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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연구 - 사7:14와 요시야 왕의 교훈

이동원 (서울북노회,성광교회,목사) 2021-02-25 (목) 07:17 3년전 1269  

성경의 내용 중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을 깊이 연구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더 깊은 깨달음을 얻을 때가 많다. 성경의 내용 중 너무나 감동적이고 놀라운 역사를 많이 볼 수 있지만 어떤 경우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더 연구 묵상하면 더 놀라운 영적 감동을 얻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해가 안될 때는 일단 지나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 부분은 그 후 언젠가 더 큰 감동과 깨달음으로 올 수도 있다. 진리이기 때문이다. 진짜이기 때문이다. 내가 알지 못한다고 진리가 진리가 아닐 수 없고 진짜가 진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7:14는 예수님 탄생에 신약에서 인용되는 중요한 구절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예언은 그 당시의 상황에서 요아스 왕에게 주어지는 말씀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구절이 예수님의 탄생에서도 인용이 되었다는 것이다.

7:14절의 예언의 말씀이 그 당시에 주어진 예언의 말씀으로서 그것이 이미 이루어졌다면 마1:23- 이해가 난감할 것이다.

만약에 사7:14절의 말씀이 그 당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도 이해가 난감할 것이다. 그런데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말씀이 어떻게 예수님께 다시 적용이 된다는 것인가, (사7:10-14)

1). 사 7:14 말씀이 그 당시 이루어졌다고 해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이해하기가 난감한 문제이다.

그 때에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마1:23- 에 두 번째 이루어진 것이 되기 때문이고 안 이루어졌다면 이사야의 그 당시의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이사야의 예언의 신뢰성 하나님의 능력과 예언성취에 대한 신뢰성이 손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이래도 저래도 받아들이기가 난감하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어떤 선입견 없이 냉정하고 사실적으로 다시 생각해 보자.

다른 시각에서 생각해 보자.

사 7:14 절의 예언이 그 당시에 그대로 이루어졌다고 하여도 문제가 없고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문제가 없다는 시각을 가질 수 있다. 그 당시 이루어진 것은 분명하다 할 수 있는데 그 징조의 예언이 이루어졌다면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이 그리고 그 신실성이 분명히 증거된 것은 너무나 명백한 것이다. 만약 그 당시 그 예언이 그 시대에 안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탄생으로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이 된다. 이래도 저래도 받아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마1:23 절의 말씀은 마태가 자기의 시각을 가지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이 부분은 하나님의 사자가 말씀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부분까지 하나님의 사자가 꿈에 말씀하신 것인가는 정밀하게 보아야 할 것이다.(마1:18-25)

마1: 23절은 이사야 7:14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이사야서는 메시야의 탄생에 대해서 너무나 정확 정밀하게 예언된 내용이 많다. 신약에서도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그 예언의 성취를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도 이사야서의 예언의 성취를 선언하시기도 하였다.(눅4:18-23)

또한 이사야서는 하나님이 육신으로 오시는 길을 알리는 사람(세례 요한)도 대해서도 예언한 책이다. 그 예언을 전한 이사야는 히스기야 왕의 시대에 그가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자신의 시대에 생생하게 목격하고 실천하기도 하였기에 예언자로서 신뢰할 만한 예언인 것은 분명하다 할 것이다. 즉 자신의 시대에 그가 놀라운 증거를 받은 체험을 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그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내용이기에 더욱 신뢰할 만 하다는 것이다. 이사야서를 읽을 때에 그가 히스기아 왕 시대에 겪은 기록을 같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2). 사7:14절의 말씀이 그 당시 이루어졌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하여 약속하셨고 그 약속은 그 당시 성취되었다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성을 너무나 확실하게 증명해 주는 것이다.이것은 분명하다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이성과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징조에 대한 예언을 성취시키신 것이다. 그 당시 이루어졌다면 이것은 너무나 확실한 것이다. 그 당시에도 그 예언이 이루어지고 예수님께 또 이루어졌다고 반드시 이해 난감할 것인가도 묵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그 당시에는 그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예수님께  대한 예언으로 적용 인용될 수 있기에 

