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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생명을 살리는 동력-

이기영 (전남노회,,목사) 2019-06-14 (금) 04:12 4년전 1941  

성령, 생명을 살리는 동력-2019년 성령강림절에

사도행전 2:1-13

2019616

1. 시작하며-성령, 생명을 살리는 동력

사도행전에서 성령을 주로 성령이라고 언급되며(39), 때로는 (11)또는 주님의영(2)으로 불립니다. 성령은 아버지의 약속으로 주어집니다(1:4,24:49). 무엇보다도 사도행전 233절에서,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 메시아의 역할과 위치는 그에게 성령으로 기름 부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10:38, 1:35, 4:18).

성령의 역할이 오히려 능력을 행사하는 하나의 힘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성령은 사도행전에서 인격적 모습보다는 활동하는 능력으로 기능합니다. 구약성서에서 영을 표현하는 언어 루아흐(ruach)378회 나오고, 바람, , 으로 사용합니다. 이렇게 자주 나오는 루아흐는 자연, 사람, 하나님과 관련하여 나타납니다. 루아흐는 어떤 역할을 하였을까요? 하나님의 창조활동과 생명의 보존운동을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한 기관입니다. 루아흐가 이스라엘민족의 지도자들이나 사사들에게 임할 때 큰 힘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예언자들에게 임할 때는 예언의 카리스마(은사)가 됩니다. 율법을 깨우치는 지혜가 루아흐의 활동입니다. 루아흐는 인간의 의지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역자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신약성서에서 성령은 프뉴마, 바람이고 회개와 역사와 세례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성령은 예수를 그리스도와 주님으로 고백하게 합니다(2:38). 한스 큉은 성령에 대하여 말하기를 성령은 여러 가지 면에서 교회의 존립의 기초요 생명원리이며 활동능력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에서 오는 성령에 의하여 충족되고 생활하며 유지되고 인도된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피조물입니다. 교회는 성령이 활동하고 있는 성전이요 건물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전입니다(고전3:16-17, 2:17-22). 본래 성령은 바람과 같은 속성이 있는데, 바람은 자기가 원하는 때,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데로 분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성부와 성자의 뜻을 받들어 교회를 직접 세워갑니다.

따라서 2019년 성령강림절기에 우리의 관심은 한국교회와 사회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에 대하여 성령강림의 의미와 이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역사의 과제를 바르게 깨닫고 실현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성령, 생명을 살리는 동력입니다.

 

2. 어떻게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며 능력인가?

성령강림절에 내려온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요, 그의 정신이 살아 움직여 말씀을 되살아나게 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든 사역과 행동의 밑바탕에는 성령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공생애로 시작되는 하나님나라운동이 세례/기도/성령의 강림(3:21-22)의 순서로 이루어졌는데, 초대교회도 오순절의 성령강림과 함께 시작합니다(1:5, 2:1-13). 초대교회 공동체의 사도들과 성도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성령의 능력을 제공받았고, 그 이후 부여된 사명을 담대하게 수행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언제나 성령을 따라 행동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을 경험한 초대교회는 성령의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을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인 로마까지 복음을 전달하는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했습니다. 이방인 선교로 일컫는 만민구원의 행진은 예루살렘 성전 경내를 넘어 세상을 모두 포괄하도록 힘차게 달려 나갔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은 능력을 합의하는 뒤나미스, 헬레니즘 시대에는 모든 생명과 존재를 작동시키는 우주의 원리를 지시하는 용어로 쓰였는데, 하나님의 본질인 그분의 능력이 언제나 성도들과 함께 하신다는 공식적인 지표로 쓰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본질이 능력이므로, 성령을 수여 받는 것은 성도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려는 역동적 장치가 됩니다. 그러나 성령이 능력으로 임할 때 나타나는 모습은 매우 다양하고 활동적입니다. 그렇다고 뒤나미스가 수퍼맨이나 헥폭탄의 파워와 같다는 말은 아닙니다. 대신, 성령은 생명을 살려내고 관리하며, 사마리아의 백성들이 고통당하는 을 풀어주고, 그리고 절망적 탄식을 내뱉으며 신음하는 인간고통의 자리를 직접 찾아가 해결하게 돕습니다. 성령은 성도들에게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능력 안에 머물 수 있도록 도우며, 세계만민이 궁극적 구원의 자리에 참여하도록 선도하는 새 언약의 징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세속화의 물결과 함께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도덕률마저 그 기준이 흔들려 무너질 정도입니다. 그리스도인 또한 기복과 물량, 자기욕구충족을 하나님의 뜻이나 예수의 가르침보다도 더 중히 여깁니다. 그러나 성령강림절은 이런 역사 속에서 신음하는 참된 하나님의 사람들을 다시 일깨우며 새롭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독려합니다. 바로 이런 역사가 성령강림절의 다른 의미입니다. 오늘 도덕적으로 피폐하고 물질만능주의 사회 속에서 성령 충만한 인간과 세상풍조의 변화는 절대적으로 요청됩니다.

