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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님의 거룩한 백성

이기영 (전남노회,,목사) 2019-01-26 (토) 11:46 5년전 2947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A People Holy to the Lord)

신명기 7:6-11

베드로전서 1:15-17

2019-01-27

1.

거룩이 분리를 의미하는 것은 성()과 속(), 창조자와 피조자, 하나님과 인간의 분리를 가리킵니다. 즉 전적인 타자(他者)를 거룩한 존재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몇 가지 단계에서 이스라엘의 신앙역사에 나타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중심하여(18:27), 야곱의 벧엘에서 가진 꿈에서(28:17), 모세에 대한 계시사건에서, 그리고 아모스는 하나님을 거룩한 존재로 보았고(4:2), 호세아도 하나님을 거룩한 존재라고 했습니다(11:9). 특히 이사야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보았습니다(1:4, 5:19). 2이사야도 야훼를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보았습니다(41:14-16).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함은 인격적인 거룩이며, 그 거룩은 이스라엘에 국한하지 않고 역사의 모든 영역에서 활동하는 적극적인 거룩으로 되어있습니다.

신약에서 거룩은 하그우스(hagws)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고전 희랍어인 하고스(hgos)에서 왔는데 공포의 대상, 존경의 대상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신약성서의 거룩 관념은 구약성서의 전제인 하나님을 거룩한 존재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가 거룩하고, 둘째는 하나님의 영이 거룩하며, 셋째는 교회와 신자가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은 성서에서 성령으로 많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한 백성이라 할 때, 그리고 신도를 성도라고 부를 때에도, 그것은 그들 자신의 내적 거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야훼와의 관계점에서 그렇게 불려집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2.

구약본문 말씀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간곡히 당부하는 설교 중 한 부분입니다. 모세는 40년간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가나안 땅 입국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의미심장한 자세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너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그의 백성, 즉 성민(聖民, a people holy)으로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19:6)고 했습니다. ‘성민이란 거룩한 백성(holy people), 하나님께 바쳐진 백성(consecrate people)이라고 했습니다. 어근(語根)으로 보아 분리’(separation), ‘구분’(divide) 외에도 새로움’, ‘순수함’, ‘빛남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에서 구분하여 하나님께 드려짐, 하나님의 소유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하나님이 지상(地上)의 모든 민족으로부터 특별히 택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말씀한 하나님의 성민이란 그 뜻은 거룩한 백성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존재이며,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께 속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백성은 언제나 하나님의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됩니다. 시편 115:12절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라고 했습니다. 생각은 마음으로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항상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거룩한 백성은 결코 자기 의지에 따라서 생각하거나 판단하거나 행동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과 의지에 따라 행동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의식(意識)은 그리스도인다운 사람을 창출하는 동기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능케 하는 능력의 샘터가 됩니다.

둘째는 너희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이유와 이스라엘을 택한 이유 3가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본문 7절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수적인 힘이나 양적인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마음이 가난하여 온유한 자와 겸손한 자를 선택하십니다. 민수기 12:3절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선택받은 이유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은총에 의한 것이며 인간의 어떤 공로나 조건에 의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8절에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라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이스라엘을 열국 중에서 선택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agape)는 영원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 사랑, 다함이 없고 제한이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의 조건이 어떻게 변해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미쁘시고 일향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9절에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의 신실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千代)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하신 것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열조들과 약속하신 것을 지키기 위하여 애굽 왕 바로의 종노릇하는 이스라엘을 속량했습니다. 속량(贖良, redemption)은 원래 나의 소유였던 것이 무슨 일로 말미암아 타인의 소유가 되었을 때 거기에 해당하는 대가를 지불하고 다시 찾아와서 나의 소유가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의지(意志)에 따라 행하여진 사건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함의 동기(動機)입니다.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는 구원사건은 십자가 신앙의 기초가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셋째는 그런즉 너는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11)고 합니다. 이 말씀은 거룩한 나님의 백성의 책임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거룩히 성별된 하나님 백성의 책임은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지키는 일입니다. 주님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면 하나님은 천대(a thousand generation)에 이르도록 복을 주시고 인애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지키지 아니하면 당대에 징계하시겠다는 경고입니다.

 

3.

