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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22일 (금) 일점일획_ “이르에 랄레바브(יִרְאֶה לַלֵּבָב): “심장으로 보시는 하나님” – 사무엘상 16장 7절에 대한 묵상"(IBP)

이종덕 (익산노회,삼광교회,목사) 2023-09-21 (목) 21:15 2개월전 128  
이르에 랄레바브(יִרְאֶה לַלֵּבָב): “심장으로 보시는 하나님” – 사무엘상 16장 7절에 대한 묵상
송민원

사무엘이 이새의 여러 아들 중에 이스라엘의 왕을 선택하는 장면에서 나온 유명한 구절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개역개정 삼상 16:7b)

대부분의 영어성경이나 한글성경의 번역도 여기에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번역은 바로 그 앞에 나오는 “그(엘리압)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삼상 16:7a)”는 말과 아주 잘 어울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겉모습의 화려함 보다는 마음가짐과 태도가 중요하다는 정도의 의미로 강대상의 설교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손님 중 하나입니다. 이 표현은 외모지상주의의 시대에 역행하는 비판적인 힘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가 정해놓은 미적 기준에 벗어나는, 뚱뚱하거나 못생기거나 키 작은 많은 분들의 영혼을 좌절에서 구원하기도 한 이 구절을 한번 살펴봅시다.

1. 문맥에 따른 의미: 삼상 16:12와 16:18에 대한 원문 분석

잘생기고 키가 큰 엘리압을 본 사무엘은 바로 이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합니다(삼상 16:6). 그러나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한 자는 엘리압이 아니라 다윗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마도 키가 작고 그리 잘 생긴 외모는 아닐 것이라고 짐작하게 됩니다. 그런데 막상 다윗의 외모를 묘사하는 장면에 오면 좀 당황하게 됩니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삼상 16:12 개역개정).”

여기서 “빛이 붉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원어는 아드모니(אַדְמָנִי)라는 단어인데, 아담(ַאדם)을 어원으로하는 붉은 색, 혹은 적갈색을 뜻합니다. 성경에서는 다윗을 묘사할 때를 제외하고(삼상 16:12, 17:42), 갓 태어난 에서를 묘사할 때 딱 한번 쓰입니다(창25:25 “먼저 나온 자는 붉고”). 갓난쟁이가 범상치 않은 기운이나 아우라를 풍긴다는 해석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다윗과 에서의 피부색깔이 적갈색을 띠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게 보다 가능성이 많은 해석입니다. 

“눈이 빼어나다”는 말은 원어를 직역하면 “예쁜 두 눈을 가진 (with beautiful eyes)”입니다. 이 말 역시 다윗의 눈의 생김새를 뜻하는 말이지, 결코 사물을 꿰뚫어보는 어떤 예지적 능력이나 눈썰미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공동번역성서와 두란노에서 출판한 우리말성경은 개역성경보다 한발 더 나아가서 “눈이 반짝이다”라고 번역하면서, 단순히 “예쁘다”라는 원문의 뜻을 왜곡합니다.

“얼굴이 아름답더라”는 번역도 문제가 있는데요, 원어성경에는 “얼굴”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히브리어 로이(רֹאִי)는 “보다”라는 뜻을 가진 라아(ראה)에서 파생된 것으로, 눈에 보이는 것, 즉 전체적인 외모와 겉모습(appearance)을 뜻하는 말입니다. “아름답더라”라고 번역된 단어 역시 단순히 “좋다”라는 히브리어 “토브(good)”로,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창세기 1장에서 사용된 단어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즉, 이 문장은 다윗의 외모가 출중했다, 그는 ‘잘 생겼다(good-looking)’는 뜻입니다. 

12절에 대한 개역성경의 번역은 이 구절이 다윗의 외모가 아닌, 풍기는 인상이나 혹은 ‘영적 기운’ 정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오역이라기 보다는 ‘의도적인 곡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히브리어 원문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 어휘 선택을 애매하게 해서 이 구절이 마치 외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읽힐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12절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살펴본 바대로, 구리빛 피부와 예쁜 눈을 가진 잘생긴 청년이라는, 다윗의 외양에 대한 것입니다.

다윗이 얼마나 뛰어난 인물이었는가는 바로 뒤따라 나오는 한 젊은이의 증언으로 뒷받침됩니다.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본 즉 수금을 탈 줄 알고 용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삼상 16:18)

다윗은 1) 악기도 잘 다룰 줄 알고 2) 용감하며 3) 싸움도 잘 하고 4) 말도 잘 하는데, 거기다 5) 잘 생기기까지 한 사람(이쉬 토아르 אִישׁ תֹּאָר)이었습니다. 비록 엘리압만큼 키가 컸다는 기록은 없지만, 능력과 외모에 있어서 당대에 견줄 자가 없을 인물로 묘사됩니다. 키도 작고 외모도 볼품 없을 것이라는 기대와 상상을 여지없이 무너뜨립니다. 

