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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이름, 이스라엘이라

이기영 (전남노회,,목사) 2019-01-13 (일) 04:37 5년전 2061  

새 이름, 이스라엘이라 창세기 12:1-3, 22:1-14

New name, will be Israel 32:22-32

(이스라엘 족장들의 신앙역사) 2019년 새해주일

 

1. 서론적 이야기: 아브라함

 

그 동안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의 이야기 대부분은 개인 경건의 모범을 보여주는 본문으로만 읽히거나 이해되어 왔습니다. 믿음과 순종의 문제를 단지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차원으로만 파악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121-3절에 원() 아브람의 약속은 땅, 후손, 임재와 보호, 이름의 창대 등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의 정치적. 공동체적 실체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의와 公道(공도)를 이루는 나라를 형성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18:19, 11:10,16) 따라서 우리는 아브람의 이야기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더욱더 풍요롭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 121-3절에는 이스라엘민족의 형성을 세계사적 지평 속에서 보려는 신학적 성찰이 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선택 받은 민족이라는 자의식을 가졌고, 자신의 역사가 세계만민을 향한 하나님의 보편적 구속(救贖)계획의 도구임을 예리하게 의식하였을 것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네 가지 약속(, 큰 민족, 이름, 임재와 보호의 약속)을 근거로 아브람을 본토친척아비 집에서 불러내십니다(12:1-3). 가장 놀라운 약속은 당대의 대물림도 하지 못하는 아브람을 큰 민족의 조상으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본토친척아비 집에서 창조적인 탈출을 감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증명해 보입니다.

아브람은 세계만민에게 복을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 위해 자신의 본토친척아비 집의 결속에서 분리되어야 했습니다. 정상적인 경우 이 같은 가족적, 혈연적, 지연적 유대에 충실한 것이 죄일 수는 없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는 혈과 육의 유대로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건설되기에 아브람은 가족적 유대로부터 창조적 탈출을 감행해야 했습니다. 이 때 이란 아브람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통로가 되는 큰 민족(위대한 공동체)이 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복의 근원으로서의 삶은 세계만민이 참여하는 복의 시발점이 되는 삶을 의미합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무기력한 75세의 중늙은이와 10살 아래인 그의 아내 사래에게 저항할 수 없는 인생의 전환점, 즉 하나님의 부르심의 말씀이 찾아왔습니다. 75세까지 자식도 낳지 못하고 불임의 세월을 살아온 이 늙은 부부에게 하나님은 전혀 예상치 못한 미래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100, 사래가 90세 때에 약속의 아들 이삭을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 하시는 이 모든 일에 믿음으로 응답하고 순종하였습니다. 할례 받은 아브람은 데라 가문의 씨 족장에서 열국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변화됩니다. 아브라함으로의 변화는 사래의 사라(열국의 어미)로의 변화를 동반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열왕들과 열방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사의 시야를 가지고 자신의 후손(대물림)탄생을 기대해야 합니다.

 

2.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 명령(22:1-14)

 

아브라함은 공포와 전율의 제단에 독자 이삭을 바치는 사건에 직면합니다. 아브라함의 갈대아 우르에서 불려 나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후손에 대한 약속은 25년의 기다림 끝에 이삭의 탄생으로 그 절정을 이뤘습니다. 그런데 창세기22장은 이삭탄생자체가 후손약속의 절정이 아니라 번 제단에서 쪼개진 이삭, 즉 독자를 이끼지 않고 제단에 바친 아브라함의 순종이야말로 후손약속의 궁극적 성취임을 보여줍니다. 한편 그리스도인들은 이삭의 결박 당함 속에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결박십자가상에서의 도살당함을 본다고 주장합니다. 창세기22장은 아브라함의 신앙역사상 최악의 위기였고 동시에 아브라함 신앙의 최고 순종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서적 신앙 안에는 가장 불확실하고 가장 모순적인 요구 앞에서도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뢰하고 허공 속에 자신을 내던지는 것과 같은 모험의 요소가 들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은 다음날 아침 일찍 두 사환과 아들을 데리고 또 하나의, 하나님이 지시한 곳으로 떠나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음과 삶을 초월한 달관의 경지에서 하나님의 산으로 떠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키에르케고르가 묘사한 그 공포와 전율을 가득 안고서 3일 길의 먼 여정을 떠났을 것입니다. 브엘세바에서 모리아산까지의 거리는 100km 정도 됩니다. 아브라함은 3일간의 여정에서 이삭을 얻기까지 겪었던 인내의 세월들, 이삭을 얻고 기뻐한 일, 이삭을 얻고 맏아들 이스마엘을 쫓아냈던 일 등 만감이 교차되는 경험을 하였을 것입니다. 불안과 공포 속에서 보낸 3일은 그가 얼마든지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브엘세바로 돌아 갈 수도 있는 긴 시간이었습니다. 3일간의 여정 끝에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3일 동안 아브라함의 마음에 일관성 있는 믿음의 태도가 유지되었는지 알고 싶었을 것입니다. 산 밑에 도달하여 두 사환들을 돌려보내고, 이삭이 자신을 번제로 태울 장작더미를 지고 반 발자국 앞서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 비장하고 고독한 신앙여정 속에 깃든 침묵을 깨는 이삭의 질문에 그는 피가 역류하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아버지, 나무와 불은 있는데 번제 할 어린양이 어디 있습니까? 이삭의 질문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은 예상외로 답답합니다. 하나님이 번제로 쓸 양을 준비할 것이다(22:8).

