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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태진


교회안에서 여신도와 바람직한 여신도 지도자

관리자 (광주남노회,작천교회,목사) 2010-07-02 (금) 13:15 13년전 2692  

성경본문 : 마태복음 13장 13절

오늘 성경본문은 마태복음 13장 33절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입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33절에는 많은 개념들이 들어 있습니다.

1. 비유 2. 천국 3. 여자 4. 가루 서 말 5. 누룩입니다. 하나하나씩 보겠습니다.

첫째,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말할때는 거의 비유법을 사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비유란 헬라어 원어로는 “파라볼레”인데 이는 “나란히 던져놓고 비교해본다”는 뜻이 있습니다. 천국은 이거다 저거다 말할 수 없고 단지 그 비슷한 것을 비유를 통해서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땅에 있는 그 무엇을 통해서 비교함으로써 천국의 실체를 단지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둘째, 천국입니다. 여기서 천국은 하늘의 천국이 아니라 땅에 이루어지는 천국입니다. 예수님께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주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진다면 그 땅은 땅이지만 천국이 됩니다. 찬송가 중에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곳은 그곳이 하늘이 되었던 땅이 되었든 내 맘속이 되었든 그곳이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셋째, 여자입니다. 여자는 마태복음 13장 33절 예수님의 비유의 중심 속에 있습니다. 여자가 밀가루 서 말 속에 누룩을 갖다 넣어 밀가루 반죽을 부풀게 한 장본인입니다. 만일 이 비유에서 여자가 없다면 밀가루 서 말에다가 물을 부어 반죽을 만들지도 못하였을 것이요 누룩을 갖다 넣어 반죽이 부풀게 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반죽이 부풀어 올랐을 때 그것으로 구워 빵을 만들어 가족들에게 먹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천국의 비유를 하면서 “천국은 마치 남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을까? 물론 예수님 당시 팔레스틴에서도 여자가 밀가루 반죽해서 거기다가 누룩을 넣어 부풀게 하여 빵을 만들어 가족들에게 먹이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화법이 독특합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그렇게 서두를 말함으로써 여자를 무척 강조하고 있습니다. 천국과 관련되어 있는 여자는 여신도입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어떤 깊은 뜻이 있으리라고 봅니다.

넷째, 가루 서 말입니다. 이는 아직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상태의 어떤 사람의 모임이나 공동체를 말합니다. 가루 서 말은 한 가정을 상징할 수 있고 한 공동체, 즉 교회나 일터이거나 아니면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에 사는 우리나라이거나 온 세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 그것이 비록 가정이라는 적은 세상일 수도 있고 온 세상일 수도 있습니다.

다섯째, 누룩입니다. 누룩이란 효모로서 비록 조그마한 것이지만 그것이 밀가루 반죽속에 들어가면 밀가루 반죽 전체를 변화시키는 변화의 촉매입니다. 누룩은 밀가루 서 말에 비교해보면 그 양에 있어서나 그 크기에 있어서 엄청나게 적지만 밀가루 반죽 속에 들어가면서 자신의 존재는 없어지면서 반죽 전체를 변화시키는데 그저 물리적 변화가 아닌 화학적 변화를 일으킵니다. 누룩이 들어 갔을 때 누룩은 아주 조용하게 소리를 내지 않고 누룩 바로 옆에 있는 밀가루 반죽을 변화시켜나갑니다. 만약 누룩이 10그램이 들어갔는데 매 1분마다 자기 몸무게만큼 변화시켜 나갔다고 하고 변화된 만큼 그 양이 변화의 매체가 되어 변화시켜 나간다고 가정하면 1분에 10그램을 변화시키면 2분이 되면 20그램을 변화시킵니다. 3분이 되면 40그램 4분이 되면 80그램 5분이 되면 160그램 6분이 되면 320그램 그렇게 기하급수적으로 변화시켜나가는데 어느새 밀가루 반죽 전체에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누룩은 밀가루 전체를 변화시키고 난 다음에 자신의 존재는 형태도 없이 무게나 성질도 없이 모두 없어지지만 그러나 밀가루 전체는 이미 변화된 상태에 있게 됩니다. 누룩은 변화시켜 나갈 때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나는 말이야 누룩인데 내가 지금 밀가루 서 말을 변화시켜 나가고 있어! 내가 저점 없어져가고 있는 대신에 보시오 얼마나 많은 밀가루 반죽들이 변화되고 있는지를!” 하고 동네방네 광고홍보 선전하면서 나발을 불면서 변화시켜 나갑니까? 아닙니다. 조용히 자신의 몸무게를 줄여나가면서 자신의 형체는 마침내 보이지 않으면서 전체 밀가루를 완전히 변화시켜나가지만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그렇게 합니다. 누룩이라는 존재는 전혀 들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누룩을, 밀가루 서 말을 갖다 넣은 여자의 이름이 드러납니까? 전혀 들어나지 않습니다. 그저 이름은 없고 ‘여자’로만 되어 있어 전혀 익명성이 강조됩니다.

