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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강 나핵집 목사(평화본부 공동대표) 강좌 원고

관리자 2014-06-12 (목) 13:48 9년전 3230  
 
한국교회 통일 운동의 역사와 전망
 
나 핵 집 (공동의장, 평화공동체운동본부)
 
한국교회는 민족분단 속에서 아픔을 경험해야 했다. 한국교회의 복음의 역사는 역설적이게도 북한지역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분단 이전에는 북한 지역의 교회가 더 활발하게 움직였다. 북한을 관북지역(함경도, 북간도)과 서북지역(평양, 평안도, 황해도)으로 나눈다면 초기 교회부흥은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서북지역은 성서중심의 보수주의 신앙이 자리 잡고 있었고 관북지역은 민족주의적인 진보신앙이 자리 잡게 되었는데 그 지역의 선교사들의 신학적 영향에 기인한다고 보아야 한다. 현재 남한 교회의 뿌리가 된 서북지역의 교회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북교회에서 남하한 분들이 남한교회의 주도적 세력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남한교회의 보수적인 신앙형태도 역시 서북지역의 교회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진보신앙을 가진 교단은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관북지역의 영향을 받았다. 함경도에서 이주하여 북간도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종교지도자들이 그 뿌리가 되었기 때문에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해방이후 서북지역의 보수교회들은 북한 공산주의 정권과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고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남한에는 진보적인 기독교 세력들이 결집하고 있었다. 보수적이고 근본적인 세력과는 대조적으로 민족주의적인 자유를 표방하는 기독교 세력이 서울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었다. 자유적이며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감리교가 서울 중부지역에 집중되었다.
한국교회의 분열의 역사는 선교사들의 신학적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 반면에 한국전쟁과 무관하다 할 수 없다. 민족분단이 결국 교회의 분열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고 현재까지도 진보와 보수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한국교회에는 분단의 역사가 끼친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의 통일을 이야기 할 때 민족분단의 형성 과정과 한국교회의 분열과정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전쟁 이후에 공산정권과 충돌을 일으켰던 서북지방의 교회들이 대거 남하하면서 남한교회를 형성하고 신앙의 기저에는 반공의식과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감이 깊이 자리하게 되었다. 이런 신앙형태는 이후 분단이후 통일 운동을 하는데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1. 이승만 정권의 통일정책과 한국교회
분단 이후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과 북조선의 정부 수립이 이루어지면서 우리 민족은 국토의 분단만이 아닌 두 민족으로 갈라져 분단의 역사를 시작하게 된다. 분단의 과정에서 공산주의와 충돌을 일으키던 대부분의 서북지역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남하하게 되고 보수신앙을 형성하게 된다. 그 신앙의 기저에는 아주 강한 멸공의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남한에서 단독정부로 출발한 이승만 정권은 이 보수신앙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같은 길을 가게 된다. 1953년 휴전 때도 기독교지도자들은 휴전을 반대하는 적극적인 운동을 펼친다. 그들은 북한의 공산정권을 무너뜨리고 다시 신앙으로 북한지역을 회복해야 한다는 강한 집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은 분단 초기에 북한정권 자체를 인정하지 않음으로 평화통일의 가능성을 배제해 버린다. 반공과 북진통일론을 장기집권으로 가는 과정에서 이용하고 반대 정치세력들과 통일세력들을 제거하는 일에 나선다. 남북평화통일 방안 7원칙을 주장한 제헌의회 소장파의원을 제거한다. 그게 유명한 국회 프락치 사건이다.
 
남북평화통일 7원칙(1948년 제헌의회 소장파 의원들이 제기)
 
① 외국군대를 완전히 철퇴케 할 것
② 남북의 모든 정치범을 석방할 것
③ 남북정당사회단체대표로서 남북정치회의를 개최할 것
④ 남북정치회의는 일반, 평등, 직접, 비밀의 4대 원칙에 입각한 선거규칙을 작성 하여 최고입법기관을 구성할 것
⑤ 최고입법기관은 헌법을 제정하고 통일중앙정부를 수립할 것
⑥ 반민족행위자를 처단할 것
⑦ 조국방위군을 재편성할 것
 
