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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붓다

이기영 (전남노회,,목사) 2018-03-12 (월) 20:03 9개월전 1353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붓다

- 거룩한 낭비· 흔들리는 터전 마가복음 14:3-11

2018-3-4, 3-11

1. 시작하면서 ? 마가복음의 고난 주간 배경사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즉 종려주일 혹은 고난주간에 있었던 사건으로만 전 내용의 절반을 채우고 있습니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이야기 역시 고난주일로 불리는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 중 수요일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이 본문을 종려(고려)주간이라고 하는 배경과 함께 이해하지 않고서는 잘못 해석하기 십상입니다. 수요일에 있었던 이 여인의 이야기는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12명의 제자들의 실패담과 더불어 이해되어야 옳습니다. 가롯 유다의 이야기 역시 본문과 더불어 생각될 주제입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12명의 제자들과 극명하게 다른 삶을 보여준 한 여인의 이야기가 핵심내용이 되겠습니다. 오늘의 메시지는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붓다-거룩한 낭비, 흔들리는 터전입니다.

주지하듯 고난주간이란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3년간의 공생애를 사셨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마지막 일주일의 삶을 일컫습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당시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에게 희망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온갖 탄압과 불의로 인해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기에 예루살렘을 우주의 중심으로 존중히 여겼으나, 성전 자체는 그와는 너무도 다른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도둑과 강도의 소굴이었고, 정의가 사라져 버린 탓입니다. 백성들을 옥죄는 지배자 로마 제국의 위용에 이스라엘 종교는 머리를 숙였고, 그들의 앞잡이 역할을 했습니다. 그곳은 예수님 공생애 3년간 선포했던 하나님나라의 실상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예루살렘으로 당신의 마지막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백성들을 진정으로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해방시켜 구원해내기 위하여, 가난한 백성들에게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군림하던 세력들에게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하고자 예수님은 죽음을 예감하며 그 길을 걸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은 참으로 험난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열정을 가슴에 품었던 예수님은 당시 예루살렘을 다스리던 로마의 세력과 성전 관리들에게 불편한 진실이었던 까닭입니다.

 

 

2. 예수님 중심을 읽지 못한 제자들의 이야기

예수님은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을 시작하셨습니다. 지난 3년간 제자들은 예수를 보았고, 알았고, 누구보다 이해한 듯 했습니다. 하지만 성서 곳곳을 보면 제자들 중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간의 삶, 그가 가슴 속에 품었던 하나님 나라의 열정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곁에 있던 제자들에게 수차례, 적어도 성서에서 3번 이상 자신이 가야할 길의 성격을 분명하게 말씀하였습니다. 다음 말씀 속에 자신이 가는 길의 성격을 분명히 언급하였습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져야한다.”(16:24) “하나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대속물로 내놓기 위함이다이렇게 3차례에 걸쳐 당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설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 중 누구하나라도 예수님의 가슴 깊은 중심 이야기를 진지하게 숙고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루살렘 입성과 함께 헛된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누가 더 큰 존재가 될 것인가. 예루살렘에 가면 누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될 것인가가 그들의 관심사였습니다. 심지어 한 제자의 어머니는 예수님에게 자기 아들의 미래에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도 답답하셨고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베드로는 자신만만하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대답했습니다만 진정으로 예수님의 중심인 고난 여정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당당하게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인자는 죽을 것이란 말을 거듭 강조하였습니다. 베드로의 고백 바로 앞에는 소경된 자를 고치시는 이야기가 두 번 나옵니다. 예수께서 맹인을 보게 하셨던 이 사건은 육신을 고친 기적을 강조할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이야기의 핵심은 예루살렘의 길을 옳게 보지 못하는 제자들의 소경됨을 눈뜨게 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제자들의 장님된 상황을 답답하고 안타깝게 바라보았습니다. 이런 제자들이니 예수님 잡히시던 날 다 도망갔고, 십자가 처형 현장에 누구도 곁에 서 있을 수 없었습니다. 가롯 유다만이 특별히 나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12명의 실패한 제자들 중 한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사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그리스도인들 역시 실패한 제자들을 닮아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누구도 죽지 않으려 했고, 높아지려고만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갈망을 다 망각해버렸습니다. 예수께서 제일 근심하신 일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경우였는데, 바로 우리가 지금 오늘의 삶의 정황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기보다도 다른 길을 가려는 자들이 아닐까 안타깝고 두려워지기 때문입니다. 사순절 기간에 깊은 자아성찰을 해봐야 하겠습니다.