성령 받은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자기중심적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라 이웃과 세상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중심의 삶으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하나님께로 옮겨져 갑니다. 즉 그가 사랑하고 염려하는 중심의 축이 자기가 아니라 이웃과 세상으로 옮겨졌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성령 받은 그리스도인은 신령한 은혜를 받았기에 아픈 역사의 현실을 외면한 채 비역사적이며 초현실적인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이상한 괴성을 내며 방언을 하는 것에서 영적인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오래 전, 한 사이비 이단집단이 성령이 내려오는 증거라며 검은 하늘에서 불꽃같은 빛들이 위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큰 사진을 자랑하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결코 그런 괴성이나 사진이 찍히는 물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현상을 한국교회가 혹시라도 선호한다면 큰 약점이고 거짓인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을수록 예수님의 역사적 생애와 그리스도의 정신과 생이 뚜렷해지고, 역사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바로 그 시대 그 장소의 십자가를 껴안고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존 맥캐이(John A. McKay)박사는 프리스턴 신학교 총장이던 시절에 이따금 교실강단에서 생기 없는 장로교인보다 고함을 지르면서라도 열광적인 펜테코스탈(Pentecostal)한 신자들이 차라리 낫다는 말을 자주 했다 합니다. 왜냐하면 생기 없고 다 죽은듯한 점잖은 장로교인을 죽은 상태에서 일으키는 것보다 한 페테코스탈한 그리스도인을 조용히 달래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의식화된 교회도 이 같은 핀잔의 대상이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복음이라는 기쁜 소식(Good News)을 듣고 감사감격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힘을 얻어 세상에 나아가 힘차게 복음전하는 열정과 사회정의를 위해 때로는 투쟁하며 진리증언자로 살아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서와 그리스도교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변두리 인생 같은 고난의 역사를 꼭 부정적으로만 치부할 것이 못됩니다. 가난을 잘못 받으면 비굴하되 긍정적으로 받으면 위대한 능력의 자원이 되어 대성케 합니다. 버려진 변두리 생 같은 애굽에서 히브리노예들도, 로마제국치하 지중해 변두리를 헤매던 초대 그리스도인들도 저들이 그 시련과 박해를 하나님과 함께라는 신앙, 희망, 사랑을 갖고 긍정적으로 살았기에 서구문명을 일으키는 주역이 된 것입니다. 성령의 은총과 감화 감동으로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깨달아 새 힘을 얻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당면한 난관, 사회적 모순들 속에서도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이 아니라 저 가나안의 새 꿈과 비전을 바라보면서 기쁨과 새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분단시대의 아픔(십자가)의 쇠사슬을 끊고 반드시 통일(부활)의 꿈과 비전을 갖고 평화행진을 꾸준히 계속하는 그리스도인들이어야 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확실히 성령 충만의 체험이었으나 현실을 외면한 비역사적이거나 탈 세상적인 신비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었다는 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성령체험은 저 피안의 세계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언자로써 눈물과 한()으로 찬 고난의 세계에서 이기적인 자아를 극복하고 이타적이며,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이룩하기 위한 역사에 동참한 것입니다.

