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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태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관리자 (광주남노회,작천교회,목사) 2010-08-07 (토) 14:38 13년전 3752  
 

1998 년 12 월 6 일 오후 1 시 한인제일감리교회


성서본문 : 고린도전서 10 장 31 절, 마태복음 6 장 31 절 - 34 절

제      목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며 살기를 원하는 여기 모인 모든 분들 위에 넘치도록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영화배우같이 생긴 3 년 선배인 윤종수라는 선배가 있었습니다. 신학교 옆에는 도봉산으로 올라가는 길에 화계사라는 절이 있습니다만 거기 가는 길이 좋아 밥 먹고 소화시키는 코스로 더없이 좋습니다. 어느 날 저녁을 먹고 형과 화계사 산책을 하였습니다. 제가 묻지도 않았는데 앞으로 자기는 다리가 미끈하게 빠진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했습니다. “아니 형, 그럼 얼굴이나 마음은 안 보겠느냐?”고 했더니 물론 얼굴과 마음이 이쁘면 同價紅裳이겠지만 다리만 이쁘면 다른 것은 그렇게 따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형이 조그마한 것에도 잘 감동하는 편인데 언젠가 헬라어 수업을 듣더니 이제는 만나는 사람마다 “데오글로리아”하고 다녔습니다. 그때 제가 1 학년이라 아직 헬라어를 듣지 않아서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서 “응 형이 외국 잡지에서 각선미가 기가 막히게 빠진 데오글로리아라는 여자를 발견하였는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Deo Gloria는 “하나님의 영광”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런 뜻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형은 아침 기숙사에서 일어나면서도 "Heil Hitler" 하는 식으로 “데오 글로리아”, 식당에 나타나면서 밥 먹고 있는 신학생들을 향하여도 “데오 글로리아”하고 다녔습니다. 음료수를 한잔 할 때도 잔을 높이 들면서 "데오 글로리아" 했습니다. 나중에는 “데오글로리아”를 다 안하고 형은 “데오” 하면 그 형을 아는 후배들은 "글로리아"를 외쳐야 했습니다. 한번은 우연히 형이 화계사에서 어떤 여자하고 팔짱끼고 다정하게 걸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즉각적으로 저는 물론 그 여자의 다리부터 보았습니다. 그리고 얼굴을 보았습니다. 얼굴은 참으로 목사님 사모와 같이 결코 이쁘지는 않으면서도 은혜로운 모습이었는데(집-X), 다리는 그 형이 이상으로 했던 미끈형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형에게 귀속말로 물어 보았습니다. “형 아니쟎아?” 그러자 형은 역시 귓속말로 내게 한마디로 답했습니다. “데오 글로리아”


3. 사람들은 해바라기에 대하여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스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정치인을 해바라기성 정치인이라고 합니다. 그런 공해 정치인을 비판하는 것은 좋지만 좋은 해바라기를 그런데다 비기는데는 비유의 핀트가 맞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해바라기는 해가 동쪽에서 뜨면 해바라기 얼굴도 동쪽을 향하고 서쪽으로 지면 얼굴을 서쪽으로 돌립니다. 해만 바랍니다. 일편단심입니다. 우리는 해바라기와 같은 믿음, 주님만 바라보는 믿음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찬송가 465 장은 해바라기 찬송입니다.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구주와 함께 나 살았도다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나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이 찬송은 언제나 주님은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나니 주의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보겠다는 뜨거운 믿음이 이 찬송 속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것이 오늘 말씀 제목입니다. 오늘은 사도 바울 선생님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어떻게 말하였고 그의 전 생애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어떻게 추구하였나를 집중탐구하면서 오늘 우리의 삶에 던져주는 깊고 깊은 뜻을 함께 음미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첫째로, 바울 선생님은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백이면 아흔 아홉은 자기의 영광을 구합니다. 자기 영광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바울이 자기 영광을 구하려 했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던 위치에 있었습니다. 제가 전도사로 한빛교회에서 봉사할 때 교회청년들 데리고 동해안을 다녀왔는데 팔부터 시작하여 살갗이 많이 타서 벗겨지는 것을 본 어떤 집사 하나가, 이름도 안 잊어 먹는데 오승룡이라고, 아니 목사님 예수 믿고 거듭나시려는 거 같아요, 껍질이 다 벗겨지시게! 바울이 거듭나기 전 사울이었을 때 참 잘 나갔습니다. 당시 최고 문하라고 하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한 엘리트 중에 엘리트지! 로마 시민권도 가지고 있었지! 맘만 먹으면 출세길이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만한 조건이면 에스더와 같은 미인들이 트럭으로 줄을 서서 기다릴만한 당시의 종교가의 로얄 패밀리였습니다. 입신양명과 금의환향이 바로 언덕 너머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우리 예수님 만나 사울이 바울로 거듭난 뒤에 자기의 영광을 구할 수 있는 완벽하게 구비된 모든 객관적 조건들을 다 분토와 같이 초개와 같이 여겼습니다. 자신의 영광과 행복의 길을 가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가신 고난과 형극의 길을 갔습니다.


