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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현충원 평화둘레길 걷기에 다녀와서

이상호 (대전노회,공주세광교회,목사) 2018-10-27 (토) 07:51 5년전 3148  

이야기가 있는 현충원 평화둘레길 걷기에 다녀와서


지난 21일 주일 오후 6.15 대전본부와 겨레하나에서 실시한 현충원 역사순례에 다녀왔다. 날씨가 좋아 걷기도 좋고 젊은 학생 청년들이 해설을 맡아 하는데 역사적 의미가 다가와 참 신선하고 좋았다.


먼저 순직 공무원 묘역을 찾았다. 공무를 수행하던 중 안타깝게 순직하신 분들이 잠든 곳이다. 소방관들, 독도수비대분들도 있고, 최근 세월호 순직 교사들이 있었다. 이곳에 교사 공무원 즉 선생님들이 안장된 것은 처음이란다.


● 양승진 (순직공무원-12)

양승진 선생은 일반사회 과목을 맡고 인성생활 부장교사였다. 세월호 침몰 당시 학생들에게 구명복을 내어주고 "탈출하라" 소리치며 한 명의 제자라도 더 구출하기 위해 애쓰다가 배 안에 가득 찬 물속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학생들은 지금도 양승진 선생이 절뚝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학생들을 구하러 다시 선실 안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세월호 미수습자는 5명인데 양승진 선생은 그중 한 분이다. 아직 미수습자이시기 때문에 여기 현충원에 안장이 불가능할 뻔 했는데 아내분이 침대 밑에 남편의 것으로 보이는 머리카락을 모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내 양선생의 것으로 나와 현충원에 영면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유니나 (순직공무원-14)

여기 계신 유니나 선생님은 경상대 사범대학 일어교육과를 국가 전액 장학생으로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임용고시 합격 후 처음 발령 받은 곳이 바로 단원고였다. 처음 부임받은 학교에서 근무한지 4년째인 2014년 4월 16일 2학년 1반 담임 선생님으로 수학여행에 올랐다. 세월호가 침몰할 당시 자신이 맡은 1반 학생들 19명을 탈출시킨 후에 자신도 구조될 상황이었지만, 배 안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학생의 전화를 받고 다시 선실로 들어갔다. 10개 반 가운데 생존 학생이 가장 많은 반이었다. 참사 이후 54일 만인 6월 8일에 세월호 3층 식당에서 구명조끼도 입지 않은 채 발견되었다. "걱정마 너희부터 나가고 선생님이 갈테니까" 이것이 선생님이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고 한다.


● 김초원 (순직공무원-16)

김초원 선생은 서태지의 '교실이데아'를 좋아했고 어릴 적부터 몸짱, 얼짱, 범생이로 불렸다고 한다. 미용실에 갈 때마다 '스튜어디스냐'는 말을 들을 만큼 눈에 띄었다고 한다. 하지만 꿈은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고, 첫 발령지 시흥중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치다 단원고로 부임해서 화학을 가르쳤다.


김선생이 출근 전날 쓴 일기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나는 어떤 교사가 되어야 할까? 내가 가르치는 과학을 통해 아이들이 신비한 자연현상을 이해했으면 좋겠어. 멋진 하늘빛을 감상할 줄 알고 풀, 나무, 꽃과 같은 생명을 소중히 여겼으면, 마음이 따뜻한 교사, 맵시 있는 선생님."


그리고 4월 16일은 선생님의 생일날이었다. 4월 16일 0시, 세월호 배 안에서 제자들이 마련해준 깜짝 생일파티에서 케이크 촛불을 불면서 행복해했던 선생은 사고 직후 구명조끼 없이 뛰어가던 아이에게 자신이 입었던 조끼를 벗어주고 3반 아이들이 있는 4층 객실로 내려갔다. 선생의 귀에는 제자들이 생일선물로 준 귀걸이가 달려 있었다. 선생은 이승에서의 마지막 생일날에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별이 됐다.


● 이지혜 (순직공무원-18)

세례명이 '가브리엘라'인 선생은 부모님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큰딸이었다. 13살 생일날 엄마에게 쓴 편지를 보면 얼마나 사랑스러운 딸이었는지 알 수 있다.


"엄마, 저 지혜예요. 이 무더운 여름날 가게에 앉아서 장사하시는 것 참 힘드시죠?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절 이 아름다운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셔서, 저에게 행복을 한 아름 안겨 주셔서요."


동생에게는 더없이 착한 언니였던 선생은 탈출이 쉬웠던 5층 교사 선실에 있다가 사고가 나자 제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4층 선실로 내려갔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들과 함께 하며 구명복도 입지 않은 채 희생됐다. 앞서 소개했던 김초원, 이지혜 선생은 기간제 교사라는 이유로 한동안 순직 심사 대상에 오르지 못했던 분들이다.


