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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의 신앙고백 선언

이동원 (서울북노회,성광교회,목사) 2018-11-29 (목) 08:50 5년전 2912  

1. 나의 주 나의 하나님 - 도마의 신앙고백

( 요20:28-29)

'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



직접 보기 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철저하게 의심한 도마의 모습을 보고 꼭 나의 모습 같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나도 한편 도마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철저하기 검증하고 또 검증하고 의심해보고 검증하고 확증하는 것이었다. 많은 신앙인들이 그냥 열심을 다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그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무명 신앙용사들의 간증이 놀랍다. 그들은 가장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자세로 신의 존재 부활 역사등을 의심하고 검증하여 증명을 얻은 것이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그렇게 호락호락 믿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제자들 사도들도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여인들에게 듣고 허탄한 (넌센스) 듯 여겼고 베드로와 요한 만이 달려가 보았다. 그 무덤 안을 자세히 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할렐루야 예수 부활 하셨다하며 감격적으로 기뻐뛰며 감사 찬양하고 외치며 돌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기이히' 여기며 돌아 왔다고 하였다.

빈 무덤을 보고도 사흘 만에 부활하시라는 말씀을 이성이 가로 막았고 기이히 여겼을 뿐이다. ' 기이히' 라는 단어가 그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다시, 무덤에 달려갔던 베드로와 요한이 빈 무덤을 보고 할렐루야 찬양 예수님, 하면서 기뻐뛰며 달려 돌아온 것이 아니라 기이히 여기며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다락방의 문을 닫아 잠그고 있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 날 저녁 찾아오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그날 저녁 그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도마에게 전하였다.

물론 그 전하는 분위기로 보아서 제자들은 그렇게 기쁨이 충만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들에게 부활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기도 하였고 자신들의 모습을 알았고 여러가지 생각들이 많은 듯 모습의 분위기를 본다.

 

어쨌든 예수님은 다시 오셔서 평강이 있을지어다 기원의 명령을 하셨다..

못자국의 창자국을 보여 주시며 또 ( 여기서도 '또' 인 것이다.)

'또'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것은 기원문이고 명령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받으면 된다는 것이다.)

 

1. 여드레 후 ( 약 일 주일 후)

다시 그 다락방에 , 닫히고 잠긴 그 다락방에 '또' 나타나신 것이다.

(여기에서도 역시 하나님의 ' 또 또 복과 은혜 위에 은혜' 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인생들은 세상에서 또 또 복과 은혜 위에 은혜가 아니면 살아가기가 힘들 것이다. 자연에서도 은혜 위에 은혜를 또 또 반복적으로 계속적으로 주시는 것을 볼 수 있다.)

 

1. 자, 도마의 그 의심을 강도를 보라,

도마는 바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이다. 그 모든 말씀을 들었고 기적을 보았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에 대하여서는,


'내가

내 눈으로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 하겠노라' (요20:25)


 

그  도마가 '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라고 고백하였다. 가장 정확한 최상의 선언이었다.

그 다락방에 두 번째 찾아오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선언 한 것이다.

이것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이 도마의 고백을 통해서 의심 많은 많은 사람들에게도 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1. 근래에 무슨 도마복음인가를 누군가 어디에서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혹자들이 이런 때에 이것으로 뭐 한건 해 보겠는다는 것인지 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미 복음서는 검증하고, 검증하고 또 검증하고 등등의 과정을 거쳤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라는 기초에서 기록한 책이 아니라면, 그 책이 과연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 기록한 것인가도 확실하다 할 수 없다. 무슨 관심과 화제 거리로 한 건 해 보려는 어떤 상술이 포함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학계에도 포퓰리즘이 없지 않나 볼 것이다. 어떻게 하든 튀는 글이나 말을 하여 유명해 지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일시적 호기심은 있을 것이고 거기에 시간 보내기는 그러하고 하는 중에 도마서를 침소봉대 확대과장 등등을 해도 그런가 보다 하지 잘 알 수 없는 것이다. 대부분 잘 모르기에 누군가 마음대로 이야기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최소한 도마의 신앙고백 선언 그리고 확증된 복음서와 일치하지 않는다면 신뢰할 수도 없고 받아드릴 수도 없다 할 것이다.

