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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부족"이 아닌 "믿음의 일부"

신솔문 (전북동노회,임실전원교회,목사) 2019-08-04 (일) 20:44 4년전 2082  

1.

 

이곳에 온지 7개월이 넘었는데

아직 적응중입니다.

 

농촌 교회는 사계절을 한 번 겪어봐야

리듬을 파악할 수 있을 듯합니다.

 

얼마 되지 않아

예배당 꼭대기의 십자가에

피뢰침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꼭대기가 비교적 높지 않으나 평지에 있어서요)

제 시력이 먼 곳을 잘 못 보기도 하고

요즘은 눈에 잘 안 띄는 피뢰침도 있어서

확신할 수는 없더군요.

5월 경, 집사님들이 십자가에 안전하게 접근할 수 있는 공사를 시작할 때

피뢰침을 직접 확인해보겠다는 말까지는 했는데

지지난 주중까지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지지난 주 휴가 전날

예배당 안전을 점검할 때

문득 피뢰침이 생각났습니다.

근무지를 비우는 기간이라서 그런지

조바심도 생겼고요.

그러나 무슨 조치를 취하고 가기는 늦었고

대신 피뢰침에 관한 결단은 매우 신속하게 하였습니다.

 

여러 해 동안 큰 문제가 없었는데

새삼스럽게 피뢰침을 달겠다고 하는 것이

믿음 부족으로 오해받을 수 있지만

만약 휴가 끝나고 와서 피뢰침이 없는 것이 확인된다면

주저 없이 피뢰침 설치를 추진하겠다.

낙뢰의 원리를 모르면 모를까

알고 있는 이상,

과학적으로 대비하는 것은

믿음의 부족이 아니라 믿음의 일부이다

 

 

2.

 

이러한 착상은

앞에서 말씀드린 베니힌 집회에서 얻은 깨달음과 일맥상통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탄마귀의 개념을

현대에서도 구제할 수 있는 아이디어이고요.

 

 

3.

 

휴가 다녀온 후 지난 주중에

종탑과 피뢰침에 대해 조사를 하다가

참으로 통찰력있는 신학자의 글을 발견하였습니다.

꼭 읽어보십시오.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의 절묘한 조화, "십자가와 피뢰침"

 

                                                                                           김정우(총신대 교수)

 

교회당 꼭대기의 십자가 위에 달린 피뢰침은 어딘가 모르게 약간 방정스러워 보인다. 십자가 위에 피뢰침을 다는 것은 신성모독은 아닐지라도 기독교 신앙에 어울리는 것 같지 않다. 그것은 교회가 겉으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은근히 자연질서를 더 믿는 듯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 같다. 혹시 우리는 피뢰침을 달면서 하나님의 실수(?)를 염려하는 것은 아닌가? 사실 벼락을 맞은 교회도 있고 신자도 많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대학시절에 친구와 함께 길을 걷다가 그 친구가 벼락을 맞아 죽는 것을 보고 바로 신학을 하기로 서원하였다. 만약 그 때 피뢰침이 있어서 벼락을 피했다면, 루터의 종교개혁은 없었을까? 십자가와 피뢰침은 우리에게 초자연질서와 자연질서라는 두 질서 사이의 관계에 문제를 던져 준다. 기독교 신자는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에서도 그를 지켜주실 것을 믿어야 할 뿐 아니라 번개는 높은 곳을 때린다는 자연질서를 지켜야 하는 양면성을 요구받고 있다.

 

이 양면성에 대한 오해 때문에 기독교는 때로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을 믿는 "초자연주의"에 치우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자연과학 질서만을 믿는 "자연주의"에 빠질 때도 있었다. 자연질서와 초자연질서의 갈등은 단지 피뢰침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병이 들 때 의사의 처방을 받고 약을 먹으며 쉬는 자연질서를 따를 것인지, 혹은 기도와 안수와 금식으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을 기다릴 것인지 고민하는 경우가 있다. 특별히 의사가 치료할 수 없는 불치의 병으로 판정을 받은 경우에는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에만 매달리는 경우가 있다. 이런 사람들은 소위 "성령 수술"을 한다면서, 손톱으로 병든 암세포를 파낸다고 하는 "신유의 은사"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모든 병을 "귀신"에게 돌리고 귀신을 내어쫓는 능력을 가진 자를 따르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는 오직 성령과 악령의 두 영 만 있고,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병과 죽음은 모두 악령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귀신과 병을 내어쫓는 능력을 얻기 위해 40일 금식기도도 서슴치 않는다. 이들은 유치한 초자연주의의 한 단면을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