박근혜 정권 하에서 많은 것들이 은폐하기 위해 기무사와 국정원이 개입하고 진상규명 결과를 왜곡했다. 304명이 왜 죽음에 이르게 됐는지 그 이유를 다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하는 것이올바른 진상규명이다.


■ 사회 공헌자 묘역 해설

우리나라를 빛내고 사회를 위해 헌신한 분들이 오셔야 하는 곳인데 아닌 사람도 있다.


● 손기정 (국가사회공헌자-10)

먼저 한민족 최초의 올림픽 남자마라톤 금매달 리스트인 손기정 선생님이다. 올림픽 남자마라톤에서 금매달을 딴 동양인은 단 2명다. 바로 손기정, 황영조 선수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손기정 선생은 1912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식민지 조선 땅에서 태어나 매우 가난하게 자랐다. 학비와 용돈을 벌기 위해서 길거리에서 옥수수나 참외 장사를 하고, 우동집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집과 학교가 2km 떨어져 있었는데, 그 거리를 매일 뛰어서 통학했다고 한다. 고무신을 새끼줄로 묶고 달렸고, 피가나도 아랑곳 하지 않고 달렸다고 한다. 1932년 경성부에서 열린 제 2회 동아 마라톤에 출전, 서울의 복잡한 지리를 몰라서 삼각지 로터리에서 길을 잃은 바람에 아쉽게 2위를 했다고 한다. 그로인해 당대의 걸출한 마라토너들이 배출된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더욱 훈련에 매진했고, 그 결과 이듬해 제3회 동아 마라톤에서는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1935년에 도쿄 메이지 신궁대회에서 마라톤 풀코스에 처음 출전하여, 2시간 26분 42초라는 비공인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한다. 이 기록은 비공인이긴 하지만, 세계적으로 마라톤 풀코스에서 최초로 2시간 30분의 벽을 깬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이후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 동갑내기이자 양정고등보통학교 동기였던 남승룡 선수와 베를린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 참가하게 된다. 손기정과 남승룡 두 사람이 워낙에 실력자였기 때문에 대표 선발전에서 1위에 남승룡, 2위에 손기정이 랭크되어 무난히 대표로 뽑힌다. 일본에서 출발한 두 사람은 어떻게 베를린 까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이용했다.


우선 도쿄에서 기차와 배를 갈아타고 부산에 도착한 뒤 경부선 열차에 올라 서울로 이동했다. 서울에서 베를린을 향해 떠난 것은 올림픽 개막을 약 두 달 앞둔 1936년 6월 4일이었다. 마라톤 코스 답사 등 현지 적응 훈련을 위해 다른 종목 선수보다 먼저 출발했다는데 서울역에서는 모교인 양정고보 전교생과 교직원, 시민들이 몰려와 우렁찬 박수를 치며 우승을 기원했다. 손기정 일행을 태운 기차는 국경을 넘어 단둥, 봉천, 하얼빈을 거쳐 6월 8일 소련과 인접한 만주리에 다다랐다. 이어 시베리아횡단철도를 이용해 다음 목적지인 모스크바로 향했다. 손기정 선수는 열차가 멈출 때마다 내려서 철길을 따라 뛰었다고 한다. 장기간 움직이지 않아 몸이 굳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 그랬다고 한다. 그러다가 소련 철도망을 염탐하려는 스파이로 오해받아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는 일화가 있다.


서울을 떠난 지 열흘 만에 모스크바에 당도한 손기정은 유럽행 열차로 갈아타기 위해 이틀간 열차에서 머물러야 했다. 그리고 손기정은 천신만고 끝에 7월 17일 베를린에 도착했는데 마중 나온 베를린 주재 일본 대사관 직원들이 "왜 마라톤에 조선인이 두 명이나 끼었느냐"고 핀잔을 줬다고 한다. 손기정 선수는 이를 악물고 달려 1등을 차지하고, 함께 한 남승룡 선수도 3위를 차지했다. 당시의 조선인 청년들이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차지한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하지만 가슴에 붙은 일장기, 이름도 ‘손기정’이 아니라 일본식으로 읽은 손 기테이(Son Kitei, そん きてい)라는 이름이었다. 우승국의 국가가 연주될 때도 일본의 국가가 연주됐다. 두 선수는 고개를 숙여 게양대에 오르는 일본 국기를 외면했고, 훗날 동메달을 딴 남승룡 선수는 "금메달을 딴 동료가 부러웠다"고 했는데 "우승자는 기념품으로 받은 월계수 묘목을 들고 있어 가슴팍에 붙인 일장기를 가릴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손기정선수는 대회에서 한국어 이름으로만 서명했으며 그 옆에 한반도를 그려 넣기도 했다. 인터뷰에서도 그는 자신의 모국이 한국이라고 밝혔지만 시상식 때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손기정 일행의 귀국은 갈때처럼 기차로 돌아오면? 엄청난 환영인파가 몰릴 것이 뻔했기 때문에 열차 대신 비행기로 바뀌었고, 이동 경로도 베를린-인도-싱가포르-일본-조선으로 변경되었다. 손기정 선수는 일본에서 항공편으로 울산으로 갔다가 다시 여의도로 이동했다. 당시 여의도는 마포와 육교로 연결되지 않아 시민 접근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손기정을 환영한 사람은 친형과 양정고보 교장뿐이었다고 한다.