교회의 장로였던 이승만 정권에 의해 조장된 반공, 반북이데올로기는 이승만의 북진통일론 외에는 그 어떤 통일논의도 용납하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 정권에게 최대 정적이었던 평화통일론을 주장하던 진보당의 죽산 조봉암을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불법무기 소지죄로 사형을 언도하고 처형한다. 1심재판부는 무죄를 선언했지만 재판부에 압력을 가해 2심에서 사형언도를 한다. 조봉암 간첩사건은 52년이 지난 다음에야 무죄를 선언했다. 1948년 6월 남북직접 협상으로 통일을 구상하며 북한을 방문했던 김구를 암살하고 분단체제를 공고히 하며 반공이데올로기를 극대화하고 독제체제를 유지 강화하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이승만 정권시대는 북진통일론이 중심을 이루어 호전적인 대북정책을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의 이런 반공주의에 기초한 북진통일론은 보수 기독교와 궤를 함께 함으로 반공주의와 친미 노선을 걷는 기독교를 만들어 낸다. 성서의 가치가 평화와 화해임에도 불구하고 분단 상황은 신앙자체를 적대감과 공산주의를 척결한다는 명분하에 평화통일론이 발 부치지 못하도록 환경을 만들어 왔다. 지금도 평화통일론을 말하는 사람들을 종북세력으로 호도하며 여전히 기독교 안에는 반공주의와 친미주의 성향의 기독교가 분단의 시점에서 조금도 진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이다.
*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조봉암을 중심으로 한)
 
- “선거준비와 실시 감독, 감시를 위해 국제 감시위원회를 설치하되 구성원은 인도, 스위스, 체코”로 하며 “선거의 준비와 실시를 위해 대한민국과 이북 당국에서 각각 선출한 대표로 구성되는 전 한국위원회를 설치하자”고 주장.
 
- 진보당 당수 조봉암은 이승만의 무력통일론의 위험성을 공박하며 “이남과 이북이 동등한 위치에서 동일한 시간에 총선거를 실시하는 방안이 타당하다” 주장.
 
- 민중들의 통일염원을 반영하여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은 216만 표를 획득하여 이승만 정권을 저지할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하였으나 이승만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처형, 진보당 해산됨.
 
2. 이승만정권의 붕괴와 한국교회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장기독재를 위한 3.15 부정선거는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마침내 권좌에서 물러나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이승만 정권과 북진통일론을 주장하며 함께 궤를 같이 했으나 정권의 붕궤로 당황하게 된다. 그리고 이승만 정권의 잘못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킨다. 4.19 혁명으로 국민들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피어나고 통일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만 5.16 군사쿠테타로 인해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반통일적인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낸다. 그동안 친미, 반공정권의 몰락을 다시 회생하게 하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숨죽이고 있던 교회는 새로운 정치적인 반공세력과 밀착관계를 가지면서 교회성장의 시대를 만들어 간다.
반면에 기독교 진보세력은 기독교 장로로써 정치적인 부패와 독재로 물러난 이승만 정권의 몰락을 경험하며 정의에 무관심했던 자신들을 성찰하고 사회정의를 세우는데 앞장서기 시작한다. 이후 박정희 정권이 18년 계속되는 동안 사회정의에 앞장서고 인권과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정권과 밀착한 보수교단들은 교회부흥에 박차를 가하고 사회에 무관심함으로 자신들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반공주의와 멸공통일의 기운은 겉으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존재하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날 때는 친미주의와 함께 적대적인 반북의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실 60년대 70년대를 가치면서 한국교회는 한 축은 교회성장에 매달리고 다른 한 축은 민주화 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민족분단의 문제보다 더 우선적인 것이 사회정의의 문제이고 인권의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72년 7.4 공동성명이 발표되면서 선통일 후 민주, 후 통일 선 민주 논쟁이 잠시 일었지만 여전히 한국교회 안에서 통일문제는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었다. 국가보안법이 살아 있고 통일문제는 바로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기 때문에 우선 시급한 문제가 민주화였기 때문에 시급성을 느끼지 못했다. 한국교회는 민주화 운동에 힘을 쏟던가 아니면 교회의 성장을 꾀하든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보수를 표방하는 보수교단들은 후자를 선택했고 진보를 표방하는 교회들은 전자를 택하였다.
통일 논의는 정부 주도로 이루어지고 그것도 평화통일이 아닌 반공주의에 입각한 통일논의의 독점을 해왔다. 한국교회는 민주화 운동을 통해 새로운 미래를 꿈꾸면서 다른 한 쪽에서는 북한 지역을 복음화해야 한다는 복음화론에 입각한 통일논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국내적으로 분단이라는 장벽과 국가보안법 때문에 통의 논의는 쉽게 이루어 질수 없었다. 통일 이라는 이야기를 꺼내도 그것은 불온한 것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해외에 거주하고 있던 기독교인들은 통일논의를 하는데 국내보다 자유로웠다. 1978년부터 한반도의 통일 문제를 논의하려는 움직임들이 있었다. 1979년에 남, 북한의 불신과 오해를 제거하고 사상과 신앙과 문화의 교류를 촉진하는 “조국통일 해외 기독자회”(기통회)를 결성했다. 통일과 기독교라는 잡지도 발간했다. 그러나 기통회의 이런 움직임도 국내적으로 통일운동이 가로 막혀 있는 상황에서 일정부분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해외에 거주하는 기독인들이 민족의 통일논의의 물꼬를 열었다는 점에서 매우 높이 평가 할 수 있다.
 
