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타자를 핀치 히터라고도 하지요.
어릴 때 “군산상고” 야구 중계방송(라디오) 들을 때 알았던 용어가
먼저 튀어나오는 것 보니 신기하네요.
원래 본문은 마태복음 20장 “포도원 품꾼 비유”였습니다.
대척점에 있는 두 부류에게 주는
교훈 두 개를 포착하고 준비했는데
끝까지 한 교훈을 정리해내지 못했습니다.
방심한 탓도 있습니다.
그 교훈에 대한 2명의 신학자의 글이 있어서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읽어보아도 중요한 연결고리가 안 보이는 겁니다.
이런 현상이 철학 책에서는 다반사였지만
묵상 글에서는 처음입니다.
이런 것이 난독증인가요?
핀치 히터로 급히 잡은 본문이
마태복음 11:16~19의 “장터 아이들의 비유”였습니다.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이 비유에서 “피리를 불거나 슬피 우는 아이”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 “반응하지 않는 아이”는 ‘세태’로 해석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아마 17절의 불평하는 말을 예수님이 인용하셔서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해석이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비난하는 쪽”과 “비난당하는 쪽”이라는 단서를 가지고 18절과 19절을 이해하면 해석이 반대로 됩니다. 18절과 19절에서 “비난하는 쪽”이 세태이고 “비난당하는 쪽”이 세례요한과 예수님이므로 17절의 “피리를 불거나 슬피 우는 아이”는 세태이고 “반응하지 않는 아이”는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됩니다.
이 해석 하에서 우리가 얻는 신앙 교훈은 이전과 다릅니다.
“세속적 가치관과 세속 문화, 세상 평판에 부응하지 않는 예수님처럼 됩시다”가 되지요.
다만 이 해석 하에서 얻는 신앙 교훈과 이전 해석 하에서 얻는 신앙 교훈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신앙적 가치관, 신앙 문화, 주님의 평판에 부응할 때”, “세속적 가치관과 세속 문화, 세상 평판에 부응하지 않는” 힘이 생기기 때문이지요.
비록 긴급히 잡은 대타 말씀이었지만
적어도 저한테 ‘안타’였고
예배에서도 그랬을 것이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물론 세속인 것의 상당 부분은
신앙적 것과 상치(相馳)되지 않는다는 점도 언급해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