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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묵상 31 - 역사와 자연을 보라 (시126:)

이동원 (서울북노회,성광교회,목사) 2019-02-22 (금) 08:11 5년전 1742  

(시126편)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126:1)


1. 이스라엘이 정확히는 북왕국은 멸망하고 남왕국이 바벨론 포로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70년 만에 유대 즉 남왕국 이스라엘이 고국에 돌아오면서 감격하여 쓴 서사시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면 바벨론에서 해방이지만 바벨론의 입장에서 보면 바벨론의 제국이 멸망인 때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참 기이한 일이라 할 수도 있다. 아니 그 당시 강대한 대제국이 어찌하여 70년 만에 멸망할 수 있다는 말인가. 역사학자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해 보아도 역사에서 좀 특이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어떻게 대제국이 70년을 임기로 멸망한다는 것인가, 도저히는 아니라 하여도 상당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갑작스럽게 바뀐 놀랍고 상상하지 못한 시대 상황 또는 사건을 보고 어떻게 또한 무엇이라고 설명할 것인가,,

 

( 며칠 전 어떤 작가의 베스트 셀러 책의 몇줄을 읽게 되었다. 상당한 실력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이 작가의 책은 상당히 풍부하고 유익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그 책에서 성경 중의 복음서에 대해서도 언급한 부분이 있어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한 한 그는 내가 비록 무신론자이지만 성경도 잘 안다는 의도가 있는 듯 하였다. 그러나 전문가가 볼 때 기독교의 성경에 대해서는 잘 모르면서 아는 체 하는 것으로 볼 수 밖에 없었다. 이 부분에 관한한 어디서 들은 풍월은 있어서,, 하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내용인즉슨 무슨 주제를 이야기 하면서 신약 성경에 예수의 말씀과 제자들이 지어낸 이야기를 구분 운운하는 문장이 있는 것을 보았다. 즉시 어디서 뭐 들은 풍월은 있군 하는 느낌과 많은 자칭 지식인들이 성경을 몇 번 읽고 아는체 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부분은 지어낸 이야기라니 누가 그렇게 말하든가, 일부 소위 실력 없는 즉 성경을 잘 모른는 자유주의 풍류 유행학설을 어디서 듣기 하였군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기독교 경전을 진지하게 심지어 무신론적 사고를 가지고 또는 기독교를 박해하기 위한 목적에서라도 진지하게 집중하여 탐독 하였다면, 영적 감동은 물론이지만 그 방대함, 그 문학성, 그 사실적 역사성 등을 깨닫게 되어 그 경전에 대해서 함부로 경솔하게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성경을 한 두 번 또는 몇 번 읽고 기독교의 경전을 인용하며 가볍게 이야기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비하하는 내용이 있다며 세상적 지식을 상당히 가진 소위 지식인이라해도 빈깡통이나 빈 수레의 요란함이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의 경전은 신앙 외의 면에서도 그렇게 누가 가법게 말하기는 너무나 놀라운 책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읽은다면 그 놀라운 내용앞에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으면 겸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성경을 기록한 모세를 비롯하여 그 기록자들이 세상적 시각으로 보아도 보통 사람이었던가. 그들의 경력과 실력 앞에서라도 머리 숙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성경의 그 내용을 진지하게 읽고 그 위대함을 깨닫지 못했다면 그들을 진정한 지식인 지혜자라고 평가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다시,  기독교나 성경을 낮게 평하며 튀는 소리나 하는 지식인이라면 관심 끌기를하는 관종 또는 실력은 없으나 튀는 소리로 이름을 알리려는 요란한 빈수레 또는 빈깡통 지식인으로 평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말로는 경전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체 하는 사람으로 평가 받는 것이 적절할 값일 것이다. 세상의 탁월하다는 수 많은 사람들도 하
나님 앞에는 겸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예를들면 성경의 한 기록자 모세에 대해서 그의 경력과 행적을 추적하여 보라. 그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어떠한 일을 감당하였고 그 태도가 왜 어떠하였는가를 안다면 역시 겸손할 수 밖에 없을 것이
라는 것이다.