 

기독교의 역사를 돌아보면, 이 세상을 떠나 수도원으로 들어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과 성욕과 혈연을 부인하고 온갖 고행과 수련을 통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과 인격을 가지게 되는 것을 참된 신앙으로 여기던 때가 있었다. 이들은 이상적인 품성과 신비로운 능력을 얻기 위해 자연적인 생활을 장애로 여겼다. 이리하여 이들은 오직 청빈과 순종과 성결이 가장 확실하게 완전에 이르는 길로 보고 자연적인 모든 감정과 이성과 상식을 부인하고, 천상의 인격과 힘을 얻기 위해 정진하였다. 초자연주의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감히 흉내낼 수 없는 믿음의 능력을 과시하는 것 같지만 그 배후에는 무서운 함정이 있다. 초자연주의자들은 우리의 일상생활이 가장 소중한 신앙의 자리인 것을 잊고, 가상적인 신앙의 공간을 추구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인격보다는 능력을 더 강조하며, 기적과 초월을 강조하여 창조 때에 주신 자연질서가 모든 삶의 기본인 것을 잊는다. 이와 반대로, 자연주의자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며 사회인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만, 이 세상의 질서를 넘어 더 큰 질서가 있음을 보지 못한다. 이들은 병이 나도 기도하지 않고 약과 의사만을 의지하며 오직 자신이 심은 것 만 바라고, 자신의 노력과 수고를 넘어 하나님의 은총과 복이 있음을 인정하지 못한다. 한 때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먼 나라로 가버리시고, 이 세상은 오직 자연질서에 맡겨버렸기 때문에, 자연질서만이 하나님의 질서라는 믿음을 가진 적이 있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만드시고, 이후에는 진화의 질서에 맡겨 버렸다고 생각한다.

 

자연주의의 함정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하지 않고, 오로지 이 세상의 사회적 질서와 과학적 질서만을 따르다 보니 꿈이 없고, 기독교적인 초월성과 능력을 상실하는 함정에 빠진다. 이런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의 혼란에 대해 십자가 위에 달린 피뢰침은 기독교신앙의 절묘한 조화를 보여준다. 우리는 피뢰침을 다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자연질서를 따르는 것으로 믿으며, 또한 피뢰침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보지 않기 때문에 십자가를 단다. , 십자가는 자연질서를 넘어 있는 초자연적 은총을, 그 위에 있는 피뢰침은 우리가 자연질서를 존중함을 보여준다. 이런 자연과 초자연의 아름다운 균형은 "집을 지을 때 지붕 위에 난간을 세우라"(22:8)는 법을 통해 나타난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붕을 평평한 슬라브 형태로 만들었기 때문에, 지붕에서 놀다가 사고가 많이 났다. 신명기의 말씀에 따르면, 만약 사람들이 지붕 위에서 놀다가 난간이 있는 곳에서 떨어졌으면 떨어진 자의 책임이며, 난간이 없는 곳에서 떨어졌으면 집주인의 책임이라고 한다. 신명기의 말씀이 주어질 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직접 나타나던 시대였고, 하나님께서 자신이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직접적으로 돌보시던 시대이다. 하나님은 크신 능력으로 이집트의 바로와 그 군대를 홍해에 수장하시고 자기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던 시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 지을 때에는 난간을 만들라고 하신다. 사람의 죽음을 운명이라거나 하나님의 작정이라거나 우연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도 실수로 지붕에서 떨어져 죽을 수 있으므로, 이런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건축학적인 대책을 세우라고 한다.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은 먼저 자연질서를 세우시고, 인간의 죄와 탐욕으로 자연질서가 붕괴되었을 때 초자연질서를 통해 그것을 회복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무지와 죄로 우리가 창조질서를 어겼을 때 구원자로 오셔서 다시 창조질서를 회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십자가 위에 피뢰침을 달지 않는 것은 창조질서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우리는 난간을 세우라는 말씀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모습을 깨닫는 지혜를 얻어야겠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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