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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그 오늘의 역사적 의미-마리아 찬가(Magnificat)

이기영 (전남노회,,목사) 2017-12-18 (월) 05:53 6년전 2113  

성탄 그 오늘의 역사적 의미 - 마리아 찬가(Magnificat)

누가복음 1:26-38, 46-56

2017년 성탄절

 

1. 여는 말

성탄, 한 아기의 거룩한 탄생이 어제 있었던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우리시대의 현실로써 재현되어야 한다는 것이 크리스마스의 이유입니다. 위대한 존재의 탄생을 추모하듯 회상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오늘 우리의 가슴 속에서 사건화시킬 수 있는 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성탄은 한해의 끝자락에 있지 않고 언제든 새로운 시작의 의미를 갖습니다. 교회력의 절기도 강림절부터 시작하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태양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달, 12월에는 옛 것과 새 것이 때로는 지나간 삶에 대한 부족감을 느껴서 이해의 남은 시간을 빨리 보내고 새해 맞기만을 바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12월의 남은 몇 날들은 이 해의 찌꺼기가 아니라 새싹을 잉태케 하는 그루터기와 같습니다. 한 해의 끝자락에 있는 예수 탄생은 하나님의 자녀 될 우리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리는 카이로스, 새로운 시간을 알리는 역사적이고 은총의 사건인 까닭입니다. 미국의 작가 오 헨리의 소설 마지막 잎새의 그 한 잎새처럼 시간의 끝에 매달려 살고 있는 우리에게 새 생명을 입도록 하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성탄은 이천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를 기억하고 회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마음, 정신 속에서 재현, 반복되어야 할 현재의 역사적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 주여! 이제는 여기에서 태어나소서라고 노래해야만 할 것입니다. 2017년 성탄절 메시지는 성탄 그 오늘의 역사적 의미 마리아 찬가(Magnificat)’입니다.

 

2. 예수의 화육은 하나님의 경륜

요한복음 서사(1:1-5)에 따르면, 인간으로 태어난 예수는 말씀으로 존재했으며, 하나님과 함께 모든 것을 창조한 분으로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실은 이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요 그 안에 모든 사람을 비추는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 빛이 어두운 세상에 비치기에,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선재와 말씀으로서의 존재, 화육하여 인간으로 된 세상에서의 탄생을 말하며, 세상은 그를 이해하지도 못하나 그를 이기지는 못했다고 밝힙니다.

마태복음은 마리아가 낳게 되는 아기 예수는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이미 예언되었으며 하나님은 예수 탄생을 그의 인류 구원의 경륜 가운데 이미 작정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이름을 예수라 부르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라”(1:21)는 뜻입니다. 이사야는 그가 동정녀의 몸에서 낳을 것으로, 미가는 그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게 되는 것까지 예언했습니다(미가5:2, 2:6). 마태는 구약의 예언자들을 인용하며,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동정녀에게서 탄생하는 성탄의 기적들은 다 하나님이 구약의 예언된 말씀들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지적합니다.

예수의 탄생에 대해 처음부터 정확하게 조사하여 데오빌로 황제에게 보고하려던 누가복음은 좀 더 상세히 전합니다. 마리아의 수태는 성령으로 된 것이요, “‘가장 높으신 분의 능력이 그를 감싸줄 것이요.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불릴 것이다.”(1:35)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문안할 때, 성령으로 충만한 엘리사벳은 다음과 같이 마리아에게 외쳤습니다.