3.광주민주화 운동과 한국교회의 통일운동
 
박정희 군사독재기간 동안 국가보안법은 통치수단으로 전가의 보도와 같았다. 유신헌법과 같은 초 헌법을 통해 국가를 통치하고 확고한 영구지배를 꿈꾸었다. 그러나 유신세력은 가장 가까운 친위세력에 위해 종말을 고한다. 장기집권으로 가던 독재정권이 끝이 나자 서울의 봄이 찾아 왔다. 국민들은 저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고 민주화뿐만 아니라 통일논의도 새롭게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뿐이고 신 군부세력의 쿠데타로 인해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신 군부세력은 자신들의 집권을 위해 희생양이 필요했고 그 희생을 양을 광주로 삼았다. 광주에서 가장 강렬하게 민주화운동이 불타올랐고 그곳을 제압하지 않고는 집권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신 군부는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해 무자비하게 시민들을 학살했다. 신 군부는 광주에 침투해서 국가를 전복하려는 북한군을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광주를 고립시켰고 시민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모든 매스컴을 장악하고 국민들을 호도하는 사이에 국민들은 침묵을 지킨다. 나중에 광주의 학살이 그들의 집권이 광주를 희생양 삼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새로운 각성을 통해 방향을 잡게 된다.
지금까지 민주화 운동에 매진해 왔던 진보기독교 세력들도 분단체제를 극복하지 않고는 민주화가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를 중심으로 분단체제 극복을 위해 노력을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미 해외에서 민족의 통일을 위해 결성한 기통회는 광주민주화 운동 이후에 통일 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남북의 기독자들의 만남을 시작한다.(1981년 11월3-6일/하델스톨프 쉬바이쳐 하우스) 제1차 “조국통일 위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간 대화모임”에 북한에서 30명이 참석했다.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인물들인 전금철, 허정숙(독립운동가, 여성운동가, 사회주의자), 안병수, 고기준 등이 참석했고 해외 기독인 대표들로는 이영빈목사와 이화선 목사 등이 참석했다. 이 처음 회의는 대화를 위해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서로를 발견하는 목적을 가지고 진행되었다. 참가자들은 회의를 통해 자주적인 통일, 평화적인 통일, 민족의 대단결, 자치적 연합체 구성 등에 합의한다. 이것은 이미 7.4 공동성명에 나와 있는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가치를 재확인하는 모임이었다. 이 대화 모임은 남쪽정부나 기독교인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친북 인사들의 종교행사를 가장한 정치집회로 인식되어 한국교회는 이것을 기독교인들의 모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만큼 국내 기독교인들 사이에는 그 당시에도 통일논의는 금기사항이었다. 이런 논란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통회는 2차 모임( 핀란드 헬싱키/1982년)을 이어갔고 북측에서는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참석할 만큼 비중을 두었다. 84년과 85년에도 이 모임을 계속 이어갔다. 해외 기독자들은 모임 참여자들이 친북으로 낙인찍혀 국내에 들어오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러나 그런 해외 기독자들의 노력이 국내 기독인들의 통일논의의 물꼬를 트는데 기여했다고 보아야 한다. 정부가 통일논의를 독점하고 논의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민간차원에서 한반도통일 논의와 대화를 모색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고 본다.
