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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제주도입니다!

송영섭 (,,) 2007-04-24 (화) 22:16 16년전 7785  



컴맹이 컴퓨터에 앉아 이 글을 씁니다.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습니다.

무슨 일이 생겼기에 컴맹이 컴퓨터에 앉은 것일까요?
양심이, 그 알량한 신앙양심이 저로 하여금 이 글을 쓰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목사라고....그래도 예수의 제자직을 따르기를 원한다고.....
“무슨 소리라도 내야하는 것 아니냐고......”하는 저의 작은 신앙양심이 제게 컴퓨터에라도 앉아서 무슨 소리라도 내어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저를 자꾸만 쿡쿡 찌릅니다.

무슨 일이 생겼기에 컴맹이 컴퓨터에 앉아 이 글을 쓰는 걸까요?
제주도에 군사기지를 세우겠다는군요. 평화의 섬 제주를 지켜주는 대규모 해군기지랍니다. 그리고 동시에 마라도와 한라산이 가슴 설레게 펼쳐 보이는 송악산 알뜨르들판에 공군부대를 건설하겠답니다. 제주도가 「기가막힌」군사요충지라나요?  말 그대로 「기가막힐」노릇입니다.

이 「기가막힌 이야기」를 이렇게 「한가하게」 늘어놓고 있습니다. 그것이 저의 모습이군요. 그냥 「소리」를 내는 것 밖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소리라도 내어야지요.

저는 지금 기장홈페이지 커뮤니티란의 「문익환목사 -당신에게는 꿈이 있습니까?」를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하면 문익환목사님의 영이 -곧 그 분 속에서 일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영이- 저를 조금이나마 도우셔서 저를 통해 그 분께서 말씀하시게 되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그리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새삼 주저리주저리 함석헌선생님의 생각도 나는군요.
살아생전 종로5가 기독교회관강당에서 단 한번 뵈었던 그 분.
새삼 그 분들이 그립습니다. 새삼 참 소리가 그립습니다. 새삼 참 사람이 그리워지는 세월입니다. 그렇게 ‘그리운 분들’이 이 글을 읽어주시면 참으로 제 마음 행복할 것 같습니다. 

아,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사실 제가 이 글을 쓰는데는 두 가지 마음의 동기가 있습니다.
첫째는, 군축과 평화협정 그리고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 그래서 “사망의 그늘에 앉아 울고 있는 우리형제들에게” 총과 칼과 군대가 아니라 쌀과 국과 평화의 노래를 들려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기장 홈페이지와 총회회보 이번호(2007년 4월호)에 실린 김경재선생님의 글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습니다만 우리정부가 2020년까지 구상하고 있는 ‘국방개혁2020’계획에 의하면 국방개혁의 헛된 미명으로 쏟아부르려는 우리나라재정의 예산규모가 2800억달러에 이른다합니다. 그리고 제주 해군기지건설을 그 기획의 한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국방예산2020’의 2800억 예산이란, 제주도민 50만 전체에게 1억원아파트를 전체 무상공급해주고도 제주도와 같은규모의 4개지역 국민들(200만명)에게 똑같이 1억원 아파트를 무상공급해 줄 수 있는 액수라는 것 아닙니까? 말이 260만명이지 한 가족을 4명으로 잡을 때  국방개혁2020의 2800억달러는 1000만의 무주택국민에게 1억원아파트를 무상공급해 줄 수 있는 그야말로 ‘꿈 같은 천문학적 재화’가 아닙니까?  그 액수를 만일 북한경재재건을 위해 2020년까지 단계적으로 북한을 돕겠다고 우리 정부가 선언한다면,

아, 6자회담이고 뭐고 지금 당장 「화해와 평화와 통일은 이미 이루어 진 것」이 아니고 무었이겠습니까? 
문익환목사, 그 (예수의 영에) 미친 늙은이는 “통일은 이미 이루어졌다!”고 일찍이 부르짖지 않았습니까?  통일의 영, 화해의 영, 절대평화의 영에 들떠 부르짖던 그 노인네의 애타는 부르짖음이 <오늘 ? 지금 ? 여기에서>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꿈이라고요? 꿈이지요. 그렇지요 꿈이고 말고요.
그 꿈이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고 온 것이 아닙니까? 그 꿈이 있어 「예수쟁이」아닙니까?