 

 

3. 예수님의 고난여정에 따른 한 여인의 이야기

실패한 제자들의 옆에 한 여인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성서에 여인의 이야기는 가롯 유다 이야기와 짝을 맺고 있습니다. 실패한 제자들과 다른 삶을 살았던 한 여인의 이야기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마가복음서는 제자들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만이 예수님 죽음의 길을 인지(認知)하고 깨달은 유일한 존재였음을 강조합니다.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과 동문서답을 하고 있을 때, 이 여인만이 홀로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열정이 예수 마지막 생애의 일주일을 예루살렘으로 이끌었고, 그 곳에서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베다니의 한 여인만이 이전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았고 앞서 장례를 치렀던 것입니다. 마지막 일주일 동안 이 여인만이 예수님을 바로 보았고, 참으로 알았고, 진정으로 따랐던 유일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여인은 모두가 피해 숨어있는 이른 아침 홀로 예수님 무덤가에 달려갔던 사람이 되었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목도한 증인이었다고 요한복음은 증거합니다. 예수님의 길, 예루살렘 여정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에게는 죽음도 무서움의 대상일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것을 예수님 마지막 죽음을 위해 아낌없이 내놓은 여인, 예수님의 장례를 치른 여인이야말로 땅에 떨어진 밀알이었습니다. 장식품으로서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 삶의 몫으로 십자가를 만났던 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4. 거룩한 낭비

이 여인의 이야기 중 거룩한 낭비라는 말로 생각해봅니다. 절제하지 못하고 분수에 어긋나게 필요 이상의 물질과 돈을 쓰는 형태를 가리켜 낭비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식의 낭비는 막아야 합니다. 하나밖에 없는 지구 생태계의 미래 역시 지나친 낭비를 줄여야 존립이 가능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백 데나리온이란 엄청난 값어치의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었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데나리온이란 큰 화폐단위입니다. 부자들이 보석을 사고 팔면서 흥정하는 단위의 돈이라 합니다. 수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기름이 한순간에 예수의 머리에 쏟아부어졌습니다. 가롯 유다가 말했듯이 그것은 엄청난 낭비였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수없이 구제할 수 있는 금액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위를 아름답게 여겼고 복음이 전해지는 곳곳마다 여인의 이야기가 회자될 것이라 했습니다. 낭비에 거룩이라는 말을 붙여도 좋을만한, 어색하지 않은 그런 이야기로 전해질 것이라 한 것입니다. 이렇듯 분노, 허기, 낭비와 같은 부정적인 단어에 거룩이란 말이 붙여지면 본뜻과 전혀 다른 값지고 멋진 말로 변합니다. 우리 역시도 부정적 개념들을 달리 만들 수 있는 신앙적 힘을 지녔으면 좋겠습니다.