그 시대 그 당시 목격자들에게 검증되지도 않고 뒤늦게 어디서 발견 된 것이라면 그리고 도마의 신앙고백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면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도마가 의심하여 각고의 노력 끝에 예수님을 '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의 선언은 기독교의 가장 핵심고백이고 복음서의 핵심교리의 선언인 것이다. 그런데 의심의 도마가 실증적으로 보고 그러한 신앙고백을 하였는데 그 내용이 다르다면 그것을 신뢰하는 것이 헛고생 또는 손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도 많은 분들이 생각없이 맹목적으로 신앙을 받아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는 의심 부정 실증 경험 확증 등등의 참 산산첩첩의 과정을 거쳐서 믿게 되고 신앙의 기초를 세우고 나아간다는 것이다. 장년이 된 사람이면 누가 전 생애 그리고 그 이상이 연결되고 달려있는 신앙을 그렇게 쉽게 결정하겠는가, 다 자기 나름대로 확고한 자기 주관 주장을 가지고 사는 대부분의 또는 모든 인생들이 그렇게 맹목적으로 결정 결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 예수님의 제자였던 도마는 그러한 캐릭터의 대표적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배운 그리고 동료 제자들이 전하여 준 예수님의 부활도 그냥은 못 믿겠다는 그의 실증주의적 단호한 모습이었다.

그의 믿음의 자세는,

내 눈으로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고 , 그것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 자기의 눈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인가,

내 손가락으로 그 손의 못자국을 넣어보고 , 이것으로 의심 끝 믿음 시작도 아니고, 아직도 또 있는데 그것은

내 손으로 예수님의 옆구리의 창자국을 눈으로 보고가 아니라 손으로 넣어보고 믿겠다는 것이다. 

도마는 동료 제자들의 말도 자신의 눈으로 보고도  자신의 손가락으로 넣어보고도 아직 믿지 못하겠고 손으로 옆구리의 창자국을 손으로 넣어보고야 부활을 믿을 수 있겠다고 하였다. 왜 도마는 동료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하였을까, 자기의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글쎄 누가 아니 부활하신 주님을 본 제자들이 무엇때문에,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는데도 부활하셨다고 할 이유가 있을까, 그 이유가 있다면 그 무엇일까.

 

나도 누구보다도 도마와 같았다는 생각을 할 때 있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렇지 않았지요.

렇게 말하였을때. 아니 그 이상으로 아니지요. 그 반응은 의외로 강하였다. 나도 도마와 같았지요. 신실한 권사님이 말한다. 나만 그러했던가 했는데 신실한 열심의 믿음의 사람들이 도마의 모습이 자기의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도 도마 같았지요. 나도 도마 같았지요. 의외로 생각 보다 많은 분들이 도마의 모습이 자신들의 모습이었다고 강력 공감하는 듯 하다. 그러면서 웃는다. 자기의 모습들을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 이 과정을 다 거치는 것이다.

 

1. 최근 맹목적 교회 비방자들은 신앙인들이 맹목적으로 믿고 열심인 것으로 아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을 믿는 그들은 모든 것을 걸고 마음으로 의심하고 회의하고 도전하다가 나의 주 나의 하나님 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고 많다는 것이다. 많은 믿는 사람들의 신앙의 결단은 그렇게 가볍게 결정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들의 믿음의 대상을 자기의 전 삶을 걸고 실증해 보고 선택하였다는 것이다.