이때쯤에는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사태의 진상을 말해 주었을 것입니다. 십대소년 이삭이 노인 아버지에게 잠잠히 결박 당하는 장면을 보면 이 번제 사건이 아브라함 신앙의 절정이면서 이삭의 신앙의 진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순종했지만, 이삭은 하나님과 아버지 모두에게 순종하였습니다. 결박을 마친 아브라함이 빠른 동작으로 이삭을 도살하려고 그를 강압적으로 붙들고 칼을 내려치려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다급하게 간섭하십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11-12). 하나님은 이미 수풀에 뿔이 걸린 채 일찍이 서 있는 한 마리 수양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13). 아브라함의 절망적인 곤경은 하나님의 예기치 않은 준비하심(여호와 이레)때문에 부활의 축제와 환희로 반전되었습니다. 결국 이 시험은 아브라함을 연단하사 하나님과 더 깊은 신뢰를 맺고 믿음의 반석 위에 굳건히 세우기 위한 시험임이 밝혀졌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아브라함은 이미 이삭을 심리적으로는 도살한 셈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사의 본질이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와 의탁과 순종에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결국 천하 만민은 하나님명령에 순종하며 자신의 소중한 아들을 바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왜냐하면 하나님말씀을 듣고 준행한 사람만이 천하 만민을 복되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매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되는 변화와 성숙의 드라마

 

우리는 야곱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통하여 한 평범한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인격훈련과정을 아주 세밀하게 그려주는 그림을 보는 듯합니다. 야곱의 성화과정은 부모 같은 하나님의 훈육으로 인격성장과 진보를 가능케 한 사실을 예증해줍니다. 야곱은 인간적 야망과 운명에 도전하는 투지, 냉혹한 승부사로 인생을 시작하여 청소년기를 종처럼 비천하게 살다가 장년기에 자수성가를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인생황금기인 장년기에 그의 강철 같은 의지가 산 산히 부서지는 경험을 하면서 하나님의 복으로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기에 이릅니다(32-33). 급기야 노년에는 가정의 비극적이고 불행한 사건들로 세속적 욕망을 추구하는 삶의 처량한 한계와 고통스럽게 조우합니다(34-35). 그는 결국 늦은 인생말년에 애굽왕 파라오에게 축복기도를 해 줄 정도로 성숙한 성자로 변했으며, 숨을 거두기 직전에는 손자들과 열 두 아들의 미래를 전망하며 복을 비는 예언자로 변화되었습니다(47, 49).

야곱의 생애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인생의 가장 위대한 의미는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리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성서적으로 말하면 인생이란 하나님의 세계사적 혹은 보편적 계획을 실천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계와 교섭하시지만 가장 미미한 개인과도 교섭하십니다. 모든 개인은 하나님 앞에서 세계를 대표하는 개인이며 모든 개인의 삶 속에도 세계를 향하신 하나님의 보편적인 계획이 작용합니다. 야곱의 인생살이 자체가 평범한 개인의 삶 속에서 작용하는 절대자 하나님의 성스러운 계획의 생생한 증거입니다. 그는 소시민적인 출세 지향적 인생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세계만민을 복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도구로 광활해지는 신앙역정을 살았던 증인입니다. 도덕적으로 결코 선량하다고 할 수 없는 흠이 많고 점이 많은 인생, 야곱이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주인공이 된 사실은 보 잘 것 없는 그저 그런 필부들까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펼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강력하게 증거 합니다.

