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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차리시는 하나님 / 성령강림주일-환경주일

김민수 (서울북노회,한남,목사) 2017-06-03 (토) 13:42 6년전 2682  

밥상차리시는 하나님 / 성령강림주일-환경주일

열왕기상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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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공동체

 

혼밥혼술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는지요? ‘혼자서 밥 먹고, 혼자서 술 먹는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여기에 혼클혼놀이라는 말도 생겨났는데, ‘혼자서 클럽에서 놀고, 혼자서 노는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맨 처음 이 단어가 생겼을 때에는 일본의 왕따나 이지매와 같은 현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많았는데, 요즘은 ‘1인 문화로 자리매김하면서, ‘혼밥혼술의 미학이라는 평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너무 복잡하게 연결되어있는 네트워크 사회이기 때문에 홀로 있는 시간을 갖지 못함으로 다양한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홀로 있는 고독의 시간과 외로움의 시간을 통해서 내면의 성장을 이룰 수 있는데, SNS가 일상화된 세상은 제러미 벤담이 제안한 일종의 파놉티콘(Panopticon)’과도 같습니다. ‘파놉티콘은 수감자들이 감시자를 볼 수 없는 구조로 건물을 만들어서 한 명의 감시자가 수감자 다수를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는 형태의 건물입니다. 서울에 사는 보통의 사람이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출퇴근한다면 하루 CCTV나 블랙박스에 노출되는 건수는 평균 88건에 이르며 강남대로의 경우에는 3.3초에 한 번씩 녹화된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혼밥혼술, 혼클혼놀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는 것도 이상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밥상은 함께 나누는 것이 맛나고, 그래서 우리나라는 밥상머리교육이라는 것이 있었고, ‘밥상을 함께 나누는 것은 곧 가족이 된다는 의미기에 밥상공동체라는 말도 있습니다. 저는 우리 사회가 건강해지려면 밥상공동체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식탁에 올라오는 음식재료들로부터 음식을 조리하고 밥상을 나누는 모든 과정에 정성이 들어간다면, 그야말로 이 세상은 잔칫집 같을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이신 하나님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은 성자이신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성부 하나님 곁에 앉으신 뒤, 이 땅에 우리의 곁에 계시며 도와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함게 하셨던 분이시며,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비둘기처럼 임하신 분이시며,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인 다락방에 불길로 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삼위란, 성부, 성자, 성령인데 그 삼위가 일체라고 고백하는 것은 동일하신 하나님의 나타나시는 방식이 다를 뿐,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성령의 시대입니다. ‘성령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단어는 보혜사입니다. 보혜사란 곁에서 도와주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시대를 살아간다는 말은 곧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살아가는 시대라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오늘 성령강림주일에 예배드리는 여러분 위에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이 늘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교단에서 제정한 환경주일이기도 합니다. ‘성령은 곧 생명이므로, 성령께서 창조하신 생기 넘치는 아름다운 세상을 지켜가는 것은 곧 하나님의 창조역사에 동참하는 일이요,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창조세계의 질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들에 핀 꽃을 보면서, 하늘을 나는 새를 보면서, 몰려오는 구름을 보면서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시대의 징조를 보는 사람, 이런 사람이 성령의 사람이요,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양식으로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성경의 인물 가운데 가장 세찬 성령의 기운을 가지고 산 사람은 아마도 엘리야일 것입니다. 그 성령의 기운, 생명의 기운이 얼마나 세찼던지 이 세상을 떠날 때에도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해집니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기원전 850년경 북이스라엘이었으며, 아합왕 때였습니다.

 

인간의 죄로 함께 고통당하는 자연

 

이스라엘의 왕 아합은 페키키아의 공주 이세벨을 왕비로 맞아들입니다. 이세벨은 많은 혼수와 함께 바알 신상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풍요의 신 바알에 마음을 빼앗겼고 이내 출애굽정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풍요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은 나눔의 공동체 정신을 상실했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흉허물없이 잘 지내던 마을공동체가 개발의 바람을 타고 온 돈 때문에 갈기갈기 찢어지는 모습을 자주 봐왔습니다. 아합이 다스리던 시대가 그러했습니다. 힘 있는 자들은 그들이 보호해야 할 사회적인 약자를 짓밟고, 속이고, 살해하며 자기의 잇속을 챙겼습니다. 아합왕이 이세벨의 계략대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일은 그 시대 일반 백성이 처해있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민심이 흉흉해졌습니다. 거기에 가뭄이 찾아왔습니다. 인간 세계의 소통이 막히면 자연조차도 황폐해지기 마련입니다. 인간 세계의 소통이 막히면, 인간들만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자연도 함께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했는데, 아무런 잘못도 없는 땅이 함께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을 내어놓습니다. 가뭄이 심하게 들어 비는커녕 이슬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17:1) 상황입니다.