큰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된 일인가.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받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1:42-45,개역 개정판)

엘리사벳에게서 이토록 놀라운 말씀과 축복을 받은 마리아는 그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주님을 찬양하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본문 내용입니다.(1:47-56)

 

3. 기다림과 메시아 탄생의 역사적 진실

수백년을 거쳐 민족의 고난을 경험해 온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약속된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로마제국하의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의 해방을 위해 메시아 탄생을 간절히 염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실상 성서를 자세히 보면 이러한 기다림과 메시아 탄생에는 몇 가지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는 메시아 대망이 민족 차원의 것이었음에도 이스라엘 민족 중에는 메시아 탄생을 원치 않았던 부류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로마정권에 빌붙어 자신들의 안락과 행복을 얻을 수 있었던 소위 가진 자, 기득권층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 당시 이스라엘 왕 헤롯이었습니다. 그는 메시아 탄생 소식을 전해 듣고 자신의 자리를 염려한 나머지 베들레헴 근처의 두 살 아래 어린 아이들 모두 다 죽였습니다.(2:15) 예나 지금이나 메시아를 기다리고 구원자를 바라는 사람들은 가난하며 억눌리고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질 것 다 가지고 부족한 것 모르고 자기 한계를 경험한 적이 없는 자들에게 있어서 메시아는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여겨질 것입니다. 자신의 안정, 권위, 소유를 흔들어 놓는 위험한 존재일 뿐입니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기보다는 어떻게 해서라도 남보다 앞서려고 안달하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하나님 신앙은 희미해지고 돈(물질)에 대한 신뢰만을 가슴에 가득 채우고 있는 시점에서, 네 것을 포기하라고, 너 자신을 희생하라고 말씀하시며, 가난한 자, 낮은 자, 고통 받는 자를 위해 오신 메시아가 혹시 우리에게도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심히 염려됩니다.

둘째는 이스라엘 민족의 메시아 기대에도 불구하고 메시아 오심을 진정으로 원하고 바라며 매일 그 뜻을 묵상하고 그 징조를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어두운 시대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의 탄생 시점에 이르러 유일하게 메시아 비밀을 알아차린 몇몇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알려고 추구하던 동방박사들이었습니다. 동방이라 함은 아라비아, 바벨론 또는 바사(=페르시아)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동방에서 온 방문자, 동방박사들의 방문기사는 메시아 탄생이 범세계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방문자들은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많은 예물(황금, 유향, 몰약)을 드립니다. 유사한 이야기가 모세의 탄생과 어린 시절에 대해 유대 전통 가운데 나옵니다.(2:1-10참조)

동방박사란 요즘 말로는 학자들, 특히 철학가, 신학자를 일컫겠지요. 본래 신학자란 위의 것, 하늘의 징조와 변화, 시대의 의미를 예민하게 듣기 위하여 명상하며 연구하는 존재입니다. 시대 변화를 무감각하게 느끼는 사람들,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활동무대는 인간이 숨쉬고 먹고 살아가는 역사 한가운데이기 때문입니다. ‘시대의 징조를 알지 못하느냐고 외치신 예수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생존문제, 질병, 가정 내의 대소사 등 실존적 문제에 사로잡혀 하늘의 변화, 역사의 징조들에 둔감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가 다반사입니다. 깊은 명상과 기도 한번 제대로 못하고, 신문과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못하여 현실 세계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기회 한 번 갖지 못한 채 살아가는 한 시대를 향한 성서의 메시지가 실종될 때가 많음을 뉘우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럴수록 오로지 하늘을 보며 진지(眞知)를 추구하던 동방박사들의 모습이 마냥 그리워집니다.

셋째로 성서 안에서 우리는 성탄의 비밀을 터득한 목자들의 활약상을 찾게 됩니다. 그것을 마치 예수탄생의 초라한 환경에 걸맞게 그 탄생의 소식도 당시에 거지들이나 심지어 도둑과 같이 천대받는 사람들인 목자들에게 맨 먼저 알려졌다는 사실입니다. 때는 아마도 건조기인 여름이었을 것이고, 양떼는 들판에 방목했을 것이고(2:8), 장소는 어딘가 다윗의 동네”(2:11) 베들레헴(2:4,15)과 가까운 곳이었을 것입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목자들이란 밤을 지새우며 양들을 이리떼로부터 보살펴야 하는 힘들고 어려운 직업이었습니다. 아마도 요즘 말로 하면 가능한 한 피하고 싶은 더럽고, 힘들고, 보수도 적은 3D 직업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누가 보지 않더라도 졸지 않았고, 게으르지 않았으며 양들을 보호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 착하고 신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정말 성실한 민중이요,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모두가 자고 있던 밤에 이들을 통해 메시아 탄생의 징조가 드러난 것입니다.

