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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산책(7)-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의 운명

김민수 (서울북노회,한남,목사) 2016-12-30 (금) 10:44 7년전 2227  

백성 앞에서, 바로 앞에서(출애굽기 강해 7)

출애굽기 4:29-5:2

소명 앞에서 망설이던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적을 보여주시고, 동역자 아론을 허락하신 후에야 비로소 결단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모세의 망설임은 우유부단한 성격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명 앞에서 부족함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기꺼이 동참하기보다는 마지못해동참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아멘!’으로 응답하려면, 자기의 뜻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기의 뜻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자기 부정이고, 희생입니다. 이렇게 소명을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고, 그래서 거룩한 것입니다. 오늘은 소명 받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바로 앞에 서는 장면 사이에 있는 내용을 공부합니다.

 

1. 굳은 마음은 소통하지 못합니다.

 

소명을 받은 모세는 이제 모세는 그의 장인 이드로에게 가서 애굽에 있는 형제들에게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이드로는 즉시 평안히 가라고 허락합니다. 모세는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갑니다. 그의 손에는 지팡이가 들려있습니다. 이 지팡이는 이제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상징하는 거룩한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420절에서는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백성과 바로 앞에서 해야 할 말과 해야 할 일을 상세하게 알려주십니다. 백성에게 해야 할 말은 모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전하고, 행하라고 하신 이적(지팡이가 뱀이 되는 기적과 손에 나병이 일어나는)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에게 해야 할 말은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니라(4:22).” 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기적을 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가 쉽게 그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아십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기 때문(4:21)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바로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그의 의사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의 참뜻은 존재의 밑바닥에 이르기까지는 돌이키지 못하는 권력자들의 실상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완악하다는 것은 마음이 굳어있다는 뜻입니다. 굳은 마음으로는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도 없고, 다른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없습니다. 뭔가에 중독되어 있거나,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소통하지 못합니다. 어제(20161129) 박근혜 대통령의 제3차 대국민 담화를 보셨을 것입니다. 그분이 그렇게 국민의 정서와는 동떨어진 이야기만 반복하는 이유는 마음이 굳어있기 때문입니다. 소통의 능력을 상실한 것이지요.

 

2. 낯선 하나님과 부드러운 마음

 

감당하기 어려운 소명을 안고 애굽으로 향하는 모세의 마음은 무거웠을 것이요,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애굽으로 가는 중에 이상한 경험을 합니다. 출애굽기 424절에 하나님이 그를 죽이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 중 하나입니다. 오랜 설득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해방이라는 대업을 맡기시고는 모세를 죽이려고 하시다니? 하나님의 낯선 얼굴 앞에서 당황하게 됩니다.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하나님께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당황하게 됩니다. 이 순간 십보라가 모세를 도와줍니다. 할례는 나중에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는데 돌칼로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말합니다. 이 역시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대목입니다.

 

하나님의 낯선 얼굴과 대면했던 모세는 하나님의 산에서 아론을 만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한 모든 일을 다 고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스라엘 장로들 앞에서도 반복됩니다. 아론이나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하나님은 낯선 존재였을 것입니다. 도시의 신, 신의 아들로 상징되는 바로의 노예로서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이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시는 하나님은 낯선 존재였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간혹 우리에게 낯선 얼굴로 다가오실 때가 있습니다. 16세기의 영성가 성 요한은 이런 시간을 어둔 밤의 체험이라고 했습니다. 영혼은 어둔 밤을 거쳐 밝음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소명을 받는 이들은 자신의 자아와 국은 마음을 깨뜨리시는 시간, 어둔 밤을 거쳐 밝음에 이른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이런 분이신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 이상을 넘어서는 분이실 때의 당혹감을 누구나 느끼셨을 것입니다.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분들에게는 진보적인 신앙을 가진 분들이 고백하는 하나님이 낯설고, 또한 진보적인 신앙을 가진 분들에게는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분들이 고백하는 하나님이 낯설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둔 밤의 체험이라고 한다면, 이런 체험 뒤에 밝음에 이른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굳은 마음이 부드러워진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부드러워진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져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이 된다는 말씀이기도 할 것이며, 굳은 마음을 가진 이들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3. 바로 앞에서

