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
 
 
 
배태진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관리자 (광주남노회,작천교회,목사) 2010-08-07 (토) 14:44 13년전 3160  
1999 년 2 월 21 일 오후 1 시 30 분 한인제일감리교회 성서본문 : 골로새서 2 장 6 절 - 7 절 제 목 :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1.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우리 교회에 넘침으로 인해 우리 교회 모든 곳에서 감사가 솟아나기를 바랍니다. 요즘 제가 논문을 쓰기 위해 여러 논문들을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알게 된 것은 논문의 페이지 수가 많다고 해서 잘 써진 논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옛 선조의 말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습니다. “가방 크다고 공부 잘하는 것이 아니다” 저는 그것을 통하여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은 것이 있습니다. “설교 길다고 은혜 넘치는 것 아니다” 예전에는 제가 설교를 12 장을 써왔는데 오늘부터 8 장 반으로 팍 줄였습니다. 제 설교를 구조조정하고 거품을 뺐습니다. 그렇다고 은혜가 세 장 반분이 줄어들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담임목사가 되면 뭔가 달라져야죠! 2. 장로교회는 개신교 중에서 말씀이 무척 강조됩니다. 저는 스코틀랜드 교회를 1 년동안 돌아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들을 순방하였을 때 많은 교회의 설교단이 우리와 같이 평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 높은 곳에 걸려 있었습니다. 목사는 빙빙 돌아가는 계단을 한참 올라가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장로교주의자들의 주장은 하나님의 말씀은 권위가 있게 높은 곳에서 던져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인지 모르지만 장로교 교인들은 말씀에 대해서는 상당히 식견이 높습니다. 주일 낮 주보에 본문과 제목이 나오면 “음, 이번에 우리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시고 이런 예화를 들어 얘기하시다가 이렇게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렇게 추정합니다. 그리고 설교 시간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꼭 말씀에 대해 아멘해서가 아니라 “음! 목사님이 내가 예측한대로 가고 있구만!” 느낄 때마다 고개를 끄덕입니다. 감리교 교인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니까 “우리 목사님이 개척교회 교회의 재정을 생각하면서 감사헌금을 강조하시려는 모양이다”고 설교내용을 예측하신다면 여러분들은 말씀에 익숙한 장로교 교인들과 같이 고개를 끄덕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3.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감사를 넘치게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6 절에서 시작된 말씀이 7 절에서 끝나면서 결론적으로 감사가 넘치게 하라고 합니다. 바로 그 이전에 무엇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서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데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이 말씀은 총 66 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만 이것을 좀더 요약하자면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32 자로 반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다시 요약하자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는 23 자의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결론적인 말은 물론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는 것이지만 무조건 감사를 넘치게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굳게 서서 감사를 넘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감사는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 감사의 근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좋은 일이 생긴다면 그 모든 것을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그 영광을 돌리는 사람입니다. 감사를 해도 그리스도 때문에 감사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그 안에 세움을 입어”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감사의 근원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한국에 어떤 사람이 하는 일마다 안되자 묫자리를 마음데로 이장하다가 토지에 관한 무슨 법에 걸려 구속되었습니다. 아마 이 사람은 무슨 일이 잘되면 묘자리를 잘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잘 안되도 묫자리가 좋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묫자리를 옮겼을 것입니다. 묫자리가 이 삶에게 감사와 불평의 근원이었습니다. 