기독교를 훼파하려고 하는 사람들 중 순수한 사람들이라면 한번 도전해 보는 것도 좋다. 그 방법으로 성경을 읽어 보는 것이다. 인생에 태어나서 진리의 말씀인 성경과 그리고 잘 번역된 영어 성경을 niv1984 읽고 결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후 그래도 만약 만약 못 믿겠다고 해도 결코 손해가 없는 것은

이 세상에서 최고의 책을 읽었다는 것이다. 세계 최고의 책 역사 문학 비유 언어 사상 교양 등등에서도 최고의 책을

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어로 같이 읽었다면 어떤 분야에서건 그 유익은 말로 표현 할 그 이상일 것이다.



도마도 사실 예수님의 부활을 누구보다도 믿고 싶었을 것이다
. 그러기에 오히려 확실한 부정을 하였을지 모른다. 진리에 대한 가장 확실한 부정을 통하여 가장 확실한 긍정을하게 된 것이다. 진리이기 때문이다.

( 문호 도스토옙스키는 가장 철저한 무신론자는 이제 가장 철저한 유신론자에 가장 가까이 왔다고 말하였다. 진리는 검증하고 검증할수록 진리인 것이 확증되기 때문이다. 진짜는 검증하면 검증할수록 더욱 진짜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도마는 부활의 예수님을 철저히 부인하므로 가장 철저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분명하게 고백 선언한 것이다. 이러한 도마의 신앙과 일치하지 않는 어떤 글도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의 하나인 도마의 글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도마가 아닌 엉뚱한 도마가 쓴 글을 가지고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인 도마가 기록한 도마서인 줄 알고 왈가 왈부하는 것은 우습다 할 것이다.)

사복음서를 통해서도 그 내용을 충분하고도 넘치고 분명하게 전하셨고 알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의 감동의 쓰여진 책이 뒤늦게 발견되었다는 것은 수긍하기도 힘들 것이다. 복음서는 기록할 때부터 뿐 아니라 전달되고 보급되는 과정에서도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일 것이다. 한국의 최초의 개역성경전서의 완성을 보고도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이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최초로 완간된 세계어 영어 성경이 격찬 받고 한글 개역 성경전서를 보고 이것은 우연히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계에 한국에 주신 은총의 선물이라고 역설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 번역의 그 결실을 통해서도 과연 그 기록과 그 전달의 전 과정에서 함께하시고 역사하셨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에 의해 기록된 것이라는 그 이유가 여기에도 있는 것이었다. 즉 성령에 감동에 의해 기록된 경전의 번역과 그 전달 과정을 보면서 다시 그 말씀이 확증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 성광교회 이동원 목사 드림>

 

 

=. 묵상 (meditation)

1. 도마의 각오

(요11:15-16)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and for your sake I am glad I was not there, so that you may believe. But let us go to him."/
Then Thomas (called Didymus) said to the rest of the disciples, "Let us also go, that we may die with him."


1. 도마의 질문

도마의 이 질문은 우리가 질문하고 알아야 할, 예수님의 귀한 답을 주셨다.

도마에 이어서 빌립도 질문을 하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르는 것을 대충 지나가는 것이 아니었다.(요14:7)

(요14:3-6)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And if I go and prepare a place for you, I will come back and take you to be with me that you also may be where I am. / You know the way to the place where I am going." /

Thomas said to him, "Lord, we don't know where you are going, so how can we know the way?"/

Jesus answered,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1. 도마의 의심과 실존론적 체험 그리고 그 선언

(요20;24-29)


( 부록:

한편 최근의 도마복음의 책이 어디에서 발견되어 학계에서도 이것으로 한건 하려는 모습까지 보이는데 ,, 이 도마의 신앙고백과 일치하지 않으면 그것이 도마가 기록한 것인지도 알 수 없으며,초대교회에서의 목격자들의 검증을 받지도 않았다면, 그리고 복음서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과연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의 그 제자라고 할 수 있다고 하겠는가, 단지 참고자료는 될 것이다.          

