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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과 동행하신 역사의 주 하나님

이기영 (전남노회,,목사) 2017-02-18 (토) 16:31 7년전 2580  

요셉과 동행하신 역사의 주 하나님 창세기 45: 1- 15

2017-02-19

1. 시작하는 이야기

요셉의 신앙여정은 아브라함의 약속(12:1-3, 22:18)가운데 두 가지, 하나님의 함께하심(임재와 보호)의 약속과 세계만민의 복의 근원이 된다는 약속의 실현현장입니다. 그는 모든 환란과 전락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함께하심, 즉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를 아주 세밀하게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앙여정을 통하여 세계만방에 이름이 창대 하게 되는 대역전극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요셉의 형들과의 화해에서 나를 이리(애굽)로 보낸 이는 형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었다는 구원의 역사섭리, 하나님을 향한 그의 신앙과 충성, 그리고 넓은 마음을 보게 합니다. 70년 동안의 분단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신음하는 한반도 남북형제 간의 화해와 통일에의 꿈을 갖게 하는 교훈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2. 꿈꾸는 요셉과 함께하신 하나님

요셉은 야곱의 노년에 태어난 아들 (특히 라헬의 아들)이었으므로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17세까지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특권적 편애와 돌봄을 받으면서 자라 매사에 거칠 것이 없는 되바라진 막내였습니다. 요셉이 꾼 꿈들은 한결같이 정치적인 야망과 관련된 제왕 형의 꿈이었습니다. (37:5-11) 요셉은 형들의 질투와 미움, 속임수로 노예로 팔려와 죄수신분이 되었습니다. 즉 요셉은 애굽으로 끌려와 바로 왕의 경호대장 보디발 집에서 신복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을 하였지만 이를 거부하자, 그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양심과 신앙의 사람 요셉은 감옥에서도 신임을 얻었습니다. 주께서 그와 함께 계시면서 돌보아주시고, 그를 한결같이 사랑하셨다(39:21). 감옥에서 요셉이 애굽 왕에게 술잔을 올리는 시종 장과 빵을 굽는 시종 장이 꾼 꿈을 해석해 줍니다. 요셉이 해석해 준 대로 그대로 되었습니다. 2년이 지나 바로가 꿈을 꾸었는데, 술잔을 올리는 시종 장이 감옥에 있는 요셉을 불러냈습니다. 요셉은 바로에게 저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왕께서 기뻐하실 대답은, 하나님이 해 주실 것입니다.(41:16) 바로 왕은 요셉의 풍년과 흉년에 대비하라는 해석을 듣고, 바로의 신임을 얻어,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41:41-43) 애굽 땅에 일곱 해 동안 풍년을 이루었고, 일곱 해 동안 흉년이 시작되었습니다.

 

3.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요셉의 신앙여정

창세기에서 요셉의 부분을 읽어보면, 그가 원망했다는 말이 한 구절도 없습니다. 단 한번도 자기의 가정이나 환경이나 형제를 원망하는 요셉의 모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에게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아버지 야곱에게 아내를 4명이나 거느리며 가정을 혼란케 만들었던 그 아버지를 주신 이유가 충분히 있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자기를 적대시하는 형들이 있지만 저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하시고자 하는 이유와 역사가 있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불행한 환경이지만 이 환경을 주신 이유가 있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믿음으로 삶을 살아 갔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존경스럽지 못한 면도 있었지만, 그 아버지의 하나님 경외하는 좋은 믿음을 붙들고, 요셉 자신의 삶의 역경과 좌절의 밑바닥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고, 그는 결코 꿈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계획이 있을 것이니, 내 삶에 대한 놀라운 섭리가 있을 것임을, 그는 이 삶을 통해서 하나님 하실 일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형통한 사람이라고 창세기 3923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였더라. 성경에서 형통하다 는 단어는 나를 둘러싼 환경이 내 마음대로 되어지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살다 보면 억울한 일도 당하고 실패하기도 하고 괴로운 환경 속에 처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믿음과 삶에 대한 올바른 태도로 역경의 환경을 아름다운 환경으로 바꾸어 놓는 창조적 삶의 자세를 가리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셉은 노예신분이지만 보디발의 집에서도 죄수의 신분으로 감옥에서도 형통하였습니다.

