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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태진


찬양과 승리의 삶

관리자 (광주남노회,작천교회,목사) 2010-08-07 (토) 14:36 13년전 3161  
 

미국 캘리포니아주 훼어필드한인교회 1998 년 7 월 11 일 오후 2 시


              성서본문 : 시편 34 : 1 - 4

              제       목 : 찬양과 승리의 삶



1. 은총이 소낙비와 같이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총과 평화로서 훼어필드 교회를 통해 주님을 섬기시는 우리 모두 위에 넘치도록 내려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2. 승리의 삶



저는 장로교 목사입니다. 저의 부친 역시 장로교 목사님이시고 소천하신 할아버지는 장로교 집사이셨고, 할머니는 장로교 권사, 작은 아버지는 장로교 장로, 제 아들, 딸은 장로교회에서 주일학교와 유치원을 다니고 있습니다. 저의 소천하신 장인 역시 장로교 은퇴장로이셨고 장모님은 명예권사로 두 집안을 합하면 식구들이 약 153 명 정도 됩니다만 좋은 소식(GOOD NEWS)은 한사람도 빠짐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다는 점이고 약간 안타까운 점(BAD NEWS)이 있다면 감리교인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 장로교 교인입니다. 저는 장로교가 최고인줄 알아서 미국에 오기 전까지는  한번도 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린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오자 저는 주로 감리교회를 다녔습니다. 오클랜드한인연합감리교회, 버클리한인감리교회 그리고 한인제일감리교회 이상하게 감리교회에서 설교를 하거나 예배드릴 때가 많았습니다. 제일 처음 감리교회에 갈 때 장로교와 좀 다르겠지 하고 왔습니다만 그동안 여러분과 여러차례 함께 예배드리면서 우리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데 있어서 감리교와 장로교가 다르다는 어떤 경계선을 어디에다도 그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찬미하고 영광돌리는데 여러분의 감리교회와 제가 다녔던 장로교회가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감리교 교인과 장로교 교인은 어디가 다를까 찾으려고 해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장로교는 상당히 장중하고 거룩하여 찬송을 열정적으로 부르지 않는데 한인제일감리교회가 이 점은 장로교를 닮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알고 있기에는 감리교회는 열정(passion)이 있는 교단입니다. 챨스 웨슬레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열정적으로 기도하고 열정적으로 찬송하고 열정적으로 선교하고 열정적으로 봉사하는데 이것은 사실 장로교가 감리교에게 배워야 할 내용입니다. 알다시피 감리교는 웨슬레가 말을 타고 다니면서 찬송을 하고 찬송을 지었을 만큼 찬송의 열정이 살아 있는 교단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왕 라벨을 감리교회라고 단 이상 뿌리를 찾아서 교회의 모든 부문에서 웨슬레의 찬송의 열정으로 가득 채웠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을 기다릴 때도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찬송하면서 기다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승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악과 죄의 세력에 의해서 질질 끌려 다녀서는 안됩니다. 악한 죄 파도에 의해 쉽게 뒤집혀져서도 안됩니다. 유혹의 마귀가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합리적인 이성으로 꼬일 때에도 쉽게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깊은 디플레션의 어둠의 그늘이 우리 영혼에게 그물망을 던졌을 때에도 그 포위망안에 스스로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뱀이 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됩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 영혼은 올무에 빠져 비참한 생활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는 이겨야 합니다. 아니 우리는 주님 주신 능력과 힘으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악과 죄의 세력을 무너뜨리고 승리의 개선가를 불러야 하겠습니다. 오늘을 승리하며 살아야 합니다. 어제는 가고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바로 오늘을 승리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루하루를 승리하며 살 때 그것은 바로 행복으로 기쁨으로 믿음으로 소망으로 사랑의 삶으로 연결됩니다. 이 시간 삶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길을 찾아나가되 말씀 속에서 함께 찾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3. 노래에는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 노래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냥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메가톤급 이상의 파워가 있습니다. 2 차세계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는 당시 독일국민들을 마치 로봇과 같이 지 마음대로 움직였습니다. 그렇게 독재의 채찍을 휘둘렀는데도 그에 대한 여론지지도는 95 퍼센트를 훨씬 상회하였습니다. 히틀러는 행진곡풍의 노래를 만들어 전국민들에게 유포시켰고 독일국민들은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그들 민족이 세계제일이라는 착각속에 빠져들어갔습니다. 히틀러가 리모콘을 가지고 채널을 누르면 독일국민들은 T.V가 되어 히틀러가 원하는 화면을 보여 주었습니다. 히틀러와 독일국민들은 그렇게 유대인 600 만명을 비롯한 수천만명을 죽였습니다. 노래가 지닌 부정적이고 마력적인 힘입니다. 꼭 부정적인 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긍정적인 힘도 있습니다. 의학에서는 노래를 사람의 병을 고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특별히 재활의학이나 정신질환자들에게 자주 응용됩니다). 이를 music therapy라 합니다. 어떤 이가 depression 으로 고생하고 있다고 합시다. 예를 들면 응 그러면 너는 안토니오 비발디의 글로리아 상투스를 들어라, 신앙이 병들어 가고 있다 응 너는 그 불속에라도 들어가서 주의 사랑 전하리 그 복음성가를 계속 반복해서 불러봐라 뭐 그런 비슷한 치료방법입니다.  