식민지시절 손기정에게 올림픽 마라톤 우승은 오히려 구속이었다. 그는 한민족 에게 영웅이었으나, 이를 일본제국주의가 용납하지 않았다. 환영행사는 모두 통제되었고, 그는 식민지시절 내내 더 이상 달릴 수 없었다. 강제로 일본제국 주의를 찬양하는 데 동원되기도 하였으나, 그의 행적 곳곳에는 이에 대한 저항과 울분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손기정 선생은 앞서 말씀 드린대로 평안북도 신의주 출신으로 죽을 때까지 언제나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았으며, "죽기 전에 남북통일이 된다면 신의주 - 부산 간 역전경주 대회에 나가고 싶다"고 항상 말씀하시고 살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통일을 보지 못하고 2002년 눈을 감았다.


● 오제도 (국가사회공헌자-8)

손기정 선생 옆에는 손선생과 비슷한 때에 태어났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오제도 검사의 묘가 있었다. 오제도 검사를 단 한마디로 표현하는 별명이 바로 ‘사상검사’다. 오제도는 1917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손기정 선생님과 고향이 같다. 나이도 오제도가 5살 아래로 거의 비슷하다. 그러니까 고향 선후배 사이이다. 오제도는 평안중학교를 졸업하고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간다. 손기정 선생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나갔을 때랑 비슷할 때이다. 그는 일본에 가면서 ‘일제의 차별정책과 맞서 싸우려면 법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해 와세다대학교의 법학부에 입학했다’고 스스로 말했다. 해방 이후 1946년 제1회 판검사 특별임용시험에 합격해서 본격적인 검사생활을 시작한다.


오제도는 해방정국 당시에는 삼척동자도 인정하는 '반공검사'로 명성을 떨쳤던 사람이다. 좌익 성향이 강한 마을에선 그의 이름만 대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뚝 그쳤다는 '무시무시한 전설'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검찰사상 '공안검사의 원조'로 통하는 인물이다. 오제도는 호를 일여(一如)라고 지었는데 그 뜻이 뭐냐면,‘반공 외길’을 걷는 다는 뜻이었다.


오제도의 활동을 살펴보자면 먼저 지금도 남아있는 국가보안법의 초안을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름만 들어도 가슴 아픈 보도연맹 결성을 주도했다. 반민특위 해체에 결정적 영향을 준 국회 프락치 사건도 그의 작품이었고, 조봉암 선생을 사법 살인한 진보당 사건도 그의 작품이었다. 1960년 3.15 부정선거 때 마산의 시위를 북한이 조종한 것이라고 허위 선전하기도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반공의 한길을 걸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생에 수많은 사건 중 가장 끔찍한 일을 꼽자면 단연코 보도연맹 결성을 주도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결성을 주도한 보도연맹이 훗날 끔찍한 학살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6월 5일 좌익 계열 전향자로 구성됐던 반공단체 조직이다. 1948년 12월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라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사상 전향시켜 이들을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와 국민의 사상을 국가가 나서서 통제하려는 이승만 정권의 대국민 사상통제 목적으로 결성됐다. 이런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제정된 국가보안법의 시행에 따라 1949년 말에는 가입자 수가 30만 명에 달했고, 서울만 해도 거의 2만 명에 이르렀다.


보도연맹 대상자는 좌파 낙인이 찍힌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으나, 실제로는 공무원들의 건수올리기 실적주의 때문에 거의 가입을 강요받은 경우가 많았으며, 지역별 할당제였기 때문에 사상범이 아닌 경우에도 등록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당시 제1공화국 정부는 '국민보도연맹'에 묶어 좌익에 대한 전향공작에 힘썼다고 하지만, 실상은 좌익뿐 아니라 '남북협상'에 참가한 중도파나 우파정당(한국독립당), 미군철수를 주장한 소장파 국회의원들을 전면적으로 탄압하기 위해 보도연맹에 반강제적으로 가입하는 경우도 많았다.


