막상 담임 목회자의 '사부'가 되어 보니 생활 자체가 고통이었다. (사진 제공 이준모)

 
 

그런데 어느 날 나는 깜짝 놀랐다. 담임목사로 취임한 아내가 10년 동안 지켜 온 주보 틀을 바꾸기 시작했다. 해인교회 주보 첫 장에는 목회자들의 이름이 죽 나열되어 있다. 나는 그동안 우리 해인교회에서 일하는 목회자나 선교체인 내일을여는집에서 일하는 동역자들의 이름을 목사나 전도사의 구분 없이 가나다순으로 적시했었다. 그것은 내가 대학원 시절 향린교회에서 목회 실습을 했을 때, 홍근수 목사님으로부터 직분에 대한 강의를 감명 깊게 듣고 그때부터 향린교회를 따라 한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그렇게 10년을 지켜 온 나름대로의 전통을 담임목사는 취임 이후 신임 장로들과 의논하여 바로 바꾸어 담임목사와 동역자를 구분하는 것이었다. 나는 적절한 때에 슬쩍슬쩍 문제 제기를 했지만 허사였다.


아내는 나날이 변해 갔다. 아내는 무엇인가 새로운 일을 해 보려고 부단히 연구해 냈다. 교회 성가대를 강화하고, 제자 훈련이나 세미나를 자주 참석하여 교회에 적용하려고 했다. 아내는 공동 목회의 틀을 좀 더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주일 설교는 격주로 번갈아 가면서 맡겨졌다. 수요일 예배는 아내가 강해 설교를 하고, 금요일 철야 기도는 내게 맡겨졌다. 주일과 화요일에는 제자 훈련 성경 공부를 신설하고 아내가 맡았다. 이 성경 공부는 보통 세 시간 정도로 진행되었다. 교인들이 때로 내게 볼멘소리를 하였지만 나는 어쩔 수가 없었다. 아내는 월요일에는 대학교에서 야간 강의를 하고, 화요일에는 성경 공부를 밤늦게까지 하고, 수요일에는 수요 예배를 하고, 목요일에는 가정폭력상담소에서 집단 상담을 진행하고, 금요일에는 철야 기도를 했다. 거의 매일같이 밤 11시나 12시에 귀가했다. 아내는 종종 쓰러져 링거를 맞기도 했다. 아내의 변신은 우리 집 모두의 생활 패턴에 큰 영향을 주었다. 내가 담임일 때는 몰랐지만 막상 담임 목회자의 사부가 되어 보니 생활 자체가 고통이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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