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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이 없는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 디모데후서 1: 7- 14 2017-12-31 송년주일 1. 디모데후서는 대체로 젊은 동역자요 보조자인 디모데에게 주는 사사로운 조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행16:1). 주된 주제는 인내입니다. 디모데는 모든 고난과 반대에 직면하여도, 예수 그리스도를

이기영 (전남노회,,목사) 2018-01-07 (일) 04:16 6년전 2157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 디모데후서 1: 7- 14

2017-12-31 송년주일

 

1.

디모데후서는 대체로 젊은 동역자요 보조자인 디모데에게 주는 사사로운 조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16:1). 주된 주제는 인내입니다. 디모데는 모든 고난과 반대에 직면하여도, 예수 그리스도를 충실하게 계속 증언하고 복음과 구약성서의 참된 가르침을 견지하고(3:15), 교사와 전도자로서 의무를 다하라는 권고와 격려를 받습니다. 디모데는 특별히 망령되고 헛된말에 휩쓸리게 되는 위험에 대한 경고를 받습니다(2:16). 끝으로 그는 바울의 삶과 목적의 모범, 즉 그의 믿음, 오래 참음, 사랑, 박해에서 오는 고난을 상기하라는 충고를 받습니다.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바울의 편지를 통해 나타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착하고 신실한 사람으로 충성된 일꾼입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와 외조모 사이에서 사랑을 받으며 자란 탓인지 성격이 나약하고 용기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지도력이나 담력이 약하여 당연히 고난 받아야 할 시간에 고난 받지 못하고 이리저리 기피하여 비굴하게 굴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아버지인 바울이 지금 디모데에게 편지를 쓴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1:8). 디모데는 바울이 빈번히 감옥에 들어가고 매를 맞으며 고생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비해 디모데 자신은 너무 안일하게 지냈고 조그마한 고난과 수고도 피하려고 했으므로, 이제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이루어지는 일에 소외된 자기를 생각하니 부끄럽기 그지 없었습니다. 바울은 몹시 부끄러워하는 디모데를 편지로써 위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송년주일의 메시지는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입니다.

 

2.

인간에게는 거룩한 수치감이 있어야 합니다. 군자의 덕 중에 하나가 수오(羞惡)지심(至心)입니다. 악을 부끄러워 할 줄 아는 마음, 즉 잘 못된 일에 대해서는 부끄러워 할 줄 아는 마음이 군자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잘못 되었으면 부끄러워하고,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회개할 줄 아는 자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문제는 무엇을 부끄러워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가난은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닙니다. 다만 게으른 것이 부끄러움입니다. 물론 부자도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얼마나 이기적이었느냐 하는 것이 부끄러움입니다. 부 자체나 진실한 가난은 결코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닙니다. 정직한 평민은 자랑스럽습니다. 때로 문벌이나 학벌이 좋지 못하다고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학벌의 부족함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진실하지 못하고 비굴한 것이 부끄러움입니다. 때로는 용모가 초췌하다고 부끄러워 합니다. 그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다만 마음이 더러운 것이 부끄러움입니다. 체구가 왜소하다고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작은 것이 부끄러움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부끄러워 하며 무엇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부정한 출세, 부정한 재물이 부끄러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격()에 맞지 않는 칭찬을 들을 때에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비굴함과 불신과 불충성과 게으름에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의 맑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면서 부끄러움이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복된 사람입니다. 아이들의 깨끗한 음성을 들으면서 한 점의 부끄러움이 없는 어른들은 훌륭한 어른입니다. 우리는 지난해 동안 무엇을 자랑으로 여겨왔고 무엇을 부끄럽게 여기며 살아 왔습니까?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어떤 부끄러움과 자랑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당연히 되어야 할 존재로 되지 못했을 때에 부끄러움을 가지게 됩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어이없게도 하지 못했을 때에 부끄러운 것은 당연합니다.