 

강력한 바로에게 아무런 힘도 없는 모세와 아론이 노역에 시달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풀어달라고 하는 것은 무모한 일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앞에 서긴 했지만, 애굽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아직 알려지지도 않은 신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아론과 모세는 바로 앞에 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전합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라(5:1)”. 여기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광야의 신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도시의 신과 광야의 신에 대해서는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도시의 신은 지배권력의 신이요, 지배권력의 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해 주는 역할을 하는 신입니다. 이에 반해 광야의 신은 도시권력으로부터 억압받는 이들의 신이요, 버림받은 자들의 신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모세와 아론에게서 배워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정말 무모한 일입니다. 그리고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을 지킬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지팡이가 모세의 손에 있긴 하지만, 바로의 명령 한 마디면 체포되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명령이므로 순종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만납니다. 내 생각에는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은데, 하나님의 생각은 다른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다를 때, 상충할 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선한 일이 분명한데, 옳은 일이 분명한데 그 일을 하면 반드시 손해를 보거나 힘든 일이 생길 것으로 판단되는 일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많은 일을 포기해야만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럴 때, 손해를 두려워하지 말고 선한 일이라면 하십시오. 그러나 어리석은 선택을 위하여 그런 각오를 하고 달려간다면 그것은 미련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윤복희라는 가수는 박근혜 대통령의 3차 대국민 담화가 발표된 29일 오후 트위터에 "대한민국을 위해 기도합니다. 내 사랑하는 나라를 위해 기도합니다. 억울한 분들의 기도를 들으소서. 빨갱이들이 날뛰는 사탄의 세력을 물리쳐주소서"라는 내용의 글을 남겼다가 삭제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좋지만, 불법과 국정을 농단한 최순실과 박근혜 대통령 같은 이들이 억울한 사람들인지, 나라를 걱정하며 바로 세워가기를 염원하는 촛불 시민이 빨갱이고 사탄의 세력인지 구분하지 못하면 헛다리를 짚는 것이겠지요.

 

4.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운명

 

바로의 반응은 차갑습니다.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득고 이스라엘을 내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5:2).” 바로의 처지에서 보면 당연한 대답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요청은 바로의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바로는 이제 비싼 대가를 치르며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천천히 배우게 될 것입니다. 바로는 히브리인들에게 이전보다 더 강도 높게 노동을 시킵니다. 바로는 노동의 강도를 높이는 방법으로 벽돌에 들어갈 짚은 주지 말고, 할당량은 유지할 것을 명령합니다. 당연히 히브리인들은 이전보다 더 힘들어졌고, 이에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바로의 전략은 성공적입니다. 노동의 강도가 높아지자 백성 사이에서 원망하는 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그리고 원망의 출구는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는 쪽으로 분출됩니다. 자중지란이 일어난 것이지요. 불의한 권력이 즐기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자신들은 가만히 앉아서 한 마디씩 톡톡 던지고, 국민이 서로 분열하여 싸우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전략은 그동안 대한민국에서의 단골메뉴였습니다. 반공이데올로기라는 것은 그래서 악마적입니다. 진보와 보수라는 프레임으로 나누고 빨갱이, 종북이라는 딱지만 붙이면 무조건 이기는 것입니다. 아직은 진행 중이지만, 4% 지지율의 대통령은 끝까지 반전을 노리며 국민 간의 이간질을 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시도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제는 중고등학생들이 최순실이라는 사람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대통령보다 더 똑똑하기 때문입니다.

 

바로의 반응이 이렇게 차가운데다가 히브리인들까지도 자신들을 원망합니다. 이제 막 시작인데 이래서는 어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이를 수 있겠는가 싶었을 것입니다. 바로와 싸우는 것도 버거운데 내부의 사람들과 싸워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은 지금 참으로 힘들고 외롭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운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엎드려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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