 

 

5. 신학적인 의미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두 권의 설교집이 있습니다. 하나는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고, 다른 하나는 흔들리는 터전(Shaking Foundation)이라는 책입니다. 그리스도교 언어를 일상의 실존적 언어로 바꿔서 신앙의 본질을 설명하는데 천재적인 능력을 갖고 있는 신학자입니다. 이 두 설교집에서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아주 분명합니다. 종교란 본래 궁극적인 관심에 대한 이해란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명예가 궁극적 관심이라면 그것이 본인에게 신()과 같다고 했습니다. 만약에 물질()이라는 것이 삶의 궁극적인 관심일 경우 그것 또한 그 사람에게 신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부르고 신앙을 말한다 하더라도 일상적인 것에 그의 궁극적인 관심이 향해질 때 그것이 그에게 실제로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이 이성(理性)을 철저히 신뢰하고 그것에 생사를 걸 때, 그 또한 신()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틸리히는 궁극적인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치열하게 묻고 살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이야기를 생각해봅니다. 이 여인은 아마도 막달라 마리아라고 추정됩니다. 성서에 그렇게 기록된 바 없지만 성서학자들은 여인의 직업이 창기였을 것이라고 가늠합니다. 당시의 가부장적인 체계 속에서, 율법이 지배하는 현실 속에서 이 여인에게는 인간 이하의 삶이 일상(日常)이었을 것입니다.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을 것이며, 개만도 못한 인생을 버티면서 옥합에 기름을 사서 모으는 일로 자기의 인생을 보상받으려 했을 것입니다. 여인에게는 옥합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기름이 존재이유였고, 그것이 자기 인생의 궁극적인 관심이었으며, 그것으로써 자기 인생을 보상받을 수 있다고 믿었고, 그 희망만으로 모진 세월을 견디며 살았을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기 이전까지 여인에게 궁극적 관심은 오직 옥합에 쌓여있는 기름뿐이었습니다. 그것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폴 틸리히의 흔들리는 터전(Shaking Foundation)의 제목처럼 옥합에 쌓인 기름을 궁극적 관심으로 믿고 살던 이 여인에게 삶의 터전이 흔들리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성서 속 여인에게 자신의 기초가 흔들리는 대지진의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우연한 만남이 그녀에게 영향을 미쳤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확고하다 여겼던 삶의 터전이 크게 흔들린 경험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흔들리는 터전(Shaking Foundation)의 경험이 우리의 삶 속에 한번쯤은 찾아와도 좋을 것입니다. 지금껏 인간대접을 받지 못했고, 삶을 산 게 아니라 버텨왔던 이 여인을 예수님의 따사로운 눈으로 바라봐 주었던 탓입니다. 그를 인간으로, 창기가 아니라 정말 사랑스러운 한 여인으로, 천하보다 귀한 생명으로 바라봐주는 눈길을 예수님으로부터 느낀 까닭입니다. 차곡차곡 채워진 옥합, 거기에 인생의 궁극적 관심을 두었던 이 여인의 터전(Foundation), 지금까지 자기 삶을 버텨주었던 삶의 토대가 그 따뜻한 예수님 눈길과 그의 인격으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간에 옥합에 쌓여 있는 기름이 아니라 자기를 전혀 다른 인간으로 바라봐 준 예수님에게로 삶의 방향을 돌렸던 것입니다. 흔들리는 자기 삶의 터전을 주시하며 그녀는 과감히 옥합에 모아 둔 향유,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엄청난 값어치의 기름을 예수님 머리에 쏟아 부었습니다. 성서는 이것이 예수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라 했지만, 그것은 후대의 신학적 해석일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터전의 흔들림 앞에서 예수님 장례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을 것입니다. 장례 이야기보다 중요한 것은 이 여인 속에서 생겨난 흔들리는 터전의 경험입니다. 옆에 있던 제자들마저 그것을 낭비라고 여겼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면 배불리 먹을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의 낭비가 어떤 의미인지를 알았습니다. 여인의 낭비를 아름답게 기억하라 했습니다.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여인의 이야기가 전해질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흔들리는 터전을 통하여 궁극적 관심 자체가 달라진 구체적 사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의 낭비는 거룩한 낭비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도 궁극적 관심을 발견하고 흔들리는 터전의 경험을 반드시 통과해야한다는 교훈입니다.

 

 

6. 거룩한 낭비는 역사 속에서 일어난다.