둘째, 바울 선생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였습니다.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이라는 우리 유행가가 있습니다만 바울 선생님은 자나깨나 주님만 생각하였습니다. 주님의 영광만을 생각하였습니다. 바울은 스스로 오직 한 곳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채널에 자신을 맞추어 놓고 다른 데는 채널을 돌리지 않고 아예 납땜을 해 버렸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시면 바울 선생님도 “앉으나 서나 당신생각” 노래를 불렀습니다. 어디에 그런 노래가 나오느냐? 로마서 14 장 6 절에서 8 절을 보면 그 노래가 나옵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은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것이야말로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보다도 훨씬 더 지독한 당신생각입니다. 이같이 철저했습니다. “먹어도 주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어떤 선생이 제자들과 포커놀이에 푹 빠졌습니다. 잠시 뜸을 들이다가 뜸을 들이며 한잔들을 하게 되었는데 얘기가 죽음이라는 주제로 돌아갔습니다. 선생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이 놀이가 한창 신나는 판인데 내가 그만 나뒹굴어 죽었다고 치세 그러면 자네들이 해야할 두가지가 무엇인지를 아나?” “무엇인데요?” “첫째, 시체를 얼른 치우게 그리고 둘째, 패를 돌리게” 바울 선생님은 주님께 푹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 서신에 보면 그 빠져 있는 정도가 포커놀음이거나 마약에 빠져있는 것보다 더 심합니다. 바울 선생님에게는 어떤 strong addiction 이 있었습니다. 바울 선생님의 말씀 속에는 “내가 미쳐도 주를 위하여 미쳤고” 완전히 바울은 주님과 주님의 영광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습니다. 결혼도 안하고 소아시아 천지를 다니면서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에다 편지를 쓰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맞고 풍랑도 만나고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오히려 기뻐하였음은 그런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영광과 연결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 시대에도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로마가 식민지에서 온갖 공물을 실어나르기 위해 사통팔달로 뚫린 길을 만들었습니다. 어느 길로 가더라도 로마에 이르는 길이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우리가 바울의 생각, 사상, 말과 글, 바울의 행동과 삶은 어느 길로 가더라도 모두가 한 길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님께서 가신 그 길은 영광의 길이었습니다. 자신의 영광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한 길이었습니다. "one way to the glory of God"  


셋째, 바울은 남이야 어찌든 나만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나만 하나님께 상받자는 그런 이기주의적인 생각을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나만 예수 믿고 천당”과 같은 개인주의적 기복신앙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은 모든 피조물의 의무로 보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서신으로 닿을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권면하였습니다. 그의 모든 전도와 헌신은 자신 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함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낸 바울의 서신을 보면 좀더 명백해집니다.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함이라”(고린도후서 4 장 15 절)


4. 저는 지지난학기에 “Luther and Lutheranism" class에서 500 페이지가 훨씬 넘는 책을 읽고 2 페이지로 요약해야 하는 숙제를 해야 했습니다. 10 페이지나 15 페이지 paper를 만드는 것 보다 그것이 훨씬 어려웠습니다. 