여섯째, 여자와 누룩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가만히 살펴보면 여자가 누룩을 넣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누룩은 ‘여자가 가지고 있는 누룩’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자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누룩으로 천국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 누룩이 여자가 손에 쥐고 있는 누룩인지 여자 속에 있는 내면화된 누룩인지 분간할 수 없지만 여자와 누룩은 둘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가! 하셨을 때 바리새인과 누룩이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처럼 여자가 지닌 누룩이라면 여자와 누룩은 분리되어 있는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비유가 지시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여자를 여신도들이라고 해도 무방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은 자가 천국을 만들어가는 누룩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신도들이 밀가루 서 말과 같은 가정 속에서, 교회에서, 직장과 일터에서, 여신도회에서,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한국교회에서,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이 나라에서 누룩이 되어 없어지면서 변화시키는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작은 천국을 만들어간다 그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비유를 오늘의 현실로 끌어온다면 과연 오늘 여신도회 여러분들은 예수의 누룩이 되어 밀가루 서 말과 같은 공동체를 변화시켜 나가고 있는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여자”입니까? 교회 안에도 여러 여자들 즉 여신도들이 있습니다. 여신도들이 많지만 모든 여신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이 각각 다릅니다. 저는 지금까지 12교회를 섬기며 수많은 여신도들을 만났습니다. 그 수많은 만남 속에서 여신도들을 나름대로 크게는 세 가지 유형으로 세부적으로는 여섯 가지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한번 나는 그중에서도 어떤 양식인지 한번 나름대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크게 세 가지는 첫째 누룩 없는 여신도형입니다. 둘째는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이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누룩의 여신도형, 그리고 셋째는 예수 누룩의 여신도형입니다.

첫 번째 누룩 없는 여신도형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교병형 여신도들입니다. 누룩 없는 빵은 맛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에도 누룩 없는 무교병이라는 빵이 있습니다만 이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고난을 생각하면서 유월절이라는 절기에 먹는 빵입니다. 고난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기억하여 먹는 빵이니 얼마나 맛이 없겠습니까? 교회 안에서도 무교병과 같은 여신도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존재하고 있어도 주변에 눈꼽만큼도 털끝만큼도 손톱만치도 변화를 주지도 못하고 변화가 일어나지도 않는 여신도들입니다. 백날 교회만 왔다갔다 하지만 생활에 있어서는 일점일획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그렇다고 남을 변화시키는 촉매도 되지 못합니다. 습관적으로는 신앙생활을 하고 종교생활을 하고 있지 자신이 크게 변화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주변의 이웃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변화되지도 않습니다. 언제나 그때 그 자리인 것입니다. 이 무교병형 여신도들은 다시 두 가지 형으로 나누어집니다.

