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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제자들을 부르다, 나를따르라

이기영 (전남노회,,목사) 2013-06-05 (수) 12:28 10년전 7443  

예수, 제자들을 부르다, 나를 따르라        마태복음 4:18-22, 누가복음 9:57-62

-오직 바보만이-

오직 바보만이,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 하나로 세상을 바꿔보려 시도하겠지요.

그렇다면 예수야말로 바보였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보들만이 그를 추종하다가 그가 처형당한 뒤에,

그의 일을 계속할 수 있었을 거예요.

    따라서 사도들 모두 바보였다고 하겠습니다.

    그 바보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진지하게 듣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 또한 같은 바보들만이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시방 우리 모두가 바보라는 그런 말이올시다.

이는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유식한 학자가 아니라

겸손한 목수를 택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또 어부와 세리를 사도들로 뽑으셨지요.

    우리가 과연 그들보다 낫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도, 복음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과

    학력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 모두 바보임을 기꺼이 시인합시다.

그러면, 세상을 바꾸려는 시도에 마음 놓고 몸을 던질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사도들도 때로는 겁에 질리고 비굴하게 처신하지 않았던가요?

우리 또한 그들처럼 두렵고 떨리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야 말로 우리를 두려워 떨게 할 만한 사건이지요.

그래도 그분의 부활은 우리에게 초인적인 용기를 제공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I

예수는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시험을 받은 후, 사람들을 불러 제자로 삼아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나를 따라 오라고 예수는 당시 평범한 사람들을 불러 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기들의 인간관계와 생업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희망이 넘치는 메시지와 그의 치유의 능력, 그리고 그의 비폭력 운동에 매혹되었기 때문에 예전의 생활을 버리고 온전히 예수께만 헌신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혼란의 시대에는 이처럼 철저한 제자직(discipleship)을 위해 우리가 자신의 가족과 생업을 버리고 떠날 만큼 우리를 불러내는 인격적인 카리스마를 찾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런 카리스마를 가진 예수는 자신의 비폭력여정에 동행하고 자신이 죽은 후에도 사랑과 평화의 사명을 계속 이어갈 제자와 친구들을 그리고 예수의 하나님나라 공동체를 원했을 것입니다.

제자(disciple)라는 말은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왔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세례 요한과 바리새인들에게도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도 제자들을 두어, 열 두 제자의 친밀한 제자집단을 이루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70명의 많은 제자들이 보냄을 받은 것으로 나옵니다. 사도행전(6:1-7)에서는 예루살렘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제자들로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가 처음 제자들을 부른 사건은 모든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어부 형제들인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각각 부르면서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부르셨습니다. 성서학자 체드 마이어스 (Ched Myers)는 이 복음서 기자들이 여기서 예레미야서(16:16)의 말씀, 곧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우상을 섬기는 백성들, 그 믿음 없는 자들을 붙들기 위해서 어부들과 사냥꾼을 내보내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을 가리킨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예언자 아모스(4:2)와 에스겔(29:4)도 부자들과 억압자들에 대한 심판으로서 물고기를 낚시바늘로 끌어내는 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예수는 이런 전통 안에서, 제국의 군사력과 특권과 불의가 다스리는 기존질서를 변화시키기 위해 자신이 시작한 비폭력 투쟁에 가난한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그 후, 마태복음(9:9)과 마가복음(2:14)은 세리였던 마태(혹 레위)나를 따르라는 한마디 명령으로 불러냈습니다. 마태는 비록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던 로마제국의 앞잡이였지만, 예수와 함께 식사를 나누었고 그의 부름을 받아들여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누가복음(5:1-11)은 예수가 시몬을 제자로 부른 장면을 더욱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예수는 게네사렛 호수가에서 시몬의 배를 이용해서 많은 군중들에게 가르쳤으며, 나중에는 시몬에게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5:4)하고 말했습니다. 시몬과 그의 동료들이 비록 밤새도록 허탕을 치고 말았지만, 시몬은 투덜거리면서 순종했습니다. 전에 없이 고기를 잡게 되자, 그는 갑자기 예수의 현존 앞에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고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시몬에게 예수는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5;10), 그리고 그들이 배들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5:11)고 했습니다.