바울 선생님이 쓴 서신을 다 합하면 500 절이 넘습니다만 만일 이것을 두 절로 요약을 한다면 저는 쉽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 장 17 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과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0 장 31 절로 요약을 하겠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무슨 일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여러분 미국이 하는 모든 대외정책은 가만히 살펴보면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중동평화, 아시안의 번영, 세계의 평화와 안녕을 내세우지만 구호를 앞세우는 구호 뒷면을 보면 “미국의 이익”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미국의 이익이 되면 독재정권에도 무기를 지원하고 미국의 이익이 되면 경제협력과 교류라는 명분을 이용하여 통상압력을 가중시키기도 하고 미국의 이익이 되면 제3세계 정부를 무너뜨리기도 하고 미국의 이익이 되면 폭격기를 보내어 테러리스트를 응징한다는 명분으로 그 나라에 허락받지도 않고 제약공장을 무자비하게 파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국의 대외정책은 이렇게 요약됩니다. “그런즉 무슨 일을 하든지 미국의 이익을 위하여 하라” 바울의 대외선교정책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잘 나타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합니다. 사실 바울은 이 말씀을 고린도교회에게만 한 말씀이 아닙니다. 소아시아에 세운 교회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단지 바울의 말씀을 뛰어 넘어 성경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 시대와 공간을 뛰어 넘어 오늘 우리 한인제일감리교회 교인들에게도 여러분 각자를 위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5.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이 말씀은 바로 오늘 지금 여기 실존해 있는, 오늘 이 시각 1998 년 12 월 6 일 오후 지금  시  분 이 자리에 예배드리고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입니다. 우리 이 시간 이 말씀을 달고 오묘한 그 말씀을 받아먹읍시다. 그리고 어떻게 이 말씀이 내 삶 속에서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갤 수 있도록 기도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을까를 함께 연구하십시다. 어떻게 이 말씀이 내 삶 속에 나팔이 되어 크게 울려 퍼지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 말씀이 내 몸과 마음과 영혼을 가득차게 하여 흘러 넘치게 할 수 있을까?를 이 함께 생각해 봅시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이 말씀을 준행하기 위해서 첫째, 먼저 우리 삶의 우선 순위가 무엇인지를 조용히 분석해 봅시다. 조용히 눈을 감고 마음의 눈을 떠서 과거에 스쳐지나온 삶을 그리고 현재 지내고 있는 나의 삶을 비디오 스크린 속에 담아 놓고 한번 rewind 해 봅시다. 지금 나는 어디에 정신이 팔려 있습니까? 내가 지금 분주하게 뛰는 일들이 무엇인지 내 삶의 비디오를 돌려보면서 자세히 살펴 봅시다. 물론 하루에도 수 없는 많은 일들이 분주하게 일어나고 있는 모습이 스크린 속에 돌아가고 있습니다. 잠시 리모콘의 pause(멈춤) 기능을 이용하여 멈추고 잠시 생각해 봅시다. 과연 그것이 내가 온갖 정열을 쏟을 만큼 중요한지 생각해 봅시다. 혹 내 삶의 가장 귀한 것들 중에서 우선 순위를 차례대로 중요도에 따라 순위를 매긴다면 제 1 순위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그 우선 순위가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우리 주님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땅에 있는 많은 일 중에 하나입니까? 자녀교육이나 비즈니스나 내 건강이나 사람을 만나는 일이나 친구들과 그린필드에 나가는 일 중에 하나입니까? 아니면 어떤 것이 중요한지 우선 순위가 명확하지도 않은 채 정신없이 일에만 바쁘게 하루하루를 지내십니까? 내 삶의 우선 순위는 어디에 있습니까?  삶의 우선 순위가 중요도에 따라서 배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뒤죽박죽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그냥 세월 흘러가는데로 “가는 세월 그 누구가 막을 수가 있나요?” 노래 부르며 바람 부는 데로 물결 닿는 데로 가고 있는 것 아닙니까? 눈을 뜨고 다음으로 넘어 갑시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이 말씀을 준행하기 위해서 둘째, 내 삶의 가장 우선 순위를 정하는 일입니다. 내 삶이란 나룻배에 실어야 할 가장 귀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를 정하는 일입니다. 언젠가 이런 퀴즈가 유행하였습니다. 만일 당신이 무인도에 가게 되었는데 만일 가장 중요한 세 가지 것을 가지고 갈 수 있다면 무엇을 가지고 가겠느냐? 이 퀴즈를 여러 사람에게 냈는데 각각 달랐습니다. 어떤 친구는 ”화투 그리고 돈많은 두사람“ 어떤 분은 ”모토보트, 밧줄, 남편“, 가서 남편을 무인도에 밧줄로 묶어 놓고 모토 보트를 타고 돌아 오겠다고 했습니다. 어떤 이는 성경 찬송 그리고 색연필이었습니다. 색연필로 줄을 그으며 성경을 읽겠다는 것입니다. 