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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에 대하여

이상호 (대전노회,공주세광교회,목사) 2019-05-18 (토) 09:42 4년전 2355  


5.18 민주화운동에 대하여


필자는 1978년에 보안부대에서 제대하고 79년에 복학하여 10.26을 겪고 1980년에는 신학교 졸업학년에 고향 판교교회 교육전도사로 부름을 받아 주중에는 서울에서 공부를 하고 주말에는 교회에서 업무를 하고 있었다. 필자는 보안사 요원이었고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이었기에 음지에서 군과 나라의 안보를 위해 충성해야지 양지에 나와 권력을 잡아 흔드는 일은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5월에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전면에 나서면서 대학에서는 시위가 한창이었다. 15일에는 서울역 광장에서 무려 10만이 모여 민주화를 부르짖는 데모를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1989. 3. 8 KBS가 방영한 ‘광주는 말한다’의 정중앙에 익산에서 목회하고 있는 김은경 목사 등과 함께 어깨 걸고 시위하는 장면이 그대로 잡혔었다.


5.18에는 전국에 계엄령이 확대되고 각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답답한 시기였는데 광주에서는 그 피비린내 나는 항쟁이 있었지만 고립무원이었다. 양지는 전두환 정권에 대해서 무척 반대하였고 급기야 87년 성전에 최루탄까지 얻어맞았다.


오늘은 5· 18광주민중항쟁 39주년 째 맞는 날이다. 그러나 학살자는 여전히 큰소리치고 피해자는 아직도 고통하고 있다면 문제다. 그러기에 광주항쟁은 끝난게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역사는 박정희쿠데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1년 박정희 일당이 만든 한반도 남쪽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동토(凍土)의 공화국이었다.


5.18은 박정희정권 18년에 이어서 전두환, 노태우 13년간의 군사정권의 시대 서막을 여는 피의 극?이었다. 이름은 군복을 벗고‘민정으로 이양’했지만 사실은 국민의 입과 귀에 자물쇠를 채우는‘국가보안법’으로 무장하고 보도 자료로 언론의 입에 족쇄를 채워놓고‘한국적민주주의’라는 말까지 지어내 유신과 군사정권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5월 18일 광주에서 전남대생 200여명이 휴교령이 내려진 학교에 들어가려다 계엄군과 충돌하여 다수의 사상자들이 발생하였고, 이를 본 시민들이 합세하여 시위를 벌였으나 계엄군의 폭력 진압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항쟁이 촉발되었다. 5월 19일 시위대가 5,000여명으로 불어나자 계엄군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5월 20일 20여만 명의 시민이 군경 저지선을 뚫고 시청 건물을 장악하였고, 계엄군은 모든 시외전화를 끊어 광주를 고립시켰다.


5월 20일 밤 11시경 계엄군이 시민을 향해 발포하여 수많은 사상자가 속출하자 이를 보다못한 시민들은 무장을 하고 시민군을 조직하였다. 5월 22일 시민군은 도청을 장악하고 5· 18 사태 수습 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수습에 들어갔으나 계엄군의 거부로 협상은 결렬되었다. 5월 27일 병력을 증강시킨 계엄군은 도청으로 진격하여 최후 항전을 벌이던 시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등 10일간의 항쟁에서 사망자 166명, 행방불명자 54명, 상이 후유증 사망자 376명, 부상자 3,139명 등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남기고 광란의 살상극은 막을 내리게 된다.


이미 역사적 심판이 있었지만 북한 특수군 개입이라 말하고 당시 반란과 국민을 향해 총을 겨눴던 전두환 일당은 권력을 잡고 부를 누려 왔다. 만약 북한군이 개입됐다면 그 많은 적군이 침투할 때 보고만 있었던 정치군인들은 벌을 받았어야 하는데 모두 진급하고 권력의 주변에서 부를 누렸다. 역사왜곡, 5.18 폄훼가 도를 넘고 있다.


5.18 39년을 맞는 지금도 학살자는 국가원로로 대접받고, 모교인 대구공고에는 ‘모교를 빛낸 동문’으로, 그의 고향 합천에는 일해공원(전두환의 호)을 건립해 그를 추모하고 있다. 헌법질서를 파괴하고 광주시민을 학살한 살인자가 활개치는 나라에서는 민주주의를 말하고 정의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광주 민주화 운동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결정적 계기가 됐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과 민중의 의지를 대내외에 드러내었고 반민주, 군사독재의 야만성을 세계에 폭로하였고 민주주의를 향한 민중들의 항쟁의지를 보여준 사건이었으며,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어 오늘 우리 역사가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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