이해 난감할 수은 없을 것이다. 어떤 선입견 갖지 않고 결론을 먼저 내어놓고 거기에 맞추어 해석할 필요 없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찾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보려고 한다면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르키메데스가 금의 무게를 찾기 위해 유레카 하며 깨닫듯이 말이다. 진리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진짜는 진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 바로 내일이면 죽으신다는데, 내일이면 죽으신다는데 그러한 질문이나 할 것인가 할 수도 있는데 갈급한 마음으로 꼭 알고 싶은 것은 물은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내일이면 죽으시기에 그 어떤 사실을 알고 싶었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겠다는 듯이 질문하였다. 예수님은 놀라운 그리고 분명한 대답을 해주셨다.

다음은 도마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인간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에도 제자들의 질문을 통하여 오히려 너무나 분명하고 놀라운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현실에서 실제로 눈으로 볼 수 있게도 해주시고 해 주셨던것이다.

(요14:7, 요14:1-18, 20:24-31)  


1. 요시야 왕의 행적을 보고도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요시야 왕에 생애에 대해서도 연구해 보면 처음엔 누구나 성경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 삶을 산 왕이 어떤 전쟁의 전투에서 졸지에 최후를 맞는 것은 보고 말이다. 그것은 성경을 읽으면서 누구나 한번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성경을 읽고 연구해 보면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있다는 것이다.

                                 

      

=. 성경 연구 (Bible study)

요시야 왕은 왕으로서 역사에 평가될 개혁적인 많은 일을 하였다는 것이다.

왕하22:1-2

왕하23;1-30

요시야 왕의 행적을 보면 역사상 높이 평가될 왕의 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전투에서의 최후는 너무나 어이 없다는 것이다. 전투에 나아가 졸지에 너무나 허망하게 전사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누가 보아도 높이 평가 받을 만한 왕이 이렇게 그의 생을 마감하는 것에 누구나 너무나 의아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요시야 왕의 신앙과 선한 개혁은 놀랍다. 다음을 보자.

대하 34:1-35:19

 

그 요시야 왕이 어떤 전투에 참여하여 졸지에 전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장면이 그 앞 부분과 열결하여 너무나 어이없고 이상할 정도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전투의 장면을 보면 왜 요시야 왕이 그 전투에 참여했는지 너무 경솔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을 해하는 이러한 전쟁에 왕이 판단하고 참여하는 것은 너무나 신중했어야 할 것이다. 방어 전쟁도 아니고 어떤 선한 명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애굽 왕 느고의 말은 왜 당신의 나라를 공격하는 것도 아닌데 우리를 공격하려고 하느냐는 말은 오히려 절절할 정도이다. 다음을 보자

(대하35:20-24)

      

1. 예레미야와 요시야 왕

(대하35:25-27)

 

35:1,36:1-2

36:1-4

 

 1. 우리가 배울 교훈은 전쟁 전투는 참여 결정은 결단코 함부로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무슨 뜻인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사람을 해하는 전쟁은 결단코 함부러 결정할 일이 아니어야 한다. 어떤 이유도 명분도 없고 방어전투도 아닌 전쟁은 결단코 하지 않아야 한다. 존엄한 생명을 경시하는 것이다. 전쟁과 전투 참여는 결단코 함부로 경솔하게 결정하여서는 안된다는 중요한 교훈을 너무나 강하게 배울 수 있을 교훈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귀한 일을 많이 한 역사에 평가될 만한 왕이 불필요한 전투에 참여하게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는 역사의 큰 교훈이라 할 것이다.

