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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19일 (화) 로중-“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 앞에 개인으로 서 있다!”_이주형 목사

이종덕 (익산노회,삼광교회,목사) 2023-09-18 (월) 22:36 2개월전 117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 앞에 개인으로 서 있다!”

에스겔 18:4 (구약 1175쪽).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디모데전서 2:1 (신약 337쪽).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보라, 모든 영혼들이 나에게 속한다!’ 모든 영혼들(all souls: RSV)은 모든 생명들(all lives)이며 모든 사람들이다. 따라서 루터는 모든 사람들(alle Menschen)로 번역한다. 모두에는 예외가 존재하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 이는 그 누구도 다른 누구에게 책임을 돌리지 못하고 각자가 자신의 행위와 삶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도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그러므로 아버지가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아들의 그릇된 행위는 아버지에게 전가될 수 없는 아들 자신의 허물이다. 모범적인 아버지를 따라서 의롭게 산 사람은 물론이지만 반대로 아버지를 반면교사로 삼지 않은 아들도 마찬가지로 자기 죗값을 치러야 한다. 아버지는 자신의 잘못을 떠넘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cf. 출 20:5; 34:7; 신 5:9). 아버지가 설사 악인이라 하더라도 그 악은 따라 해도 된다는 허락이 아니다. 아버지가 그랬음으로 나도 그랬다는 것은 재판정에서 통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 죄렌 키에르케고르가 정의한 대로 –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개인[단독자]이다. 각자 자신의 삶에 책임을 져야 하며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심문에 직접 대답해야 한다(롬 14:12).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는 속담은 책임회피의 명분과 책임전가의 근거로 내세워질 수 없다. 이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도 마찬가지다.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다시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의 이가 신 것 같이 누구나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리라!’(렘 31:29-30). 자기 죄악에 대한 죽음의 벌은 스스로 받아야 한다(롬 6:23; 약 1:15). 내세워지는 그 어떤 이유나 핑계도 충분한 변명이 될 수 없고 방어 논리로 가당치 않다. 그 속담은 무효다. 무엇을 내세우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행위의 원인을 전가하려는] 구실은 결코 통하지 않는다. 아버지든 아들이든 신 포도를 먹은 그 사람의 이가 신 것이다. 공의를 행한 그 사람은 산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고 불의를 행한 그 사람은 죽게 된다는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 논리는 에스겔 33장에서 파수꾼과 관련된 이야기로 다시 등장한다(겔 33:1-9).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를 드리는 것이 요구된다. 모든 사람은 기도의 동행 속에서 살아가도록 소위 기도의 울타리가 그들에게 제공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임금들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 즉 사람들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cf. 롬 13:1-7; 벧전 2:13-17). 그들은 모든 사람들의 삶을 위하여 중요하고 이는 우리 자신의 삶을 위해서도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열거된 단어들은 기도를 말한다. 1) 첫 번째 것인 간구[기도](deēsis)는 금식과 평행하는 것으로(눅 2:37; 5:33) 외치며 눈물을 흘리는 탄원[애원]이다(히 5:7). 밤낮으로 하는 그 만큼 간절한 것이다(눅 2:37; 딤후 1:3). 간구나 간청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어지는 다음 단어와 함께 우리가 보통 이해하는 기도다(5:5; 엡 6:18; 빌 4:6). 2) 즉 두 번째인 기도(proseuchē)는 가장 일반적인 기도의 명칭이다. 단어에 붙은 전치사는 방향을 뚜렷이 한다. 하나님의 집은 기도의 집이다(마 21:13; 막 11:17; 눅 19:46). 기도하러 교회에 오는 것이다.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다 받는다(마 21:22). 3) 세 번째 단어인 ‘도고’(enteuxis)는 디모데전서에만 나오는 말이다. 디모데전서 4:5에서 – 기도로 번역된 – 도고는 하나님의 말씀과 평행하여(cf. 행 6:4) 근본적으로 선하고 부패하지 않은 피조물을 ‘거룩함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된다. [성도를 돌보는 두 수단 중의 하나로 중보기도로 번역하여 어울리는 단어다. 실제로 번역들이 그렇다(Fürbitte[n]: LUT; [ELB]; intercessions: RSV)].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중보기도를 통해서 지원하고 북돋움으로써 피조물 곧 사람들을 거룩함에 이르도록 돕는 것이다. 4) 마지막의 감사(eucharistia)는 앞의 디모데전서 4:4에서도 중보기도와 관련해 나온 말이다. 감사드림은 빌립보서 4:6에서 기도와 간구와 함께 하나의 짝을 이룬다. 즉 간구는 감사와 함께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기도할 수 있는 것이 그리고 감사행위 자체가 기도이다(cf. 단 6:10. vgl. 마 26:27; 골 1:3; 4:2; 살전 1:2).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높은 이들은 물론 모두를 위한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하는 거룩한 의무이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가 어떤 경우에 있든지 주님께 대하여 책임적으로 살게 하시옵소서. 환경이 우리에게 책임전가의 이유가 될 수 없고 우리가 선한 삶을 살 수 없었다는 핑계거리로 삼을 수 없음을 인식하게 하시옵소서. 긍정적으로 닮고 배워야 할 본을 따르되 그러나 또한 닮지 말아야 할 것 앞에서 더욱 경종을 얻게 하시옵소서. 이렇든 저렇든 우리가 주님께 기쁨이 되고 마지막엔 주어진 조건 아래에서 그것을 뛰어 넘어 주님의 뜻을 이룬 이들로 남게 하시옵소서. 좋은 형편 속에서 값지고 보람되게 살고 충분히 누릴 수 있게 된 것도 감사하지만 불리한 조건 역시 우리에게 분발하게 하는 큰 도전이 되게 하신 주님의 은혜임을 잊지 않도록 하시옵소서.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그래서 너는 어떻게 했느냐?’ 물으실 때 기꺼이 대답할 수 있도록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아멘.

찬송가 99장 (주님 앞에 떨며 서서); 224장 (정한 물로 우리 죄를); 42장 (거룩한 주님께); 259장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325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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