힘들고 고통을 당하면서도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가난한 사람들, 쉽게 남을 속이거나 적당하게 거짓을 섞어가며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 속에, 마음이 가난한 이들 속에서 하나님이 보일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메시아 탄생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목자의 마음이 있다면 우리의 꿈은, 믿음은 반드시 실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성탄을 보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가짐, 삶의 실제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넷째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고 실현되어진 사실로 기억되어야 합니다. 동방박사와 목자들마저도 성탄을 자기 밖에서 발생되는 객관적 사건으로만 이해하고 있을 때, 그 메시아를 자신 속에서 잉태하여 낸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천사를 통해 예수 잉태 소식을 전해들은 마리아의 고뇌 곧 마리아의 성탄에 관한 내용입니다. 주지하는바 마리아는 목수인 요셉이란 청년과 약혼한 정숙한 여인이었습니다. 다윗의 족보를 지녔으나 가난했던 젊은 청년 요셉과의 결혼을 앞둔 마리아는 너무도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민족의 아픔, 메시아에 대한 대망도 잠시 잊은 채 자신의 결혼에 대한 생각만으로 기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네가 잉태하여 아기를 낳게 되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1:31). 이는 처녀인 마리아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처녀가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불편한 일입니다. 당시,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처녀잉태란 자신의 인격적 죽음은 물론이며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가족으로부터 등돌림을 당하는 고통이 수반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다음처럼 외칩니다. 아무리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하더라도 전혀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노라고!’ ‘그런 일이 자신에게서 일어날 수 없음을 거듭 항변했습니다.(1:34) 옛날 초대교회 대표적인 교부 어거스틴은 천사에 대한 마리아의 이런 반응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자신의 처녀성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다는 가부장제 시각에서 그리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외경에는 성령잉태를 듣고 난 마리아가 하나님이 혹시 인간으로 변신하여 잠자는 사이 자신과 동침한 것이 아닌가 물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리아의 항변을 이런 시각에서 이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성서 안에는 이런 거부 의사가 한두 번 완곡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우리의 상식으로 생각하기에는 아마도 수십 번 하나님 안돼요. 절대 그럴 수 없어요.’라는 마리아의 절규가 있었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이까.”(1:34, 개혁개정판) 성령의 역사라 하더라도 한 여인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꿈을 이처럼 산산이 조각나게 할 수 있겠느냐는 마리아의 항변을 우리는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메시아를 원했지만 정작 메시아가 이렇듯 자신에게 고통을 주고 자신의 계획을 송두리째 무산시키며, 핑계조차 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일로 다가왔을 때 마리아처럼 안돼요.”라고 외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위대함은 그 다음 말 속에 있습니다. 오랜 고통, 번민 그리고 내적인 투쟁 끝에 마리아는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니라.”(1:38,개역개정판) 이러한 마리아의 대답은 당시 가부장적 가치관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자신을 메시아 탄생의 도구가 되게 하겠다는 자기 확신의 표현입니다. 모두가 대망하는 메시아 탄생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바치겠다는 거룩한 고백이었던 셈입니다.

예수의 처음 탄생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마리아, 평번한 한 처녀 자신의 운명을 바꿔 놓은 엄청난 충격의 사건을 자신 속에 품어 안음으로써 예수, 모두가 고대하던 구원자 그리스도가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첫 번째 성탄, 크리스마스이자, 마리아의 성탄이라고 부릅니다. 실제로 이러한 사건이 있은 후 마리아는 예전의 평범한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메시아를 탄생시킨 모태, 그 자궁은 정말 복이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어떤 예언자도 말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전통적인 여인으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진리를 말했습니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1:51-53, 개역개정판) 메시아 어머니로서 마리아는 공평치 못한 당시 사회권력 구조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 곧 메시아 예수가 이룩해야 할 사명에 대한 비전을 힘차게 이처럼 선포했던 것입니다. 마리아찬가(Magnificat)입니다.

