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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포스타시스(히 11:1)

신솔문 (전북동노회,임실전원교회,목사) 2019-06-29 (토) 10:47 1년전 1620  

1.

 

휘포스타시스

 

신학에서도 아주 중요한 용어라는 것을 오래 전,

형이상학 수업(전북대 철학과 대학원)을 받으면서

뒤늦게 절감했습니다.

삼위일체에서 ()’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이었기 때문입니다.

 

휘포스타시스라는 용어의 주가를 높여놓은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보통 실체(實體)’로 번역됩니다.

그래서 삼위일체에서 ()’에 상응하는 용어일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에 상응하는 용어는 우시아입니다.

이때 우시아는 본질을 의미하지요.

삼위일체에 상응하는 그리스어 용어를 그대로 풀어내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은 각각 다른 분이나 본질적으로는 같은 분이시다

 

 

본질은 무엇이고 같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후속 논의가

여전히 남아있지만

신학자가 아닌 우리들은 사변적인 영역에 들어가지 말고

일체를 간단히 통일체로 이해하고

신앙생활하시는 것이 유익하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2.

 

히브리서 111절에도 휘포스타시스가 등장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실상이 바로 휘포스타시스입니다.

원어를 거쳐 익숙한 표현으로 바꾸면 1절 상반절은 이런 말씀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이다

 

우리나라 말이지만 여전히 미궁 속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경 번역은

기본 의미가 아닌, 파생적 의미에서 해법을 찾습니다.

 

이를테면 주관성에 맞춘 번역이지요.

믿음의 심리적인 측면에 맞는 의미를 주목하고

확신비슷한 의미로 이해해버리지요.

 

 

3.

 

그러나 객관성에 맞춘 해석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의 핵심 영양소를 파괴하는 잘못을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휘포스타시스에는 동적인 개념이 들어있는데

이 점을 드러낼 때는 실체가 아닌 기체”(基體)로 번역합니다.

어떤 것을 형성하고 완성하는 출발점 내지 토대라고 할까요?

 

이러한 방향으로 해석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는 이런 뜻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을 실현해가는 토대와 같은 것이다

 

믿음의 행위의 하나인 기도를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다 아시는데 왜 기도로 아뢰어야 합니까?

실로 오랫동안 반복했던 저의 표현이군요.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役事)의 재료(토대)가 된다!”

 

 

[추신]

 

(1)

 

하반절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주관성에 맞춘 해석과 객관성에 맞춘 해석으로 나뉩니다.

 

전자는 확신비슷한 의미로,

후자는 증거비슷한 의미로 번역합니다.

 

객관성과 관련 있는 증거”(엘렝코스)로 번역했을 때

이 구절이 말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상반절이 형이상학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면

하반절은 인식론 개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비가 와서 그런지

인식론 가르쳐주신 교수님도 생각나네요.)

 

애초 믿음에는 주관성이 강해서

객관성이 강한 증거과 연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의 잠정적인 이해는 이렇습니다.

생물학에서 세포핵을 관찰할 때 염색을 하지요.

그렇게 보이게 된 세포핵은 엄격히 말해 원래 세포핵은 아닙니다.

염색약에 물든 세포핵이지요.

하지만 이것은 세포핵에 대한 증거가 되지요.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것도 비슷합니다.

믿음이라는 염색약이 들어갔지만

염색약 같은 믿음도 증거의 요소가 되지요.

 

(2)

 

며칠 전 새벽기도회 때 나눈, 히브리서 111절 말씀을 휘포스타시스로 해서 이 글을 만들었습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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