요셉이 이런 삶의 골짜기를 통과하면서도 승리했던 중요한 이유는 그의 마음 중심을 지배했을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요셉이 이런 태도로 삶을 살았다는 정확한 성서적인 증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시편105:17-19) 단련이란 단어를, 요셉은 자기의 그 고통의 기간을 훈련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 훈련시키는 놀라운 계획과 뜻을 보았습니다. 이 고난과 시련의 광야는 분명코 영광스런 새벽을 바라보며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이 없었다면 영광스런 구원의 역사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빌립보 에서의 고난이야기, 전도하다가 매를 맞고 감옥에 들어가 사람들에게 짓밟힘을 당하면서 한 밤 중에 주님을 찬양하고 복음을 증거했던 바울의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그 고난을 통과해서 바울의 유럽선교가 가능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신앙작가 존 번연이 애매하게 감옥에 들어가게 된 일이 있습니다. 그는 훌륭한 그리스도인 청교도였습니다. 감옥에 들어 갔을 때 그는 첫날 밤에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저를 이 감옥에 들어오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요? 이 감옥 속에서의 시간을 제가 결코 낭비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저를 이곳에 오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룰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는 이튼 날부터 감옥에서 한편의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설이 바로 저 유명한 <천로역정>입니다. 그 감옥은 존 번연에게 있어서 위대한 창조의 자리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올바른 삶의 태도만 가진다면 내가 어디서 사느냐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이제 계속해서 지옥 같은 감옥을 파라다이스(Paradise)로 바꾸었던 요셉의 삶의 비밀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요셉이 바로 왕 앞에 설 때에 삼십세라(41:46) 하나님은 젊은 나이의 요셉을 귀하게 쓰시려고 이 특별한 훈련으로 고난의 시기를 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비로서 요셉의 생애에 대한 고난의 파노라마(Panorama,전경)의 진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아내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든든한 두 아들을 얻었습니다. 요셉이 그 장자의 이름은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41:51-52) 그뿐만이 아닙니다. 드디어 총리 요셉의 놀라운 정치가 이 나라를 향하여 시작되는 모습을 봅니다. 일곱 해 풍년을 맞아서 곡식을 저축해서 미래를 대비하고 있는 현명한 요셉의 행동을 봅니다. 온 천하에 일곱 해 흉년이 들어 기근이 온 세상을 덮을 때, 요셉은 도움과 유익을 주는 위대한 선정을 베풀게 되었습니다.

이상의 언급한 일련의 요셉의 신앙여정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하고 결심하고 따라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디에서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오늘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환경과 어려움과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삶의 자세와 용기 있는 믿음을 내게 주옵소서!

 

4. 이스라엘 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 형들의 회개와 요셉의 용서

이 부분을 두 단위로 나누어 이해하도록 하겠습니다. 1) 이스라엘 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이스라엘 역사에서 요셉과 모세는 참으로 중요하게 하나님의 쓰임 받은 인물입니다. 요셉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으로 내려가게 하는 일에 쓰임 받았고, 모세는 그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게 하는 일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만약 야곱의 시대에 야곱과 그 가족들이 가나안 땅에 머물러 있었다면 민족적으로 크게 성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70명의 전 가족을 통해서 장차 이스라엘을 하나의 국가로 만들기 위한 역사적인 섭리를 진행하셨습니다. 애굽의 바로는 요셉과 그의 가족들에게 애굽의 고센 땅을 허락하였습니다. 그 당시 중동의 최대강국은 애굽 이였습니다. 그러한 영향력이 있는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의 민족국가의 틀을 형성할 중요한 기간을 보내게 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역사가들은 이 고센 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의 민족국가로서 탄생하고 자라날 수 있는 기틀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모세가 이스라엘민족을 이끌고 나올 때는 4백만에 가까운 대인구가 되었습니다.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힘과 막강한 능력이 형성되었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일으켜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그 민족을 다시 돌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2) 형들의 회개와 요셉의 용서입니다. 열 두 지파가 이스라엘 민족의 국가적인 기초가 됩니다. 이들 형들은 동생 요셉에게 시기와 질투를 하면서 아주 못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은 과거에 범죄 했던 형들을 회개하게 하고 깨끗하게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셨습니다. 창세기 42장부터 45장까지의 내용은 단순히 요셉이 그의 형제들과 헤어 진지 22 년 만에 극적으로 만났다는 사건을 다룬 것이 아니라 그 형제들이 어떻게 자기들의 과오, 죄를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였는가,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들을 어떻게 용서하였는가 하는 용서의 사건을 다룬 것입니다.