보도연맹에 가입이 되면 일절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약속과 달리 가입된 사람들은 시시때때로 소집되어 기합이나 체벌을 받아가며 반공 교육을 받아야 했다. 교육에 불참하거나 달아나면 주변 사람들이 피해를 입기 때문에 꼼짝없이 당해야만 했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전면전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정부와 대한민국 국군은 보도연맹원들을 무차별 검속하고 즉결처분하기 시작했다. 경기도 이천시에서는 군복을 입고 경찰 마크를 붙인 사람들이 국민 보도연맹원 100명을 총살했고, 대전 교도소에서는 3,000여 명이 처형당하는 등 대한민국 전역에서 각 마을 별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됐다. 대전에 있는 동구 낭월동 산내 골령골이 바로 그 학살의 장소이다.


당시 학살 주체는 육군특무대(CIC)와 헌병이었다. 특히 최후방이었던 경상도 일대의 보도연맹 학살은 그 피해정도가 심각했는데, 육군특무대(CIC)는 보도연맹 관련자들을 학살할 때 산 골짜기, 우물, 갱도 등에 모아다가 한꺼번에 총살했다.


이렇게 국민보도연맹원들을 학살했지만, 지금까지도 얼마나·어디서·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다. 오늘날 현재에도 추측만 할뿐, 정확한 해명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군인과 경찰이 이들 보도연맹원들을 살해한 후 자신들의 잘못을 철저히 은폐하고 금기시했었기 때문이다. 보도연맹 학살이 진행된 와중에서 운좋게 목숨을 부지한 보도연맹원들도 있고, 유가족도 살아있었지만 아무도 이에 대해 말을 꺼내진 못했다. 그들이 보도연맹 사건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곧 자신도 ‘빨갱이’로 몰려 감옥에 끌려가거나 국가권력에 의해 살해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추정하는 당시의 희생자 수는 10만 명에서 최대 12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당시의 대한민국의 인구는 약 2,500만 명이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국민을 학살로 몰아넣은‘반공검사’,‘사상검사’오제도가 2001년에 사망한다. 사망한 후에 대한민국 건국 이래 가장 훌륭한 검사로 선정이 되어 1등급 훈장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그리고 법조인 최초로 국가유공자로 인정되어 지금 여기 국립 현충원에 묻히게 된 것이다.


당시 이승만 정부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통일을 주장했던 이들은 빨갱이로 몰렸고 공산주의자로 몰려서 학살을 당했다. 수 많은 보도연맹원들이 그랬고, 죽산 조봉암 선생도 그랬다. 그리고 그 학살에 앞장선 검사 오제도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훌륭한 검사로 선정되어 여기 누워 있다.


● 김창룡 (장군1-69)

김창룡은 1916년 함경남도 영흥군에서 태어났다. 손기정 선생보다는 4살 아래고, 오제도보다는 1살이 많다. 김창룡은 누에를 키우고 실을 뽑는 기술을 배우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직물회사에 취직했다고 한다. 그러나 2년 만에 회사를 나와서 만주철도 신경역 직원으로 자리를 옮겼고, 다시 2년 만에 철도 직원을 그만두고 일본인의 추천을 받아 만주 주둔 일본 헌병부대 군속으로 일하게 됐다.


그 후 3년 동안 군속으로 온갖 노력을 기울인 끝에 1941년 4월 일본 관동군 소속 헌병 교습소에 입소했고, 교습소를 수료한 후 1941년 10월 헌병 보조원이 됐다. 그의 업무는 소련과 만주국 국경지역에서 항일 인사를 감시하는 일이었다. 사복을 입고 주요 인물들을 탐색하고 접근하는 것이 주로 그가 한 일이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임무 수행을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예를 들면 중국 공산당의 거물 왕진리(王近禮)를 체포할 때 그는 중국인 거지로 가장해 왕진리의 가게 종업원으로 일했다고 한다. 그는 왕진리의 신임을 사기 위해 경찰서 유치장을 7번이나 드나들었다. 덕분에 왕진리와 주변 중국인들조차 그를 '진짜 중국 사람'으로 인식했다고 한다. 일제는 그의 활약으로 왕진리를 검거했을 뿐만 아니라 왕진리와 관련된 9개 항일 지하조직을 색출하고 50여 명을 검거했다. 이때가 1943년이었다. 그의 활약에 탄복한 일제는 바로 헌병 오장 지금으로 치면 하사로 특진시켰다. 그 이후에도 그는 1943년 9월부터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까지 불과 2년 사이에 무려 50여 개의 항일 조직을 적발했다. 일제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눈부신 활약이었다. 그렇게 일제에 적극 부역한 김창룡은 훗날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한마디로 악질 친일파였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그는 사복으로 갈아입고 바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소련군에게 친일부역 혐의로 체포당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탈출했고, 이후 다른 지역을 전전하다 다시 친일 혐의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거듭 탈출에 성공했다고 한다. 2차례나 친일파로 체포되고 탈출에 성공한 김창룡은 38선을 넘어 서울로 내려왔다.