4.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일반세속의 노래에도 그런 힘이 있는데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에는 얼만큼 더 큰 힘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에는 모든 것을 바꿔놓고도 남을 만큼의 능력과 힘이 있습니다. 찬양에는 무엇보다도 권능이 있어서 우리 삶에 승리를 가져다 줍니다. 이는 제가 만든 가설이거나 제 신앙경험이 아닙니다. 찬양이 우리 삶에 승리를 가져다준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성서가 우리에게 어제나 오늘도 언제든지 변챦고 증거해 주시는 진리입니다.

                       

찬송은 악령을 쫓아내는 힘이 있습니다.


사울이 악령에 들렸을 때 다윗은 수금으로 찬양함으로 악령을 물리쳤습니다. 이것이 어찌 다윗에게만 해당되는 경험이겠습니까? 저와 여러분도 다윗과 같은 경험을 적지않게 하였습니다. 우리 가운데 첩첩이 쌓여 있는 부정적인 생각, 어두운 생각, 쓸데없는 염려들 그래서 우리 영혼을 짓누르고 무겁게 하는 이런 것들이 우리가 찬양할 때 아침의 이슬방울 쉬 사라짐 같이 사라지는 것을 저와 여러분이 한두번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찬송의 생활을 할 때 그것은 곧 악령을 쫗아내는 힘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악령이 쫗겨간 그 자리에 하나님의 능력의 나라가 찬양과 함께 임하게 됩니다.  


찬송은 해방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전도여행을 하다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누구도 원망하지않고 그들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감옥창살에 비추이는 달을 보고 실라의 달밤을 부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절대절망의 쇠창살 속에 절대희망의 새 찬송을 불렀습니다. 옥문이 열렸습니다. 쇠사슬도 풀렸습니다. 이것이 어찌 바울과 실라의 경험이라고만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싱가폴이 마약사범들을 수용하는 교도소에 가서 그들과 함께 찬양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교도소는 마약사범을 초범, 재범, 그리고 5 범, 6 범들을 따로 수용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배를 드릴 때 한군데 모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부르는 찬양은 간절했습니다. 그들은 마약의 사슬에서 해방되기만을 기도하였습니다. 선교사에 의하면 많은 마약사범들이 자신의 찬양교회에 나오면서부터 재범률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마약이 주는 즐거움보다도 주님을 찬양하는 즐거움이 훨씬 그들에게 더 자극적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도 그것이 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그들의 찬양은 그만큼 절실하였고 그 찬양의 능력은 그들을 마약의 사슬에서 해방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죄악의 사슬속에서, 욕심의 어둔 창살 속에서 우리의 영성의 문이 굳게 닫혀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찬미함으로 죄악의 쇠사슬이 불탄 새끼줄 같이 끊어져 버리고 절망의 옥문이 활짝 열려지는 것을 저와 여러분은 너무도 많이 목격하였습니다.       