거룩한 낭비는 성서 속의 인물들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삶을 거룩하게 낭비했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의 삶이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역사 속의 두 인물을 통해 거룩한 낭비의 화신(化神)들을 언급하고 상고해 보겠습니다. 먼저 서학(西學)을 만난 정약용과 그 집안의 경우를 상고해 보겠습니다. 유학적 가치관과 세계관을 지켜 살던 실학자들이 서학, 천주교를 만났습니다. 지금까지 양반과 상놈의 차별 속에 살던 사람들에게 만민평등이 선포되고, 현상밖에 없다고 믿던 이들이 저세상과 영생이란 궁극적인 세계가 있음을 알았을 때 자기 터전이 흔들리는 경험이 있었습니다. 모진 고난과 갈등 속에서 그들은 서학을 받아들였고, 그 결과 제일 큰형 정약현과 정약용이 귀양을 갔으며, 바로 윗형 정약종이 아들 정하성과 더불어 순교를 당했습니다. 흔들리는 터전의 대가가 이런 식의 고통이자 죽음이었습니다. 유학자(실학자)로서 살았던 이들이 자신의 인생을 낭비한 것입니다. 아마도 정약용 가문이 학문적인 전통을 이으며 살았더라면 무탈했을 것입니다. 흔들린 터전의 경험 탓에 그래서 궁극적인 관심이 달라졌기에 그들은 자기의 인생을 과감히 던져야 했습니다. 삼백 데나리온을 던진 여인과 같은 낭비가 이들에게도 있었던 것입니다. 일가족 전체, 정씨 문중 전체의 거룩한 낭비를 통해서 오늘 한국의 가톨릭 교회가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3·1 독립선언 당시 끝까지 망설이다가 마지막으로 선언서에 서명했던 신석구 목사의 경우입니다. 선교사들이 가르쳐 준 신앙의 지침에 따라서 그는 3·1 독립선언에 참여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선교사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다른 종교인들과 같이 일할 수 없고, 정치적인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이런 원칙이 이 땅의 목사들에게 강요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깊은 고민 속에서 그 역시 흔들리는 터전(shaking foundation)을 경험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입된 신념 체계가 흔들렸던 것입니다. 민족의 장래를 위해 민족대표 33인 중 제일 마지막 서명을 했으나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유일한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모진 고초와 감옥 생활을 견뎌야 했고, 병고에 고생했으나 그에게는 민족의 독립은 지켜야 할 궁극적 관심이었습니다. 실로 그의 인생은 망가졌고, 버려졌지만, 자신을 거룩하게 낭비함으로써 그는 나라를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흔들리는 터전 탓에 새로운 일들이 가능했습니다. 거룩한 낭비의 화신들을 성서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역사 속에서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 덕으로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작금의 우리에게는 분노도, 욕망도 거룩하지 않습니다. 매순간 분노하고 허기를 느끼며 낭비하지만 도무지 거룩하지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여인의 이야기가 전파되는 곳에 복음이 있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여인의 이야기가 전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낭비는 우리 안에서, 우리 속에서 거듭 발생되어야 옳습니다. 이것이 3·1절을 지내며 드는 우리의 생각입니다. 언젠가 우리의 삶 역시 거룩하게 낭비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런 날 반드시 우리에게도 허락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3.1혁명 100주년을 1년 앞두고 아직도 정명(正名)을 회복하지 못한 채 관제 용어인 ‘3.1운동이란 비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19193-4월 한민족이 왜적의 총칼 앞에 생명을 내던지며 투쟁했던 ‘3.1혁명의 역사적 의미부터 회복해야 할 과제를 갖고 있습니다.

혈육의 사람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씨름하여 이스라엘이 되어 진 성서적 배경을 갖고 출범한 나루교회가 창립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창립 당시의 신앙동기가 재생하여 현재에 새 의미와 비전을 갖고 앞으로 미래를 예비하시기를 바랍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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