서울에 온 김창룡은 만주군 대위 출신인 김백일의 추천으로 1947년 1월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에 3기로 입교해 그해 4월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소위가 된 후 자신의 ‘전공’을 살려 일제 경찰과 헌병 출신들을 모아 정보소대를 편성하고 좌익 색출 작업을 담당했다. 이후 분단과 반공 이데올로기가 광기를 펼치면서 김창룡에게 출세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즉 친일파였던 김창룡은 분단으로 인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출세를 위해 반공을 적극 이용하기 시작했다.


1947년 5월, 서울에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열리고 있었고 소련 측 인사를 경호하기 위해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한 소련 군인이 사진을 찍는 모습을 김창룡은 발견했다. 김창룡은 격투 끝에 소련 군인을 제압하고 필름을 압수했다. 미소공동위원회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소련은 난처해졌다. 미국은 소련 측에게 '정탐을 하러 왔느냐'고 따졌고, 김창룡의 이 행동은 군 수뇌부의 주목을 받아서 1948년 1월 중위로 진급했다.


1948년 여순항쟁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승만은 “한 달 내로 빨갱이들을 다 잡아 죽이고 오라”고 지시를 내린다. 이때 김창룡이 실무자로 있던 육군 정보국 3과인 방첩과가 나서게 된다. 1949년 3월까지 방첩과는 불과 4개월 동안 1500명에 달하는 군인을 숙청했다. 당시 군 병력의 3%에 해당하는 엄청난 인원이었다.


그러나 짧은 시간 안에 실적 쌓기식 숙청이 됐기 때문에 문제가 많았다. 대부분의 경우 증거보다 자백을 받아내는 식으로 심문을 했고 고문이 혹독하게 가해졌다. 자백을 한 뒤에는 연루된 좌익 인물을 대라고 또 다시 고문이 이어졌다.


숙군 과정에서 짧은 시간 안에 뛰어난 실적을 올린 김창룡은 1949년 초 소령으로 승진하고, 6월 육군 방첩대(CIC) 대장으로 임명되고, 7월 중령으로 승진했다. 불과 2년 3개월 만에 소위에서 중령까지 올라갔다.


1950년 9월 28일, 이승만은 북한군에 점령당했던 서울을 수복하자마자 김창룡을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합동수사본부는 북한군이 수도권 지역을 점령하고 있을 당시 북한군에 협조한 '부역자'를 찾아내고 처벌하는 무시무시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데 합동수사본부장은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를 했다. 정치적으로도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한 것이다.


1950년 10월 초 부터 1951년 5월까지 김창룡은 숙군 때와 마찬가지로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로 부역자를 처벌하기 시작했다. 당시 내무부 치안국 자료에 따르면 1950년 말까지 검거된 인원만 15만 3,825명, 자수한 인원 39만 7,090명으로 총 55만 915명이 부역 혐의를 받았다고 한다. 이 가운데 서울에서만 1,298명이 처형됐다.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지 시절 일제에 부역한 사람을 몇 명이나 처벌했나? 반민특위가 조사한 것은 688명, 검찰로 송치한 것이 599명, 기소된 것이 293명, 그 중에서 선고까지 받은 사람은 41명이다. 그 41명중에 무죄가 6명, 형 면제가 2명, 공민권 정지가 18명, 유기징역 13명, 무기징역 1명, 사형이 1명이었는데 사형선고를 받은 김덕기 한 사람도 항소를 했고, 한국 전쟁 전에 풀려남으로서, 반민특위로 인해 실제로 처벌 받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실형을 선고 받은 사람도 재심청구 등의 방법으로 모두 풀려났다. 일제 부역자 처벌은 단 한 사람도 하지 못한 채,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혐의로 총 55만 명을 처벌했다. 그리고 이 중에 실제 부역자는 많지도 않았다. 실제로 부역을 했던 사람은 인민군을 따라 모두 북으로 갔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었다.


이후 김창룡은 1950년 10월 말에 대령으로 다시 승진했으며, 1951년 5월 15일 육군 특무부대 대장으로 임명됐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35세였다. 이렇듯 엄청난 출세와 이승만의 신임을 얻었지만 문제가 있었다. 숙군과 학살, 부역자 처벌로 대부분의 좌익들을 소탕했을 뿐 아니라, 남아있던 좌익들도 북한으로 넘어가버려 이제 남한 내 좌익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빨갱이를 때려잡을 기회가 줄어든 것이다. 그는 이 상황에서 기발한 돌파구를 마련한다. 이를 테면 '빨갱이가 없으면, 빨갱이를 만들면 된다'는 것이었다.