 

4. 마리아 찬가와 한나의 기도와의 비교

마리아 찬가(1:46-55)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한나의 기도(삼상2:1-10; 113:7-9)와 비슷합니다. 이 노래는 두 가지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이 가난하고 짓밟히고 힘없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며, 부자와 권세 있는 사람들을 대적하신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에 대해 성실하시다는 점입니다. 마리아의 아들의 탄생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입니다.

구약성서의 한나의 기도(삼상2:1-11)는 신약성서의 누가복음 146-55절에서 마리아가 부르는 찬양의 모델이 됩니다. 인간의 문명이 역전된다는 주제는 시편 107:41-42; 113:7-9; 전도서 10:5-7 같은 곳에서도 발견됩니다. 하나님이 낮은 자들을 높이신다는 믿음(삼상 2:7)은 하나님이 사울을 선택하신 사실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됩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작은 지파 출신이었으며, 그 지파 가운데도 가장 중요하지 않은 집안 출신이었습니다.(삼상9:21) 이런 믿음은 또 하나님이 이새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어리고, 비천한 양치기 소년 다윗을 선택하신 일에서도 확인됩니다.

 

5. 오늘의 성탄절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스도 탄생 이후 2,000년 이후를 살고 있는 신앙인으로서, 교회를 사랑하며 교회를 섬기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 성탄절 역사를 통해서 오늘의 그 의미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성탄절은 적어도 그 옛날 대다수 사람들의 경우처럼, 메시아를 거추장스럽게 여긴 몇몇 사람들, 마치 감나무 위에서 감이 떨어지듯 기다렸던 사람들, 그리고 자신 밖의 객관적 사건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의 경우와는 달라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히려 성탄은 우리 모두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기존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지금까지 살아온 가치관으로서는 되지 않는 엄청난 물음을 던지며 진리를, 메시아를 너의 가슴 속에서 잉태하라는 절대 절명의 요구로 다가오고 마리아의 자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삶, 자아의 죽음을 요청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절대라고 믿고 의지해 왔던 가치관을 훌훌 털어버리고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 보화가 묻힌 땅을 사는 농부와 같은 헌신을 요구합니다.

분명 예수의 교훈은 세상이 주는 교훈과는 다른 것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헐벗고 굶주렸으며 병들고 가난한 자들을 당시 유대 율법은 암하렛츠, 곧 하나님의 형벌을 받은 땅의 사람으로 규정하였지만, 예수는 그들에게 밥 한 그릇, 물 한 모금 주는 것이 곧 자신(하나님)에게 하는 것임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성녀 테레사 수녀(1910-1997)는 동유럽의 세르비아에서 태어나 18살에 수녀회에 입회한 데 이어 1930년 인도의 빈민가로 파견돼 버려진 채 죽어가던 사람들을 돌봤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인도인이 아닙니다. 하지만 인도의 권위지가 인도인 5만 명을 대상으로, 간디를 제외하고 역대 위대한 인도인이 누구냐고 물은 설문 조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도인으로 꼽혔습니다. 그런데 모든 이의 어머니 테레사 수녀는 어느 성탄절을 보내며 전 세계인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We are called upon not to be successful, but to be faithful(우리는 성공하기 위해 불러진 존재가 아니라, 진실하도록 불러진 존재입니다).” 이런 메시지를 남기고 떠난 테레사 수녀의 손과 발, 그의 거친 모습은 그녀의 삶 자체가 바로 마리아의 자궁이었음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한국판 테레사엘리자베스 요한나 쉐핑(Elisabeth J. Shepping), 한국이름으로 서서평(1880-1934) 선교사를 기억하시나요! 그 선교사는 독일에서 태어나 9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간호학교를 나와 간호사로 지내던 중 개신교에 투신해 테레사 수녀보다 18년 앞선 19123, 조선 선교사로 파견됐습니다. 그는 전라도 일대의 나환우들과 걸인들을 돌보고 고아들을 자식삼아 한 집에서 살다가 이 땅에서 병들어 생을 마쳤고, 자신의 주검마저 송두리째 병원에 기증하고 떠났습니다. 광주시에서 최초로 시민사회장으로 거행된 그의 장례식엔 수많은 나환우와 걸인들이 상여를 메고 뒤따르면서 어머니라 부르며 애도했습니다.