한편 요한복음은 베드로를 제자로 부른 사건을 맨 마지막에, 즉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고 예수가 처형되고 부활한 이후에 일어난 사건으로 묘사합니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21:18)고 말합니다. 이어서 그 본문에는 예수가 베드로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라(21:19)고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처음 서문에 뒤이어 실제로 제자들을 부른 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예수를 따라오자 예수는 그들에게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예수는 와 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다음날 예수는 갈릴리에서 빌립을 만나 그에게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1:36, 38-39, 43).

II

우리는 예수가 온갖 부류의 사람들로 제자를 삼으면서 그들에게 죽기까지 완전히 헌신할 것을 요구한 사실을 보게 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9:23).

누가복음 9:57-62에서 예수는 나를 따르라는 주제로 말씀하셨는데, 제자직의 긴급한 요구를 강조하기 위해서 예수와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 사이의 세 차례 만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 사람: 그는 예수를 자진해서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말은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 가겠습니다! 어디든지? 그게 원래의 따르는 자의 결심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는 수락도 거부도 하지 않고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합니다.

왜 예수는 이런 반응을 했을까? 여우와 새는 굴이 있고 보금자리가 있습니다. 즉 제가 휴식하고 은거할 거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자신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내 머무를 자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집이 없다는 뜻입니까? 그러나 누가복음에는 그의 어머니와 형제가 가버나움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여우라는 말은 구약에서는 암몬족의 속칭입니다. 암몬은 유대인과의 정치적 원수입니다. 여우 같다는 말은 우리 말에서도 간교하다라는 증오심을 포함합니다. 신약성서에서도 헤롯을 저 여우라고 한데가 있습니다.

새 또는 공중의 나는 새(마태)는 이방인을 표현할 때 잘 씁니다. 그것은 남이 지어놓은 곡식을 공짜로 먹어 버린다는 뜻도 있는 듯 합니다. 즉 침략자입니다. 그래서 에돔이나 로마인을 그렇게 부른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오랑케, 왜놈이란 뜻이 통할 것입니다. 하여간 둘 다 가장 싫어하는 경계해야 하는 미움 받는 상징입니다. 그러나 저들에게는 굴이 있고 보금자리도 있습니다. 그런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합니다. 얼마나 고독한자의 소리입니까? 이 말은 그의 생애를 보면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그가 어디 머리 둘 곳이 있었던가! 그 민족, 로마인 심지어 제자들에게까지 종말적 실존의 반영입니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했습니다. 너를 세상이 미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알라. 너를 미워하기 전에 나를 미워 하리라 까닭은 나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니! 즉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이 땅에 살면서도 이 땅에 삶의 거점을 두지 않고 보이는 것으로 살면서도 거기 매이지 않고, 오고 있는 미지의 미래에 밧줄을 던지며 새 천지에 상륙하려는 모험 자처럼 그런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둘째 경우는 자기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해 달라고 부탁한 사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부탁을 한 이유는 그의 아버지가 실제로 사망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르면, 큰아들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아버지가 사망할 때까지는 집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부모에 대한 이런 전통적인 감상적 순종을 배격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나라의 소식을 전하라고 말했습니다.