1951년 한 무리의 청년들이 상복을 입은 채 관을 메고 지리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특무부대장 김창룡은 이들이 관 속에 총기를 숨겨 놓고 지리산 빨치산에게 가는 것을 붙잡았다고 이승만에게 보고했다. 기분이 좋아진 이승만은 국무회의에서 "여러분들, 김창룡 대령을 자식처럼 사랑해 주세요."라고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그런 뒤 이승만은 국무회의장으로 김창룡을 불러들인 뒤 노획한 총기를 전시하도록 했다. 알고 보니 그 총기란 것들은 도무지 살상용으로 쓰일 것 같지 않은 고물들이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모든 것이 조작이었다.


1950년 10월 김창룡이 군·검·경합동수사본부 본부장으로 취임한 직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인민군 패잔병으로부터 빼앗은 무기를 삼각산 뒤편에 있던 주민들에게 쥐어주고 이들을 공산분자로 몰았고, 이들이 서울을 습격하려 한다고 꾸며 모두 죽인 사건이다. 이것이 소위 '삼각산 사건'이다.


1952년 5월 24일 무장 북한군으로 보이는 일당이 임시수도 부산 금정산에 나타나 총격을 가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국군과 미군 병력이 밀집해 있는 임시수도 부산에 인민군이 나타나는 것은 사실상 말이 안 되었는데, 사실 이 또한 김창룡이 조작한 사건이었다. 당시 김창룡은 대구형무소에 있는 무기수, 중형수들을 상대로 '큰 일을 치르고 나면 석방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김창룡의 제안에 따른 형무소 재소자 7명을 인민군으로 꾸민 다음 부산 금정산에서 총격을 하도록 한 것이다. 물론 이들 7명은 순식간에 사살당했다.


한번은 김창룡이 잡아들인 수백 명의 영등포 특별부대 장병들이 재판에 회부됐다. 알아 봤더니 김창룡이 부평을 순찰하는데 술집에서 인민군 노래가 흘러 나와 즉각 술집을 포위해 잡아들이고 보니 특별부대 장병들이었다. 중대장이 무조건 한 곡씩 노래를 하라고 시켰는데 한 병사가 노래를 못한다고 사양하면서 그러더라는 것이다. ‘아는 노래라고는 월남하기 전 이북에서 배운 노래밖에 없다’고 하니, ‘그거라도 해라’고 해서 생긴 소동이었다. 김창룡은 이들을 잡아들여‘친한 놈 이름을 대라’고 족치다보니 부대원 수백 명이 검거됐다는 것이다.


1953년 5월 김창룡은 육군 준장이 됐다. 이 시기부터 김창룡은 간첩조작과 함께 권력투쟁에 직접 개입하게 됐다. 앞서 사회공헌자 묘역에서 본 오제도와도 권력 투쟁을 하는데, 김창룡이 이승만에게 '오제도는 빨갱이입니다.'라고 보고하고, 이 사실을 듣자 오제도 또한 '아닙니다. 김창룡이 빨갱입니다.'라고 보고했다. 결국 김창룡은 오제도 검사 제거를 성공하지 못했다는 일화도 있다. 1955년 1월 심지어 김창룡은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이 당시 김창룡을 사람들은 '이승만의 오른팔', '이승만의 양자'라고 불렀다.


권력 투쟁에 몰두하며 경쟁자들을 제거하던 김창룡도 결국 암살을 당해 최후를 맞이한다. 이승만은 김창룡의 죽음을 보고 받은 그날로 그에게 중장 계급을 추서했다. 암살 사건 발생 4일 후인 1956년 2월 3일 국군 최초로 국군장이 열렸다. 그날 하루 육해공군 전 군부대는 조기를 게양했고 장병들의 음주와 가무도 금지됐다.


김구가 죽었을 때 한 번도 조문하지 않았던 이승만은 김창룡 영전에 3번이나 조문하면서 진심으로 애통해했다고 한다. 이승만은 조사에서 "김 중장은 나라를 위해서 순국한 것이며 충령의 공을 세웠다"라고 말했다.


김창룡은 친일의 길을 걸어 출세했고, 분단 이후 반공의 길을 걸으며 더욱 출세했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 억울한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서 학살을 저질렀고, 독재세력에 부역하며 온갖 조작 사건을 만들어 냈다. 심지어 김창룡을 암살한 사람조차 "김창룡은 평소 개인의 영달을 위해 무분별하게 사람들을 잡아들였으니 공산당 1명에 무고한 양민 10명의 비율로 무고한 사람들이 그의 손에 희생되었다. 김창룡이 취급한 사건들도 전부가 협박 공갈로 자백을 받은 것으로 대부분 허위 날조됐거나 침소봉대된 것들이었다. 한편 뒤에서는 살인, 약탈, 협박 등으로 군수품을 빼돌리고 밀수를 하는 식으로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김창룡이 그간 모은 재산만 2억 원이다."라고 증언했다.