신약본문: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5)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1:16). 우리는 오늘의 삶의 상황과 역사에서 새 이스라엘이 된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현주소와 체온(體溫)을 재는 바로미터가 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주님의 부르심 받은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삶이겠습니까? 믿음이 기초가 되고 인격의 품위를 아름다고 가치 있게 높일 수 있는 조화된 신앙인입니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다.”(벧후1:3)는 말씀이 있습니다. 신의 성품을 나누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성령과 밀접한 관계를 가짐입니다. 곧 그의 도덕적 품성, 그의 거룩한 목적, 그의 구원하는 사랑, 그의 새롭게 하는 빛, 그의 공정에 대한 관심, 그의 무한한 연민, 그의 순결한 정의와 평화를 만드는 일, 그의 승리적이요 우주적인 섭리 속에 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 뿐 아니라 그의 본성을 나누는 삶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역사학자인 브룩스 아담스는 미국의 건국 공로자들 또는 초기 대통령들, 조지 워싱턴, 벤자민 프랭클린, 존 아담스, 토마스 제퍼슨, 제임스 메디슨 등 이분들의 공통점은 높은 도덕성과 인권감각을 가졌다는 점이고, 이들의 도덕성과 인권의식이 미국 민주주의 발전에 정신적 힘이 되었고 건국의 토대가 되었다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권력과 돈, 지식과 힘을 가진 자일수록, 특히 사회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는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한 도덕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에 대해서는 인격 존엄의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 때 아모스 선지의 외침처럼 정의를 강물같이 흐르게 하는사회를 이룩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과 나라가 혼란되고 전쟁을 일삼는 것도 높은 도덕성과 그리스도인다운 거룩한 삶과 평화 위해 일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출현을 대망하고 있습니다.

 

4.

A. 토인비는 우수(憂愁)의 도식(圖式)’으로 역사를 관찰했는데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인간의 비참한 역사는 일종의 구속사가 되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갈대아 메소포타미야 문명이 한 바퀴 일어났다가 굴러 넘어가는 시대의 깊은 우수를 체험한 이들 가운데 아브라함과 같은 높은 영성을 가진 이가 났습니다. 애굽 문명의 수레바퀴가 일어났다가 굴러 넘어가는 때에 역사의 비극을 경험한 이들 가운데에서 모세가 났습니다. 바벨론 문명의 바퀴가 넘어가는 시절에 제 2이사야가 났으며, 헬레니즘의 비극적 종막에 사도 바울이 났습니다. 또한 로마제국의 영원한 도시 로마가 게르만의 알라릭의 말발굽에 유린당하고, 그 불길에 무섭게 타오르는 시절에 성 어거스틴을 산출한 것입니다. 시대의 우수를 이렇게 경험할수록 사람들의 영은 더 높은 경지로 승화합니다. 그렇기에 토인비는 최고 최종적인 영도자는 나사렛 예수와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한 개인 한 사람의 심령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킨다고 했습니다. 그 방법은 서로 봉사하고 사랑하는 방향이며시대와 역사의 고뇌, 짐을 짊어짐으로써 입니다이것이 현대문명, 역사를 구하는 길이라고 합니다.

스위스의 교육자 페스탈로치는 몸을 단련시키는 체육학교도 있고, 머리를 단련시키는 지식학교도 있지만, 가슴을 단련시키는 마음의 학교가 없으니 안타깝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심정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면서 우리의 교회가 이 땅의 마음의 학교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마음의 학교이며, 병든 마음을 고치는 마음의 병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음학교의 최고 스승이시며, 마음병원의 최고 의사이십니다. 사도바울을 말씀하기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고 했습니다. 오늘 새 이스라엘이 된 그리스도인의 책임은 무엇입니까?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들어오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이암아 마음이 거듭나고 새로 변화되어야 하고, 새로워진 하나님 백성이 된 우리는 우리와 사회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촉매역할을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 책임의식(責任意識)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5.

어떻게 부활신앙과 거룩한 백성, 그리스도인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1장에 의하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하고 외치심으로써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일으켜 부활해 내신 주님이셨습니다.