찬송은 승리의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호사밧 왕 때의 일입니다. 모압자손과 암몬자손이 연합하여 유다를 침공하였습니다. 여호사밧은 위기를 타개하는 방책으로 독특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맨 앞에 서서 여호와를 찬송하도록 하였습니다. 장수들은 전투에 대한 manual에 전혀 없는 비상식적인 명령을 듣고 속으로 “저 멍청이같은 왕 때문에 세계전쟁사에 유례없는 일이 벌어지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장수들의 당혹함에 전혀 개의치 않고 믿음대로 밀고 갔습니다. 과연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온 암몬자손과 모압자손을 치게 함으로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세계전쟁사에 유례없는 일이 벌어져 승리하였습니다. 다른 어떤 놈들이 뭐라고 해도 여호사밧은 찬송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 일촉즉발 위기의 순간에, 그 절대절명의 순간에 믿음으로 찬송의 능력을 끌여당겼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찬송을 듣고 그들의 편이 되시므로 당연히 여호사밧은 승리를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승리를 안겨주실 때 여호사밧을 비롯한 이스라엘백성은 할렐루야 주님을 힘차게 찬양을 하였습니다. 이를 어찌 여호사밧의 경험이라고만 할 수 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을 찬미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방패와 병기되셔서,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셔서,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을 찬미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대장되셔서 승리한 경험들을 어디 우리의 양손의 손가락으로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5. 찬양과 승리


이스라엘의 신앙에서는 “찬양과 승리”는 항상 같이 다니는 단짝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승리는 병거나 기마의 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인의 지혜는 여기서 더 발전합니다. 찬양은 하나님의 승리를 이끌어 드린다는 확실한 고백아래 그들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들의 삶속에 찬양을 접속시키는 일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본문 시편 34 편 1 절에서 4 절에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나와 함께 광대하시다하며 그 이름을 높이세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다윗의 이 찬양에서 “여호와를 송축한다”, “여호와를 자랑한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여호와의 이름을 높인다”,  이 표현들은 각각 다르지만 이는 한마디로 여호와를 찬양한다 그 말씀입니다. 다윗이 여호와를 찬양하고 싶은 심정으로 불붙어서 그렇게 다른 네가지 표현으로 나온 것입니다.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시인이 찬양을 하고 난 다음에 두가지 중요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첫째는 여호와가 응답하셨다고 합니다. 둘째, 여호와가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다고 합니다. 즉 모든 역경과 고난에서 승리하게 하셨다 그 말씀입니다. 우리가 찬양을 하면 여호와는 응답하십니다. 우리 인간은 역시 누가 칭찬을 하면 그것이 사실에다가 조금 보탰더라도 사실과 약간 거리가 멀다하여도 몸둘바를 모르고 좋아합니다. 인간이 칭찬을 듣기 좋아하듯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칭송하는 찬송을 무척 아니 제일 좋아하십니다. 인간을 만드신 것도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 위해서 만드셨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께 찬미를 돌리면 우리 하늘아버지께서는 몸둘바를 모르시고 좋아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내안에 있을 때에만 우리는 비로서 찬송하게 된다고 합니다. 저는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주님이 내안에 계실 때 우리는 기뻐서 찬송하게 됩니다. 그러나 설령 예수님이 내 밖에 계시더라도 그래서 심정이 캄캄하더라도 우리가 찬송을 하면 주님께서 그 찬송을 들으시기 위해서라도 우리 안에 오시지 않겠습니까? 오시기만 하겠습니까? 그 찬송을 들으시고 내 영혼의 깊은 간구와 마음의 소원을 꿰뚫어 보시고 우리의 갈급한 영혼을 만족시켜 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세상사와 무관한 무감정하고 무감동하시며 무관심하셔서 하늘 저기 구름 건너편 저쪽에 앉아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팔짱끼고 우리 시시한 인간 일에는 개입하지 않으시는 희랍적인 나몰라라신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함께 아파하시고 우리가 기뻐하면 함께 그 즐거움을 나누시고 우리가 찬송부르면 만사제쳐 놓고 우리 마음가에 오셔서 우리의 찬송을 기뻐들으시는 인간적인 너무도 인

