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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3) 아이제나흐 바르트부르크성과 루터하우스

이상호 (대전노회,공주세광교회,목사) 2017-11-20 (월) 22:17 6년전 2155  

아이제나흐 바르트부르크성과 루터하우스


8월 29일(화) 늘 7:40 로비에 집결하여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부터는 루터에 집중한다. 약 2시간 30분간 동독지역 아이제나흐로 이동하면서 가이드 공선생으로부터 루터에 대한 특강이 있었다. 이곳 아이제나흐는 인구 4만 정도로 바흐와 루터 때문에 먹고사는 도시라고 한다. 참고로 독일에서 베르크 = 산, 부르크 = 성, 하임은 사는 곳을 말한다고 한다.


루터
는 1483년 11월 10일 작센안할트주 아이슬레벤에서 출생하였다. 루터의 출생으로부터 시작하려면 아이슬레벤부터 가야하는데 일정이 아쉽다. 루터의 아버지 한스 루더는 성공하고자 만스펠트로 이주하여 광부로 일하다가 광산업을 경영, 성공하여 중세 말에 한창 득세하던 시민계급의 한 사람이다. 그는 엄격한 가톨릭신앙의 소유자였고 자식의 교육에 아주 높은 관심을 가졌다. 마르틴은 1501년 에르푸르트대학교에 입학, 1505년 일반 교양과정을 마치고 법률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자신의 삶과 구원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루터는 원래 아버지와 같이 루더였다. 박사학위 후에 루터로 바꾼다. 루터는 가난한 소작 농부의 아들로 6남매 맏이였다. 어머니는 아이제나흐의 괜찮은 집안 딸로 아들을 공부시킨다. 부모는 아이슬레벤으로 이사가서 1483. 11. 10 첫아들 루터를 낳는다. 다음 날 유아세례, 당시에 흑사병 콜레라 창궐, 세례를 베푸는 풍습이 있었다.


5세 조기교육으로 라틴어(영어격) 가르쳐 깊은 학문가능, 귀족들만 가는 학교이니 월 500만원 사교육비가 들었다. 루터는 라틴어로만 학교생할하니 힘들지만 맞아가며 배웠다. 후에 에라수무스와 논쟁할 정도로 성장했다. 중학교시기 3시간 거리인 마그네부르크 대성당에 유학했지만 경제가 부담되어 어머니 고향인 아이제나흐로 유학, 외삼촌집서 하숙했는데 갈등이 있었다. 교회 합창단에 들어가 용돈을 벌며 공부했고 후에 무려 39곡의 찬송을 남길 정도로 음악을 잘 했다.


전도도 잘 해서 귀족 샬베 고타네 축호전도하다 주인이 감동하여 루터를 자기 아들 초등생 가정교사로 불러들여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교회권력 최고로 법률가(교회법)가 되기를 소원했지만 루터는 아니었다. 모쪼록 에르푸르트 대학 법대에 입학하여 신학 철학 의학 법학뿐 아니라 마시스터(학사)과정 6년간 자유의예과 7과목 3+4학을 공부했다. 즉 3학은 언어/ 수사학, 문법, 논리(문법+논리=변증법)와 4학 (산술학, 음악학, 기하학, 천문학)을 수학하여 30명중 2등으로 졸업했다. 더욱이 루터의 사상을 친구 멜랑히톤이 정리하여 루터파를 만들었다.


전문과정인 전공과정까지 1505년 졸업했다. 에르푸르트에 다시 흑사병 유행했고 친구 죽음으로 마음이 복잡할 때 휴교령이 내려서 고향 만스펠트로 귀가하다가 중간에 슈타트프르트에서 번개체험을 하고 "성 안나(예수 어머니 마리아의 어머니 성인)여,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는 고백을 한 후 1505. 7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업을 중단,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수도회에 들어간다. 계율에 따라 수도생활을 하며 1507년 사제(司祭)가 되고, 오컴주의 신학교육을 받아 수도회와 대학에서 중책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지나친 혹사로 40에 당뇨, 무릎관절 등 종합병원으로 23년을 포도주와 맥주를 약으로 먹으며 사역하였다.