금요성경공부를 이런 정신을 가지고 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도 삶의 가장 소중한 것 세가지를 적어 놓고 고심하면서 그 중 한가지를 지운다면 무엇을 지울 것이고 나머지 둘 중에서도 한 가지를 지워야 한다면 어떤 고뇌에 찬 결단을 하시겠습니까? ”성공하는 사람의 일곱가지 습관“(the 7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이라는 책을 써서 일약 유명해진 Stephen R. Covey 박사는 제 2 탄을 내놓았는데 그것이 "First things first"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일을 “더 빨리, 더 열심히, 더 영리하게, 더 많이 하라”는 전통적인 처방을 넘어선 새로운 처방을 내놓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어떤 일을 얼마나 빨리 하는냐 하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일을 먼저 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는 중요한 것은 중요하게 관리해야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이라면 삶의 가장 중요한 것,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우선 순위로 두어야 할 것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이미 그리스도가 정해준 우선순위가 있기 때문에 사실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어야 할까를 것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바울 보다도 훨씬 먼저, 스티븐 코비 보다 훨씬 먼저 우리 삶의 우선 순위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의 나라란 하나님의 나라요 그의 의란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는 그러므로 서로 떨어져 있는 독립된 실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가 실현된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무엇입니까? 이것도 뭐 복잡한 신학적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옳게 여기시는 것,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기쁨이요 즐거움입니다.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영광도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바울 선생님이 “무슨 일을 하던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을 때 이는 바울 선생님의 고유한 신학사상이 아닙니다. 이는 본래 예수님의 말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와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는 그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는 말의 표현만 다르지 그 내용에 있어서는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까? 왜 인간을 만드셨을까? 그에 대한 답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그에게 주어진 가장 큰 의무요 권리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이 말씀을 준행하기 위해서 셋째,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으로 내 삶을 온전히 채우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로 내 삶을 채워가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바로 내 기쁨으로 삼는 일입니다. 언젠가 제가 수유리에 있는 모교인 한신대학교에서 거행된 후배결혼식에 갔습니다. 선물을 포장하기 위해서 학교 앞 문방구에 들어갔는데 어떤 꼬마여자애가 어떤 악보를 가지고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가 있네”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만화영화화되어 유명한 만화가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의 주제가였습니다. 남자주인공인 까치가 여자주인공인 엄지에게 바치는 노래입니다. 그 아이가 한 여섯 살이 되었을까? 노래 부르는 모습이 너무 이뻐서 그때 다섯 살이었던 우리 아들과 사진을 찍어준 것이 아직도 있습니다. 아들이 문방구를 나오면서 “아빠 나 그 애하고 결혼하면 안돼?”고 했을 때 나는 아이가 기뻐하는 일을 해줄 수 없었습니다. 그 문방구에서 학교정문 까지는 한 40 m 되는 길을 걸어가면서 내 생각은 그 노랫가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가 있네!” 이 가사 속에 뭔가 굉장히 신앙적이고 신학적이고 그 무엇이 담겨 있는 것 처럼 느껴졌습니다. 