교황은 성탄 메시지에서 평화를 호소했습니다. ‘한반도 갈등극복 상호신뢰 증진을 그리고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라는 선언으로 전 세계에 전쟁의 바람이 불고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우리 한국사회에는 불법이 목숨을 앗아가고, 비리가 희망을 빼앗았습니다. 이런 일이 다시없길 희망하며 올해 기억해야 할 사건들을 꼽아보자니 우리 사회의 밝은 면을 비추기보다 어두운 면을 들춘 쪽이 더 많았습니다. 평화를 위협하고, 정의를 짓밟고, 사람의 존엄을 훼손한 사건들이 많아 슬픔이 길게 흐른 해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래도 촛불혁명으로 정권교체를 이루어 냈고, 과거환부를 도려내서, 새살이 돋아나게 하였습니다. 사회 각 부문에서 쌓인 적폐를 털어내고 새로운 미래를 가리킨 움직임들입니다.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께서 고난당하시는 가장 어려운 시간에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으며 그리고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도망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깊이 생각해 보면, 예수의 십자가를 구레네 시몬이 대신지고 간 사실에 대해 제자들에게 유감이 많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위시하여 열 두 제자들은 다 어딜 가고 전혀 알지도 못하는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져야 합니까? 아마도 뒤늦게 깨달은 베드로가 가슴을 치며 부끄러워 했을 겁니다. 성경에는 상세히 기록돼 있지 않지만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도 갈릴리로 되돌아가서 어부생활을 시작하려 한 것은 분명히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짐작을 합니다. 지난날을 돌이켜 볼 때, 어찌 더 이상 예수의 제자로 나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가 이렇게 부끄러움과 후회를 가지고 있을 때에 주님은 친히 그를 찾아가시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3.

동양의 공자를 소크라테스, 맹자를 플라톤, 순자를 아리스토텔레스에 비교합니다. 공자는 자연을 초월적으로 생각한 사람이었고, 맹자는 자연을 내재적으로 생각한 사람이었고, 순자는 자연을 외재적으로 생각한 때문입니다. 공자는 자연을 종교적으로 보고, 맹자는 자연을 철학적으로 보고, 순자는 자연을 과학적으로 보았습니다.

순자의 <천론>의 첫 부분을 인용해 보면, 하늘의 운행에 대하여 좋은 정치를 가지고 응하면 길하고, 문란한 정치를 가지고 응하면 흉 한다. 생산에 힘을 쓰고 소비를 절약하면 하늘도 사람을 가난하게 할 수 없다. 먹고 입는 것이 넉넉하고 적당한 운동을 취하면 하늘도 사람을 병나게 할 수 없다. 올바른 길을 따라 어긋남이 없으면 하늘도 사람을 해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생산에 힘을 쓰기만 하면 수해와 한재도 그 사람을 굶길 수 가 없고, 운동과 의식이 적당하면 더위와 추위도 사람을 병들게 할 수 가없고, 도를 따라 살기만 하면 그 무엇도 사람을 불행하게 할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순자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인간을 무생물, 식물, 동물 위에 놓습니다. 순자의 <황제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물과 불에는 기()는 있지만 생명은 없다. 풀과 나무에는 생명은 있지만 지각은 없다. 새와 짐승에는 지각은 있지만 예의는 없다. 사람에게는 기가 있고, 생명이 있고, 지각이 있고, 예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것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공자는 인()을 주장하고, 맹자는 의()를 주장했지만, 순자는 예()를 주장했습니다. 그만큼 시대가 달라진 것입니다. 사랑의 시대도 지나가고 정의의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이제 오는 시대는 습속을 가지고 절제하여야 하는 예절의 시대가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순자는 예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예는 정치의 극치요, 나라를 강하게 하는 근본이요, 권위가 행해지는 방도요, 공명을 일으키는 근본입니다. 왕이 여기에 의지하면 천하를 얻을 수 있고, 여기에 의지하지 않으면 나라를 잃고 맙니다. 예란 한마디로 사회의식입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사회의식이 예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 천하가 평화롭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순자는 유교적 군주라야 천하를 통치할 수 있고, 예를 질서원리로 하는 나라만이 미래에 이룩될 통일국가의 올바른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새 대통령을 뽑고 새로이 출범하는 이 나라에 고전을 교훈으로 삼아 봤으면 싶어집니다.

예수는 제자들이 하늘의 색깔을 보며 자연의 일기 변화는 잘 알아보면서 시대의 징조는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고 안타까워 한 적이 있습니다(16:2-3).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21세기, 이 시대의 징조를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지배제도들은 세계 도처에서 근본적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시장의 무한한 탐욕에 대해 세계인들은 두려움과 불신을 거침없이 나타내고 있습니다. 월가 (Wall Street)를 점령하려는 움직임이 전 세계로 번지고 있었던 일(2012)을 기억합니다.