간적인 정이 풍부한 우리의 찬송에 아주 sensitive 하게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찬송을 부르면 하나님께서는 설령 어디에 멀리 출장가셨더라도 그것을 취소하고 우리의 찬송을 기뻐 열납하시기 위해 우리 영혼속에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찬송을 들으시면서 흡족해하시고, 생의 놀라운 기쁨도 주시고 선물도 주시고, 붙잡아도 주시고, 만약 어떤 곤란을 당해 어떤 시련을 당해 찬송을 부르면 오늘 본문 말씀처럼  모든 어려움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고, 찬송부르는 이에게 힘을 주시고, 그 힘을 주셔서 이기게 하시고 승리의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찬송을 듣고 한번 축복해 주시기로 맘먹으시면 찬송하는 자가 도무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은혜의 소낙비를 내려 주십니다. 많은 찬송하는 자가 이를 체험했습니다. 다윗도 체험하였고 파니 제이 크로스비도 체험하였고 바로 저와 여러분도 체험하였고 체험하고 있고 더욱 더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6.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 우리는 우리의 좋으신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찬송을 좋아하시는 주님의 내면을 잘 알게 될 때 우리는 찬송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찬송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할 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축복하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하십니다. 우리가 적어도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하는데 찬송을 즐기시는 하나님께서 찬송하는 이로부터 절대 멀리 떠나계실 리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22 편 3 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뿔이 달린 송아지 제물보다는 찬송을 기뻐하신다고 하였고 시편 69 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찬송 속에 거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우리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미리 간파하고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시편 150 편을 포르테시시모로 강하게 피날레를 날렸습니다. 우리가 확실히 알아두어야 할 일은 우리가 찬양하면 하나님도 기뻐 하시고 찬양부르는 우리도 좋고 찬양을 듣는 이들에도 좋습니다.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찬송을 가까이하면 생의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찬송을 부르세요, 찬송을 부르세요,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찬송을 부르세요”, 이 복음성가를 지은 사람은 분명 찬송함으로 놀라운 일이 생겼던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상한 힘과 영감이 찬송을 부를 때 생깁니다. 찬송을 부를 때 기분이 좋아집니다. 찬송을 부르면 존재에의 용기가 생깁니다. 믿음도 생깁니다. 삶이 달라지고 있음도 느낄 수 있습니다. 찬송을 부를 때 삶이 살아볼만한 가치와 희망으로 물결치고 있음도 느낄 수 있습니다. 찬송을 부를 때 우리 몸에 좋다는 베타 엔돌핀도 증가합니다. 이 베타엔돌핀이 증가할 때 뇌에서 인체에 전혀 해가 없고 유익만 되는 20 가지 모르핀과 같은 약이 쭉쭉  스프링 쿨러와 같이 돌아가 우리 온 몸, 뼈와 살 마디마디에 흘러내려 우리의 기분을 좋게할 뿐 아니라 노화를 방지하고 자연치유력을 높여주고 암세포와 같은 파괴적 세포를 제거해 주는 뛰어난 약리적 효과를 증대시킵니다. 이 말은 제 얘기가 아니라 기독교인이 아니면서도 자신의 쓴 의학서적인 “뇌내혁명” 통하여 창조주의 신비를 전하는 하루야마시게오 박사의 주장입니다.


7. 찬송의 능력을 삶속에 접속시킵시다.