셋째는 둘째 경우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마태는 이것을 빼고 있습니다. 먼저하게 해 주십시오 와 같습니다.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해 주십시오. 평상시라면 얼마나 당연한 일입니까? 그런데 예수의 말씀은 다릅니다. 손에 쟁기를 집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나라에 합당치 않다. 이 사람은 아직 지금까지의 관련에 미련을 가진 자입니다. 본회퍼는 쟁기를 가지는 인간은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또 꿰 뚫어 볼 수 없는, 이제 갈 저쪽도 보지 않고 지금 스스로 할 수 있는 다음의 발을 내디딘다. 되돌아 보는 것은 그리스도교적이 아니다. 불안, 슬픔, 죄책에도 불구하고 당신에게 새로운 출발을 명하는 그분을 우러러 보는 것이 바른 자세다. 그러면 그분으로 인해서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고 했습니다.  

둘째 사람은 의무를 다하겠다는 것이요, 셋째 사람은 지금까지의 애착을 아쉬워하는 사람입니다. 가졌던 것이 아까워 다시 한번 보고 만져보고 떠나려는! 즉 정리하면, 집에 가서 식구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게 해 달라는 사람에게 하신 말씀은 예수자신의 사명이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긴급한 사명임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옛 세상이 끝날 때가 가까웠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나라가 매우 가까웠습니다. 그러므로 오로지 사명만을 생각하고 다른 일 때문에 그 사명을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예수는 칠십인 제자를 뽑아 앞으로 찾아갈 마을과 고장으로 미리 둘씩 짝지어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양을 이리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10:1, 3-6, 9)고 했습니다.

III

복음서에 의하면, 제자들은 제자의 길에서는 실제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생업을 포기하고 인간관계를 떠나 완전히 예수만을 따랐습니다. 절반쯤 제자로 산다든가, 파트타임으로 일시적으로 제자직을 수행하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전부 바치든가 아니면 제자가 아니든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는 제자들이 비폭력 운동에 가담하여 목숨을 걸기를 기대했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병자들을 고치며, 귀신들을 쫓아내며, 공동체를 세우고,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비폭력을 실천하며, 십자가를 지고, 그와 함께 깨어있고, 그와 함께 기도하며, 성만찬 음식을 나누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와 함께 죽고 다시 부활함으로써, 영원히 그와 동행할 것입니다.

예수는 자신의 비폭력 원칙에 따라 아무에게도 강압적으로 자신을 따르도록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떠나갔습니다. 마지막에는 제자들조차 모두 그에게서 도망쳤습니다. 예수의 비폭력 방식은 당시 상황에서 체포되고 처형되는 것이 거의 확실 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십자가를 향해 전진했으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고, 자신의 비폭력과 해방운동을 위해 가담할 제자들을 계속해서 찾았습니다. 예수는 곤경과 박해를 약속한 셈이지만, 수백 수천 명의 새로운 형제자매들과 풍성한 삶, 자신과 영원히 교제하는 삶도 약속했습니다. 예수는 자신을 따르며 자신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복 받을 것임을 약속했습니다.

로마제국의 군대가 예수를 붙잡았을 때, 모든 남자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네 복음서에 따르면, 단지 소수의 여자 제자들만이 마지막까지 예수에게 신실하였지만, 거리를 두고 그랬던 것입니다.

예수가 부활한 후 제일 먼저 그 여자제자들에게 나타났으며 나중에 전체 공동체에게 나타났습니다. 이 제자들은 예수의 영에 사로잡혀 예수의 이야기로 이 세상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으며 다른 사람들을 그 비폭력의 제자의 길로 불러들였습니다.

처음 3세기 동안에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죽음을 보증하는 것이었으며, 이들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고백한 것 때문에 살해 당하곤 했습니다. 세례자체가 제국의 권위에 대한 비폭력 시민불복종 행동이었습니다. 실제로, 새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곧 바로 로마군인들에 의해 처형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의 죽음은 새로운 생명을 보증하는 것이었습니다. 