그리고 김창룡은 김구 선생 암살의 배후이다. 1992년에 김구선생을 암살한 안두희는 당시 특무대장이였던 김창룡과 미 중앙정보국의 전신인 OSS 모 중령의 세뇌를 받아서 백범 암살을 결행했다고 밝혔다. 안두희는 백범 선생을 암살한 뒤 김창룡으로부터 “안 의사 수고 했소”라는 칭찬을 들었으며, 특무대의 수감 중일 때도 술, 담배, 고기 등을 차입 받는 등 특혜를 누렸다고 말했다. 다음에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와 김구선생의 아들인 김인 선생의 묘지가 여기서 멀지 않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김창룡과 앞서 설명을 들으신 손기정 선생님과도 인연이 있는데 두 사람은 악연으로 맺어져 있다. 1953년 10월 대구에서 열린 제9회 전국축구대회 준결승전에서 육군특무부대와 조선방직이 맞붙었는데 당시 경기장에는 조선방직 대구지점 간부로 있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과 특무부대장인 김창룡이 있었다. 경기는 0-0으로 끝났고 규정에 따라 추첨으로 승자를 가리게 되었다. 추첨 끝에 조선방직이 특무부대를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순간적으로 조선방직 응원단과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몰려 나왔다. 꽹과리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화가 잔뜩 난 김창룡이 소리를 질렀다. “저 놈들 다 잡아 넣어.” 김창룡 장군은 직접 지프에 올라 그라운드 안으로 지프를 몰았다. 특무부대 요원들이 공포탄을 쏘며 조선방직 응원단과 선수들을 체포했고, 순식간에 경기장은 아수라장이 됐고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는 사람들을 특무부대 요원들이 제압하기 시작했다. 운동장 바로 옆 미군부대에서는 공포탄과 괴성을 듣고 출동을 준비하는 비상까지 걸었다. 김창룡의 이성을 상실한 행동을 제지할 수 있는 건 ‘올림픽 영웅’손기정 뿐이었다. 손기정은 그라운드로 달려가 자제를 부탁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창룡은 이런 손기정의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감히 누가 지금 나한테 덤벼? 당장 저 놈 끌고 가.” 손기정을 알아보지 못한 김창룡 장군은 손기정까지 수갑을 채워 끌고 가도록 지시했다. 대한축구협회 임원들은 몰래 도망쳐 숙소를 옮기고 숨어 버렸고 배종호 주심은 대구에서 혼자 행선지도 모르는 열차에 올라 진해까지 도망을 쳤다. 결국 이 대회는 유일하게 우승팀을 가리지 못한 대회로 아직까지 역사에 남아있다. 김창룡의 비이성적이고 광기어린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다.


● 유학성 (장군1-2)

유학성씨는 1979년 당시 중장 계급으로서 국방부 군수차관보 신분으로 12.12 군사반란에 가담했다. 1980년 5.18 민중항쟁 때는 제3야전군사령부 사령관이었고 일련의 상황을 주도해 5공화국에 창업 공신이 됐다.


역사의 정의로 따져보자면, 여기 이 현충원에 들어와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12.12쿠데타, 5.17 쿠데타에 주역으로 참가하고, 5.18때 우리 민중을 학살한 책임이 있는 인물이다. 실제로 우리 법원은 그를 재판정에 세웠고, 징역 6년의 형을 내리기도 했다.


그리고 “내란죄, 반란죄 등으로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은 경우"에는 국립묘지 안장 자격이 박탈되는 법도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유학성씨는 여기 현충원에 묻힐 수 있었던 것일까?


유학성은 대법원 확정 판결을 20여일 앞두고 지병으로 사망했다. 우리 헌법에는 형이 확정되기 전에는 무죄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형사 소송법은 망자에게는 재판을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국방부는 이 같은 근거를 내세워 유학성의 국립묘지 안장을 허가한 것이다.


● 소준열 (장군1-21)

소준열씨도 마찬가지다. 소준열씨는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당시 전투병과 교육사령관으로 시위대 진압 임무를 맡았고, 광주 현장에서 진압의 책임자였다. 그 외에도 5.16 쿠데타에 가담한 사람이 50번에 김동하, 72번에 최주종, 196번에 김진위가 묻혀 있고,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친일파도 92번에 김대식, 71번에 김석범, 9번에 김일환, 176번에 백홍석, 108번에 석주암, 93번에 송석하, 241번에 신상철, 273번에 신현준, 45번에 윤수현, 11번에 이형근, 72번에 최주종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반란군에다가 친일파다. 게다가 조선민중을 학살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소위 '토벌’했다는 간도특설대도 많이 묻혀있다.


현충원이 생기기 전에 돌아가신 김구 선생님 같은 경우에는 효창공원에 안장되어 계시는데 효창공원은 국립묘지가 아니다. 김구 선생과 같은 분은 국립묘지에 모시지 못하고, 친일파, 반민주, 반헌법 세력들은 현충원에 버젓이 자리잡고 있는 현실이 매우 안타깝다.