 

무조건 전쟁 승리가 아니라 꼭 필요할 경우에,, 어떤 명분이 분명한데, 하나님 믿고 전투하며 무조건 이긴다는 것은 아니,, 전쟁 전투는 사람을 해하는 것인데,, 최고의 명분없이 할 일은 아니다,,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도 아닌데 즉 방어 전쟁도 아니고 ,,

종교 개혁자 ,, 칭찬받을 왕인데,, 요시아 왕의 죽음 ,, 요시아,, 이해 못함,, 단지 불필요한 전투,,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방어 전투도 아닌데,, 참여하여,,

 

너희에게 붙이지 아니 하였으니 참여하지 말라고 하실 때도 있었다. 아무 전쟁이나 할 것은 아니,, 2:5,, 2:23, 7:2,, 너희와 함께 하지 않아 패할까,,

 

[14:42]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1:42]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싸우지도 말라 내가 너희 중에 있지 아니하니 너희가 대적에게 패할까 하노라 하셨다 하라 하시기로    

[2:23]그 열국을 머물러 두사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시며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셨음이 이를 인함이었더라 

[7:2]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1. 앗수르에 대해서 성경에서 찾아보자.

1). 앗수르는 북왕국을 멸망시켰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호세아 왕 구년에 사마리아가 함락되므로 멸망된 것을 알 수 있다.(왕하18;9-12)

(남왕국 히스기야 왕 사년 곧 (북왕국) 이스라엘 왕 엘라의 아들 호세아 칠년에 ''

(북왕국 이스라엘 마지막 왕 19 대 호세아. B.C 722)

(왕하18::9-12)


2).북왕국 이스라엘을 정복한 앗수르가 남왕국 유대는 쉽게 정복할 수 있었다고 누구나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가, 전투의 승패는 어떻게 되고 앗수르는 어떻게 되어갔는가,

(왕하18:13- )

(왕하19:1-37)


1. 특별히 다음 구절을 보자.

1). 누가 왜 보호해 주셨다고 하였는가,(왕하19:34)

앗수르 제국이 이스라엘 북왕국을 멸망시켰다면 남왕국 유대는 북왕국과 비교할 때 훨씬 더 약하다고 할 수 있었기에 쉽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남왕국 유대는 앗수르 공격을 방어하고 승리하였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은 남왕국 유대까지 멸망한다면 하나님의 구원사의 통로가 끊어지고 다뒷에게 약속하신 말씀이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호 구원 인도해 주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시고 있다. 다음 구절을 보자.

(왕하19:34)


2). 남왕국 이스라엘은 어떻게 앗수르 공격을 물리칠 수가 있었는가,

(왕하19:35-37)

 

(* 남왕국 히스기야 왕 이후 ,, (12대 아하스 )  - 13대 히스기야 - 14대 므낫세 - 15대 아몬 - 16대 요시야 -

17 대 여호아하스- 18 대 여호야김 - 19대 여호야긴 - 20 대 시드기야 (11년) (왕하24:18)  / BC 586)

(* 북왕국 이스라엘 마지막 왕 호세아 (9년). 왕하18:10  / B.C 722)

북왕국 마지막 왕 시드기야 는  요시야 왕의 셋째아들이라는 것이 기이하고 특이하다. 그 후 되어진 일들을 보면 역사는 우리의 이성으로 쉽게 이해되는 것이 아닌 것도 알 수 있다.대상3:15 , 대하36:10)


(* 시드기야 왕에 대하여 다음을 보자.

(렘52:1-2)

1 시드기야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일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 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하무달이라 립나인 예레미야의 딸이더라
2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

Zedekiah was twenty-one years old when he became king, and he reigned in Jerusalem eleven years. His mother's name was Hamutal daughter of Jeremiah; she was from Libnah./
He did evil in the eyes of the LORD, just as Jehoiakim had done.'

( * 역사는 하나님께서 주관 인도하시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 세밀하신 인도하심을 분명히 볼 수 있지만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의 현재의 역사도 그러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결국 역사는 하나님의 계획하신 목적대로 되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은 자유의지를 가진 기계가 아닌 인격이라는 것, 하나님은 때론 사람을 감동케 하시지만 기계적으로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시고 사람은 자유의지 없는 기계와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여 가는 사람들과 합력하여 역사는 하나님의 뜻을 결국 이루는 것이다. 행27:20-26, 41-44, 롬8:28)

                                        < 성광교회 이동원 목사 드림>

                                                        (- ing )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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