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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전제" 이야기(1)

신솔문 (전북동노회,임실전원교회,목사) 2019-09-26 (목) 06:40 4년전 1906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아주 작은 생물을 미생물(微生物)이라고 합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생물은 이미 우리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칩니다. ‘미생물은 힘이 세다는 책도 있지요. 우리의 판단 과정에서도 이러한 미생물 같은 요소가 있습니다. 드러나 있지 않지만 어떤 판단을 끌어내는 과정에 영향을 주는 이러한 판단을 숨은 전제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따라서 백두산도 죽는다.” 많이 들어보는 구문입니다. 그런데 앞 문장에 담긴 판단으로부터 뒤 문장에 담긴 판단을 끌어내는 과정에서 뭔가 빠졌다는 느낌이 드실 겁니다. 바로 백두산은 사람이다는 판단입니다. ‘백두산이 사람 이름이었군요. 이런 판단을 숨은 전제라고 합니다. 화자와 청자가 공히 백두산이 사람이라는 것을 주지하고 있기 때문에 효과적인 의사소통을 위해 명시하지 않은 숨은 전제의 일종입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설교에도 숨은 전제들이 많이 깔려있습니다. 전도 설교를 준비할 때 이 점을 실감합니다. 보통의 설교와는 달리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할지 고민되는데요, 신자가 청중일 때는 언급하지 않아도 되었던 많은 전제들을 불신자 청중에게는 하나씩 집고 넘어가야 하는 데서 오는 막막함입니다. 그러고 보니 예배당에 모여 한마음으로 찬송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것이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주 안에서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숨은 전제가 있는 것처럼 숨은 결론도 있습니다. 숨은 결론이란 화자가 결론을 내리지 않고 청자 스스로 헤아려보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에 관한 예수님의 답변 속에서 이런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을 말로 트집을 잡아 올무에 걸리게 하려는 상황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적게 하실수록 시험에 걸리지 않지요. 예수님께서 황제에게 세금을 내라고 말씀하시면 유대 민족주의자의 반발을 일으키고, 세금을 내지 말라하시면 로마 당국을 자극한다는 것이 그들의 계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함정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22:21)는 말씀으로 피해 가십니다. 함정 판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했든지 간에, 예수님의 답변은 세금을 내야한다는 것도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셨다면 함정에 빠지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만일 가이사의 것이면, 가이사에게 내야한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의 것이라면, 하나님께 바쳐야한다한다는 추상적인 원칙만 제시하셨을 뿐입니다. 이 본문 속에는 로마에 바치는 세금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이 드러나 있지 않은 셈입니다. 이 말씀이 결론이 아니라 진짜 결론은 사실상 숨어 있지요.

 

예수님의 의중에 있는 결론이 무엇인지 본문만 가지고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숨은 전제를 넣어보면 큰 방향은 잡힙니다. 앞의 추상적인 원칙은 예수님의 명시적인 전제입니다. 여기에 가이사의 것하나님의 것에 대한 숨은 전제가 결합되어 결론으로 나아가는 것인데요, “이 세계는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으로 나누어진다.”이 세계는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는 숨은 전제들 중에서 예수님과 어울리는 것이 이 자리에 맞는 숨은 전제라 하겠습니다. 어떤 것이든지 간에 숨은 전제에 따라 결론의 방향이 달라진다는 점을 통해, 드러나지 않지만 생각과 행동의 방향과 힘에 영향을 주는 숨은 전제들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11:6b)는 말씀이 저에게는 신앙생활에서 놓치기 쉬운 전제를 늘 분명히 하라는 촉구로 들립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들은 주님이 반드시 계신 것주님을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것이라는 전제를 부지불식간에 망각하게 되고 그 결과 나태함에 빠지곤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인데요, 그럴 때 이 전제를 분명히 해두는 것만으로 신앙의 생기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 2011년 7월 경, 전북기독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아래 "요 15:2" 글과 이 글을 오래 전 어딘가 링크해놓은 것이 끊어져서 이 게시판에 정식으로 올립니다. 지난 주, 전북/전북동 스콜레에서 신학자 김범식목사님께서 마태복음 22장에 대해 해주신 해석과 비슷하네요.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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