이른바 적하효과이론(trickling down effect theory, 정부투자 따위를 대기업 성장에 기울이면 간접적으로 중소기업과 소비자에게 침투되어 경제효과가 커진다는 경제이론)은 허울일 뿐 실제로 경제적 양극화는 악화되기에 시장경제의 정당성 또한 더 거센 도전을 받고 있고 또 받게 될 것입니다. 시장의 탐욕은 커져만 가는데 이 시장을 제대로 공정하게 관리해내지 못하는 국가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국민은 국가의 공익성과 공공성에 대해서도 회의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대의정치를 표방하는 의회민주주의와 정당정치에 대해서도 시민들은 신랄한 비판을 서슴지 않습니다.

특히 올해는 지나고 있지만, 세계적으로나 우리나라에서나 권력기구의 책임자들이 교체되는 해로 기억될 것입니다. 시장, 국가, 정당, 의회 모두가 정당성의 위기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터에 정치 지도력이 폭넓게 교체되어지는 정말 카이로스의 때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상황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메시지를 어떻게 전하여야 할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4.

다시 성서본문 말씀으로 돌아가 결론을 찾겠습니다. 디모데는 희생해야 할 시기에 희생을 치르지 못했고,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이루어지는 동안에 뒷전에서 구경만 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특히 그는 믿음의 아버지 바울을 생각하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때 바울은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있는 세 가지의 지혜를 주며 디모데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첫째, 은혜에 속한 사람으로서 은혜로 해결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대로 하심이라(9)고 말씀합니다. 행위대로가 아니라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안에 있는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여 부끄러움으로부터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언제 우리가 나의 선행과 나의 의로 살았던 적이 있습니까? 오직 은혜만이 부끄러움을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둘째는 미래가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고난의 기회가 다시 있으니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을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지난날에 부끄러웠으면 이제는 영광을 찾아야 하고, 지난날에 게을러서 부끄러웠으면 이제는 부지런하고, 지난날에 기피해서 부끄러웠으면 이제는 담대하게 선두에 서고, 지난날에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부끄러웠으면 이제는 적극적으로 나서고, 지난날에 안 된다는 것 때문에 비굴했으면 이제는 긍정적으로 창조적인 생을 살고, 지난날에 조그마한 고난과 어려움과 비방으로 뒷전에 물러서서 비굴해 졌다면 이제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셋째, 여기에는 기능적인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부끄러움이 정말로 사실이라면 딛고 일어서서 절망에서 소망으로 새로운 용기를 얻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속한 고난이 따로 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네로 황제치하 로마감옥에서 순교했습니다. 그러면 네로 황제치하 로마감옥에서 죽어야만 순교입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도 불의와 부정과 죄와 더불어 싸우며 죽어 가면 거기에 순교가 있고, 한국에서 순교해도 순교입니다. 내가 처한 어느 곳이든지 순교적으로 살면 거기에 순교가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알아주고 순교 비를 세워야만 순교가 아니라, 주님을 생각하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와 함께 고난당하는 마음으로 고난과 핍박을 참고 견디는 거기에 순교가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감옥에 있는 나를 부끄러워 말라. 네가 있는 목회 현장에도 고난은 있느니라. 그리고 네가 로마감옥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부끄러워 할 것 없다. 네 몫에 대한 십자가를 지고 가면 바로 그것이 순교의 현장이니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5.

루터보다 100년 앞서 개혁을 시도했던 얀 후스(Jan Hus, 1372-1415.7.6.)의 발자취를 따라서 새로운 개혁의 길 모색을 해야 합니다. 루터의 당당함과 칼빈의 명석함과 츠빙글리의 용맹함과 낙스의 추진력은 그 시대의 좋은 개혁의 선례(先例)라고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얀 후스의 모습에서 또 하나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마도 강대국 독일의 영향력아래 있었던 체코의 외로운 개혁자의 모습이, 일제 강점기를 경험한 우리에게 그다지 낯설지 않은 사건으로 떠오릅니다.