근래에 소위 도마복음서 라는 책을 뒤늦게 어디어서 발견하였다고 하면서 뭐 한건 한듯이 호들갑을 떨고 있다고 보는 분들이 많을 것 같다. 일단 그것의 기록연대와 예수님의 제자인 도마의 저서인지의 진위등에 대해서 잘 모르는 중에 새로운 무엇이 있는듯이 요란스럽게 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중요한 내용이 있다면 지금까지 숨겨둘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마치 학문적으로 한건 한 듯이 어수선하게 할 수 있는데 기본적으로 복음서라면 그 때 그 시대에 목격자도 살아있을 때에 전해지고 검증받고 평가받고 확증되었어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 당시 기록이라면 뒤늦게 나올 이유가 있겠는가, 복음서의 기록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였을 것인데 그 복음서가 드러나지 않게 하실 이유가 없다.

그리고 어떤 기록에 의하면 도마복음서 라는 책은 연대측정결과 4세기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복음서는 목격자들이 살아있을 때 쓰여지고 검증되었어야 더욱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4세기 경에 작성된 것이라면 그 신뢰성도 문제가 있고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그 신앙에 근거하여 쓰여지지 않고 일치되지 않다면 도마서의 저자가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의 하나인 도마라고 신뢰하기가 힘들 것이다.   

복음서라면 그 당시 전하고 평가받고 검증받고 적용하는 것인데 왜 그것이 동굴에나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을 뿐 아니라 그 전달도 함께 역사 하였을 것은 지극히 당연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의 기록를 명하시기도 하시고  그 말씀의 전파등에 관심을 가지고 관여하셨음은 너무나 분명하다  할 것이다. 그리고 복음서의 중요한 내용은 초대교회 그 당시 전해졌고 또 목격자들에게 검증되고 확증되었다는 것이다.

마의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라는 신앙고백 선언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제자인 도마가 기록한 것인지도 신뢰할 수 없다 할 것이다. 인생들은 자신의 믿음의 고백과 다른 말과 글을 쓸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 철학자 데카르트,, 근세 철학사에서 높이 평가하고 영향을 준 철학자이다.

아침에 출근하는 중에 뱀이 길가에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냥 지나가고 돌아오는 중에 처리하려고 하였다. 오후에 오는 길에 보니 그것은 뱀이 아니라 썩은 새끼 줄이었다. 그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자기 눈을 믿지 못하는데 이 세상에 무엇을 믿을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내 눈이 나를 속였는데 ,, 무엇을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모든 것을 의심하며 며칠을 어렵게 보내었다는 것이다. 아마 우리 부모도 진짜 우리 부모일까 등등 부터 이었을 것이다. 며칠 동안 모든 것을 의심하는 암흑의 세계였다. 그러는 중에 한 가지 깨달았다. 모든 것을 의심하지만 의심하는 나는 분명이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의심할수 있지만 의심하는 나 생각하는 나는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코기토 어르고 숨. 이 유명한 명제에 기초하여 그의 철학의 기초를 삼았고 근대철학에 큰 공헌을 한 것이라는 것이다.)  

( 데카르트의 ,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코기토 어르고 숨 , 철학계에서 데카르트는 근세 정신적 실재론자의 조상이 된다고도 한다. 그는 한 가지 의심할 수 없는 것은 의심하고 있는 나 이것은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의심하고 있는 나 생각하고 있는 나를 의심하거나 부정할 수 없다는 근거에서 코기토 어르고 숨의 이 명제가 나온 것이다. 데카르트는 기독교 신자로 알려져 있다.)

모든 것을 의심해도 의심하고 있는 나 , 생각하고 있는 나 는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하는 명제가 나왔고,, 근세 합리주의 철학자로,,

그리고 그 철학계에서 그 공헌은 대단한 것 같다.

데카르트가 의심했던 것은 의심하기 위한 의심이 아니었고 무엇인가 확실한 신념을 얻기 위한 의심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이었던 도마도 실은 예수님의 부활을 누구보다도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오히려 절박한 심정으로 가장 확실한 부정을 하였는지 모른다. 진리에 대한 가장 확실한 부정을 통하여 가장 확실한 긍정을 할 수 있는것이다. 진짜이기 때문이다. 진리이기 때문이다.

                                                                                   ( - ing)  # 줄 간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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