 

갈멜산에서의 싸움

 

삼년 가뭄이 있은 후 엘리야는 아합에게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예언자들을 갈멜산으로 불러달라고 합니다. 누가 참 하나님인지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엘리야와 바알의 에언자들은 어느 분이 참 하나님이신지 따져보자고 합니다. 제단을 쌓고 그 위에 소를 잡아 올려놓고 각자 신의 이름을 부를 때, 불을 내려 응답하시는 신이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바알 예언자들은 아침부터 한낮이 될 때까지 부르짖었지만,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단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고, 그래도 응답이 없자 칼과 창으로 피가 나도록 자기 몸을 찌르며 광란의 상태로 들어갑니다. 그래도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이제 엘리야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무너졌던 하나님의 제단을 쌓은 후, 나무 위에 각 뜬 소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넓은 도랑을 파고, 물이 도랑에 넘칠 때까지 부으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무려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이니 850:1의 싸움입니다. 엘리야는 이런 상황에서도 기죽지 않고 하나님께 백성의 마음을 돌이키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불이 떨어져 제물과 나뭇단과 돌들과 흙을 다 태웠고, 도랑의 물까지 다 말려버렸습니다. 백성은 경외감에 사로잡혀 그가 주 하나님이시다!” 외칩니다. 신적인 분노에 사로잡힌 백성에게 명하여 바알과 아세라의 예언자들을 모두 잡아 기손 시내에서 죽였습니다. 그렇게 한 후에 엘리야가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하니 큰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바람과 비와 구름을 다스리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오, 만군의 주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엘리야는 백성에게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로뎀 나무 그늘에서

 

그런데 이렇게 호기가 넘치던 엘리야에게 큰 변화가 옵니다. 갈멜산에서 있었던 일의 자초지종을 들은 왕비 이세벨이 이를 갈며 내일 이맘때까지 엘리야를 죽일 것이며,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자기가 신들에게 천벌이라도 받겠다며 맹세까지 합니다. 갈멜산에서 850:1의 싸움을 했던 호기있는 엘리야가 이런 위협에 두려워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엘리야가 그 말을 듣고,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로 갔다고 전합니다. 두려워서, 급하게,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하였다. 영웅의 모습에서 졸장부가 된 것 같은 엘리야입니다.

 

하지만 그게 또한 인간의 한계입니다. 엘리야는 지금 고독합니다. 곁에 아무도 없습니다. 뙤약볕을 걷다가 로뎀나무 그늘에 앉아서 신세 한탄을 합니다. 차라리 죽기를 바라면서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한탄합니다. 그런데 곤한 가운데 잠이 찾아옵니다. 잠을 자고 있는데 천사가 와서 그를 깨웁니다. 잠을 통해서 조금의 여유를 찾게 된 엘리야의 눈앞에는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의 물이 있습니다. 엘리야는 맛나게 음식을 먹고 또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또 깨워서 일어나 먹으라, 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고 합니다. 엘리야는 또 먹고, 힘을 얻어서 사십 일 동안을 걸어 호렙 산에 이르렀습니다.

 

이 장면을 유심히 보시면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도망자 엘리야, 지친 엘리야를 훈계하거나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의 절망과 두려움을 품어 안으셨으며, 불안에 지친 엘리야에게 단잠을 주셨으며, 그가 잠들어 있을 때에 밥상을 차리셨습니다. 그러자 현실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지만, 엘리야는 하나님의 산으로 갈 새 힘을 얻습니다. 그는 다시금 하나님의 일은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한다는 것을 절감했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현실에서 새 힘을 얻는 신비, 이것은 공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 가지시기 바랍니다.

 

밥상 차리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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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도움은 아주 구체적입니다. 애굽을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신광야에 이르렀을 때 먹을 것이 떨어지자, 메추라기와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처형당하신 후 실의에 빠져 옛 생활로 돌아간 제자들이 밤새 그물을 던져도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어떤 분의 말을 따라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을 끌어올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때야 예수님인 줄 안 제자들이 해변으로 올라오자 거기엔 예수님이 손수 차려놓으신 생선과 빵이 있었습니다. 디베랴 바닷가(21)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압송되던 바울이 탄 배는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서 파선의 위협에 시달립니다. 그때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주면서 사람들에게 음식을 권합니다. 결국, 그들은 바울의 말에 따라 음식을 먹었고,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와 관련된 내용만 살펴보아도 밥상 차리시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는 넘쳐납니다. 먼저 가뭄이 들자 하나님은 명령에 따라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어있는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통해서 먹을 것을 전해주십니다(17). 이에 사르밧 과부를 통해서 엘리야에게 밥상을 차려주시고, 또한 사르밧 과부를 위하여 밥상을 차려주십니다. 또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하고자 할 때에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오십 병씩 굴에 숨어있게 하시고 오바댜를 통해서 밥상을 차려주십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도 로뎀나무 그늘에 앉아 낙담하고 있는 엘리야에게 거듭 밥상을 차려주시며 힘을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도망자 엘리야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 살아갈 방도를 잃고 히브리 노예들처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십자가 사건 이후 절망의 심연에 빠져들었던 제자들과 같은 사람들, 유라굴로와 같은 광풍을 만나 목숨을 위협당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밥상을 차려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런 처지에 놓인 이들을 위해 밥상을 차리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진수성찬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따뜻한 말 한마디 따뜻한 손길이면 충분합니다. 밥상이 필요한 이들에게 밥상을 나누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성령의 사람입니다. 밥상을 차리시는 하나님과 함께 밥상을 차리는 마음으로 성령강림절을 보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우리가 힘겨울 때마다 힘을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차려주시는 밥상으로 우리는 새 힘을 얻었습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님, 성령의 계절을 살아가는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며 살아가게 하시고, 또한 하나님을 도우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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