나사로를 죽음에서 부활시킨 주님의 놀라운 기적을 통해 신앙에 눈 뜬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1828-1910)는 일흔 살이 넘는 나이에 마지막 걸작품 부활이란 작품을 썼습니다. 일찍이 그의 참회록에서 톨스토이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젊은 시절은 공명심, 권세욕, 사욕, 애욕, 자만심, 분노, 복수심이런 정열에 불태우던 시절이었습니다. 나는 전쟁에서 숱한 사람을 죽였고 도박을 했으며 유부녀와 간음했으며 만취, 폭행, 살인 등 저지르지 않은 죄악이 없었습니다. 내가 글 쓰는 것은 오직 명예와 돈을 얻기 위해서였으며 문인들과 교제함으로써 추파와 아첨을 소나기처럼 덮어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명성과 부에도 불구하고 톨스토이는 열 번에 가깝도록 자살을 기도한 바 있습니다.”

말년에 톨스토이가 빛은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난다고 탄식하였듯 어둠의 무덤 속에 이미 죽어있던 톨스토이에게 어느 날 톨스토이야 나오너라고 한마디 함으로써 톨스토이를 부활시킨 빛의 주님이십니다. 톨스토이는 이로부터 죽음에서 일어난 새 사람이 되어 마침내 부활이란 소설까지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입구(入口)는 돌로 막혀 있는 무덤 속에서 죽어있는 사람들입니다. 톨스토이의 표현처럼 공명심, 권세, 이기심, 애욕, 자만심, 분노, 복수심, 쾌락의 어둠 속에 갇혀서 우리들의 몸에서는 이미 죽은 사람들의 몸에서나 맡을 수 있는 악취까지 나고 있는 것이 우리 인간 군상의 현상 아닙니까!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를 위해 눈물을 흘려주소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여 주시고 큰 소리로 외쳐서 우리를 부활시켜 주소서. 거룩한 백성, 그리스도의 현존(現存)으로 일으켜 주소서.

 

6.

그리스도인 영성에 독특한 주장을 한 사람은 히틀러의 독재와 인종주의의 악에 항거한 본회퍼 목사입니다. 그의 결정적 인생의 계기는 그가 미국에 온 1939년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서였습니다. 그가 떠나온 것은 히틀러의 징병을 피해 그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입니다. 그러나 불과 5주 동안 미국에 머물며 그의 친구 에베르하드(Eberhard Bethge)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결론을 내린 것을 봅니다. 19397월 뉴욕에서의 서신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기도하며 도달한 결론은 내가 미국에 온 것은 실수라는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국가적 고난의 시기에 독일에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머물며 살아야 했다. 내가 만약 이 시기에 나의 백성들과 함께 시련을 겪지 않는다면, 전쟁 후 독일에서 그리스도인 생의 재건을 위한 참여의 자격이 없게 될 것이다.”

이런 결론을 얻은 본회퍼 목사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귀국하여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하는 결단을 내립니다. 본회퍼는 한 독일인으로서,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의 조국의 악을 중지하고 그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전혀 다른 방법으로 그 자신을 희생하기로 했습니다. 교회가 못하기에 그는 정치적인 항거운동(resistance movement)에 자신이 가담했습니다. 히틀러 살해 음모단의 대표 도난이(Dohnany)칼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예수님의 말에 관해 질문했을 때, 본회퍼는 물론 히틀러 제거를 위해 칼을 쓰는 우리도 아무리 극단의 악한 여건 속에서라 해도 신의 심판은 면할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했습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누군가 자기들의 생명을 바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그는 폭력은 죄라는 확신을 결코 버리지 않았습니다. 히틀러살해 음모 결단을 정당화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히틀러의 목숨을 끊는 방아쇠를 다른 사람이 잡아당기며 그가 신의 심판을 받게 하고 싶지 않기에, 그 신의 징벌에 해당하는 살인죄를 자신이 지겠다고 한 것입니다.