1) 하나가 바로 “넌 너 난 나형”입니다. “넌 너 난 나형”은 “너는 너고 나는 나다” 그런 의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예수 믿고 내가 구원받아 천국 가는 것이지! 너와 내가 만나 ‘우리’가 되어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예배만 싹드리고 축도가 끝나고 반주가 나올 때 얼른 나와버립니다. 성도들 간에 어떤 교제를 나누지 않고 또 여신도회도 참여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세상에 나아가 무슨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생활을 하여 주변에 어떤 영적인 영향력도 끼치지도 못하고 끼치지도 않습니다. 전도를 하라고 무슨 이슬비 편지나 전단지룰 주어도 그때 당시는 받아는 놓지만 집에 심방을 가면 그냥 쌓여 있을 뿐입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꺼림직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이 싫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고 내 종교적인 의무를 끝냈다고 하는 식입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전혀 주위의 성도들에게 그리고 자신이 사는 처소나 이웃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지 않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끼치지 않고 삽니다. 창세기 6장 25절에서 27절에 나오는 므두셀라가 이런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므두셀라는 969년이나 살았지만 10세기를 걸쳐 살았으면서도 누구에게도 어떠한 영향을 주지 못하고 갔습니다. 그는 구백유십구세를 살고 죽었더라! 그렇게만 쓰여 있습니다. 이 형은 무교병형 중에도 “넌 너 난 나형”입니다.

2) 누룩 없는 여신도형 중에서 다른 하나가 “세상 좋아형”입니다. 이 “세상 좋아형”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identity)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어디로 가든지 특별히 해악을 끼치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지 만 그가 그리스도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세상에서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잘 지내고 세상 사람들 앞에서는 예수 믿는 티를 전혀 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술 마시면 같이 마시고 고스톱치면 같이 치고 속칭 남을 씹으면 자기도 똑같이 씹고 교회만 다닌다 뿐이지 예수에 속한 사람이란 것이 눈꼽만치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물에다 술을 탔는지 술에다 물을 탔는지 그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여신도형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찬송을 잘 부르고 예배를 잘 드리고 할렐루야 아멘도 잘하지만 세상으로 돌아가면 세상의 똑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삽니다. 혹 <투캅스>란 영화를 보셨습니까? 거기에 안성기와 박중훈이 형사로 짝을 이루어 나옵니다만 안성기는 교회에 가서 예배도 잘 드리고 십일조와 감사헌금도 잘 내고 목사가 설교를 하면 아멘도 크게 잘 외치고 목사 입장에서는 더 이상 그럴 수 없이 좋은 교인이지만 세상에 나가면 온갖 부정과 비리를 다 저지르고, 특별히 뇌물을 좋아하는 형사입니다. 세상도 좋아! 교회도 좋아! 세상과 교회 사이에서 교회에서는 교회 방식으로 세상에서는 세상방식으로 하나도 갈등 없이 잘 하고 있습니다. “세상 좋아형”은 이방원의 사고방식을 가졌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대충 적당히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때론 세상에 이렇게 섞이고 때론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지만 그 둘 사이에 어떤 갈등도 느끼지 아니하고 좋아좋아! 하면서 잘만 삽니다. 디모데후서 4장 10절에 보면 데마란 사람이 이런 사람입니다.

데마란 사람은 어느 때는 사도 바울을 좋아하여 그를 따르다가 또 이 세상 제 세셍 다니면서 전도하러 다니다 보니까 세상도 좋아서 사도 바울을 버리고 세상으로 갔습니다.

두 번째 누룩 있는 여신도형인데 그 누룩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해로운 누룩을 가진 여신도들입니다. 첫 번째 유형이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여신도형인데 비해 두 번째 여신도형은 영향을 끼치긴 끼치되 부정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형입니다. 누룩이 있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누룩도 어떤 누룩이냐가 문제입니다. 누룩이란 다시 말해서 곰팡이인데 곰팡이가 몸에 이롭고 좋은 곰팡이가 있고 몸에 해로운 곰팡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하였을 때 그 누룩은 한마디로 나쁜 영향력을 끼치는 해로운 누룩입니다.