얀 후스의 화형당한 흔적의 장소가 독일 남부도시 콘스탄츠에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합니다. 당시 가톨릭교회의 적대자들에 의해 이단으로 몰린 후스는 이곳에서 화형 되었고, 그의 유골은 강에 뿌려졌습니다. 본래 신변의 안전을 보장해 준다는 약속을 믿고 조국 체코를 떠나 600여 킬로미터 떨어진 콘스탄츠에 도착한 그는 곧 체포되어 수감되었습니다. 후스는 옥중서신을 통해 조국 체코인들을 격려하고 위로했습니다. 하지만 개혁의 당위성을 설파하려고 마음먹었던 종교회의에서 후스는 오히려 이단으로 정죄되어 마침내 화형을 당합니다. 후스의 화형을 결정한 콘스탄츠종교회의가 열렸던 장소에서 후스가 화형당한 곳까지는 수백 미터 가량 떨어져 있습니다. 후스가 당시에 마지막으로 걸었을 그 길을 따라 걷노라면 그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단의 괴수라고 적힌 모자가 씌워진 채, 책들이 불태워지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조국 체코에서 멀리 떨어진 적국 독일의 낯선 마을에서 외롭게 죽어간 후스를 생각할 때, 일본제국주의 강점기 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어간 시()인 윤동주를 비교해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일본 교토에서 유학하던 윤동주는 항일운동에 가담한 협의로 체포되어 형무소에 수감되고, 해방을 앞둔 1945216일 윤동주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낯선 적국의 옥에 갇혀 생을 마감한 윤동주와 후스의 외롭지 만 의연한 모습을 겹쳐 떠올라오는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필자는 1990년대 중반에 본교단과 항거리 개혁교회간의 선교협력계약을 한다는 명목 하에 항거리와 체코를 방문했을 때의 일을 기억을 찾아 상상해 보는 것입니다. 체코 프라하 도심 중앙광장에는, 한때 개혁교회였지만 가톨릭교회로 바뀐 틴(Tynem)성당을 바라보는 후스의 동상이 민족의 영웅개혁자로 서 있습니다. 그 교회당 첨탑아래는, 이종성찬(성찬식과 실제로 빈자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는 행사)을 주장했던 후스파의 상징인 성배를 녹여 만든 마리아상이 걸려있고, 그 맞은편에는 27명의 후스파 개신교인들이 처형당한 장소가 있습니다. 뜨거운 햇빛을 등지고 좌절된 개혁의 상징이 되어버린 첨탑을 바라보는 후스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첨탑 십자가를 바라보던 윤동주와 그의 십자가가 떠올라 옴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하늘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슬픈 눈으로 교회당 첨탑을 바라보았던 후스와 윤동주, 위기의 조국에 살았고, 적국에서 적대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생의 마지막 순간을 보냈지만, 순교자적 신앙을 끝까지 지켰던 이들은 비록 서로 다른 시공(時空)을 살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동일한 신앙을 지켰던 부끄럼없는 믿음의 선진들이었습니다. 1415년 초 후스는 나는 감옥에 앉아 있으나, 부끄럽지 않습니다.”라는 글로 시작되는 그의 옥중서신을 썼고, 1941년 늦은 가을 윤동주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그의 서시(序詩)에서 소망합니다.

얀 후스가 화형당한지 100년이 지난 후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루터의 개혁이후 500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개신교에서 우리가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한국교회는 개혁의 주체인가 혹은 개혁의 대상인가의 문제에 올바른 대답을 해야 할 과제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윤동주가 태어 난지 100년이 지난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것은, ‘개혁의 주체인지, 아니면 개혁의 대상인지 알 수 없는 묵직한 답답함이 가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한국교회는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의 대상이라는 뼈아픈 사회적 비판에 직면해 있습니다.

애국시인 윤동주의 서시(序詩)(1941.11.20)가 주는 의미를 깊이 음미했으면 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살고 싶은 것이 우리 믿음의 조상들의 아름다운 고백이었습니다.

오늘의 복음이란 나 하나 예수 잘 믿다가 죽어 천당 간다는 소식이 아닙니다. 예수의 복음의 힘은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면서 십자가 처형을 집행하는 모든 세속권력을 마침내 은혜롭게 이겨내는 사랑의 힘입니다. 때로는 바보처럼 우아하게 십자가를 지면서 그 십자가를 폭력으로 짊어지게 하는 잔인한 권력으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은총의 힘입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 그 고난 뒤에는 반드시 영광이 있습니다. 고난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주어지는 새해에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새로운 기회를 가져서 영광이 함께하는 새해를 맞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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