자기가 갈 천국에 저 지옥에 떨어진 한 영혼을 보내 달라던 갸륵한 기도와 맥을 같이 한 기원입니다. 이는 도피가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세계를 사랑하는 살인죄로 자신의 구원을 희생하는 위험을 스스로 자초하는 의지의 행위였습니다. 살해음모죄로 체포되어 감옥 생활을 하면서 보낸 서신에서 본회퍼는 참으로 신앙으로 복종하며 하나님께 충성스럽고 책임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부름과 요구에 그의 전 생명을 바치는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면서 자신의 생명과 자신의 시간을 위해 책임지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이런 생각과 결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신학에 근거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길, 영성은 속세를 떠나 거룩하고 신비한 세계에서 고고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상의 의무, 문제, 성공과 실패, 고통과 외로움, 좌절을 느끼면서 사는 것입니다.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세상을 위해 세상적(worldliness)으로 사는 것입니다. 테젤 감옥에서 본회퍼는 이것이 믿음이요 회개요 그리스도인의 생이며 영성이라 믿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새롭게 하기 위해 이를 이루어 줄 그의 사람들을 계속 필요로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은 오늘날 어떻게 구별된 자로 사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오늘 역사 한가운데서 때로는 홀로 외로이 설 수 있는 자입니다. 우리는 선택된 자요 고귀한 자이며 능동적인 삶의 소유자요

 

만인을 섬기는 종이나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은 자유인입니다. 끊임없는 훈련의 과정을 갖는 예외적인 사람입니다이 길, 순례의 길을 걷는 그리스도인은 무엇인가 다르게 사는 자입니다. 의무가 아닌 사명의 길입니다. 신의 성품, 영성을 나눈 자의 다름은 윤리적인 다름입니다. 불의와 부정 속에서도 정의를 지키는 다름, 이기적 탐욕 속에서도 남을 돕는 봉사와 헌신의 다름, 실망과 낙심 속에서도 희망을 주는 밝음의 다름, 죽음의 선상에서도 노래하며 넘는 다름입니다. 얼마나 숭고한 도덕적 영적인 다름입니까? 이것이 오늘날 우리 역사 속에서 가지는 거룩한 백성의 길입니다.

 

7.

2019년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로 각계에서 그 준비에 분망합니다. 구한말, 일제 강점기하의 교회는 고난 받는 민족의 희망이었습니다. 3·1운동을 비롯하여 일제에 대한 항거와 독립운동에서 교회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고난 받는 민족과 함께 했고, 세상과 연대하며 세상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했습니다. 당시 교회는 선교부와 함께 의료, 학원, 복지 등 각 분야에서 나라 잃고 신음하는 민족의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어떠합니까? 교회에 대한 일반대중의 반응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면, 예수는 예스(Yes), 교회는 노(No)가 아닐까 합니다. 일제 강점기와 지난 1970년대~80년대 군사 독재정권하에서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끼치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던 한국교회가 왜 이런 질책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을까요?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는 한편으로 세속화의 위험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적인 힘과 유행에 자신을 맞추려고 할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다른 한편의 위험은 교회가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신성화의 위험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 앞에서 자기 영화에 몰입할 때 일어납니다. 전자의 위험 앞에서 한국교회는 세상과 구별이 힘들 정도로 비슷해졌고, 후자의 경우에서는 세상으로부터 멀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이 두 종류의 위험의 덫에 걸려들었습니다, 교회가 교회 안팎의 뜻 있는 사람들로부터 호된 질책과 비판을 받는 것은 한편으로는 바로 이같이 세상을 동경하다가 결국 세상과 구별할 수 없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당연한 결과로 세상을 향한 자신의 채임과 사명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福音)이 교회 자신에게 규정(規定)하는 과제(課題)를 다시 새롭게 확증해 나갈 때 교회 본연(本然)의 자리를 확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길이 무엇인가를 다시 확인하고 새 출발을 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사회 양극화혹은 격차사회로 특징됩니다. WCC 벤쿠버 총회(1983)는 당대 선교의 과제를 구체적으로 JPIC(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으로써 인식하고, 오늘 우리 시대에 요청되는 평화는 전쟁의 종식뿐만 아니라 사회 각층간의 차별, 특히 사회적 및 경제적 차별의 근절이 급선무라고 파악한 바 있습니다. 이는 사회정의와 경제정의가 함께 하는 평화를 이뤄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현 상황의 근본 문제를 해결해가면서 남북미 정상 혹은 남북미중 정상이 평화협정을 선언하고, 남북 간에 항구적인 평화 체제가 확립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온갖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하고 그 실현에 총력을 다해야 합니다. 앞으로 한국교회가 100년 전의 3·1운동 당시의 교회의 의거 정신을 회복하기 위해서 세계개혁교회의 시발점의 교회로 돌아가 교훈을 삼아야 한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칼빈의 제네바 교회는 고대 교부들의 가르침을 따라서 교회재정을 4분할하여, 각각 교회당 보수 관리비, 목회자 생활비, 교회 안팎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금, 긴급을 요하는 이방인 난민 구호금으로 사용했습니다. 교회 재정의 50%가 교회 안팎의 가난한 자들과 이방인 난민들을 위한 구제기금으로 지출되었습니다. 이는 성서의 출애굽 공동체와 사도적 교회의 정신을 따르려는 데서 기인했습니다. 만약 한국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를 하나 되게 하는 성만찬의 의미를 되새기며 제네바 교회의 모델을 따라서 교회 안팎의 가난한