2. 삼상 16:7의 올바른 이해

그러면 대체 왜 개역성경은 어떤 ‘의도’로 12절이 외모가 아닌 어떤 다른 것을 뜻하는 것처럼 해석했을까요? 그 이유는 오늘의 본문 사무엘상 16장 7절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 뒷부분의 히브리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הָאָדָם יִרְאֶה לַעֵינַיִם
וַיהוָה יִרְאֶה לַלֵּבָב

이 문장을 자세히 분석하면 두 문장은 완전히 동일한 구조로 되어 있는 평행법(parallelism)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하아담) + 보다(이르에) + 전치사(라메드) + 두  눈(에이나임)

주님(아도나이) + 보다(이르에) + 전치사(라메드) + 심장(레바브)

개역성경에서 사람이 본다는 “외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두 눈(에이나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신다는 “중심”에 해당하는 단어는 ‘심장(레바브)’입니다. ‘심장’이라는 기본적인 뜻에서 ‘마음’, 그리고 ‘중심’이라는 추상적인 의미로 확장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를 “중심”으로 번역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이 문장을 이해하는 핵심은, ‘보다’라는 동사와 전치사 ‘라메드’가 과연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아래 문장에 초점을 맞춰, “주님은 심장/마음/중심을 보신다”라고 해석한다면 (문법적으로는, 전치사 라메드가 “보다”라는 동사의 목적어를 이끈다면), 위의 문장은 ‘사람은 두 개의 눈을 본다’는 말이 안 되는 문장이 됩니다.

사람이 두 눈“을” 보나요? 두 눈“으로” 보지요. 즉, 여기에 사용되는 전치사 ‘라메드’는 ‘보다’라는 히브리어 동사 이르에(יִרְאֶה)의 목적어를 이끄는 역할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수단’에 가까운 뜻으로 이해하는 게 맞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래 문장의 ‘심장/마음/중심’ 역시 목적어가 아니라 수단이 됩니다.

따라서 올바른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은 눈으로 보지만 주님은 심장으로 보신다”

여기서 말하는 심장은 하나님께서 보시는 사람들의 마음을 지칭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자신의 인지기관, 감각기관이 바로 심장이라는 뜻입니다. “심장이 보다”라는 표현은 전도서 1장 16절에도 나와 있습니다(“내 심장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보았다”). 눈으로 보는 것과 심장으로 보는 것이 어떻게 다른 지는 이 표현이 쓰인 구절이 몇 안 되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과 인간은 보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지, 보는 “대상”이 다르다는 뜻이 아닙니다. 즉, 이 구절은 “외모”냐 “마음”이냐라는 이분법에 관한 것이 전혀 아닙니다. 바로 앞 구절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삼상 12:7)”와 동일한 의미를 다른 표현으로 나타낸 것뿐입니다.

성경을 번역하는 사람들이 이 구절을 “외면 대 내면,” “겉사람 대 속사람”에 대한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본문을 해석하려니, ‘두 눈’이라는 의미의 단어 에이나임(עֵינַיִם)를 “외모”라는 전혀 다른 단어로 치환하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 12절에 나오는 다윗의 ‘외모’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를 성경번역자들은 결코 외모에 대한 이야기일 리가 없다는 생각에 어휘들을 조금씩 뒤틀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7절을 ‘외모가 아니라 중심,’ ‘겉모습이 아니라 속사람’이라고 해석해 놓았으니, 그 다음 자연스레 이어져야 할 내용은 다윗은 외모가 그다지 출중하지는 않았으나 하나님을 향한 그의 속마음은 아주 훌륭했다는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12절에 다윗의 외모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묘사가 되어 있으니, 번역자들이 많이 당황했을 듯 합니다. 첫 단추인 7절 마지막 구문을 잘못 꿰어서 그 뒷수습이 잘 안 되는 모양새입니다. 해석자가 어떤 선입관이나 의도를 가지고 성경을 읽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3. 로마서 2:11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라는 구절과의 관계

삼상 16:7의 해석이 특별히 문제가 되는 것은, 로마서 2:11의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는 구절과 연결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2:6)와 골로새서(3:25), 그리고 야고보서(2:1)에서도 동일한 표현이 나옵니다. 이 신약의 구절들을 설교하는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이것을 구약의 삼상 16:7과 연결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글로 번역된 성경만 보아서는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과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동일한 의미를 가진 표현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원어 성경의 표현과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는다’는 신약의 구절은 신명기(1:17, 10:17, 16:19)에 나오는 표현을 인용한 것입니다. 히브리어의 표현으로는 나싸 파님(נָשָׂא פָנִים), 즉 ‘얼굴을 들다’라는 숙어인데, 그 의미는 ‘편애(favoritism)’를 나타냅니다. ‘타인의 얼굴을 들지 않는다’는 숙어는 편애하지 않고 편파적이지 않은 공평과 공명정대를 의미합니다. 이 숙어가 나오는 구절들의 문맥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신 1:17 “너희는 재판할 때에 외모를 보지 말고(얼굴을 들지 말고) 귀천을 차별 없이 듣고”

신 10: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신 16:19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귀하고 천함, 높고 낮음 등을 차별하지 않고, 뇌물을 받아 누군가에게 유리한 재판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얼굴을 들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신약의 구절들 역시 차별을 거부하고 공평함과 공명정대함을 말하는 문맥에서 이 신명기의 표현을 인용합니다.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의 차별을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의를 행하라고, 파당을 지어 할례자와 무할례자를 나누지 말라는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롬 2:11)”는 구절을 사용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도 ‘힘 있는 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차별을 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표현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갈 2:6). 골로새서에서도 유대인과 헬라인, 할례파와 무할례파, 자유인과 종 사이의 차별을 두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느냐의 여부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을 설명하면서 이 구절을 사용합니다(“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골 3:25). 야고보서 2:1은 예전 개역한글에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로 번역했던 구절을 개역개정에서는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로 바꾸었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은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여 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행함이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왕으로 선택되는 사무엘상 16장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공평과 공명정대함으로 대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사람은 눈으로 보지만 하나님은 심장으로 보신다’는 구절은 오히려 하나님의 선택 기준은 인간의 기준과는 다르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선택 기준이 무엇인지 인간은 알 수 없습니다. 엘리압이 아닌 다윗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기준이 대체 무엇인지 알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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