빈수레가 요란하고 빈깡통이 더 요란하듯이 성경을 잘 모르고 어디서 무슨 학설이나 귀동냥으로 들은 사람일수록 뭐 더 그러한 경우가 있다.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그런 지식인들은 대부분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이거나 혹 좀 더 알아도 성경의 기록한 목적과 의도도 내용의 핵심을 이해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성경을 낮추어 말하는 사람은 지식적으로 수준 낮은 사람임에는 명백하다 할 것이다. 성경은 혹 신앙을 갖지 않는 사람이라도 그 방대하고 놀라운 내용들이 경외감을 그리고 자신의 부족함을 한 없이 느끼지 않고 교만하다면 성경을 잘 읽었다고 할 수 없다.

다시, 모세 그리고 많은 기록자들을 보라. 학문이나 경험 경륜이나 그 경력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기록자들이 허다하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그들만큼 배우고 실제로 하나님의 수많은 역사를 경험 목도한 사람들이었다. 세상적 기준에서도 그들만큼 실력 있는 기록자들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잘 준비된 사람들을 통해서 기록하게 한 것이다.)

 

( 나는 이미 언급하였듯이 구약에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의 선언의 말씀이 있고 기록하라는 하여서 그들이 목도한 사실을 기록한 내용이 있고 찬양과 감사도 간증도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깊이 모르는 상당한 실력의 작가가 기독교 성경에 대해서도 아는 체 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그 책의 신뢰와 권위를 떨어트리는 것이다. 다른 부분에서더 이렇게 잘 알지도 못하면 자기의 주장을 펼치는 것 아닐까는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는 것이다.

소위 외국에서 한국에서 자유주의 신학설이나 듣고 그것이 무슨 굉장한 학문적 지식을 배운 듯이 설하는 학자가 종종 또는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잘 모르고 또는 어설프게 알고 신학을 배우는 과정에 이러한 학설을 배우고 그것이 마치 대단한 양 신봉하는 분위기가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을 내용을 완전히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니고 취사선택하여 믿게 되면 뜨겁지도 차지도 않는 죽도 밥도 아닌 신앙의 사고의 체계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좀 지나친 표현같기도 하지만 평신도 성경박사 앞에 즉 신학학설박사가 평신도 성경박사를 가르치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한 것이다.)

 


이미 반복하여 말하였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의 말씀이 있고

기록하라 해서 기록한 초자연적인 역사적 사실을 목도한 기록이 있고

신앙인들의 간증 찬양 감사 간구 기도의 내용들도 있다고 하였다. 성경의 모든 내용이 하나님의 선포적 계시의 말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의 선포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 말은 오해가 있을 수 있기에 잘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1. 시126편은 역사적 사실을 근거한 신앙인의 간증적 서사시이다. 간증적 서정 서사시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내용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그 내용도 신뢰할 수 없다 할 것이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시이다. 그 때에 뿐 아니라 지금도 그 역사적 사실을 근거하므로 더욱 신뢰하고 확증하고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신약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의 말씀이 즉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의 내용으로 다 기록된 것이 아니다. 표적의 사건의 기록, 그들이 목도한 초자연적 초역사적 사실을 보고 기록한 내용도 있다.

이것을 지어낸 무슨 말인가, 사실 따지고 보면 모든 인간들의 책은 지어난 이야기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누구의 이름에 지음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한 뜻이라면 이해할 수 도 있다. 그런데 지어낸 이야기라는 뜻이 그러한 뜻이 아니라 꾸며낸 이야기의 뜻으로 말하고 있는 듯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목도한 사실의 기록 또는 간증이라고 신앙고백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지어낸 이야기는 사실을 꾸며낸 이야기의 의미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126 편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고백과 간증과 찬양이다. 그런데 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면 거기에 근거한 신앙고백과 찬양과 간증도 무색해 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의 근거는 객관적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간증 찬양 신앙고백의 시인 것이다.