 

4. 20년만의 귀향길에 오르는 야곱(30:25-31:55)

 

야곱의 밧단아람 타향살이는 그곳에 온지 20년이 채 안되어 요셉의 출생(31:38)과 더불어 끝납니다.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통하여 상속자를 얻은 야곱은 라헬과 레아, 열한명의 아들과 딸 디나를 데리고 귀향길에 오르려 하지만, 라반의 만류로 끝내 지연됩니다. 라반은 아마도 야곱을 데릴사위로 그의 수하에 오래 토록 묶어두려는 목적으로 그의 귀환을 만류하였을 것입니다. 라반은 실제로 전격적인 품 삵 흥정으로 야곱의 귀향을 어느 정도 지연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통하여 야곱은 많은 자식들뿐만 아니라 풍부한 재산까지 얻게 되고 열 번이나 지체된 임금을 일시불로 지급받게 됩니다. 라반의 기발한 귀향 만류 책은 오히려 야곱의 금의환향을 준비시키는 결과가 되었다는 사실이 금방 드러납니다.

또한 야곱은 라반이 전혀 예상치 못한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하얀 염소와 양떼 가운데서 아롱지고 점 있는 양떼와 염소 떼를 생산해 냅니다. 야곱은 자신의 꾀가 하나님의 지혜였음을 고백합니다(31:8-12). 야곱은 하얀 털을 가진 라반의 양과 염소 떼 중에서 가장 튼튼하고 실한 양과 염소가 교미할 때 그들의 눈앞에 나무껍질을 벗겨서 생긴 얼룩무늬와 아롱진 무늬와 점을 보여 줌으로써 하얀 양과 염소가 순간적으로 얼룩무늬 양, 점 있는 양 혹은 아롱진 양으로 바뀌도록 조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들을 벗겨 교미중인 수양의 눈앞에 노출시킴으로써 교미중인 수양들이 얼룩무늬와 점을 가진 새끼를 낳게 만들었습니다(30:42-43, 31:1-3, 11-13).

결국 야곱의 이런 어리석고 순진해 보이는 제안은 사기성이 농후한 라반을 기습적으로 제압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30:32). 아주 원시적인 야곱의 유전자 조작실험은 열 번씩이나 야곱의 품 삵을 변역하고 떼먹은 라반을 향한 하나님의 통쾌한 도덕적 복수였습니다(31:41). 결국 야곱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라반의 양떼들 중 실하고 튼튼한 양떼들을 자신의 품 삵으로 챙깁니다. 이처럼 야곱이 라반의 양떼들을 빼앗아오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깊숙한 개입이 있었습니다(31:9). 하나님은 라반에게 당한 야곱의 고난에 찬 세월들을 신원하신 것입니다. 또한 그 동안 라반이 자신에게 한 일과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하신 일을 대비시키는 모습에서 야곱은 밧단아람의 삶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지탱된 삶이었다고 고백합니다(31:4-13). 아버지 라반의 무자비한 노동력착취와 인색함에 대해 라헬과 레아가 내린 냉정한 평가(31:14-16)는 밧단아람 생활에 마침표를 찍으려는 야곱의 비장한 결단을 더욱 굳게 해 줍니다.

결국 세력다툼과 알력은 적어도 야곱에게 밧단아람은 영원히 머무를 땅이 아니라 일시적인 체류지란 사실을 확실히 가르쳐 주었을 것입니다. 라반과의 평화조약체결을 끝으로 마무리되는 밧단아람에서의 삶은 하나님이 벧엘에서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얼마나 신실하게 지키셨는지 보여줍니다. 밧단아람에서 야곱이 성취한 복과 번영을 근거로 하나님은 야곱에게 계속되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는 문제는 이제 야곱 자신의 소망사항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속한 일이 되었습니다.

 

5. 하룻밤의 씨름_ 새 이름, 이스라엘이라(32:1-32)

 

야곱의 귀향길은 라반과의 평화로운 작별이자 동시에 복수심으로 노기를 띤 채 작별했던 형 에서와 어쩌면 적대적으로 대면해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야곱은 20년 전의 시간 속으로 소환되면서 주체할 수 없는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히게 됩니다(32:1-7, 27:41). 이 때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귀향길에서 야곱을 만난다(32:1). 1절의 만나다”(encounter)라는 동작은 보호 혹은 동행을 위한 의도적 만남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출현하는 하나님의 사자들은 야곱의 귀향을 호위하는 천상의 군대를 가리킵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망명생활의 첫 밤을 보낼 때에도 하나님의 사자들(32:1, 28:12)의 호위를 받았고, 망명생활을 마치고 귀향길에 오를 때에도 천사의 호위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동행 약속은 ()아브라함의 약속- 이삭약속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인데 야곱은 지금 아브라함과 이삭이 누린 바로 그 장자의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에게 벧엘의 약속을 상기시켰을 것입니다(31:3, 28:15).