얼마전에 중고자동차를 한 대 샀습니다. 제일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그 중고차 안에 꽤 여러 가지 기능이 있다는 것을 자동차를 산지 한달후에 함께 동승한 친구를 통해 알았습니다. 무슨 단추를 누르면 갑자기 차가 순간적으로 파워를 발휘하여 언덕길에도 지가 혼자 잘 올라가고 또 어떤 단추를 누르면 엑셀레타를 밟지않아도 지가 알아서 똑같은 속도로 갔습니다. 야, 단추하나가 굉장한 역할을 하는구나, 여러분 찬송의 능력도 그렇습니다. 찬송의 능력을 사용하면 우리 삶은 가속력을 가지고 신나게 달릴 수 있습니다. 찬송이 지닌 승리의 능력을 사용하면 우리 삶은 굉장한 파워를 가지고 전진하기 시작합니다. 찬송의 능력은 우리 삶을 강하게 합니다. 튼튼하게 합니다. 질적으로 향상시킵니다. 삶이 격조있게 되고 풍요로워집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찬양의 능력을 그 삶에 접속하지않은 사람은 참으로 안타까운 사람입니다. 그 삶에 활력이 없습니다. 고난이 닥쳐와도 이를 극복하는 힘이 없음으로 쉽게 좌절, 실망합니다. 찬송이 없는 생활은 distress, depression, disease, 이 3 D 에 쉽게 빠집니다.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찬송이 없는 생활은 10 년 신앙생활 나무아비타불이 되어 그 영혼은 엉겅퀴와 가시덤불의 온상이 됩니다. 유혹의 뱀이 다가와도 뱀이 하는데로 내버려두어 될데로 데라는 심정으로 살게 됩니다. 언젠인가 저는 운전면허를 딴지 얼마 안되어 자동차를 몰고 LA로 신나게 달렸습니다. 면허증도 있겠다, 차도 있겠다 FREE WAY를 규정속도를 꼭 안넘었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밟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캄캄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밤에 운전해보기 처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속 85 마일로 가는데 커브길이 나타나면서 갑자기 큰 공룡같은 트럭이 함께 커브를 돌면서 내 차를 덮쳐버릴 것 같이 다가왔습니다. 당황하니까 시야가 더욱 캄캄해지면서 내가 지금 어디로 핸들을 틀어야 하는지 순간 판단력이 제로가 되었습니다. 어찌해야 좋을 지 몰랐습니다. 한쪽 코너로 그 거대한 트럭은 나를 압사시켜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이제 가는구나”, 그 생각이 스치는 순간 저는 어떤 한 복음성가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주님여, 이손을 꼭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그런 내용의 복음성가입니다. 내가 그 위기일발의 순간 내가 노래를 불러야 하겠다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언제 어느새인가 나는 그 복음성가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부른 것이 아니라 제대로 표현하자면 그 노래가 내 입에 내려앉은 것입니다. 그 노래 일절을 다 부르기도 전에 평탄한 넓은 길이 나타났고 나를 부수어버릴 것 같은 그 공룡같은 트럭은 어느새 저만치 앞서가서 오히려 어두운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빛이 되어 주었습니다. 맨먼저 운전대를 잡은 손을 느꼈습니다. 상당히 운전대를 꼭 잡고 있었고 부여잡은 두손은 상당히 뜨거운 듯한 느낌을 가졌습니다. 그 위기를 벗어난 직후 어떻게 그 노래가 갑자기 떠올라 부르게 되었는지 또 내가 그 노래를 어디서 배웠던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부터 약 4 개월전에 카톨릭수녀원에서 3박4일간 무슨 영성훈련인가를 받으면서 여러번 반복해서 불렀는데 그것이 내 안의 어디엔가 저장되어 있다가 “이제 가는구나” 생각하는 바로 그순간에 내 마음과 입술속에 뛰쳐나왔습니다. 그 영점 몇초도 안된 순간에 뭔가가 일어났음에 분명하였습니다. 저는 그때 그 생각을 하며는 그  전광석화와 같은 순간 내 입술에 노래를 얹어 주시고 흑암속 내 앞길을 빛으로 열어주신 것은 꼭 어떤 우연이 아니라 이 손을 꼭잡고 가신 분이 있었다고 분명히 믿습니다. 저는 그 경험을 통해서 저는 시편 34 편 오늘 본문에 있는 그대로 “찬양하는 자에게 여호와께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다윗의 고백은 내 실존적 상황속에서 나의 것이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주님은 정말 필요한 때에 우리 영혼에 노래를 얹어 주시는 분임을 실감하였습니다.

8. 인생의 그 어느때든지 우리 삶을 찬송으로 채우자.