 

세상 인간 역사들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다 볼 수 있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인생들은 세상 모든 역사를 알 수도 없다. 그것은 너무나 복잡 다양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샘물의 한 모금의 물맛을 통해서도 샘물의 물맛을 알 수 있듯이 한 부분 만을 보고도 전체를 알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몸의 건강을 한 부분의 관찰 진찰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과 비슷하다. 한 부분을 통해서도 전체를 알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신앙적 사건을 통해서 넓고 광대한 세상사에서 하나님의 역사의 특성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126: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When the LORD brought back the captives to Zion, we were like men who dreamed.

 

 

' 여호와께서,,'  

이 시인의 간증의 시작이다. 그리고 실제적 역사적 사실이다. 모두가 볼 수 있는 명명백백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간증이다. 이 놀랍고 감격적인 실제적인 사건을 목도하며 이것은 사람들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이 꿈같은 일을 이루셨다는 것이다. 역사의 흥망상쇠를 여호와께서 라는 것을 이 꿈같은 놀라운 사건을 보고  시의 시작에서 여호와께서 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살면서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과거에 나라를 정복하였으면 언어를 동화하거나 그들의 삶의 방식 문화를 정복의 나라의 언어와 문화와 삶의 방식으로 바꾸려고 할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조국의 크고 놀라운 의미 있는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을 부를 수 없기에 시온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을 안다면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이겠는가.


( '시온의 포로' 라고 하면 뜻을 잘 알 수 없다. 시온으로 돌려 보내실 때에 인 것이다. 이 부분은 영어성경과 같이 읽는다면 쉽고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to Zion).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는데 시온의 포로라는 말은 쉬운 내용을 토씨 하나로 잘 이해할 수 없게 번역이 되었다.

개정번역이 수정한다면 이러한 부분을 수정하였어야 했다. '시온의' 를 '시온으로'  수정하였다면  더 잘 알 수 있을 이다.  즉 여호와께서 바벨론에 있는 이스라엘의 포로를 자기의 나라를 상징하는 예루살렘으로 돌려 보내실 때에 인 것이다. 그러나 바벨론에서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예루살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바벨론이 포로로 온 이스라엘 백성들 고국을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기억하는 것을 막고 자기의 나라에 동화되도록 하였을 것은 그들로서는 필요한 정책이었을 것이다. 바벨론의 정복한 나라에 대한 포로정책을 알 수 있다.)


1. 이 시 126편의 1절을 읽는데는 일분 이내 즉 몇 초면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기간이 칠십년의 기간이 담겨있다. 뿐 만 아니라 그 포로생활의 내용은 수백 권의 책으로도 다 기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몇초로 압축하며 노래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의 간증은 1절에서  6절까지 일분 내외로 압축하여 역시 노래로 감격하며 간증하며 감사하며 찬양하며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지금이 현재와 그 이후의 삶에서도 이 하나님의 역사(History)에서 보여주신 이 놀랍고 꿈같은 감격적인 역사 (work)를 간증하며 현재에도 이루어 주실 것을 간구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언제나 볼 수 있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경영하시는 자연의 예를 들어서 더욱 분명히 알게하며 신앙고백의 찬양과 간증 결단하게 하는 것이다.

 

126:2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126:2 Our mouths were filled with laughter, our tongues with songs of joy.

Then it was said among the nations, "The LORD has done great things for them."

       
  

126:3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126:3 The LORD has done great things for us, and we are filled with joy.  

 

126: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같이 돌리소서

126:4 Restore our fortunes, O LORD, like streams in the Negev.

(126:4 Bring back our captivity, O LORD, As the streams in the South.nkj )


126: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126: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126:5 Those who sow in tears will reap with songs of joy.

126:6 He who goes out weeping, carrying seed to sow, will return with songs of joy, carrying sheaves with him.



드디어 그들의 눈물이 기쁨으로 꿈 꾸는 것 같은 역사적 사실을 목도 경험하며 이 역사적 시를 쓴 것이다.

바벨론에서 참으로 눈물이 많았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어떠하였겠는가는 누구나 충분히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의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은 정신적 신앙적으로도 거의 눈물이 마르지 않은 상황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때가 되매 역사를 주관하시고 약속하신 말씀 그대로 고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역사의 흥망성쇠를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또한 자연을 창조하시고 경영 운영하시 것을 자연에서도 분명이 볼 수 있다.