 

자들, 약한 자들, 이방인 난민들과 연대한다면, 교회 재정의 절반을, 아니 형편에 따라 최대한의 재정을 기꺼이 그들을 위해 내놓을 수 있다면, 한국교회와 사회를 위협하는 맘몬의 위세는 절로 꺾이게 될 것이며, 한국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참된 평화와 안전을 선취한 샬롬공동체로써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8.

살아있는 성자 포사이드를 펴낸 양국주 서빙더네이션스 대표 이야기.

그는 6년 전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란 이름의 저서평 전기를 통해 한국에도 인도의 테레사 수녀 같은 인물이 있었음을 일깨웠습니다. 의사인 포사이드(1873-1918)1905년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돼 병을 얻어 1911년 미국으로 떠나기까지 불과 5년밖에 머물지 않았지만 지울 수 없는 빛을 남겼습니다.

살아있는 성자 포사이드엔 두 탕자를 구원한 사례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구원이란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고 떠들면서 행실은 뒷받침되지 못하는 그런 류의 구원이 아닙니다.

그 한 사람은 이보한이라는 사람인데, 당시에 포사이드는 자신의 모든 걸 내던진 행동으로 가난한 이들을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 냈습니다. 포사이드는 자신의 귀를 자른 범인을 용서했고, 그의 한센병 환자를 부둥켜안고 치료해 주는 모습에 걸인의 아버지이보한(1872-1931)은 감명을 받아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이후 이보한은 광인 흉내를 낸 채 독립운동을 하면서 부자들에게 돈과 음식을 탁발해 걸인들에게 나눠주었는데, <거두리로다>라는 찬송을 불렀기 때문에 이 거두리로 불렸습니다. ‘이 거두리는 나라 잃은 망국민들과 자신처럼 상처 입은 영혼을 거둔다는 의미였다고 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동네 깡패였다가 개과천선한 최흥종(1880-1966). 포사이드는 1908년 목포에서 활동하다가 광주진료소의 선교의사 오웬이 폐렴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오다가 거적때기 위에 누워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한 한센병 환자를 만납니다. 당시 천형(天刑)인 문둥병 혹은 나병으로 불린 한센병 환자들은 전염을 두려워한 사람들로부터 도움은커녕 돌팔매질을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포사이드는 이 여인을 부둥켜 자신의 나귀에 태우고 병원에 들어섰습니다. 그것이 나환우들을 돌본 여수 애양원과 소록도 돌봄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이때 오웬의 조수로 병원에서 포사이드를 지켜본 최흥종은 큰 변화를 일으켜 나환우들의 아버지가 됩니다. 저자는 포사이드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고 말로 가르친 게 아니었다그의 내면에서 우러난, 소리 없는 행동이 보는 이들의 영혼을 사로잡았다고 설명했습니다.

저자는 조선에 2천명이 넘는 선교사들이 왔지만, 다 서서평이나 포사이드 같은 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며 두 선교사는 마치 조선 사람들처럼 친히 가난한 삶을 살면서 헌신했었다고 하였습니다. 서서평이나 포사이드가 우리 가슴에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건 마지막까지 주님에게 자신을 던져버리고 다 비워버리고 헌신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며 평화 위해 의한 사람들은 하나님나라의 주인공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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