찬송가에 보면 “기쁨의 근원되시는 예수를 위해 삽시다 날마다 주를 섬기며 언제나 주를 기리고 그 사랑안에 살면서”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서 모든 기쁨과 감사는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뿌리를 더듬어 가면 우리는 그리스도에 도달합니다. 요즘 임신여부를 가릴 수 있는 간단한 테스트가 있습니다. 유테스트, 두테스트인데 그것으로 간단히 아이를 가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내 심령도 간단히 테스트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내 심령이 짜증과 불평과 불만과 무덤덤함과 신경질적 반응만 남아 있을 때 여러분은 금방 아하! 지금 내 삶에 빨간 신호등이 켜지고 있구나 내 안에 감사와 기쁨의 근원되시는 주님이 안계시는구나!“ 이렇게 진단하면 그것은 컴퓨터 촬영하는 것 보다도 내 심령을 잘 진단한 것이 됩니다. 그와 반대로 내 안에 뭔가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고 무엇인가 모르지만 가슴이 뿌듯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뭣인가 하고 싶을 때 여러분의 심령을 얼른 관찰해보면 그때는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속에 계시는 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 감사의 근원이며 뿌리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만가지나 되지만 그 중 딱 한가지 생명의 은혜만 생각해 봅시다. 평범한 그저 그런 생명, 풍요한 생명 주셨습니다. 자벌레와 같이 기어가는 생명, 진리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연약한 생명, 강하게 해 주셨습니다. 병든 생명, 치유해 주셨습니다. 죄로 찌든 생명, 용서해주셨습니다. 죽은 생명, 살리셨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생명, 영생을 주셨습니다. 생명의 근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감사의 근원이십니다. 둘째, 감사는 또한 믿음에 굳게 설 때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믿음에 굳게 서서”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믿음에 선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에베소서 3 장 7 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여기서 믿음이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단순한 인식이나 인정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삶은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리스도를 향한 소망이 생기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자라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의 근원이 되신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실 때 믿음이 생기고 소망이 자라나며 사랑이 성장하게 됩니다. 믿음 소망과 사랑뿐이 아닙니다. 감사와 기쁨도 여기서 생깁니다. 자 여기서 강조해야 할 사실은 이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실 때 여기서 믿음이 생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믿는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삶 속에 계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서 내 생명의 주로써 주님의 나의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게 하는 내 삶의 자세입니다. 바로 믿음이 생깁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께서 내 모든 일을 도와주시고 예수님께서 내 생애를 인도하시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해주시고 예수님께서 나의 주님이 되신다는 믿음입니다.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가 먼저가 아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먼저입니다. 감사는 믿음으로 굳게 설 때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요,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알게 되고 깨닫게 되어 저절로 우러나는 것입니다. 감사를 넘치게 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님을 맘에 모시고 믿음으로 살 때 감사는 우리 삶이라는 그릇을 넘치게 솟아올라오게 마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실 때 우리는 달라집니다. 뭐가 달라집니다. 먼저 눈이 달라집니다. “눈빛만 봐도 알수 있잖아”라는 그런 노래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상대방의 눈빛만 봐도 날 사랑하고 있는지 lip service 만하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인은 “사물과 사람과 사건”을 보는 눈이 다릅니다. 같은 사건을 겪어도 어떤 사람은 감사하고 어떤 사람은 감사를 생략해 버립니다. 이는 그 사건을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어떤 좋은 일을 당했습니다. 최진사댁 셋째 딸을 차지하고 난 다음 칠복이는 일곱 개 복중에서 한 개가 맞았다고 좋아합니다. 