1)해로운 누룩 중에서도 “싸움왕초형”의 여신도가 있습니다. 곰팡이 중 무좀균은 일종의 곰팡이입니다만 이 곰팡이는 몸에 들어가면 가렵고 혈액을 타고 들어가 내장과 뇌에도 들어가 몸을 결정적으로는 상하게 하는 곰팡이입니다. 이 곰팡이는 몸 안에 있는 백혈구들과 싸워 무수히 많은 백혈구들을 죽이고 곳곳에 자기 깃발을 꽂아 놓습니다. 싸움 왕초형의 여신도는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여신도회에서나 마치 쌈닭과 같이 파괴와 비참함을 남깁니다. 자기를 알아주지 않으면 기어이 찾아가서 해꼬지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여신도가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좌충우돌합니다. 가는 곳마다 분쟁을 만들어내고 대립전선과 원한의 삼팔선을 만들어냅니다. 교회 안팎을 돌아다니면서 입술과 혀로 이간질하고, 없는 말 있는 말 다 지어내어 흑색선전하고, 덮어 주어야 할 것을 발기발기 찢어내고, 자기 돈 쓰면서 자기 발로 걸어다니면서 온갖 스캔들을 다 들추어내며 성도들의 허점, 단점, 결점, 약점을 침소봉대하여 떠들고 다닙니다. 이 사람이 구역에 있으면 구역이 서로 싸움판이 되고 이 사람이 신도회로 가게 되면 신도회가 갈라지고 이 사람이 어디를 가든지 교회 안에서 분쟁과 싸움이 일어나고 그 여신도 때문에 쑥대밭이 되고 맙니다. 어떤 신도들은 그로 인해 상처를 받아 “목사님! 저는 목사님도 사랑하고 성도들도 사랑하지만 그 사람 때문에 여기서 신앙생활 하지 못하겠어요!”하고 그 사람이 없는 다른 교회로 옮기게 됩니다. 참으로 교역자의 기도제목이 되는 여신도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 사람을 보고 “저런 것이 교회 다닌다고 나는 저런 것 때문에 교회 안 나가! 교회 나가 저 사람 닮을까 무섭다!” 전도를 가로 막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면서 저 잘난 맛에 열심히 교회 다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가는 곳마다 암흑의 지옥을 만들어 갑니다.

2)해로운 누룩 중에서도 “변질부패형”의 여신도가 있습니다. 싸움왕초형의 여신도형이 부단히 교회 안에서 싸움과 분란을 일으킨다면 이 여신도는 여신도들 가운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데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 철학으로 이단 사설로서 교묘하게 신도들을 변질시켜 나가는 여신도형입니다. 이 유형은 결코 싸움을 하지 않고 여신도들을 자신의 사람으로 포섭해갑니다. 그야말로 교회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돈과 물질로 포섭하든지 중심에는 세상의 철학인데 거기다가 겉만 교묘하게 기독교 신앙의 색칠을 하여 포섭하든지 아니면 사이비 이단 사설을 들고 들어와 성도들을 포섭하여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자기는 교회 안에서 영주와 같이 행동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여 될 일도 안 되게 하고 안 되어야 할 일도 되게 합니다. 그래서 교역자들이나 교회에서 직분을 맡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그 사람의 눈치를 보아야 합니다.

요즘 신천지라는 이상한 이단들이 교묘하게 교회에 들어옵니다. 신천지의 핵심세력들이 각 교회에 들어와 무척 교역자에게 순종하는 신도와 같이 굴고 나중에는 구역의 말씀 인도자가 되어 이상한 이단사설을 성경을 빙자하여 가르치고 결국 그 구역을 장악하고 신도회를 장악하여 신천지 식구들을 만들어 지옥의 자신들로 만들어냅니다. 이 유형이야 말로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누룩입니다. 마태복음 16장 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여기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이라 하였을 때 바리새인과 누룩, 사두개인과 누룩은 일체화가 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돌아다니면서 하는 일이 누룩과 같은 일인데 어떤 누룩입니까? 마태복음 23장 15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세 번째 누룩 있는 여신도형인데 그 누룩은 바로 천국을 만들어 내는 예수의 누룩을 가진 여신도들입니다. 이 여신도형은 자체가 누룩이 되어 들어가는 곳마다 빵이 만들어지고 요구르트가 만들어지고 된장과 청국장이 만들어집니다. 이 여신도형은 그야말로 예수님의 누룩이 되는 형입니다. 마태복음 13장 33절 말씀을 다시금보겠습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이 유형은 자신이 누룩이 되어 점점 적어지다가 없어지지만 그 공동체의 반죽은 부풀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복음으로 감화된 여신도가 가는 곳마다 긍정적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형입니다. 이 유형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예수님의 누룩 중에도 그저 소극적으로 있지만 주변은 영향을 받는 “은밀 누룩형”의 여신도가 있습니다. 이 유형은 여신도가 나서거나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조용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봉사하는 유형입니다. 기도 생활도 열심히 하고, 봉사생활도 열심히 하고, 구제생활도 잘하지만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 유형입니다. 그 사람을 알아서 이름을 내려 하면 손사래를 치면서 멀리 도망가버리는 형입니다. 믿음은 깊고 봉사활동도 즐거이 하지만 결코 앞장서지 않는 형입니다. 이 사람은 성경말씀을 열심히 읽고 기도생활도 열심히 하고 그 가슴 속에는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지만 그것을 겉으로 결코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 여신도를 보면서 참으로 이슬비와 같이 스며드는 영적인 영향을 받습니다.