창세기 42장은 열 형들이 애굽 총리 요셉에게 와서 땅에 엎드려 곡식 사러 왔음을 아뢰는데, 옛 꿈을 회상하게 하는 장면입니다. 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지만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요셉은 그들에게 엄한 말로 정탐꾼이라고 다그쳤습니다.(42:8-9) 형들은 정탐이 아니라 한 아버지의 열 아들임을 증명키 위해 가족사를 이야기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42:10-14) 그들은 자신들의 결백을 증명키 위해 형제 한 명의 실종사건도 언급합니다. 그들은 원래 12형제였으나 한 형제는 가나안 땅에 아버지와 함께 있고, 하나는 없어졌다고 얼버무렸습니다. 아마도 요셉이 가족사를 꼬치꼬치 물어본 이유는 형들이 애굽에 팔아버린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알아보고자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젖 동생 베냐민에 대하여 어떻게 대하는지 알아보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10명의 형들은 요셉을 팔아넘긴 사건을 괴롭게 회상하였습니다. 결박당한 시므온을 보면서 결박당한 채 살려달라고 애걸하던 요셉의 괴로움을 기억해 낸 것입니다. 요셉의 모든 연극행위는 바로 이 사건을 기억해 내도록 돕는 도덕극이었습니다(21). 그들은 자신들이 애걸해도 듣지 않는 총리대신을 보면서 요셉의 애걸을 들어주지 않은 자신들의 잔인스러움을 기억해 낸 것입니다. 요셉은 10명의 형들이 의논하는 장면을 통역 없이도 다 알아듣고 몰래 울음을 터뜨리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형들을 회개하도록 압박하는 요셉의 도덕극은 계속되었습니다.

 

5. 요셉은 베냐민을 인질로 형들의 내적 품성을 검증

창세기44장은 형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요셉이 연출한 또 하나의 도덕극입니다. 요셉은 아예 형제들을 범죄자로 취급하여 베냐민과 아버지 야곱에 대한 형들의 진심을 검증합니다.(44:1-5) 요셉은 돈을 받지 않고 자루에 양식을 가득 채우고 특히 청지기를 시켜 점칠 때 쓰는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에 집어넣게 하였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가나안 땅을 향하여 출발한지 얼마 후 청지기가 그들을 추격하여 누가 우리주인의 은잔을 훔쳐 갔느냐?고 다그칩니다. 모든 것은 물론 형들의 내적 품성을 검증하고 22년 전의 범죄에 대하여 회개를 유도하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된 은잔을 보고도 요셉은 이 사건을 베냐민 단독절도 행위로 보지않고 형제들의 연대적인 범죄라고 주장하여 책임을 물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은잔이 발견된 베냐민 만 종이 되고 나머지 형제들은 아버지께로 평안히 가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럼에도 형들과 베냐민 모두 요셉의 종이 되겠다고 자청합니다. 형들은 이전에 요셉을 대할 때 보였던 무자비함 대신에 책임감과 형제적 연대의식을 보여줍니다.(44:14-17) 특히 유다의 지도력이 빛을 발하고 그의 언변은 요셉을 감동시킵니다. 마지막으로 유다는 자신이 베냐민을 대신하여 종이 될 테니 십대 소년에 불과한 아우 베냐민을 석방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유다의 언변은 감동과 설득력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에 대한 유다의 사랑, 자신의 젖 동생 베냐민에 대한 그의 사랑을 확인하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요셉의 끈질긴 형들에 대한 내적 품성의 검증 끝에 화해의 장에 이르게 됩니다.