한국교회는 앞서 광주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통일논의에 다시 눈을 뜨기 시작했다고 했다. 1981년 6월에 “죄의 고백과 새로운 책임” 이란 주제로 서울에서 제4차 한, 독 교회협의회를 개최한다. 한국교회는 같은 분단국인 독일교회와 협의회를 구성해 함께 대화모임을 진행해 왔었다. 제4차 모임에서 우리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분단된 조국의 통일이라는 선언을 하고 통일 문제를 다루기 위한 위원회나 기구를 설치할 것을 협의회에 건의하기로 한다. 이 건의에 따라 1982년 비로소 협의회 안에 “통일문제연구위원회”를 조직하게 되면서 한국교회 통일운동이 새롭게 시작하게 된다. 이런 일련의 노력들은 한국교회의 자기 성찰과 민족의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통일 문제를 협의하고 다루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쉽지 않았다. 교회 차원에서 이런 조직을 만들고 활동하는 것을 반정부적인 성격으로 보았기 때문에 통일 논의를 할 수 없도록 정부차원에서 적극방해하고 저지하는 일들이 생겨난다. 협의회를 개최하려 했지만 장소가 갑자기 거부 되거나 개최 자체가 무산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회와 발맞추어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도 통일에 대한 기초 연구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고 연구자들이 연행되어 조사를 받게 된다.(리영희, 강만길, 조승혁목사) 이 일에 참여한 사람들이 구속되어 연구 작업은 무산되게 된다. 이 만큼 당시 통일 논의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결국 해외 네트워크에 눈을 돌린다. 세계교회협의회는 방대한 교회의 국제기구이기 때문에 이 기구를 통해 한반도의 통일 문제를 접근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당시 국제기구 안에는 한국교회가 파송한 스텝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많은 노력을 했다. 세계교회의 도움으로 “동북아시아의평화와정의협의회” (1984. 10.29-11.2/ 일본 도잔소)를 개최한다. 이 협의회에 북한의 기독교 대표들을 초청했지만 참석하지 못한다. 이 모임에서 세계교회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위해서 세계교회가 공동으로 노력한다는 내용을 담은 선언서를 발표한다(도잔소프로쎄스). 세계교회와 함께 한반도 통일을 모색하고 움직이는 교회는 정부당국과 마찰을 빚고 어려움을 겪었지만 “한국교회 평화통일선언”(1985. 2.28) 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모든 악의 근원이 분단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며 분단을 해결하지 못한 책임을 고백하고 있다. 세계교회는 일본 도잔소에서 선언한 도잔소프로쎄스를 가동하게 된다. 국내에서 통일논의가 가로 막혀 있는 상황에서 세계교회의 도움으로 인해 한국교회는 통일논의의 움직임에 탄력을 받는다. 세계교회는 도잔소프로쎄스 1차 모임을 스위스 글리온(1986. 9.2-5)에서 가지게 된다. 이 자리에는 남한과 북한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초청된다. 조선 그리스도교련맹 대표 5명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대표6명을 초청하여 분단이후 처음으로 민간차원에서 남과 북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만나게 된다. 이 모임에서 함께 감격적인 성찬을 나누게 된다. 그 뒤에 2차 모임(1988. 11/스위스 글리온)에서 1995년 희년을 선포하는 것을 합의하고 매년 8.15일을 기해 남북공동기도문을 작성하여 8.15 직전주일에 기도드리기로 합의한다. 3차 모임(1990.12/스위스 글리온)에서는 희년 5개년 공동작업 계획을 합의하고 남북교회의 만남을 한반도에서 개최하기로 합의한다. 4차 모임(1995. 3/ 일본 간사이 하우스)에서는 8.15 공동예배를 판문점에서 드리기로 합의한다. 