“은밀누룩형”의 여신도에게서는 함부로 할 수 없는 어떤 카리스마가 있습니다. 그를 단지 바라봄으로 인해 그가 하는 일을 통해서 어떤 영적인 깊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제가 섬기는 강진읍교회에는 두 분의 권사님이 계신데 제가 교역자이지만 그 권사님의 모습을 보면 옷깃을 여미고 싶을 정도의 그런 영적인 향기를 풍기는 구너사님들이십니다. 그저 조용하게 신앙생활을 하지만 그분 자신이 영적인 누룩이 되어 은밀하게 그 거룩성이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2)예수님의 누룩 중에도 적극적으로 영향을 주면서 활동을 하는 “예수 누룩형”의 여신도가 있습니다. 이 유형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고 활동을 하는 것과 같이 적극적으로 자신이 밀가루 서 말 속으로 들어가서 예수 누룩이 되는 유형입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따라 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밀가루 서 말 속으로 들어가서 자신은 비로 없어지더라도 누룩이 되는 형입니다. “존귀영광 모든 궈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 찬송가의 가사와 같이 십자가는 지려고 하지만 영광은 주님께 오직 돌리는 형입니다. 은밀 누룩형은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데 비해 이 형은 이사야와 같이 주님이 누가 나를 위해서 갈꼬 할 때 제가 여기 있나이다! 하면서 적극적으로 주님의 일을 위해 나서는 유형입니다. 이 사람 역시 은밀 누룩형과 같이 그 가슴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뜨거워져 있고 성령으로 충만해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로워져 있기 때문에 주님이 보내만 주신다면 어디든지 가서 누룩이 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일을 합니다. 주를 위하여 기꺼이 죽겠다는 각오로 임합니다. 이 여신도는 로마서 12장 2절에 있는 그대로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서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면서 세상 속에서 복음을 전하고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어디를 가든지 그와 접촉하는 사람은 변화가 일어나되 좋은 쪽으로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그가 들어갈 때 뭐든지 선한 것들이 나옵니다. 메주와 된장이 만들어지고 빵이 만들어집니다. 예수 누룩형의 여신도는 어디를 가든지 그가 일하는 곳에는 그가 만나는 사람이면 괄목할 만한 변화는 아니지만 조그맣지만 바람직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가 말을 할 때나 그가 무슨 일을 할 때 그것을 보고 어떤 선한 영향력을 느끼고 가가 참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축복의 통로, 축복의 물줄기임을 감지합니다. 그와 함께 있어도 좋고 그와 함께 일하여도 좋고 그와 함께 있으면 조그마한 천국을 경험케 되는 사람이며 그런 여신도입니다. 스바냐 3장 17절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보시고 노래를 부르실 정도로 좋아하시고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누룩이 되는 여신도는 그 공동체에서 그렇게 수효가 무척 적지만 이들이 변화의 촉매가 되어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만들어 가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적은 무리들입니다.