그 꿈이 ‘신앙’ 아닌가요? 그것 없으면 우리는 시체 아닙니까? 그 하늘의 꿈, 예수의 가슴을 펄떡이게 하던 그 꿈을 잃어버려서 우리는 맛 잃은 소금이 되어 오늘 이렇게 세상의 천덕꾸러기가 된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저의 두 번째 동기는 「제주도」입니다.
민족시인 신동엽의 글을 빌려와서 제소리로 횡설수설해 봅니다.

누가 제주도를 보았다 하는가
누가 제주도의 알속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건 껍데기 
그걸 제주로 알고 너는 비행기트랩에 올랐다.
네가 본 건 제주의 껍데기 
그걸 제주로 알고 너는 제주를 떠났다.
닦아라. 사람들아! 관광에 찌든 너의 눈을
찢어라 사람들아 문명에 가리워진 너의 너울을.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 없이 맑은 제주의 알속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그 분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릿속 경쟁과 탐욕의 오물을 씻고
티없이 맑은 제주의 하늘
우러러 볼 수 있는 사람은

연민을
알리라

문명과 탐욕에 찌든
네 형제자매들의 측은한 눈길을 
보게 되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이것이 저의 제주목회4년의 고백입니다.
누가 제주를 보았다 합니까?  누가 자연의 속살을 보았다 합니까? 누가 문명의 한계를 보았다 합니까?  누가 미래의 희망을 보았다 합니까? 자연을 보지 않고, 문명에 찌든 우리의 눈을 씻어내지 않고, 산은 산 물은 물인 자연의 진경을 보지 아니하고 말하는 모든 소리는 공허한 외침에 그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감히 생각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제주도는 온갖 관광과 개발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태초의 진경을 보여주는 오름의 어깨위로 오를 때마다 골프장의 개발소리와 문명의 페인트자국이 산천을 덧칠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때의 심정이란 분노와 연민이 제 안에서 뒤엉키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얼마 전 제주노회 교회와사회위원회가 주최한 「제주 평화기원 기도회」에서 드렸던 기도를 다시 적어 봅니다.

부끄럽고 창피합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주님!
우리는 평화를 위하여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저마다 더 많은 것,
더 많은 안전, 더 많은 소유, 더 많은 쾌락, 더 많은 안일을 위하여
경쟁하며? 근심하며?염려해 왔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알지 못합니다.
그렇게 헐레벌떡,
텅 비고 공허한 가슴들로 여기 이렇게 모였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이 땅의 모든 백성이 평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화를 원할 뿐, 평화로 가는 길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평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참 평화이신 ‘주님-당신’을 알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세상이 알지 못하는 ‘당신의 평화’를 알게 하옵소서.
오른뺨을 때리는 자에게 당신의 속옷까지 제비뽑아 나누어 주셨던
그  십자가의 평화를 알게 하옵소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주님의 이 평화의 기도를 우리가 언제쯤 배울 수 있으오리이까?

얼마나 먼 길을 헤매야 소년들이 어른이 될 수 있습니까?
얼마나 먼 바다 건너야 갈매기는 쉴 수 있습니까?
얼마나 더 많은 무기와 죽음을 쌓아야, 우리는 당신의 평화를 깨달아 알 수 있으리이까?
얼마나 더 많은 탐욕과 쾌락에서 지쳐 허덕여야
우리는 당신의 평화를 갈구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제 우리, 당신께 간구합니다.
바람이신 성령이시여, 강물 같은 평화의 영이시여,
지극히 고요한 중심 -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서
지금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와 형제 피조물들을 위하여
탄식하며 기도하시는 생명의 영이여,
주 성령이시여,

우리에게 알게 하소서!  당신의 평화?그리스도의 평화?십자가의 평화를.
‘지킴’의 평화가 아니라 ‘나눔의 평화를
‘뺏고 빼앗는 평화’가 아닌 주고 또 주고 마침내 목숨까지 내어주시는 평화를.
그리하여,
우리의 육신은 빼앗을지언정 우리의 영혼은
털끝만치도 상할 수 없는 세상 권력들의 헛됨과,
저들의 외치는 평화의 거짓됨을 알게 하소서!