그런데 왜 하나님의 천사들이 갑자기 그의 귀향길에 동행하려고 할까요? 하나님의 천사들은 에서와의 대면을 준비하는 야곱을 도우려는 사자처럼 보입니다. 그는 에서와의 적대관계를 청산하지 않으면 이제껏 얻은 모든 재산과 가족들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형 에서가 400명의 장정들을 거느리고 그를 맞으러 온다는 사자의 전갈은 그에게 두려움을 확장시키고 심화시킵니다(32:6).

32장은 야곱의 심층심리학적 불안을 이토록 예리하게 해부하고 있을까요? 왜 야곱은 20년만의 귀향과 형 에서와의 상봉을 이처럼 극도의 두려움 가운데 맞이하여야 할까요? 여기에는 야곱의 지난 삶에 대한 창세기 저자의 도덕적 신앙적 판단이 숨어 있다고 봅니다. 32장 전체에 걸쳐서 부각되는 야곱의 불안, 죄책감, 두려움 등은 그가 20년 전 에서 형에게 끼쳤던 악의적 행동에 대한 통절한 자기비판이었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여기서 하나님의 공의로 판단해 볼 때, 드러난 야곱의 편의주의적이고 야비하고 기만적인 자세에 대하여 은근하면서도 알 짬 있는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 스스로 20년 전의 장자(長子)() 매입파동과 장자축복탈취사건에 대하여 어떤 모양으로든지 자책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형 에서의 보복감정을 용인하고 있으며 그가 자신을 잔인하게 공격해올 가능성 때문에 전율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가해자로서 피해자인 형 에서의 너그러운 용서를 진심으로 소망하지만,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극단적인 당혹감과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차하면 폭발할 형의 진노와 복수를 피하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웁니다. 그 준비와 계획은 세 단계로 기획되어 있습니다(32:3-5, 7-10, 13-21). 먼저 사자를 앞서 보내어 형 에서의 감정을 정탐하고 누구려 뜨려 보려고 합니다. 둘째, 동시에 그는 하나님께 약속을 상기시키며 도움을 구하는 기도에 몰입합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약속을 상기시킵니다(32:9,12). 셋째, 그는 에서의 마음을 누구려 뜨리려고 선물을 보냅니다(32:13-20). 그는 자신의 대열을 모두 세 대열로 나누어 각 대열의 향도에게 에서 앞으로 보내는 에서 주의 종 야곱의 화친과 공경의 인사를 강조하도록 당부합니다(32:18-19). 야곱은 형 에서를 깍듯이 ()라고 부르며 장자의 명분에 집착했던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했을 것입니다.

야곱의 신앙역사의 절정인 얍복강 나루터의 철야씨름기도는 야곱의 생애를 BCAD로 나누는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본진(本陣)을 세 집단으로 나눠 형 에서에게 미리 예물을 보내놓고는 불안에 압도된 야곱은 고독한 단독자(單獨者)가 되어 간절한 기도를 시작합니다. 이제 그 기도는 온몸으로 드리는 씨름기도가 됩니다. 어둠 속에 그 모습이 감추어져 있던 어떤 사람(24)과 밤새도록 씨름한 사건이 도대체 야곱의 불안과 공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28-30) 이것은 야곱의 환도뼈를 내리치는 사건에 이를 때까지 신비스러운 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야곱은 정체 모를 그 씨름꾼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축복을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축복 대신에 그는 먼저 야곱의 환도뼈를 내리칩니다. 야곱은 환도뼈 위골을 경험하면서도 그 신비한 씨름꾼에게 복을 빌어달라고 강권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천상(天上)의 씨름꾼은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29, 13:17-18). 자신의 지난 삶을 정면으로 응시해 보도록 압박하는 질문입니다. 네가 누구냐?라는 질문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야곱스러운 본질을 드러냅니다. 나는 야곱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속이는 자, 형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고 사는 경쟁적 인생의 전형입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그 천상의 씨름꾼은 야곱 대신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줍니다.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긴자(이스라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복을 지상(至上)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이제야 우리는 환도뼈가 위골 되는 고통이 그가 받을 복의 내적인 조건이었음을 알게 됩니다(26-27).