1507년 첫 설교할 때 아버지가 참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자수성가 한 아버지는 아들이 탐탁하지 않았다. 이제 수도사이자 신부 사제로 1508년 로마 바티칸에 갈 기회가 있었다. 스승 요한 폰(귀족) 슈타우치 수도원장 대리로 보냄을 받아 흥분되어 갔는데 성매매하는 사제들을 보고 크게 실망하였다. 돈으로 알렉산더 3세가 교황인데 성매매를 밥먹 듯 하니 사생아가 많아 공창제를 만들고 교황청에 고아원을 만들기까지 하였다. 그 유명한 에라스무스도 사생아 출신이라고 한다. 교황은 건축 광이자 부정부패로 연옥사상을 강조하여 면죄부를 파니 루터도 조부를 위해 면죄부 구입한 적이 있을 정도다.


스승이 비텐베르크대학에 심화과정으로 신학수학을 제안해서 보낸다. 1굴덴은 1주일 인건비이니 500굴덴 이면 5억이나 가는 성경이 비텐베르크대학에 있다고 해서 입학하여 2년 만에 성서학 박사학위를 끝낸다. 이제 교수로 활동하며 성경강해와 목회도 하였다. 1512년 신학박사가 되고 1513년부터 성서학 강의를 시작하였다. 루터가 1483년에 태어나 1546년에 생애를 마감한 것은 아이슬레벤이었으나, 그가 활동한 중심 지역은 비텐베르크였다.


오늘은 먼저 루터가 은신하여 신약성경을 번역했던
바르트부르크성에 올라간다. 바르트부르크성은 아이제나흐 시와 에르푸르트 구를 내려다보는 깎아지른 듯한 산 위에 있다.


1080년에 이미 이 산은 요새화되었다. 1217년에 죽은 튀링겐의 영주 헤르만 1세가 이 성을 다시 지었으며, 이곳을 포겔바이데 출신의 발터와 볼프람 폰 에셴바흐 같은 방랑시인과 음악가들이 자주 찾는 대저택으로 만들었다.


1485년부터 이 성과 주변지역은 작센의 에르네슈티네 공작가(家)에 속했다. 작센의 선거후 프리드리히 3세가 루터를 납치하여 1521년 5월부터 1522년 3월까지 바르트부르크에서 보호해 주었다. 루터는 그리스 원문으로 된 〈신약성서〉를 독일어 번역하였다. 단 11주 만에 번역을 완료하여 3월에 하산 하여 9월에 성경 3천부를 발행한다. 5억 짜리 성경이 150만원으로 낮아졌으니 성경 읽기 붐이 일어나 곧바로 절판된다. 시민들이 성경을 읽고 깨어나니 종교개혁의 불길이 불게 된 것이다.


고성과 루터의 방, 그리고 높은 전망대에 올라 둘러본 후에 내려와서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특히 어제 저녁 호텔측의 착오로 고생했는데 그 댓가로 ‘학새’라는 돼지족발 특식으로 풍성하였다. 식후에는 루터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다녔던 교회와 하숙했던 루터하우스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곳 출신 음악의 아버지 바흐의 생가와 동상을 둘러보았다. 참고로 음악의 어머니 헨델은 독일인이지만 영국서 활동했다. 독일 음악의 3B가 있는데 ①바흐 - 되돌이표 등 모든 표현 작곡, ② 베토벤 본 출신, ③ 브람스라고 한다.




이동중


바르트부르크성 안내


성에 올라와서


내려다 본 풍경





한 장 찍어야지요.








바로 이 집 2층에 루터의 방이 있는데 촬영금지








그림도 발견


높은 성루에서


내려다 본 풍경


일행의 기도하는 모습


하산 중 여기에도 거리의 악사는 있었어요.


지나가면서





루터가 다니던 교회


여기도 119


학새(돼지족발)


광장에서 기념촬영


루터가 다니던 교회에서


루터하우스에서


루터하우스 전경


"지구이 종말이 온다고 하여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은 루터의 말이랍니다.


여기도 목수노동자


바흐의 동상





바흐이 생가





한 번 더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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