■ 애국지사 2묘역


앞서 민족반역자, 반공주의자, 친일파, 반란군들의 묘지를 보면서 마음이 참 무거웠을 것이다. 마지막은 훈훈하게 맺으려고 한다.


● 곽낙원 (애국지사 2-771)

● 김인 (애국지사 2-772)

여기 나란히 있는 두 개의 묘지는 하나는 할머니의 묘지고. 하나는 손자의 묘지이다. 그리고 곽낙원 여사의 아들이고, 김인 선생의 아버지는 바로 김구 선생이다.


먼저 곽낙원 여사에 대해 소개하면 김구선생의 어머니로 유명하시지만, 곽낙원 여사도 독립운동가였다. 김구 선생님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자 임시정부의 식모를 자처하며 가정부 노릇을 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셨다. 곽낙원 여사의 일화가 하나 전해지는데 임시정부 시절 곽낙원 여사의 생일이 다가오자 임시정부의 사람들은 여사님의 생일상을 차리려고 했다. 그러자 곽낙원 여사는 ‘내 먹을 것은 내가 마련할 터이니 돈을 달라’고 했다고 하셨다. 드디어 여사님의 생일날이 되고 임시정부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여사가 내어놓은 것은 권총 두 자루였다. 자신의 생일상을 준비할 돈으로, 나라의 독립을 위해 무기를 준비한 것이다.


여사는 임시정부가 여러 번 자리를 옮기던 도중에 고령으로 인한 노환과 건강악화로 병을 얻게 되었고, 1939년 끝내 바라던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향년 81세로 순국하셨다. 199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며 원래 중국에 안장되었다가 후에 국립대전현충원 지금 이 묘역에 안장되셨다.


할머니 옆에 계신 김인 선생은 김구 선생의 장남이다. 김인 선생은 1936년에는 한국독립군 특무대예비훈련소의 감독관으로 나가 군사훈련에 전념하셨다. 1937년에 한국광복진선의 조직에 참여하고 다시 상해로 들어가 한국국민당청년단 상해지구 기관지 『전고(戰鼓)』를 발간하면서 독립사상 고취와 전쟁의욕을 촉진시켰다. 1938년 5월 주석 김구의 명령에 따라 상해에 재차 잠입하여 당 재건을 기도함과 동시에 일본의 중요관공서를 폭파할 것과 일본의 현관들을 총살할 계획을 지휘 감독했다. 1939년 10월 광시성 류저우에서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에 입대하여 한중간의 유대를 강화하였고 첩보활동에 참가하였다. 1940년 충칭에서는 한국국민당청년단의 기관지 청년호성을 발간하고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그러던 중 광복을 불과 몇 달 앞둔 1945년 김인 선생은 폐병에 걸리고 말았다. 원래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옮겨온 중경에는 연료로 쓰는 석탄 매연과 습한 날씨 때문에 폐병으로 죽어간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이 많았다고 한다.


김인 선생이 폐병에 걸리자 그의 아내였던 안미생은 김구 주석에게 당시 만병통치약으로 불리던 항생제인 페니실린을 구해 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구 주석은 “다른 동지들도 맞지 못한 비싼 주사를 내 아들이라고 해서 맞힐 수는 없다”고 하셨다. 당시 김구 선생의 지위를 이용하면 구할 수는 있었겠지만, 아들이라고 특혜를 줄 수 없다는 뜻이었다. 결국 해방을 불과 몇 달 앞둔 1945년 3월 중경에서 서거하셨다.


여기 곽낙원 여사와 김인 선생, 그리고 옆에 계신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꿈꾸었던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 아마 지금과 같이 분단된 나라는 아닐 것이다. 실제 김구 선생님은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고 말씀하시고,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셨다. 일제 강점기 나라를 찾기 위해 떨쳐나섰던 분들은, 독립 이후에 분단에 반대하는 활동에 나섰다. 분단 이후에는 통일을 위해 한평생을 바쳤다.


반면, 일제 강점기 나라를 팔고 민족을 배신한 친일파들은, 독립 이후에 분단에 앞장섰고, 분단 이후에는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반공을 내세웠다.


2018년 올 한해는 아마 역사에 길이 남을 해이다. 판문점 선언이 있었고, 9월 평양공동선언이 있었다. 독립운동가, 애국지사로부터 이어지는 우리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위해 그리고 평화를 위해 앞으로 모두 함께해 나갔으면 한다. 운동하고 역사공부하고 일거양득이었다.






















손기정이 타고간 열차




















이 사람 묘가 여기에 있네요.




























이상호 2020-04-04 (토) 16:54 4년전
글이 꽤 기네요.
물론 여러 자료를 짜집기한 글입니다.
여유되시면 찬찬히보세요.
역사의 현장에서 들으니 새롭고 감동적이고 교훈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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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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