깨닫게 하소서!
우리에게 지금 절실한 것은 더 많은 무기, 더 든든한 군대, 더 많은 소유와 그것의 지킴이 아니라
우리에게 절박한 것은
더 많은 성령, 더 풍성한 자연, 더 고요한 저녁노을, 그리고 그 노을 속에서

감사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자연의 사람, 고요한 평화의 사람, 참 영성의 사람임을 알게 하소서.

강물을 팔아 생수를 사고, 하늘을 팔아 빌딩을 사고, 곡식과 들판을 팔아 비행장을 사고
펄떡이는 물고기와 대양을 헤엄치는 돌고래를 팔아 잠수함과 함정을 사려는 어리석음에서
돌아서게 하옵소서. 


친구가 급하게 전화를 했습니다.
“형, 빨리 오소, 여기 서림 바당이야!  돌고래야 돌고래, 돌고래떼야!”
토요일, 설교준비에 바쁨도 뒤로하여 팽개치고, 당신의 노래로 춤추는 - 친구 돌고래 떼를 보려고, 과속도 마다않고 질주하며 서림바당으로 달려갔습니다. 수족관의 어항을 사고, 메뚜기의 곤충도감을 뒤적이는 아이에게, 저 드넓은 대양의 돌고래 떼를 보여주려 과속도 마다않고 달렸습니다.

조금이라도 가까이에서 - ‘살아계신 당신의 얼굴’을 보여주고자 바다 끝, 검은 현무암을 달려갔습니다. 그렇게 당신은 저를 부르셨습니다.
손짓하는 오름에 이끌려 들판을 가로지르다가, 탐욕과 죄악에 감염된 ‘인간 군상의 얼굴’을 보고 소리치며, 달려가며 아우성하는 한 무리의 노루 떼를 보았습니다. "나는 너희를 해할 뜻이 없다"아무리 읊조리며 떨리는 걸음을 옮겨도 "나는 너희를 믿지 못한다"두려움에 사로잡혀 꽥 꽥 멧돼지처럼 소리 지르며 들판을 가로지르는 한 무리의 노루가족을 보았습니다.

봉고차를 몰다  ‘날아가는 새’에 부딪치고, 한밤중 친구의 차를 몰다 노루를 부딪쳐 넘어지게 하였습니다. 물새가 날아갈 줄을 몰라 차를 멈추고 그 길을 기다리고 멀리서 저를 훔쳐보는 노루의 눈길에 이끌려 그와 눈길을 마주하였습니다.

황혼이 지는 저녁 무렵, 웃옷을 잃어버린 꼬마아이의 옷을 찾아주려 숲속으로 들어갔다가 저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맑은 눈망울의 어린사슴을 보았습니다. 그가 세상모르는 ‘어린’사슴이었기 때문일까요?
그는 저를 쳐다보았고, 저도 그를 숨죽이고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그에게 다가가지 않고 / ‘그의 평화’를 지켜 주었습니다.  그도 저를 두려워하지 않고 저의 눈동자를 ‘떼끄마니-’ 바라보았습니다.


주님, 저는 그날 그 저녁 숲가에서
당신의 눈빛을 보았습니다. 
구름 한점 없이 맑아 마침내 하늘을 볼 것 이라던 그 청결한 마음 -
'
맑은 당신의 눈동자’를 보았습니다.