얍복강 나루터에서 야곱이 벌였던 그 씨름은 지나간 40년의 삶의 요약이요 새로운 존재로 환골 탈퇴하기 위한 해산의 고통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40년 동안 사실 야곱의 인생은 씨름에서 지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쓰던 경쟁의 삶이었습니다 (에서와의 싸움, 라반과의 씨름을 통해서 축복을 쟁취해 온 삶). 그는 비록 인간의 힘으로 씨름 (사람과의 경쟁)에서 승리를 쟁취하였지만 그 자체가 하나님의 복 주심을 대체할 수 없음을 통렬하게 자각하였을 것입니다. 비록 위골 된 환도뼈 때문에 다리는 절었지만 해가 돋았다는 저자의 표현은 야곱의 마음속에 일어난 영적 각성을 엿보게 해 줍니다. 그는 하룻밤의 기도를 통해서 사기꾼, 경쟁자로서의 경력을 접고 하나님의 지팡이에 의지하는 절름발이가 됩니다.

또한 야곱은 밤새도록 벌인 씨름이 곧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한 사건이라고 해석하고 그 지명을 브니엘, 곧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지었습니다. 야곱은 환도뼈가 위골 되어 절름발이가 되어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찬 밤을 보냈지만 새로 돋는 아침을 맞이합니다. 그 새 날을 정녕 새 날로 만든 것은 돋는 해처럼 빛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죽지 않고 자신의 생명이 보전되었다는 감격이었습니다. 그는 형과의 싸움을, 아니 두려움과의 싸움을 이미 브니엘에서 완료하였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옛사람이 낡아짐을 맛보며 자신 속에 자라는 한 새 사람의 정체를 인식하기 시작하였습니다(고후4:16-20). 우리는 야곱의 파란만장한 신앙역사 속에서 인격성장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며 신앙인격성장이야말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훨씬 더 포괄적으로, 심층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필수과정임을 목격하게 됩니다.

 

6. 결론적 이야기

우리는 이스라엘 족장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개성이 뚜렷하고 각기 특성을 갖고 묘사되어온 신앙역사를 고찰하였습니다. 먼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우직할 정도로 직선적인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들 이삭은 자기 이름 이삭(웃음)처럼 성품이 온유겸손하며 정직한 사람입니다. 야곱이 가장(假裝)하여 아버지 앞에 축복을 받으러 들어갔을 때에 순진한 마음으로 축복하려든 진실한 성품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야곱은 독특한 성격의 사람입니다. 영특하고 기지가 있고 아주 활동적인 사람입니다. 이들 이스라엘족장들의 신앙역사는 주전 2000-1800년대에 고대근동지방의 문화와 역사의 관계 안에서, 메소포다미아에서 현재의 팔레스타인으로 알려진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의 참 뜻은 무엇입니까? 세 가지로 요약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의미는 연약한 자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신비하신 하나님, 긍휼과 자비를 속성으로 갖는 신비하신 영원 자를 믿는다는 신앙고백을 보게 됩니다. 둘째 의미는 신적 속성이 자비와 사랑이지만, 동시에 그 신비하신 분은 공의로우신 분이며, 거룩하신 분으로서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셋째 의미는 특히 프랑스의 수학자요 철학자였던 파스칼의 회심경험 이후, 그의 비망록<팡세>에 기록된 강렬한 주체적, 실존적, 체험적 신앙을 의미합니다.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은 추상적이거나 보편적 원리로서의 철학적 하나님이 아니고, 생명의 기쁨, 구원의 확신, 신생의 불의 체험, 역설적 진리로 다가오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바르게 이해되는 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동시에 나의 실존에 하나님이 되신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토인비는 그의 <역사연구>에서 도전(challenge)응전(response)을 배우지 못하면 그 문명은 쇠멸한다고 주장하여, 도전과 응전이라는 공식으로써 인간역사의 전 과정을 설명하였습니다. 토인비가 제시한 21개 내지 26개의 문명들은 모두 발생, 성장, 정체(좌절), 해체의 4단계를 거쳤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선 문명은 어떻게 발생하는 것입니까? 원시문화에서 문명으로 질적인 비약을 할 수 있었던 문명들은, 종래의 정설을 뒤집고, 온화한 기후니 비옥한 땅이니 하는 유리한 지리적 조건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리한 곤궁한 토지, 낯선 땅의 자연적 환경으로부터 오는 도전에 대해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즉 성공적으로 응전함으로써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문명은 발생 했다는 것 보다는 창조적인 일단(一團)의 인간들이 생산했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이 성장과정을 담당하는 세력이 창조적 소수자(Greative Minority)이고, 그 새 종교는 세계교회(Universal Church)인데 그리스도교룰 지목한 것입니다.