무엇보다 도잔소프로쎄스는 현재 진행형이다. 세계교회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한다는 약속을 이어오고 있다.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의 지원에 힘입어 통일 의지를 불태우게 되고 제37회 총회(1988.2.29/연동교회)에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을 총회원들의 기립박수 속에서 채택하게 된다. 한국교회가 선언한 “88선언문”은 한국교회 통일의 대장전이 되었고 이후 정부에도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국교회 통일선언은 민간단체의 통일운동에 숨을 불어 넣으며 통일운동이 활발하게 진행하게 하는데 기여하게 된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이후 박차를 가하여 “세계기독교 한반도평화 협의회”(1988.4.25-29/ 인천송도비치호텔)를 개최하게 된다. 88선언을 세계교회가 전적으로 지지하고 이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에큐메니칼교회가 동참하기로 했다. 이 협의회는 정부당국의 방해로 사회주의권 인사들은 입국을 불허했고 주게 강사 2명을 비롯해서 해외교회 대표들 일부도 참석하지 못했다. 88선언은 이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노태우 정부의 7.7 선언이나 남북기본합의서 그리고 김대중 정부의 6.15 선언에도 영향을 끼쳤다.
한국교회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민족의 통일의 끈을 놓지 않고 세계교회와 함께 통일운동의 불을 지피고 논의를 활성화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문익환 목사의 방북(1989. 3. 25/ 김일성 주석과 만남)과 임수경양의 방북(1989. 7/제13차 세계청년 학생축전/평양)으로 공안사태를 불러오고 통일논의를 하는데 일정 부분 위축을 가져 왔지만 더 넓은 의미에서 보면 통일운동의 물꼬는 트는데 크게 기여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남북유엔동시 가입(1991. 9.18/분단46년 만에 북한 160번째, 남한161번째 회원국이 됨)을 하고 남과 북의 고위급 회담을 통해 남북기본합의서(1991. 12.10-13)를 도출해 내고 통일로 가는 과정에서 남과 북은 잠정적인 특수한 관계임을 밝혔다.
이후 한국교회는 1995년을 통일 희년으로 선포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특히 남, 북 인간띠잇기 행사 등을 준비한다. 상징적인 행사로 남북인간띠잇기 행사를 가졌지만 정부당국의 요구로 축소한 부분도 있다. 남북인간띠잇기행사는 교인들의 통일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일정부분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1995년을 희년으로 선포 했지만 한국교회는 통일의 돌파구를 실질적으로 마련하지 못한다. 한국교회가 통일 희년으로 선포한 1995년 이후 북한은 큰물 피해를 통해 심각한 식량난에 봉착하게 되고 통일 논의보다도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는 인도적인 사업에 몰입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는 남한 내의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교회들까지 식량지원에 나서고 대북 지원에 참여하게 된다. 90년대에서 2000년대 까지 한국교회는 남북나눔운동기구를 통해 대북 지원 사업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이후 들어선 민주정부의 적극적인 통일정책으로 인해 정부 보다 뒤로 밀려나는 기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남과 북의 관계는 급속하게 발전하게 된다.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고 개성공단이 이루어지면서 남과 북의 만남도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4. 남과 북의 만남을 통한 통일을 향한 의지
 