칠복이가 셋째딸을 차지하게 된 시각은 “재수가 나쁘거나 재수가 좋은거나”는 두 잣대를 가지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그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생각 안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배필을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살다가 좋은 일을 맞이했습니다. 그 사람은 믿음의 눈으로 그 좋은 일이 생겨지게 된 근원과 뿌리를 생각합니다. 아하 또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셨구나 “think” 하고 그 사람은 바로 “thank”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안좋은 일이 생겼습니다. 그 사람은 길거리에 있는 깡통을 힘껏 찹니다. 그러자 신고 있는 신발마저 함께 날아갑니다. “참 재수 더럽게 없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안좋은 일이 생겼습니다. 그 사람은 믿음으로 그 안좋은 일을 깊게 생각(think)합니다. 왜 그런 일이 생겼을까?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싶은 뜻이 무엇일까? 그러고 한참 생각하다가 그 안 좋은 일마저 더 큰 안 좋은 일을 예방하시려는 주님의 뜻으로 고백하고 감사(thank)하게 됩니다. 사건은 같은 사건인데 바라보는 시각이 독특합니다. 같은 사건임에도 발상을 전환하여 받아 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한 사건을 볼 때 그냥 평범하게 보지 않습니다. 발상을 전환합니다. “어떤 사람이 발모제를 내다 팔았는데 사람들마다 웃습니다. 그 파는 사람이 대머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어떤 손님이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당신 대머리인 주제에 발모제를 팔 수 있는거야? 그러자 그 대머리 아저씨가 무엇이라고 얘기했겠습니까? 그럼 브래지어는 꼭 유방있는 사람이 팔아야 합니까?” 발상의 전환입니다. 금번 이사한 집에도 개미가 많이 찾아 옵니다. 저쪽 집에서는 날씨가 추울 때만 찾아왔는데 이 집에서는 날씨가 좋을 때나 궂을 때나 시도때도 없이 찾아옵니다. 개미는 우리 집을 무척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식탁에서 밥을 먹는데 개미가 벽을 기어가고 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개미를 잡으려고 하자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개미가 왜 많이 찾아오느냐? 그것이 다 이유가 있다. 성경에 보면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는 잠언 6 장 6 절 말씀이 있는데 우리가 게으르니까 개미가 나타나서 자신이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요지로 설교를 하자 아들 녀석이 “근데 아빠 방에 개미가 제일 많아요” “고연 녀석”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게 되면 한 사물을 놓고 달리 봅니다. 전혀 다른 각도로 보게 됩니다. 제가 한국 갔을 때 하나 얘기를 하겠습니다. 작은 아버지는 장로님이시고 공무원이신데 금번 IMF 의 여파로 원래 예정보다도 2 년을 일찍 은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 십 여년을 일해오셨는데 감축대상에 들어갔습니다. 다른 데로 일하러 갈려고 해도 젊은이들도 쓸 수 없는 판에 끼여 주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열받았을 텐데 다른 사람들 같으면 홧술로 지새우셨을 텐데 제가 인사하러 갔더니 만면에 웃음을 띠고 계셨습니다. 요즘 집에서 애를 보고 계십니다. 지난해와 올해에 2 명의 아들로부터 잇따라 2 명의 손녀와 한명의 손자를 보셨습니다. 제일 처음 손녀를 기쁨이라고 지으셨습니다. 그 다음의 손주를 충만이라고 지었습니다. 세 번째 손녀는 은혜라고 지었습니다. 뭐 꼭 말로 연결하자면 기쁨 충만, 은혜충만 아닙니까? 바로 손주와 손녀의 이름 속에 작은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비록 실직이 주는 아픔이 있었지만 그런 것이 작은아버지의 마음을 어둡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주님 안에 모시고 믿음에 굳게 서서 그냥 늘 기쁨충만 은혜충만이었습니다. 혹 여러분이 이것을 확인하고 싶으시면 한국에 011-82-62-362-5048을 걸어 보십시오. 지금 애를 보고 계시는 저희 작은 아버지가 기쁨 충만한 목소리로 “감사합니다. 배요섭입니다” 은혜충만하고 기쁨충만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 사시기 때문에 땅 위의 법칙이나 세상 가치관을 가지고 보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주신 은혜로우신 시야를 가지고 모든 사건을 하나님의 은혜로 해석하고 감사를 넘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Sense, Sensibility” 라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잇습니까? 거기서 여러분은 사랑을 느끼는 여자의 섬세하고 특유한 어떤 감정을 알게 될 것입니다. 두 자매가 각각 남자를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방식이 각각 다릅니다. 동생은 자기가 좋아하면 상대방의 마음이야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나타냅니다. 그러나 언니는 사랑하는 마음을 가슴속에 품고 있으면서 사랑하는 대상의 마음을 예민하게 읽습니다. 상대방의 감정의 미묘한 흐름에 따라 그 마음도 아주 sensitive 하게 움직입니다. 마침내 자신의 사랑이 make sense 하게 되었을 때 그는 북받쳐 오르는 눈물을 그때서야 억제하지 못합니다. 아마 동생쪽의 사랑의 접근 방식을 sense 라고 한다면 언니쪽은 sense 보다는 더 sense 한 sensitivity입니다. 언니는 사랑하는 대상이 감정이 어떻게 흐르는가를 매우 sensitive 하게 읽어냅니다. 