그 저녁 숲가에 서서,
저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평화를 보았습니다.
도시에서는 꿈 꿀 수조차 없었던 평화
경쟁과 분주함에선 하마, 꿈도 꿀 수 없었던 평화,
피조물들이 탄식하며 그렇게도 바라던 평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평화,
드넓은 오름의 평화, 한없이 펼쳐진 하늘의 평화, 자연의 평화, 폭풍속의 평화
태풍과 바람 속에서도 숨죽여 당신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고요한 영혼의 정수리-
그 정점의 평화를 보았습니다.

주여!
우리 속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이 평화를 우리 속에 심어 주옵소서.

그날 언뜻 바라본 그 하늘의 평화를 - 저희의 영혼과 심장 속에 새겨주옵소서.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평화를 묵상하는 이 사순의 계절에 우리로 하여금 만물의 신음하며 고대하는 - 피조물의 탄식소리를 듣게 하옵소서.

해양대군의 위용으로 바다의 평화를 지키겠다는 바다의 싸움꾼 장보고의 후예가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 그 겸손과 온유로 마침내 하늘의 평화를 우리에게 열어 주신
≪그리스도의 평화, 당신의 제자직≫을 살게 하옵소서.

정조를 팔고/ 웃음을 팔고/ 자연의 평화를 팔아,
피 묻은 군인의 호주머니에서 떨어지는 ‘저 탐욕의 자본주의 문명의 쥐엄열매’를 탐하기보다 이제 겸손히 어머니의 창조의 품 - 자연의 가슴으로 돌아가 이 땅의 청지기로, 품꾼의 하나로 겸손히 살겠다는
뼈저린 깨우침을 우리에게 주옵소서.

경제, 경제, 경제!
돈이 하나님이 되고, 돈이 평화가 되고, 돈이 종교가 되는 이 어처구니없는 우상의 땅에서 탈출하여, 오직 하늘의 평화와 자유로 - 광야 같은 이 땅에 자유한 나그네로 살다 가신 당신의 출애굽의 영성 , 광야의 믿음을 허락하옵소서. 그리하여 지금 우리가 비록 / 고난의 광야를 행진할지라도, 다시금 돌아가 자본주의의 우상, 쾌락과 경쟁의 더 많은 애굽의 고깃가마를 탐하는

옛 시대의 ‘죽은 믿음’을 이 광야에 묻게 하옵소서.
하여, 이제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고 하는
《광야 나그네의 믿음 - 순례자의 그 온전한 영성》을.
하여, 새 하늘과 새 땅 - 당신의 약속의 땅을 향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오직 당신의 음성에만 한 걸음씩 귀 기울이며 나아가는 그 가슴 벅찬 하늘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십자가의 좁은 문으로 걸어 들어가 마침내 무덤 없는 부활의 영광 속으로 날아오르신 주님- 당신처럼, 우리도 이 땅에서 《십자가의 평화》를 온 몸으로 춤추며 살다가 《오직- 당신》그리스도의 영과 함께

영원한 부활의 영광 속으로 날아오르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여 /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아멘.-


소리를 내고 싶었습니다.
그냥 소리라도 내어야 저의 알량한 양심이 조금이나마 편안해 질 것 같았습니다. 저마다 소리를 내더군요. 국방부장관은 그의 소리를 내기 위하여, 지난 4월13일 제주도청에 내려와 제주도지사와 자리를 함께 나란히 하고는 ‘제주 군사기지건설’을 거의 확정 짓고 올라갔습니다. 거기에, 소리를 듣고 달려와 긴급히 항의를 하던 200여 시민단체회원들, 그리고 목사, 신부, 수녀님들까지 닭장차에 우격다짐으로 구겨 넣은 채 연행을 해갔습니다. 아직도 주요 시민단체책임자들의 발이 묶여 있습니다.