그런데 역사에서 뿐 아니라 자연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경영하시는 자연에서도 지금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볼 수 있는 자연의 예를들어 그 내용을 더욱 확증하며 이 노래를 마치는 것이다. (창1:10-11)

1. 남북의 분단 적대적 관계에 남북의 정상이 도보다리에서 대화의 장면을 보라.

그 배경에  아름답고 평온한 자연의 산이 보이고 산 새들이 울고 있었다.

마치 새들이

우리는 국경선이 없이 이렇게 사이좋게 노래하고 하고 있는데

사람들인 당신들은  동족상쟁이 있었고 지금까지 적대적이었다며,

대들은 지금까지 동족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던거냐 말하고 있는듯이,,


우리의 어린시절 저의 모친께서는 가끔은 새벽 잠을 깨워

가정 예배를 인도하실 때 이 추운 겨울에 일선에 수고하는 군인들을 위해

그리고 공중에 나는 새들은 남북을 자유로이 왕래하는데 하시며 기도하시었다.


아직 한국의 남한에 육이오를 겪은 분들이 아직도 북한에 대한 미움의 어떤 마음을 이해하지만

그 이후 태어난 사람들이 맹목적 적대적 비방의 태도는 이 시대의 미아가 아닐까 자성해야 할 것이다.


산 새들도 국경선이나 철조망이나 증오심이나 무기없이 노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생들아 너희들도 적대적 비방말고 동족해하려는 데 무기 위해 돈 너무 들이지 말고

너희의 행복을 위해 사용하라며 동포가 서로 사랑하라 하는 노래로 들리지 않은가,

그 도보다리에서 남북의 평화 번영의 진지한 대화 장면과 함께 새의 노래들을 방영하며

전 국민이 듣고 함께 평화의 노래를 하며 행복의 번영의 길을 찾아 행진하여야 할 것이다.

 

특히 초등학생들에게 이 장면과 새의 노래를 듣게하며 온 세상이 더불어 함께 사는 교육을 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 경쟁 갑을의 교육이 아니라 평화 번영 윈윈의 더불어 함께 행복한 세상을 위한 교육을 하여야 할 것이다.


한 동포가 분단의 철조망의 쳐놓고 그리고,,
자연에서 새들의 노래를 들으며 무엇을 생각하는가,

이러한 주제로 전 국민에게 숙제를 내 줄 수 없지만

초등학생에게는 작문의 기회를 주는 것은 교육적으로도 유익할 것이다.



이 한반도에 평화 공존 번영의 기쁨의 새 역사를 기대하며,

                                     < 성광교회 이동원 목사 드림>

 

 

 

 

=. 성경연구 (Bible study0

1. 레26:



1. 역사 뿐 아니라 자연에서도 보라.

(창1:10-11)

역사 뿐 아니라 자연을 경영 운영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자연에서 지금 되어지는 상황의 예를 들어 하나님의 역사를 분명하다고 노래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바벨 포로에서도 눈물을 흘리며 울며 믿음의 씨를 심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경영하시는 자연에서도 풍성한 결실을 하고 있는 것을 지금도 보고 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Then God said, "Let the land produce vegetation: seed-bearing plants and trees on the land that bear fruit with seed in it, according to their various kinds." And it was so. /

The land produced vegetation: plants bearing seed according to their kinds and trees bearing fruit with seed in it according to their kind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 공중의 나는 새 들의 백합화를 보라.

마6:25-33

 

1. 126:1 A song of ascents.

When the LORD brought back the captives to Zion, we were like men who dreamed.

 

126:2 Our mouths were filled with laughter, our tongues with songs of joy.

Then it was said among the nations, "The LORD has done great things for them."

 

126:3 The LORD has done great things for us, and we are filled with joy.

 

126:4 Restore our fortunes, O LORD, like streams in the Negev.

 

126:5 Those who sow in tears will reap with songs of joy.

 

126:6 He who goes out weeping, carrying seed to sow, will return with songs of joy, carrying sheaves with him.

                                                                              ( - ing ) # 줄간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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