저는 이 영화의 내용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마음을 예민하게 읽어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 삶의 언저리를 스쳐 지나가실 때에도 그것을 느끼는 sense, sensibility 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혹 내 삶의 뒤안길에서 님의 그림자와 같이 소리 없이 따라올 때도 우리는 아하 주님이 내 뒤에 나를 말없이 뒤따라오시는 구나를 느끼는 것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사랑에 빠지게 되면 여인은 스쳐오는 바람결 속에서도 시오리 밖에서 오시는 낭군의 내음을 맡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이런 시를 썼습니다. “태초에서부터 너의 내면에 하나님이 바람처럼 일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너의 마음이 닳아 오르고 비밀을 지킬 때 하나님은그 속에서 창조를 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마음 속 스쳐지나가는 바람 속에서도 하나님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뭐냐? 영적 감수성입니다. spiritual sensibility입니다. 영적 감수성이란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지각능력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신다는 신뢰입니다. 바로 이 영적 감수성이 예민할 때 우리에게 감사가 나옵니다. 바로 믿음이 있을 때 우리에게 감사가 절로 나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는 이런 역학관계(Interaction)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섰을 때 감사함을 넘치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에 굳게 섰을 때는 내가 그렇게 하려하지 않아도 감사가 넘쳐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에 섰을 때 감사가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섰을 때” 감사는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넘쳐 나오는 것입니다. 믿음에 굳게 확고하게 확실히 섰을 때 감사는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분수가 물을 뿜어내듯 나오게 됩니다. 5. 저는 감사가 넘칩니다. 저의 감사 역시 뿌리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저에게 많은 선물을 해주셨기 때문에, 여러분이 부족한 저를 담임목사로 받아드려 주셨기 때문에, 여러분이 저에게 사례를 갑자기 이 아이엠에프 시대에 팍 올려주셨기 때문에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여러분들을 한인제일감리교회라는 신앙공동체의 이름으로 여러분들을 만날 수 있게 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감리교회 교인들인 여러분들을 사면팔방에서 보았습니다. 처음 제가 느꼈던 것은 어떤 열정이었습니다. “참으로 헌신적으로, 활동적으로, 속도감 있게 하는구나! 상당한 열정은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저 열정과 헌신이 어디서부터 오는가? 그리고 더 깊게 여러분을 보았습니다. 원래가 감리교회 교인들은 그런가? 쭉 지켜 보아왔습니다. 저는 1998 년 9 월 27 일 이후부터 여러분을 지켜보면서 저의 지속적인 의문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바울 선생님이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말씀하신 그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드릴 때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과 모든 성도들에게 품은 사랑을 전해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 안의 깊은 믿음과 사랑을 가진 여러분과 함께 이 한인제일감리교회에서 만나게 된 것을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훌륭한 믿음을 지닌 성도들과 부족한 교역자가 만났습니다. 여러분이 공중기도할 때 마다 부족하고 함량미달인 저를 위해 기도하시면서 “하나님께서 배 목사님을 보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할 때 시편시인이 그렇게 고백한 것처럼 “내가 무엇이관대 이토록 돌보시며” 주님을 향한 감사가 넘칩니다. 요즘 제 심정은 시편시인이 정확하게 대변하고 있습니다. “내 잔이 넘치옵니다” 2) 여러분 각자에게 더욱 감사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앞으로 컴퓨터는 Sensor가 무척 발달 할 것입니다. 가르쳤던 교회대학부 학생 중에 삼성 연구소에서 Sensor만 전문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연구하는 것은 자기 집 앞에서 "열려라 참깨!" 하면 문이 스스로 열어지는 연구를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열려라 참깨 하면 열려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컴퓨터 센서가 자기 주인의 음성을 인지하고 있어서 주인 아닌 어떤 사람이 똑같은 주문을 외웠다고 해도 열어지지 않습니다. 혹 주인이 감기에 걸렸다고 해도 예민한 센서는 백만분의 일의 주인의 음성의 파장을 정확하게 캣취하여 그 주인의 음성을 감지하고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감기 조심하세요“하면서 문을 열어줍니다. 센서가 예민하게 주인의 상태까지 잡아냅니다. 