2003년 독일교회의 주선으로 남과 북의 교회가 만나게 된다. 이 모임은 헤쎈나싸우 주 교회가 운영하는 아놀드 하임에서 만남을 갖게 된다. 본 필자는 이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 자리에는 북한의 조그련에서 강영섭위원장을 비롯해서 대표들이 참석하게 되었다. 이 모임에서 비공식 모임으로 한 가지 중요한 일을 결정하게 되는데 지금까지 세계교회 주선으로 해외에서 남과 북이 만났는데 한반도에서 남과 북이 만나기로 합의한 것이다. 필자는 기장의 통일위원장으로 이 만남을 성사시키고 바로 돌아와 준비를 시작했다. 만남의 장소는 이미 열린 금강산에서 갖기로 했다. 기장과 조그련의 한반도에서 첫 만남과 기도회였다. 기도회 제목은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과 북의 기도회” 였다. 이 첫 기도회는 금강산의 김정숙 휴양소에서 가졌다. 당시 김정숙 휴양소는 북한 땅이었고 금강산 관광에 포함되지 않는 장소였다. 지금은 금강산호텔로 바뀌었지만 당시에는 그 장소는 매우 의미 있고 상징적인 장소였다. 북한의 조그련에서 5개부서의 부장들이 다 참석했고 기장에서는 60여명이 참석했다. 우리 모두 감격적인 만남을 가졌다. 이런 한반도에서 만남은 이미 도잔소프로쎄스의 이행으로 스위스 글리온 3차 회의(1990.12)에서 세계교회와 합의한 내용의 결실이라고 볼 수 있다.
2003년도 5월의 조그련과의 금강산 남북기도회는 2004년도 도잔소 20주년 기념대회를 하는 일본의 도잔소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계속 이어가기로 합의하고 금강산과 평양에서 6차까지 이어져간다. 우리 민족끼리 자주적으로 만나 우리 민족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분단체제 극복은 이미 7.4 공동성명이나 6.15 공동선언에서 밝혔듯이 우리 민족이 대 단결하여 자주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정신을 담고 있다. 남한교회와 북한교회는 바로 이 정신을 실천해 가기 위해서 함께 힘을 모으고 노력하여 결실을 이루어 낸 것이다. 세계교회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하고 협력한다는 도잔소프로쎄스가 있었지만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점점 한반도의 관심은 약해졌다. 세계교회협의회는 오히려 한반도 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는 중동이나 아프리카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한국교회는 도잔소프로쎄스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한반도의 평화가 얼마나 절실한지 알리기 위해서 기장에서 평화운동본부를 결성(2006.5.2)하고 출범을 기념하는 국제심포지엄(2006.5.2-4/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 호텔)을 열었다. 이 심포지엄의 주제는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에큐메니칼 국제심포지엄”으로 하였으며 WCC, CCA, NCCK와 공동개최를 했다. 아시아와 북미 유럽 등 15개국의 교회와 25개 정도의 에큐메니컬 단체들이 모여 열띤 토론을 가졌다. 이 모임을 통해 한반도에서 관심이 멀어 졌던 세계교회의 관심을 끌어 들이고 심포지엄을 통해 “에큐메니컬 국제 컨소시엄”을 건설하게 되었다. 현재 세계 에큐메니컬 단체들이 이 컨소시엄을 통해 한반도 문제와 북한을 돕기 위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국제 에큐메니컬 컨소시엄에는 북한의 조그련이 운영위에 들어와 함께 활동하고 있다. 라운드 테이블을 통해 북한교회의 의견을 청취하고 문제를 함께 협의해 가는 구조로 되어 있고 정기적으로 함께 만나 문제를 협의하고 있다.
한국기독교교회 협의회를 중심으로 2013년 WCC 10차 총회를 앞두고 남과 북의 새로운 통로를 열기 위해서 노력했다. “평화함께2013 위원회”를 만들고 이 위원회 안에 세 개의 소위원회를 설치하고 총회 때까지 활동하기로 했다. 세 가지 위원회는 평화열차위원회와 평화협정위원회, 평화콘써트위원회이다. 평화열차 위원회는 총회에 참가하는 사람들 중에서 분단의 상징이었던 베를린에서부터 시작하여 러시아와 몽골 중국을 거쳐 평양을 관통하여 부산총회 장소까지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거대한 프로젝트이다. 이 평화열차에는 독일 출발 133명의 15개국의 총회참가자들이 타고 23박24일 동안 대장정에 올라 통과하는 도시마다 평화행사를 열고 한반도 평화의 중요성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평화열차가 단둥에서 신의주로 평양을 거쳐 서울로 내려오기를 간절히 염원했지만 남북관계의 문제로 평양을 통과하는 것은 무산되었다. 북한교회 대표들과 심양에서 2차례 협의를 했지만 남측 정부의 불허로 무산되고 말았다. 평화열차는 단둥에서 배를 이용해 인천으로 들어 올 수밖에 없었다. 못내 아쉬운 것은 평양을 통과하여 한반도 문제를 WCC 총회에서 이슈화 하고 세계교회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관심을 기울이도록 했어야 하는데 극대화 시키는 일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총회 기간 중 평화열차 부스는 가장 세계교회 지도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관심을 가져 주었다.
평화협정위원회는 분단 60주년이 되는 해에 한반도에 평화협정을 맺어 전쟁의 불안을 제거하고 분단체제를 극복하고자 설치되었다. 평화협정 서명을 비롯해서 위원들이 미국을 방문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한반도 문제가 아직도 분단체제가 강고하다는 것을 느꼈다. WCC 총회에서 채택한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관한 선언문”은 이런 위원회의 간절한 염원을 담아 평화조약을 촉구하는 방향으로 결정되었다. 이 선언문에서 미래에 대한 권고안을 내었는데 아래와 같다.
미래로 가는 길-권고안들
 