6. 대 화해: 용서의 눈물

창세기45장은 요셉 이야기의 절정을 이루는 대 화해의 장입니다. 요셉은 유다의 감동적인 언변에 봇물 터지는 듯한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고 자신의 정체를 밝히며 방성대곡 하였습니다. 요셉은 가장 먼저 아버지 야곱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형들이 충격과 두려움에 휩싸이지 않도록 요셉은 자신이 당한 고난을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로 돌립니다.(45:1-5) 그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떨고 있던 형들에게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라고 말합니다. 그는 재차 자신이 당신들이 애굽에 판 아우 요셉이라고 밝힙니다. 이 마지막 말, 당신들이 애굽에 판 아우 요셉은 형들의 양심에 폭풍을 불러 일으켰을 것입니다.

이때부터 요셉은 자신들을 애굽에 노예로 팔아 넘긴 형들의 죄를 더 이상 추궁하거나 심판하지 않고 대신에 악과 고난을 선으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자신이 애굽에 오게 된 궁극적 원인은 형들의 시기심이나 미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장구한 계획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45:5, 7-8, 12) 하나님이 기근의 때에 형들과 그들의 후손들의 생명을 보존하여 세상에 두시려고 자신을 앞서 애굽에 보내 준비시켰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7-8)

요셉은 형제들에게 아버지 야곱과 온 가족이 애굽에 이주할 것을 요청하였고, 요셉의 정체를 재차 실감나게 강조하였습니다. 그때에 요셉과 베냐민, 요셉과 형들 사이에 감격적인 포옹과 입맞춤이 오갔고 그들은 눈물바다를 이루었습니다.(6-15)

우리는 요셉 자신이 13년 동안(애굽에 팔려와 총리가 된 것) 겪은 고난의 의미를 하나님의 놀라운 생명의 섭리로 해석하는 그의 아름다운 인격 속에서 세계만민을 복되게 할 아브라함의 후손의 전형을 만납니다. 아브라함 형 인간은 아담 형 인간이 저지른 죄와 불순종의 역사를 수습하는 인간형입니다. 아담은 자신의 불순종과 죄로 온 인류를 죽음과 고난의 시궁창 아래로 몰아넣었지만, 아브라함 형 인류의 이상형인 요셉은 타인의 죄악으로 초래된 재난과 악한 운명을 견디어 마침내 세계만민을 위한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약속(22:18)은 요셉의 생애에서 실현 되었습니다.

 

7. 한반도 남북 형제간의 화해를 향하여

우리는 오랜만의 성사로 남북 형제 부모간의 상봉행사를 지켜보면서 지난 세월간의 그리움과 아픔을 되새겨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고령의 연세여서 더욱 지난 세월의 운명적이고 정치적인 강자들의 역사운영에 대하여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반드시 한반도에 통일은 오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는 남북 형제의 화해를 위하여 기도하며 준비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북한동족들은 이미 오래 전에 기독교를 아편이라고 오해하도록 교육을 받았지만,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운동을 재현시키는 개혁정신과 평화와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종교임을 삶의 현장에서 증명해 보여야 합니다. 성서의 예수님 복음은 부르주아를 위한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것이란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 스스로가 가난의 청빈의 삶을 살아야 하고 구체적으로 사회와 역사 안에서 변혁의 주체로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남북한 민중의 한가운데 서서 민족의 화해를 위한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구약성서 요셉의 이야기는 인간이 주체가 되어 자신의 운명에 대항해 싸우면서 운명을 바꾸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요셉은 그의 신실한 신앙과 순결성과 정직 및 인내심이 모든 역경과 고난의 항아리 속에서 이끌림을 받았다는 설득력 있는 교훈적인 것을 보여줍니다. 신약성서의 예수님도 요셉의 모형으로 해석됩니다.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은 밑으로부터의 휴머니스트 예수님을 만나게 하며 무신적 마르크스주의자 사이에서 예수님은 더 이상 분열의 지점이 아니라 만남의 지점으로서 서 있게 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가난하고 힘없고 병들었고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가 아니었습니까!?