신학교 교정을 들어서는 순간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가 있네” 노랫가사의 의미가 갑자기 실타레 풀어지듯 그의미가 이렇게 내 마음 속에 풀어졌습니다. “난 주님이 기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가 있네” 내가 6 년이나 신학교를 다닌 것도 압축하고 요약해보면 바로 이 노래를 부르기 위해 갈고 닦고 조이고 기름친 것이다는 어떤 강한 feeling과 intuition이 나를 휘감아버렸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얘기 하나하려는데 이것이 제 자랑이기 보다는 주의 말씀을 선명하게 전달하는데 봉사적으로 쓰이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저는 저희 아버지가 기뻐하는 일을 그렇게 적게 한 편은 아닙니다. 아버지가 신학교 가라고 해서 갔습니다. 아버님 기뻐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제가 목사안수를 받을 때 아버님은 너무 기뻐서 우셨습니다. 아버님은 그 이후로도 저 때문에 기쁨의 눈물을 몇 번 더 흘리셨습니다. 저는 아버님의 설교과 강론집을 아름다운 장정으로 하여 두 권을 만들어 드렸습니다. 제가 “광야를 지나 약속의 새 땅으로” 첫 번째 책을 만들어 드렸을 때 아버님이 마치 어린애같이 좋아하시는 것을 보고,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음, 또 한 권 만들어 드려야지, 그리고 여기 오기 전에 정확하게 821 페이지 되는 책 “희년의 복음과 함께 새로운 세기를 향하여” 제목의 책을 만들어 드렸습니다. 아버님은 너무 좋아서 그 책을 부둥켜 안고 울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아버님의 표정을 보니 너무도 행복의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올라 서신 것 같아 또 한 권 더 만들어 드려야 겠구나 다짐을 하였습니다. 아버님이 무슨 비중있는 일을 하시고 싶어할 때 저는 총회에서 근무하였기 때문에 모든 인맥을 동원하여 아버님이 교단의 최고어른인 총회장 하실 수 있도록, 아버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도록 일조를 했습니다. 총회장이 되시고 너무도 좋아 하셨습니다. 그렇게 아버님께 기쁨이 되는 일 한 개씩 한 개씩 할 때 마다 “아버지, 만가지 은혜 중에 한가지 갚았습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어째서 만가지 중에 하나냐 이제 다 갚았다”고 하십니다. 그 얘기를 들을 때 아버지 은혜를 막 더 갚고 싶은 생각이 났습니다. 여러분 혹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을 상상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여러분 우리 주님이 마음 뿌듯한 모습으로 여러분을 자랑스럽게 여기시는 모습을 그려본 적이 있습니까? 하늘 아버지의 마음도 저와 여러분의 아버지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영광을 안겨 드리면 책을 부둥켜안고 우실 만큼 좋아하시는 분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기쁨을 안겨 드리면 어찌할지 몰라 좋아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제 선배 얘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제 선배는 아내 선택의 기준을 다리가 이쁜 여자로부터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DEO GLORIA)이 되는 기준으로 옮겼습니다. 물론 다리가 이쁜 여자를 선택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리가 이쁘면서도 그 이쁜 다리로 열심히 남편과 함께 뛰어다니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잇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선 순위를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척 중요합니다. 아내를 선택할 때 기준이 어여쁜 다리에서 목회자의 아내세속의 기준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기준으로 바꾸어진 것입니다. 사실 “다리에서 영광으로”는 여러분의 삶속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무슨 일을 할 때 세속적 기준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기준으로 옮겨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만일 “다리에서 영광으로” 옮겨가면 바로 그때 여러분의 삶도 옮겨갑니다. 우리가 옮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또 다른 차원으로 이 모든 것을 더해 주시는 차원으로 옮겨 주십니다. 우리가 어느 새인가 기쁨의 나라에 도달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혹시 삶의 우선 순위가 혹 뒤죽박죽 되었다면 이 시간 하나님 앞에서 재조정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의 생은 하나의 노래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가 있네”, “난 목사님이 좋아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가 있네” 그런 노래도 뭐 별로 나쁘지는 않겠습니다만 무엇보다도 “주님 영광되는” 이 노래 부르면서 찬송하면서 기쁨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이 말씀을 준행하게 되면 우리 하나님께서 절대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 속에 차고도 넘치는 기쁨을 넘치게 해 주십니다. 