IV

오늘날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오늘날도 여전히 제자의 길은 위험과 개인적인 풍파를 뜻합니다. 제자의 길은 우리의 직업적인 안전, 개인적인 안락함, 가족의 보호, 문화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하며, 비폭력을 고집하며,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공동체생활, 정의를 위한 공개적 행동, 묵상과 영성의 기도, 성만찬 축하, 그리고 생명의 하나님을 예배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 길은 실패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길이며, 명예를 잃게 되고, 실속 없으며, 외로움과 고통, 박해와 수난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길입니다. 제자의 길은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또한 경제적으로 대안적인 생활방식을 요청할 뿐 아니라, 예수가 오늘날 정의와 평화를 위한 비폭력 투쟁에서 계속해서 십자가를 질 때 우리의 삶을 포기하고 그와 동행할 것을 요구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가 나치 독일에 의해 처형되기 직전에 남긴 그의 기념비적인 저술 <나를 따르라>(The Cost of Discipleship)에서 말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들의 제자직은 편안한 싸구려 제자직(cheap discipleship)이 되었습니다. 적어도 풍요한 나라들일수록 복음서가 요구하는 철저한 제자직을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대신에 우리는 안전하게 침묵하는 교인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예수의 정신을 이어받은 제자직의 날이 무디어진 것입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이 더 이상 불법적인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합법적이며, 사회적으로 주류에 속하는 것이며, 오늘날 지배문화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주의 깊게 읽어보면, 우리의 제자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도전 받게 됩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의 비전에 의해 우리의 생활이 깨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본회퍼는 우리시대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값비싼 제자직(costly discipleship)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의 제자로서 지불해야 하는 비용을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직 참된 제자가 되지 못한 것이라고, 그는 처형되기 직전에 썼습니다.

간디의 비폭력의 길, 간디의 길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사티아그라하 진리파지입니다. 참을 지킴이고 비폭력운동입니다. 간디는 옳지 않은 것에 대해 저항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는 죽어도 저항해 싸우자는 주의입니다. 그러므로 비폭력저항주의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높여 마하트마 곧 위대한 혼이라 부르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혼의 힘을 가지고 모든 폭력 곧 물력으로 되는 옳지 않음을 싸워 이기자는 것입니다. 혼 곧 아트만은 자아의 힘을 드러냄입니다. 간디는 자기의 몇 십 년 정치투쟁의 목적은 자아를 드러냄, 곧 하나님께 이름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인도사상으로 하면 아트만은 곧 브라만입니다. 절대이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자아를 드러냄, 곧 하나님에까지 이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디의 길은 밖으로는 정치인 동시에 안으로는 종교를 즉 믿음입니다. 

V

마감의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핵무기가 넘쳐나고 인종과 계층간의 차별이 심하며 경제적인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예수를 따르는 것은 우리의 폭력문화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을 뜻합니다. 문화가 폭력을 조장할 때 우리는 예수의 비폭력을 주장합니다. 문화가 전쟁을 외칠 때 우리는 예수의 평화를 외칩니다. 문화가 성차별, 계급차별, 인종차별을 지지할 때 우리는 모든 사람의 평등성, 공동체, 화해를 요구합니다. 문화가 보복과 처형을 주장할 때 우리는 예수와 더불어 용서와 연민을 위해 기도합니다. 문화가 우리에게 성공하도록 부자가 되고 경력을 쌓고 1등이 되도록 부추길 때 우리는 그 반대편으로 달려가 예수와 더불어 자발적인 가난, 힘없음, 겸손, 고난과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원수들을 사랑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정의를 요구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을 추구하며, 병든 삶들과 옥에 갇힌 사람들을 찾아보고, 죽음의 우상을 타파하며, 군사주의에 저항하고, 소비주의를 배격하며, 인종차별을 철폐하고, 공동체를 건설하며, 칼을 녹여 보습으로 바꾸며(2:4, 미가4:3), 평화의 하나님을 예배할 것을 요구합니다. 만일 우리가 정직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사회적 실천을 감당하기 위해 애쓴다면 우리는 제자직의 날카로운 가시를 느끼게 될 것이며 복음이 생생하게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우리는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입니다. 평화의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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