세계화되고 상호 의존적인 세계에서 평화를 건설하는 일은 주권국가들과, 유엔, 그리고 교회를 비롯한 시민사회 단체들의 공동 책임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2013년 10월 30일부터 11월 8일까지 대한민국 부산에서 WCC 제10차 총회로 모인 회원 교회들은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되라는 그리스도교의 소명을 확신하며 한국사회에 희년을 선포한 한국교회의 신앙적 증언에 응답하면서 다음과 같이 다짐합니다.
 
1. 남북한 사람들과 함께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교회와 에큐메니컬 협력 단체들이 남북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사이의 긴밀한 협력과 신뢰관계 속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새롭게 힘을 내어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책임감을 느낍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다짐합니다.
 
a) 용기, 돌봄, 소통, 고백, 화해 및 헌신과 같은 도잔소 회의의 정신을 실천한다.
 
b) 8월15일 전 주일을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기도 주일'로 지정하여 남북한 사람들 및 교회들과 함께 기도한다.
 
c) 남한과 북한의 젊은 세대들이 함께 만나서 한반도의 바람직한 미래를 구상하는 폭넓은 에큐메니컬 논의의 장을 제공한다.
 
d) 남북한 교회를 방문하는 연대 프로그램을 준비하여 평화를 만드는 자로서 다리역할을 감동하도록 한다. 첫 번째 방문은 역사적인 도잔소 국제회의 30주년을 기념하는 2014년에 조직할 수 있으며,
 
e) 남한과 북한의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을 함께 만나서 화해와 평화를 진전시킬 수 있도록 공동의 장을 제공함으로써 남북한 교회들과 지속적으로 동행한다. 우리는 이런 선도적인 활동을 하기 위한 역사적으로 상징적 시기를 한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0주년이 되는 2015년이라고 본다.
 
2. 우리는 다음과 같이 행동할 것을 다짐합니다.
 
a) 우리는 각국 정부들과 협력하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로 하여금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새로운 노력을 시작하고 북한에 대한 기존의 경제 및 금융 제재를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노력한다.
 
b) 1953년의 정전협정을 평화조약으로 바꾸어 전쟁상태를 종식시킬 폭넓은 캠페인을 시작한다.
 
c) 한반도에서의 군사훈련 중단, 군사개입 중지, 군비 축소를 통해 한반도의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창의적인 과정에 참여할 것을 이 지역에 있는 모든 외세들에게 요청한다.
 
d) 핵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조치를 취하고 동시에 전 세계 핵무기에 대한 인도주의적 금지를 주창하는 국제적 합의에 동참함으로써, 동북아시아의 핵무기와 핵발전소들을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비가역적인 방식으로 제거하고 지구상의 어떤 지역에서도 생명이 더 이상 핵으로부터 위협을 당하지 않도록 한다.
 
e) 불의와 대립을 극복함으로써 정의와 인간 존엄이 살아 있는 인류 사회를 회복하고, 이산가족의 인도주의적 문제를 시급하게 해결하고, 이산가족의 소재 확인, 자유로운 서신 교환과 방문을 가능하게 하는 지속 가능한 노력을 하고, 필요한 경우 국제기구의 지원을 제공함으로써 인류 사회를 치유하도록 남한과 북한 정부에게 촉구한다.
 
f) 비무장지대(DMZ)를 문자 그대로 평화지대로 전환하기 위한 국제적인 협력을 제공하는 일에 남북한 정부와 함께 협력한다.
 