1926년 이 땅의 한 매체는 서서평 인터뷰 기사에서 그를 사랑스럽지 못한 자를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고, 거칠고 깨진 존재를 유익하고 아름다움을 지닌 그리스도인으로서 단련된 생명체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서서평의 열정이라고 썼습니다. 서서평이 별세하자 선교사 동료들은 그를 한국의 메리 슬레서라고 추모했습니다. 메리 슬레서는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로 가서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다 숨져 아프리카 아이들의 어머니로 추앙된 인물입니다.

1930년대 미국 장로교회는 전 세계에 파견된 수많은 선교사 가운데 한국 선교사로는 유일하게 서서평을 가장 위대한 선교사 7으로 선정했습니다. 서서평의 부음을 듣고 그의 집에 달려간 벗들은 그의 침대 밑에 걸려있던 좌우명을 보았습니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Not Success, But Service.)”

우리가 반드시 그를 회상해야 할 교훈적인 것은 미국에서 온 초기 선교사들이 교회와 병원, 학교와 고아원을 세워 좋은 일을 많이 했지만, 그러나 대부분 그들은 미국식 삶을 고수했을 뿐 조선인과 같이 된장국 먹고 고무신 신고 함께 자며 사는 서서평 같은 인물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와 하나가 되고 스킨십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서서평 선교사의 성공의 지향의 삶보다는 거룩한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6. 끝내는 말

세월호는 우리의 삶의 존재이유를 묻게 하였습니다. 3년을 보냈습니다만 아직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미완으로 남아 뜻있는 이들에게 질문과 고백을 하게 합니다. 그 동안 살아오면서 수많은 고통을 직간접적으로 보고 겪었습니다. 세월호 이전에도 이후에도 우리 사회에는 비통하고 억울한 죽음이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고통과 죽음을 매일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 날 이후왜 뜻있는 이들은 그 가족들을 포함하여 진도 앞바다에서 죽어간 그들을 단 하루도 잊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 날 우리 사회의 모든 것이 침몰했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참사는 한두 개의 핵심어로 특징지어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세월호는 한국 현대사에서 오랫동안 쌓여 온 물질주의적 탐욕, 이윤지상주의, 성장제일주의, 생명경시풍조, 군사주의적 경쟁, 이기적 개인주의, 무책임한 관료주의 등 모든폐단을 과적 상태로 싣고 출항하다가 침몰했기 때문입니다. ‘적폐(積弊)’라는 표현이 이보다 더 적합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한해의 끝자락에서 맞은 성탄, 메시아 탄생이 죽음과도 같은 하나님 앞에서 마리아의 철저한 자기 굴복, 복종 속에서 가능한 일이었음을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죽음 속에서 비로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진정 새롭게 태어날 것이며, 자신 속에서 진리를 잉태할 수 있을 것이고, 이로써 좁게만 이기적으로만 살아왔던 우리 마음이 마음껏 밖으로 열려야 하겠고, 타인을 향해 무한히 넓힐 수 있는 관용의 삶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 가난하고 소외된 형제들, 이주민들, 성소수자들, 북녘 동포들, 그들에 대해 닫혀 있던 마음이 활짝 열릴 때 남 북간도 관계개선이 되어 평화로 하나 된 새 민족의 길을 갈 것이고, 여기서 우리는 메시아 왕국을 살게 되는 복된 삶을 누릴 것입니다. 성탄은 곧 연대를 주전(BC)와 주후(AD)로 나누는 역사적인 날입니다. 다시 한 번 성탄의 절기에 하나님의 말씀의 신비로운 자신의 변혁과 교회 개혁과 역사 변화의 움직임을 직감하시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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