저는 지난해 한국일보에서 가슴아픈 기사를 읽었습니다. 어떤 KOREAN-AMERICAN이 미국정부의 관리로 일하다가 심한 디프레션으로 생명을 스스로 끊었다는 보도를 일었습니다. 글쎄 얼마나 그 사람이 얼마나 고통을 당했으면 그런 결정을 했을까? 참으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분도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했다던데 그 분이 들어갔던 그 절망의 깊이를 그 어떤 자가 있어서 잴 수 있을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문화는 영혼의 깊은 친교를 나눌만큼 침투하지 못하는 것일까? 참으로 그가 영혼의 어둔 밤을 경험할 때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에게 무엇이었을까? 가슴아팠습니다. 사실 이만큼이야 하겠습니까만은 우리들은 여러 가지 고통을 안고 삽니다. 우리 인생에는 푸른 풀밭도 적지 않지만 험한 골짜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많이 있습니다. 정들면 고향이라지만 이곳에서 살다보면 문화적 이질감, 정서적 다른 곡선 등으로 어딘지 모를 타향에서 헤메고 있는 듯한 느낌으로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스트레스가 가득 쌓여 있지만 어디에다 풀 수 없는 때도 있습니다. 무엇인가 문제에 쌓여 돌아버릴 것 같은 때도 있습니다. 분노와 증오로 우리 삶의 평정을 잃어 버릴 때도 있습니다. 세상의 욕망은 채워졌지만 그래도 뭔가 허전하고 공허한 마음 때문에 견딜 수 없는 때도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도 없이 억울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우월감으로 하늘찌를듯하다가도 어떤 때는 열등감으로 비전직하하여 감정의 텀블링을 주체할 수 없는 때도 있습니다. 바로 이 때가 중요한 때입니다. 바로 이때가 찬송이 지닌 놀라운 능력을 여러분 삶속에 접속시킬 때입니다. 제가 미국에 온 것은 지난 2 월이니까 이제 16 개월이 다 되어 갑니다. 저는 여기서 혼자 생활하면서 “공부하고 밥먹고 잠자고 하는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문화적으로 정신적으로 토양이 전혀 다른 이곳은 우울증(디프레션)이라는 그물에 걸리기 너무도 딱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공부하는 많은 학생들 중에서 그런 경향성을 가진 이들을 많이 만나 고통을 호소해서 함께 기도하곤 했습니다. 저도 가끔 어떤 어두운 영이 나를 사로잡으려할 때 자꾸 부정적으로 생각이 나를 사로잡으려고 할 때 저는 곧바로 하는 일이 있습니다. 제 책상 오른쪽에 찬송가와 복음성가를 펴놓고 한가지 노래를 계속 반복해서 부릅니다.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내 영혼에 햇빛비치니 주 영광찬란해 이세상 어떤 빛보다 이 빛 더 빛나네” 반복해서 부르다 보면 내 속에 있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내 속에 있는 우울한 생각들이 내 속을 사로잡으려 하는 어둔 영들 썩 좋지 않은 느낌들이 어느새 사라지고 마음의상태가 평화롭게 정리되어 있는 것을 느낍니다. 사실 햇빛은 우울증 환자에게 좋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이렇듯 평정을 잃어버리고 어둠의 생각들이 침투해올 때 바로 이때가 우리 안에 있는 찬송의 능력을 되찾을 때입니다. 찬송가 262 장에 있는 그대로 “이 떄라 이때라 주의 긍휼받을 때가 이때라” 그렇습니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갈 때, 찬송을 불러야 할 때입니다.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불 때도 찬송, 바로 찬송을 불러야 할 때입니다. 내 짐이 점점 무거워질 때, 바로 이때가 찬송을 부를 THE VERY RIGHT TIME입니다. 이 광야같은 세상에 늘 방황할 때도 찬송을 부를 수 있는 가장 좋은 때입니다. 죄짐을 지고서 곤할 때도, 여러분의 삶이 비바람이 칠 때와 물결 높이일 때도 이 때보다도 찬송을 불러야할 더 좋은 때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그 어느 때든지 오히려 즐거운 때 보다도 환란과 풍파 한가운데 있을 때 그 위기의 때를 찬송으로, 찬송의 힘으로,  찬송의 승리의 능력으로 짱짱하게 채우시기를 진실로 바랍니다. 저는 눈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인데 언젠가 영화 한편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독일 나치에 이스라엘인들이 줄줄이 묶여 잡혀가면서 그들은 히브리어로 어떤 노래를 부르면서 갔습니다. 귀에 익숙한 노래여서 찾아보았더니 어린이 찬송가에 나와 있었습니다. 이런 가사였습니다. “밝은 빛을 따라서 앞만 향해 나가자 내 마음을 지키며 앞만 향해 나가자 주와 함께 걸으면 걱정할 게 무어냐 갈 길 멀고 험하여도 노래하며 나가자” 하나님신앙을 가진 그들은 독일군에게 잡혀가거나 투옥되거나 가스실에 가서 죽기전에도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스라엘 신앙인들에게 찬양은 이 땅에서만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그 찬양은 환난 저 건너편 죽음 저너머에 까지 하나님의 능력이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찬양은 꼭 이 땅에서 내게 유익과 능력이 있다해서 부르는 것만이 아닙니다. 존귀와 찬양과 영광을 주께 돌리는 것은 피조된 인간존재의 서있는 본질적인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찬양이 현세의 내 삶에 어떤 유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찬양을 드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찬양의 삶이야말로 인간의 제일되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꼭 찬양이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 땅에서 찬양이 세속적 능력이 없어 보인다할지라도 내 앞에 곧 죽음이 닥쳐온다하더라도, 환난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바로 이스라엘인들의 신앙처럼 죽음 앞에서도 끝까지 하나님 신뢰를 저버리지않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런 성숙한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설령 죽어, 우리가 우리의 존재형태를 달리하여 존재할 때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주님만을 찬양했던 우리 영혼을 하나님께서 고이 고여 주시지 않겠습니까?