 

3. 1907년 성령강림의 의미와 이해

한국교회는 지난 2007년에 평양에서 성령운동이 일어 난지 100주년이 되는 매우 뜻 깊은 해로 기념한바 있습니다. 성령강림, 성령충만, 성령의 부으심, 성령의 하강 등으로 표현되는 1907년의 성령운동의 그 종교적-사회적 의미를 길선주목사의 성령운동을 통해서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1907년 성령강림사건은 교인들의 회개운동을 통해서 신앙을 강화했고, 그것은 항일의식을 조직화하고 민족운동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1907년 성령운동 전후에 일어난 교회의 애국적 행동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 길선주목사의 국가를 위한 기도회제안, 105인사건(1912), 3.1운동(1919), 물산장려운동(1920)에서 교회가 주도적 역할을 한 역사적 사실들을 고려할 때 과연 한국교회가 선교사들의 의도대로 비정치화 되었거나 혹은 1907년 성령운동의 결과로 비정치화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1907년 성령운동을 통해서 하나님을 체험한 교인들이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는 사람이 나라도 사랑하며 민족고난에 참여한다는 敬天愛人의 신앙을 1907년 이후에도 일관되게 견지하였습니다. 12년 후 19193.1운동 때에 역사 참여적 신앙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민족과 민중의 고난에 동참하는 애국적인 민족종교로 사람들에게 각인되었고, 교인들은 애국자로 백성들의 칭송을 받게 되었습니다. 1907년 성령운동의 주역이었던 길선주목사의 행각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오랜 구도생활을 하다가 이길함 선교사의 설교에 크게 감동을 받아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1897815일에 세례를 받았고, 그 이듬해 널다리골 교회의 영수가 되었으며, 1901년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인 최초의 7인 목사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당시에 그는 조선의 바울로 불리었으며 목회자요 교육자요 독립 운동가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체험, 사회적 복음이해와 종말신앙을 바탕으로 사회개혁운동, 민족교회형성과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즉 그는 1907년 성령운동을 개인의 내적 변화를 통한 교회갱신과 사회개혁은 물론 민족해방운동으로 발전시켰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강조하면서 고난당하는 민중을 위로하고 민중에게 새로운 사회에 대한 종말론적 희망을 선포했습니다.

길선주목사는 그의 하나님체험에 근거한 종말신앙과 사회적 복음이해를 통해서 교회갱신과 사회개혁과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의 종말신앙은 결코 민족현실을 외면하는 타계적인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일제의 통치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였으며 일제의 혹독한 식민지통치하에서 고통당하는 민중에게 새로운 사회가 도래한다는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실로 1907년 성령운동은 36년 동안 일제의 식민통치를 견디어 나갈 에너지를 공급해 준 축복의 사건이었습니다. 이러한 1907년 성령운동은 21세기 한국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회개를 통한 성령체험과 그 능력으로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고 민족통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길선주목사는 민족교회형성의 선구자였습니다. 그의 정신은 1930년대에 최태영의 기독교 조선복음교회운동,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운동과 김재준의 교회와 신학운동을 통하여 계승되었습니다.