뒤늦게 그 소리를 듣고는 저는 부끄러움과 어찌할 줄 모름 속에서 문득 김경재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선생님은 앞서 말씀드린 강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 문제의 본질과 심각성을 전국민에게 알리는 정보교류작업이 시급하다. 사실, 육지사람들의 90% 이상은 ‘제주 해군 기지화 계획’에 대하여 들어본 바도 없고 아는 바도 없다. 모든 통치권한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전국 방송매체, 신문, 인터넷등을 총동원하여 이 문제를 여론의 중심에 세어놓아야 하고 공론화 시켜야 한다. (중략)‘제주 해군기지화 시도’가 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인지 전 국민에게 알리는 홍보책자를 발행하는 등 구체적 일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그 말씀이 오늘, 부족하나마 저에게 이 글을 쓰도록 강요하고 계십니다. 제주 군사기지건설이 왜 얼마나 심각한 사안인지는 여기서 다시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부디 총회홈페이지와 이번 4월 총회회보의 김경재교수님의 글을 꼭 한번 일독하시기를 권합니다. 그러나 핵심 한 대목만은 다시 한번 옮겨야 할 것만 같습니다.

「둘째, 제주 화순항 해군기지화 기획시도는 (중략) 한국민에게는 결정적으로 미래 역사적 운명에 영향을 끼치는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왜나하면, 화순항 군사기지건설은 (중략)  탈냉전시대 이후, 미국과 중국의 거대국가를 양극으로하는 새로운 제2양극체제의 전초기지화로서 한국을 희생양으로 만들 가능성을 스스로 자초하는 것이다. 마치 2차대전 종전 직후, 한반도에 주둔하는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서 당시 연합군인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 38선을 경계로 임시 주둔하였지만, 그 단순한 군사전략상 행위가 한반도를 분단시키고 동족상쟁의 6.25를 일으키고, 오늘까지도 민족의 대동단결에 큰 장애물이 되고있는 것을 깊이 생각하여야 한다. (중략)그러므로, 화순항 해군기지화 문제는 중대한 민족역사의 미래운명과 직결될 수도 있는 사안인 것이다.  (중략) 셋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 교회는 우리시대 선교과제의 제1순위가 ‘생명평화’임을 다시 한번 신앙고백하면서, 동아시아 인간 공동체를 살려내는 생명을 살려내는 일과  제주화순항 군사기지화반대운동이 직결되어 있음을 신앙적으로 재 다짐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정말 저의 소리를 접어야 하겠습니다. 한 달여 전부터 좌골신경통으로 인해 자리에 앉는 것이 매우 불편한 시골교회의 한 컴맹목사가 몸을 뒤틀어가며 글을 올려봅니다. 물론 이 글이 총회홈페이지에 게재될 수 있을 런지도 알 수 없습니다. 수 많은 글들이 올라오고 또 그 글들이 모두 게재되기도 어려운 노릇일터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올려지기를 간절히 바래봅니다.
믿음의 동역자분들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총회교회와 사회위원회가 이 일에 긴급히 나서 주시기를 바랍니다.
총회 평화공동체운동본부가 이 일에 긴급히 나서주시길 바랍니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기 어려워 지기 전에 이 일에 긴급히 나서주시기를 긴급히 부탁드립니다.

끝으로 아빌라의 데레사의 말씀 한 마디를 여기 옮겨보며 번잡한 저의 글을 마치겠습니다. 

그리스도는 지금 이 땅에서 
그대 몸 말고 다른 몸이 없으시다. 
그대 손 말고 다른 손이 없으시다. 
그대 발 말고 다른 발이 없으시다. 
그대의 눈은, 그것으로 세상을 내다보시는 
그리스도의 자비로우신 눈이요 
그대의 발을, 그것으로 선한 일을 하러 가시는 
그리스도의 부지런한 발이요 
그대의 손은, 그것으로 사람들을 축복하시는 
그리스도의 따뜻한 손이다.

그리스도의 제자직을 함께 걸어가려 애쓰시는 선후배동역자 여러분들의 걸음마다, 그리고 섬기시는 교회와 일터마다 주님의 평화 가득하시기를 마음모아 기원하며.

2007년 4월 24일,  마라도가 내다보이는 제주서남 바닷가 서림교회에서
송영섭목사 드림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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