WCC 10차 총회에서 이런 선언문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역할이 매우 컸다. 화해통일위원회에서 수차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모임을 갖고 북한에도 WCC에도 내용을 알리고 이런 내용들이 채택되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이다.
 
아쉬운 점은 이번 WCC총회에 북한의 기독교 대표들이 참석하고 선언문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문제를 다차원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세계교회의 관심을 끌어 들이고 향후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로드맵을 만들어 가는데 함께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 이번 10차 총회에서 제기한 문제들을 가지고 후속작업을 진행하는 가운데 있다. 앞으로 남한의 교회와 북한의 교회가 어떻게 서로 문제를 공유하고 함께 하느냐에 따라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길을 여는데 큰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본다.
 
5.한국교회의 통일 운동의 전망
 
한국교회는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운동의 선두에 섰다. 3.1 운동을 비롯해서 일제강점기에 교회를 통해 수많은 민족주의자들을 길러내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다. 해방이후에는 독재에 항거하여 인간의 권리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며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다. 민주화 과정에서 교회는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절망의 시대 희망을 만들어 내는데 주력했다. 한국교회는 역사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역사 속에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드러내는 일에 온 힘을 쏟았다. 하나님의 정의를 드러내는 일이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일이라면 하나님의 평화를 이루는 것은 평화와 통일을 위한 몸짓 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다. 교회의 기반자체가 보수적이고 교회중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회 밖의 민족문제에 대해 교회는 적극적이지 않다. 지금 한국교회는 침체기에 접어들었고 사회로부터 신망을 얻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런 교회가 앞으로 어떻게 백성들의 신뢰를 얻으며 영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우리 앞에 놓여진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민족문제에 소극적인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다양한 방법으로 끌어내어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하게 하고 행동하게 할 것인지 우리 앞에 놓여진 큰 과제라 아니할 수 없다.
앞으로 교회는 사회시민단체들과 타 종단들과 함께 평화적인 환경을 만들어 가는데 주력해 가야 하리라고 본다. 무엇보다 교회 내부적으로 갈등들을 봉합하고 평화적인 감수성을 지닐 수 있도록 견인해 내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본다. 과거 88선언을 통해 운동을 저변화하고 시민단체들에 숨을 불어 넣고 정부의 정책에도 영행을 끼친 것처럼 새로운 통일 환경을 만들어내는데 상상력과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본다. 분단의식을 넘어서는 통합된 그림을 가지고 사고하고 실천하는 가운데 분단의 장벽은 점점 낮아지게 될 것이다. 분단환경을 공고하게 하고 있는 냉전법령들을 폐기하는 문제나 냉전 밸트들을 해체하는 일들도 신중하게 풀어가야 하리라 생각한다. 또한 지금 남한에 들어와 있는 새터민들을 어떻게 접근하고 그들을 통일과 평화의 미래 일꾼들로 육성할 것인지 깊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무엇보다 통일된 나라에서 살아갈 미래 세대들을 평화적인 관점에서 교육할 수 있는 길을 교회 안에서 부터 열어가야 할 것이다. 각 교단간의 관련자들의 소통 네트워크를 마련하고 함께 공동의 교재를 집필하고 어려서부터 평화 감수성을 길러내고 통일을 꿈꾸는 사람들로 세워 갈 때 우리민족은 통일을 축복으로 맞이하게 될 것이다.
끝으로 북한의 낙후된 철도를 복원하는 일에 교회가 앞장서 남, 북의 혈맥을 잇고 평화를 위해 복무하는 일에 헌신하는 길을 모색해야 할 때라고 생각된다. 교회가 타 종단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이런 일들을 하게 된다면 모든 국민들은 이 일에 동참하게 될 것이고 한국교회 나아가 종교가 통일의 새 아침을 열어 가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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