저희 아버지는 둘째아들인 저에게 참으로 잘하십니다. 무슨 문제가 있으면 적은 배 목사 의견을 들어보고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교인들에게 받은 좋은 것은 철제 캐비넷 속에 꼬불쳐 두셨다가 제가 가면 그 캐비넷 열쇠를 콧노래를 부르시며 여십니다. 할아버지 산소에 벌초하는 것도 자신이 친히 운전하면서 나를 옆자리에 앉히고 가기를 즐겨 합니다. 목욕탕에 가는 것도 저하고 가는 것을 좋아하고 야산에 산보하러 가는 것도 저하고 가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저는 알게 모르게 아버님의 사랑을 가득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도 그러십니다. 자식들이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면 자식들과 동행하시기를 즐겨 하시고 얘기를 나누기를 좋아하시고 축복을 소낙비와 같이 내리시는 것도 좋아하십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할 때 바로 그 인간 속에 최고의 행복과 기쁨을 느끼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이것이 다름아닌 하나님의 창조질서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께 영광을 돌리면 도무지 가만히 계시지 못하고 마음이 움직이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이실 때 우리의 삶의 현실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그냥 그대로가 천국이 됩니다. 그래서 찬양을 안부를 수 없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면 이는 다시 feedback 되어 우리가 견딜 수 없는 축복으로 돌아와 우리 마음 속에 차고도 넘쳐 찬송을 부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 말씀 그대로입니다. 여러분 찬송가 502 장을 지은 이는 헨리 젤리입니다. 이 찬송가는 후렴에서 감칠 맛이 납니다. ”하늘의 영광 하늘의 영광 나의 맘 속에 차고도 넘쳐 할렐루야를 힘차게 불러 영원히 주를 찬양하리“ 분명 헨리 젤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 한 평생을 바쳤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늘의 영광으로 차고 넘치도록 채워 주었고 그렇기에 헨리 젤리는 ”하늘의 영광 하늘의 영광 나의 맘 속에 차고도 넘쳐 할렐루야를 힘차게 불러 영원히 주를 찬양하리“ 찬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여기 계신 저와 여러분이 오늘 이 시간부터 1998 년 12 월 6 일 오늘을 여러분의 삶의 우선 순위를 굳건히 정하고 그 우선순위를 위해 타오르는 불길로 헌신하시는 잊을 수 없는 기념일 “unforgettable memorial day”로 만들어 가시는 여러분의 신앙의 기록에 길이길이 남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카이로스는 하늘이 정한 시간입니다. “이 시간이 다리에서 데오글로리아로 넘어가는 카이로스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 시간이 내 중심에서 주님중심으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카이로스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 시간이 나의 쾌락에서 주님 영광으로 우선 순위를 옮기는 기억할만한 카이로스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 시간이 주님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가 있네”노래를 부르시는 가락으로 흥겨워지는 카이로스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 시간이 하늘의 영광 하늘의 영광 나의 맘속에 차고도 넘쳐 할렐루야를 힘차게 불러 영원히 주를 찬양하리“ 찬송을 부르며 하늘나라로 옮겨가는 카이로스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의 영광이 내내 여러분의 가정과 사업과 영혼 속에 머물러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주님! 지금까지는 저희의 즐거움과 나의 영광을 더 많이 구하였습니다. 주님 이제 주님의 영광을 구하며 주님께 기쁨을 드리며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자꾸 옛 습성 때문에 주님께 기쁨을 드리며 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 저희 가운데 들어오셔서 저희를 바꾸어 주시옵소서 저희가 저희의 기쁨을 먼저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기쁨 가운데서 저희 기쁨을 찾으려 합니다. 주님 저희 생 한 가운데 계셔 주시고 저희의 생명이 하나님의 카이로스 속에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03 20:59:55 총무 칼럼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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