새 해가 되면 누구나 새 희망을 겁니다. 허나 역사의식이 없는 희망은 막연한 기대요 미신에 지나지 않습니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어라(5:38)고 하신 예수님 말씀은 분명 역사에 도전(challenge)할 것을, 그리고 그 역사에 응전(response)할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4:16) 라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의 겉 사람은 없어지고 지금(只今)부터 새 존재로서 살기 위하여 역사에 도전하는 미래의 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얼마나 멋진 신앙자세입니까! 이러한 사람은 희망의 사람입니다. 겉사람은 하나의 물리적 인간(Physical man)이고 속사람은 곧 속죄를 받은 영적인 자아 (redeemed and Spiritual man)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단순히 개혁되거나 개선되거나 외부적으로 변화된 사람이 아니라, 다시 태어난 사람 (born again man)입니다. 다시 만들어진 사람 (he is re-made)을 뜻합니다.

우리는 지난해 남북정상과 북미정상의 회담을 가짐으로 핵무기 페기와 평화와 화해의 새 역사를 창조해 나가는 일에 합의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남쪽은 아직도 이념대립으로 갈리고, 민주주의는 위험의 수위에 놓였고, 계층 간의 격차는 더욱 커지는 현상입니다. 새 해를 맞으며 이제 70년 넘게 우리민족의 생명에너지를 갉아먹은 갈등과 분열의 시대를 마감하고 화해와 통합의 실마리를 찾아야 합니다. 화해와 통합을 이루려면 힘을 가진 자와 부를 차지한 자들인 기득권층이 먼저 자신의 일부라도 내려놓는 게 순리일 것입니다.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반드시 그리해 나가야 합니다. 새해에는 남북 평화통일 정책도 새롭게 전개되는 카이로스적인 하나님의 역사개입과 평화통일에의 변화가 있어지기를 희망하며 기도합니다.

이제부터라도 서독의 동방정책 같은 긴 안목의 정책을 펼친다면 남북 간의 화해와 평화통일은 멀지 않을 것입니다. 남과 북이 상생의 원칙 하에서 신뢰를 이뤄가며 교류를 증진해 가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통일된 민족사는 1500년이고 분단역사는 70년에 불과합니다. 이제 그 70년을 되돌려 통일로 내디뎌야 합니다.

2015년에 미국은 쿠바와 53년 만에 국교정상화에 합의했습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그 동안 쿠바고립정책은 실패했다고 솔직히 시인하면서 어떤 나라를 실패한 국가로 몰아붙이는 정책보다 개혁을 지지하고 독려하는 것이 더 낫다는 교훈을 어렵게 얻었다고 반성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만든 이념의 시멘트에 계속 갇혀있다는 과오를 깨닫고,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실현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교훈이겠습니다.

한국 현대사의 특징가운데 하나는 수많은 희생을 치르면서도 어렵게 그러나 자랑스럽게 전개한 민주화 운동이 있습니다. 한국사회는 위기의 순간 고비마다 좌절하지 않고 돌파구를 연 민중의 민주화 운동을 통해서 괄목할만한 민주발전을 이룩했습니다. 이는 오랜 우리역사를 통해 축적한 문화적 역량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부끄러움을 반성해야 할 역사이고 고난으로 점철된 어두운 역사였지만,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사회통합과 발전을 이뤄왔고 다양하고 이질적 요소들을 수용하여 민족공동체를 이루어 왔습니다. 이제 그 동안 어렵게 이룬 성과를 발전시켜 한 차원 승화된 민족사의 발전을 이룩해야 할 때입니다. 새 해에는 어둡고 안타까웠던 지난 세월이 역사의 기록 속으로 사라지게 하는 전환점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또한, 새 이름, 이스라엘(New name, will be Israel)이라는 새로운 변화의 역사와 이스라엘 족장들의 신앙역사가 오늘 우리들의 신앙의 삶에도 귀한 길잡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새해에 새로움의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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