 

4. 성령의 신학적 이해를 위한 역사적 고찰

교회사에서 대표적인 신학자들의 성령이해에 대한 고찰을 간단하게 스쳐보겠습니다. . 어거스틴은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의 끈이라고 간주했습니다. 즉 그는 성령을 아버지와 아들만이 아니라, 신자들까지를 함께 묶는 끈으로 보았으며, 모두를 하나로 묶을 때 성령은 그 소임을 한다고 보았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어떻게 성령을 이해하였을까요? 루터는, 옛사람이 율법에 의해서 죽고 복음에 의해 살게 되는 일을 성령의 역사라고 했습니다. 루터가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에 관해 해석한 요지를 따르면, 성령의 사역은 하나님이 그의 뜻을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서 이루려 할 때 가장 효과 있게 성사되게 하는 동력입니다. 성령은 신자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게 하며, 사랑으로 충만하며, 그의 이웃 동료들을 환희에 차도록 섬기게 합니다. 마음을 변하게 하며, 새롭게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선포함으로써 이를 성취합니다.

성령에 대한 칼빈의 가르침은 좀 더 적극적이고 포괄적입니다. 칼빈은 성령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회개에 큰 사역을 담당한다고 말합니다. 신앙을 시작하고 성장케 하는 것이 성령이요, 이는 마치 태양이 모든 물체에 비치는 것과 같습니다. 칼빈은 회개는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진심으로 전환하는 것이라며, 성령만이 이런 회개를 가능케 한다고 말합니다. 칼빈에 따르면, 성령의 성화에 의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영적 본성이 주어지며 죽음과 부활로부터 중생(거듭남)을 받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화와 중생의 원인은 성부로부터, 그 실체는 그리스도로부터, 그 결실은 성령으로부터 특별히 받게 됩니다(<기독교강요>IV 15:6).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임재 하되, 그 임재를 가능케 하는 것이 성령의 능력이라고 칼빈은 증언합니다.

현대 신학자들은 성령의 이해를 어떻게 하였을까,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에밀 부르너에 따르면, 성령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임재 하는 존재양태입니다. 성령의 가장 중요한 일은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존재케 하는 일이라고, 즉 그리스도는 살아있는 인격적 존재로 우리가 알 수 있도록 증거 합니다. 무엇보다도 성령은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말씀이 되게 합니다. 진정한 사람이 되는 것도 성령의 사역으로 가능합니다. 따라서 성령은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증거 할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창조하고 섭리와 행동의 능력까지를 창조합니다(부르너, <교의학> 3).

칼 바르트의 출발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의 신비스런 자아 계시입니다. 바르트에게 있어선, 아들, 아버지, 영의 순서가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것이 중심이고 제1위입니다. 삼위일체의 제2위의 신성은 아버지의 신성이요, 3위는 영의 신성입니다. 바르트는 이점을 그의 <교의학>1/1권에서 잘 보여줍니다. 따라서 그에게 성 금요일, 부활, 오순절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일어난 사건으로서, 아버지와 성령을 통해서 우리와 만나고 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나타내며, 그것이 삼위일체의 참모습입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그의 <조직신학> IIIIV, 생명의 영 에서 오순절의 이야기는 역사적이며 전설적이며 신화적인 요소들이 복합된 것(combines historical, legendary & mythological elements)이라 봅니다. 그리고 이를 가능성의 빛으로 구별하는 것을 역사적 연구의 과제로 넘깁니다. 오순절 성령사건에서 우리가 추구할 중요한 점은 여러 요소들로 된 성령에 관한 이야기에서 그 상징적 의미(symbolic meaning)를 찾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보며, 다음 몇 가지 요소로 구별합니다.