저는 바로 우리 한인제일감리교회 성도들에게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대신 우리 한인제일감리교회 성도들이 우리 주님 매일 여러분과 함께 임마누엘하시는 데 바로 이 주님을 알아보는 이 영적 감수성(spiritual sensitivity)이 더욱 델리케이트해지고 더욱 센서티브하게 되어지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바로 그때 저와 여러분 바로 우리는 우리는 무엇에든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더욱 감사로 넘쳐 주께 영광 돌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넘치는 감사로 충만한 교회를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국민학교 교장 선생님이 출근하면서 우연히 학교 앞 우체통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일 우리 꼬맹이들이 우체통 속에 돌멩이를 집어넣으면 안되겠지 생각하면서 아침 훈화 시간에 어린이 여러분! 학교 앞의 우체통에 돌을 집어넣으면 안됩니다. 그 다음날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개구쟁이들이 청개구리 심뽀를 가지고 정말 우체통에다 돌을 가득 집어 넣어 편지가 들어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인제일감리교회 교인들의 열정과 감사로 인해 교회가 너무 넘쳐서 저도 역시 그런 훈화를 하고 싶습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에 너무 감사로 채우지 마십시오!” 앞으로 우리 교회는 성도들이 너무 사랑도 넘치고 헌신도 넘쳐서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너무 주의 일만 매달리시는 것 아닙니까? 앞으로 우리 교회는 담임목사는 자꾸 말리려고 하고 성도들은 그러면 그럴수록 더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를 넘치게 하려는 긴장 가운데 더욱 영적으로 성장하게 될 것 같은 강한 영감을 가지게 됩니다. 가끔 어떤 곳에서 자리를 앉으려고 할 때 장로님들과 권사님들이 상석을 권하여 젊은 목사로서 그 자리에 안게 되는 것이 익숙치 않아서 앉아도 약간 어색합니다. 우리가 우리 교회에서 무엇보다 해야 할 일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에 모든 일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제일 상석에 앉으시도록 모든 배려를 하십시다. 우리의 경험과 이성이 우리의 신앙의 경력이 우리 교회의 제일 좋은 상석에 앉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제일 상석에 앉으시도록 그런 아름다운 질서를 만들어 나갑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모입시다. 목사 중심도 아니고 장로 중심도 아니고 감리교장정이나 장로교교리가 중요하지만 교회의 중심은 아닙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가 한인제일감리교회의 중심이 되게 하십시다.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생활을 하자는 말씀입니다. 마로 그때 우리 교회는 더욱 감사가 넘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계시록에 보면 일곱 교회에 관한 평가가 있는데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는 각 교회들을 evaluation 하시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감사가 넘치는 두 교회를 선정하셔서 축복의 말씀을 해주실 때 첫 번째 우리 교회가 선정되고 두 번째는 오늘 본문의 골로새 교회가 칭찬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이름이 제일교회니까 감사제일교회, 감사충만제일교회로 먼저 하나님께 칭찬을 받고 다음에 골로새 교회도 하나님께서 칭찬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우리 한인제일감리교회 교인들은 골로새 교회 교인들과 함께 손을 잡고 하나님이 주신 은총 안에서 더욱 즐거움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오 주님 우리에게 감사를 넘치게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 주님 우리 안에 사심으로 우리에게 평화주시고 우리 곁에 계심으로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 앞에 계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 뒤에 계심으로 우리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시고 우리 위에 계심으로 우리를 주관하시고 우리의 모든 삶속에 임마누엘 하심으로 인해 감사드립니다. 주님 우리에게 금보다도 보배같은 믿음 위에 믿음을 주셔서 그 믿음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저희 생이 주님을 향한 감사찬송으로 채워지기 원합니다. 주님 또한 한인제일감리교회를 은총적 섭리 가운데 예정하시고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퍼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 교회를 감사로 충만케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주신 감사와 기쁨의 에너지로 이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의 직분을 잘 감당하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감사와 기쁨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03 20:59:55 총무 칼럼에서 이동 됨]

hi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츲ҺڻȰ ⵵ ȸ ѱ⵶ȸȸȸ ()ظ ѽŴѵȸ μȸڿȸ ȸ б ѽŴб ûȸȸ ŵȸ ŵȸ ȸÿ ѱ⵶ȸȸͽ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