3) 오늘의 세계는 성숙한 시대에 접어 들었습니다. 순교신학자 본 회퍼 목사의 성숙한 시대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실존의 삶을 구가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자본주의의 소비성향의 사치와 권력에 빌붙어 안주하는 잘못되고 타락한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오히려 오늘의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예언자적 자세로 불의를 고발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압제하는 강한 자에게는 강력한 대항의 힘으로 작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당대의 권력자의 불의와 압제를 고발하다가 그들에게 잡혀 십자가에서 산채로 못박혀 죽은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성숙한 시대에 사는 성숙한 신앙인은 어떤 모습일까요? 만일 빈곤, 소외, 착취, 억압이 사람들을 절망과 고통과 죽음의 상태까지 몰고 간다면 그리스도인은 그 사람들을 그런 사회의 곤궁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벅찬 일을 시작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인 스스로 완성해야 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성숙해 질 때 우리는 당당히 북한의 형제들을 만나고 맞이할 수 있습니다.

 

7. 마감하는 이야기-남북화해는 사도적 사명

요셉의 신앙고백에 의하면 형들이 저지른 반인륜적 악행과 요셉이 겪은 고통스런 삶이란 결코 그 어떤 악마의 짓이 아니고 그 선하신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신앙입니다. 요셉의 그 신앙은 우주역사의 모든 사건은 오직 한 분, 이 우주를 만드시고 통치하시며 이끌어 가시는 오직 한 분! 이른바 유일신 신앙(practical monotheism)이었습니다.

구약본문은 같은 혈육의 동생을 애굽에 노예로 팔아 넘기는 반 인륜의 악행과 불행도 성서의 유일신 신앙의 눈, 성서적 신앙의 눈(eyes of faith)으로 새롭게 다시 보면, 역사의 유일한 주인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 섭리와 역사경륜에 속한 일일뿐 이라는 말씀입니다.

남북한의 형제들에게도 유일신 신앙 하나님의 섭리, 역사경륜이 주도적으로 작용하여 앞으로 하나 된 통일의 나라로 인도하실 것을 확신하며 소망합니다. 고난은 생명의 원리입니다.(간디) 우리는 고난 없는 생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고난은 인생을 깊게 만들고 위대하게 만듭니다. 관대하게 만듭니다. 요셉의 형들을 포용한 관용은 그의 고난의 값에서 얻은 소득이었습니다.

한 민족적 단결은 이념과 체제보다 강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동서냉전의 시대에 인위적으로 통합하거나 분단시켰던 세계적 국경선은 다 허물어졌지만, 유일하게 그 인위적 국경선과 다른 체제를 유지하고, 서로 노려보고, 서로 경쟁적으로 군비를 증가하고 있는 것은 한반도뿐입니다. 이제는 70년 동안의 남북대결의 험로에 용서와 화해, 평화와 통일의 통로를 깔아가야 합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의 역사도 용서와 화해로서 풀 수 있어도 증오와 보복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자기를 못 박은 원수까지 용서함으로 완성되는 것이지, 그들을 향한 저주로서는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중국현대사에 마지막 왕조 청나라를 뒤집고 입헌공화국을 건국한 손문(孫文)은 이념으로 지금도 분단되어 있는 중국과 대만 모두에게 현대중국창설의 국부로 존경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앞으로 우리민족의 대단결은 남북을 포함하는 탁월한 정치지도자보다는 우리 모두의 피 속에 흐르는 동족애에 의해서만 이루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남북 정치지도자들은 모두 통일을 외치면서도 분단의 고착화에 집착해 오지 않았습니까?

앞으로 우리 한국교회는 대북관을 수정하여야 합니다. 대결의 남북관계를 화해와 평화로 이끌어야 합니다. 한반도의 교회는 일찍이 하나의 민족교회로서 복음을 받았는데 우리는 지금 찢어진 교회로 70년을 보내며 분열의 아픔과 민족분단의 아픔을 그다지 느끼지 못하고 있으니 부끄럽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우리는 초대교회 신앙공동체가 고백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의 거룩한, 그리고 사도적 교회에 속해 있음을 고백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 고백이 우리의 지금의 분열된 교회에 분단된 민족에 주어진 사도적 사명이며 요셉이 그의 형들과 화해한 가르침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에게 역사의 주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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