1) 영적 공동체(Spiritual Community)의 창조적인 황홀한 성격(ecstatic character)입니다. 오순절 사건은 제자들이 그 동안 듣고 배우며 기다리던 주의 말씀과 약속들이 황홀하게 어울려 체험된 간증이야기입니다. 그들의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되고 미쳐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영과 은혜가 제자들의 혼신을 뒤흔들 만큼 황홀하게 휘 잡은 사건입니다. 이러한 황홀한 체험 없이는 영적 공동체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2) 오순절이야기는 새로운 존재(the New Being)가 되게 하는 예수가 십자가위에서 살해됨으로 거의 멸절 위기에 있던 한 신앙을 창조한 사건입니다. 갈릴리로 잠적한 제자들에게 영적 현현이 그들을 붙잡고 그들의 신앙을 다시 세워준 뒤에 새 신앙공동체로 나타났습니다. 오순절사건에서 의심이 극복되고 확신을 갖게 되자, 비로소 이런 신앙의 확신 없이는 영적 공동체는 있을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3) 상호봉사, 특히 나그네와 가난한자들의 필요를 채운 사랑의 창조입니다. 오순절이야기에서 사랑이 창조한 봉사의 빛으로부터, 우리는 사랑에 스스로 복종하는 자세 없이는 영적 공동체는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합니다.

4) 일치성의 창조입니다. 영적 공동체는 각각 다른 개인들, 국가들과 전통들을 성찬과 예배에 모으면서 연합하는 효과를 갖습니다. 제자들이 황홀한 각국언어 사용은 바벨탑에서 공통언어 사용의 붕괴로 인류가 여러 종족으로 갈리던 사건이 언어이해로 다시 복귀되는 상징성을 갖습니다. 이런 빛으로 모든 인류의 소외된 족속들이 궁극적으로 재결합 없이는 영적 공동체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5) 오순절이야기 속의 요소는 성령 임재로 붙들린 자들의 선교적 열의에 찬 보편성의 창조입니다. 오순절사건으로 모든 종족의 담을 넘는 선교가 가능했고, 신앙공동체가 새로운 존재가 되어 새 역사를 펼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를 종합하여 우리는 신적 영은 그리스도라는 예수의 영이요, 그리스도는 모든 영적 주장이 복종할 기준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강림의 의미를 잘 터득하며, 그런 영적 공동체가 오늘 이 땅에서 다시 펼쳐질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교회와 성도들의 몫이고 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 어거스틴,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 신정통주의 신학의 부르너, 바르트, 틸릭히 등의 성령에 대한 사상이해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는 성령에 관한 개신교전통에 흐르는 최소한의 신학사상을 살펴본 것입니다.

 

5. 나가며-오늘의 성령탄식, 희망사항

기독교적 사랑인 아가페義愛라고 풀이한 김교신은 사랑이 의롭기 위해서는 역사와 복음을 냉철히 해석할 수 있는 의식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키신저(Henry Kissinger)가 미 국무장관 재직 중에 유엔연설에서 남긴 말입니다. 미국은 세계로부터 도망칠 수도 없고 세계를 지배할 수도 없다. 그와 같이 지구상의 어느 나라도 이 세계로부터 도망치거나 남을 지배할 수는 없다. 이제는 지구촌이 서로 어울려 살고 도우며 살고 힘을 모아 평화를 이룩할 때입니다. 오늘 한반도의 정세는 평화와 상호신뢰를 위한 도상에 있습니다. 한반도의 핵위협과 분단비극을 종식시키는 현실적이고 합리적 길은 핵무기포기와 평화협정의 동시병행론인데, 그것을 가로막고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한반도를 둘러싼 이해당사 국가들의 소위 국가주의 때문입니다. 특히 미국과 일본 중국의 국가주의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 그리스도인은 참 종교, 참 정치의 실현을 희망하면서 권력화된 거짓종교 종교화된 거짓정치와 대결, 프로테스트, 비폭력 저항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사람답게, 그리스도인답게, 성령 체험한 사람답게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령의 탄식소리를 들으며 평화의 통일을 희망하며, 노르웨이 오슬로 구상은 한반도 비핵화나 통일이후가 아닌, 남북 주민들이 지금 누릴 수 있는 평화를 함께 체감하고 누리면서 이를 비핵화와 분단극복의 동력으로 삼자고 했습니다. 이제는 북-미 교착 국면에 돌파구가 열릴 수 있도록 남..미 모두 힘을 쏟아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기원합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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