결론입니다! 오늘 강연 제목을 “교회 안에서 여신도상과 바람직한 여신도 지도자”로 잡았습니다만 그렇다면 어떤 유형이 교회 안에서 여신도 지도자형으로 바람직한 것인지를 대강 짐작해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변해가고 있습니다. 과학과 기술이 변해가고 이에 따라 인간의 의식도 변해가고 인간세상의 풍조도 무섭게 변해 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할 주도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의 정신이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쓸어가고 변질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물질과 자본이 드디어 천하를 평정하였습니다.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있었습니다만 오늘날 21세기 자본주의만 남고 나머지는 전멸하였습니다. 물론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나라가 있기는 해도 중국이나 러시아는 껍데기만 공사주의지 실제 내면은 자본주의보다 더한 자본주의, 변형된 자본주의일 뿐입니다. 자본주의도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막스 베버에서 나오는 성서적인 정신에 뿌리를 둔 자본주의가 아니라 오늘날 자본주의는 그야말로 돈으로 돈 먹는 자본주의, 물질이 중신이 되고 자본이 주가 되는 자본주의입니다. 이런 자본주의를 퇴폐자본주의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자본주의의 가치관으로 인해 즉 물질지상주의, 자본 중심주의가 인간을 유물적인 인간, 소유지향적인 인간, 쾌락적인 인간으로 무섭게 바꾸어 가고 있습니다. 다리 말하자면 예수님이 말하는 조심해야 할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누룩으로서, 그 누룩의 영향을 받으면 갑절이나 지옥의 자식이 되는 그런 인간으로 바꾸어져 가고 있습니다.

세상이 변하니까 교회도 뒤지지 않게 변하자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과 자본주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누룩으로 인간을 좀비족으로 변하여 지옥으로 가게 하는 인간들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이런 퇴폐자본주의 물결이 넘나들어 교인 구성 대비 좀비족들이 너무도 많아져 가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물질주의의 해로운 누룩으로 물든 영혼들이 너무도 많은 것입니다. 오늘날 세기말적인 현상들이 이곳저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는 신신애라는 가수를 그저 가수로 보지 않습니다. 오늘의 현실을 고발하는 예언자라고 봅니다.

신신애가 부른 노래는 정확하게 오늘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요지경속이다!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친다! 온통 세상이 거짓으로 버무러져 있다고 세상을 고발합니다. 단지 고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 차려라 이것들아 요지경에 빠진다!”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요지경의 세상 속에서 우리 여신도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 땅의 여신도들은 참으로 교회 안에서부터 예수님의 누룩이 되어야 합니다. 내 안에 예수님의 누룩이 형성되기 위해 해산하는 수고의 기도를 하고 성령으로 충만케 해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내 안에 예수님의 누룩이 발효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나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아울러 내가 예수님의 누룩이 되어 살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먼저 예수님의 누룩이 되어 밀가루 서 말과 같은 교회 속에 들어가 교회가 참으로 이 세상 가운데 예수님의 누룩이 되게 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보면 여자가 밀가루 서 말 속에 누룩을 갖다 넣었다 하였습니다. 이 여자를 저는 오늘의 여신도 지도자로 봅니다. 밀가루 서 말은 우선은 교회입니다. 여신도 지도자들은 교회를 누룩 공동체로 만드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누룩이 되도록 여신도 지도자들이 누룩이 되어 밀가루 서 말과 같은 교회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교회가 누룩이 되지 못한다면 교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소금이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하면 세상 사람들의 발에 밟히게 될 뿐입니다. 벌써부터 그런 징후가 나타납니다. MBC가 교회를 고발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들이 약간 부풀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희망이 없으면 이 세상은 어둡게 종말을 맞이할 것입니다. 교회가 그저 종교인의 누룩,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누룩이 된다면 이 땅의 교회들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돌 위에 돌 하나가 놓이지 못할 정도로 훼파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강단에서 적극적 사고방식의 철학만을 전하고 세상에서 성공하고 형통케 되는 방법만을 알려줄 때 또한 교회가 복만 많이 받도록 하는데 치중한다면 교회는 세상 속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해로운 누룩이 될 뿐입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누룩이 되어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손해볼 줄 알고 희생할 줄 알고 오 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같이 가주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주고 저주하는 자를 위해 축복해주는 그런 천국시민을 만들어 가는 누룩공동체가 되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하고 우리 여신도들은 교회를 누룩으로 만드는 오늘 마태복음 13장 33절에 나오는 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때 교회는 희망의 공동체, 예수님의 누룩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03 20:59:55 총무 칼럼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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