8. 찬양의 에이젼트로서 헌신을 다하자


저는 오늘 예배를 드리는 훼어필드 중앙교회 여러분들이 하늘의 기쁨을 여러분의 믿음으로 전하는 찬양의 에이젼트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냉전시대의 소련의 케이지비 요원과 미국의 시아이에이 유능한 요원 하나는 서로 상대방의 3 개 기갑사단 탱크부대와도 안바꾸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에이젼트들은 엄청난 파괴력이 있었습니다. 객관적 전력으로는 질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에이젼트들이 적진에 들어가서 007 산더볼작전으로 완전히 분위기를 바꾸어 결국 승리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나는 훼어필드 교회가 모두가 승리하는 에이젼트가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 당백 1 당천의 찬양의 에이젼트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넘쳐흐르는 찬양의 활기를 교회와 가정과 만나는 사람마다 그리고 내 영혼 속에 불어넣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 주시는 찬양의 능력을 끌여들여 여러분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바꾸고, 찬양의 능력을 끌여들여 여러분의 가정의 환경을 바꾸고, 찬양의 능력을 끌여들여 자신과 맺고 있는 모든 인간관계를 바꾸고 특별히 찬양의 능력을 끌여들여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교회를 온통 통채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교회로 바꾸는 찬양의 일급에이젼트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막과 같은 이 세상에 여러분은 찬양의 능력을 끌여드려 사막을 푸른 풀밭과 맑은 시냇가로 만들고 찬양의 능력을 끌여드려 온갖 못된 악령을 쫗아내며,  찬양의 능력을 끌여드려 모든 죄악의 쇠사슬과 옥문을 열게 하며, 찬양의 능력을 끌여들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능력가운데서 어디가나 무얼하나 승리하는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그런 찬양중앙 훼어필드 교회로 여러분의 교회를 더욱 아름답게 더욱 능력있게 더욱 기쁨있게 만들어 가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훼어필드 교회 교인 하나는 다른 교회 교인 3 개사단과도 바꿀 수 없는 그런 찬양의 에이젼트가 되시기를 진실로 바랍니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저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저희에게 이전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고 사모하는 심령으로 저희의 빈 마음을 채워 주시옵소서. 주님을 사랑하기에 이전보다 주님께 더 찬양하고 성시와 찬송가와 영가를 부르며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살게 해주십시오. 이 교회 김 원석 목사님과 교인들이 하나가 되어 주님께 찬미하고 더욱 주님께 영광돌리는 일로 주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채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03 20:59:55 총무 칼럼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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