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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족케 하지 말라(마태 18:5-9)

이상호 (대전노회,공주세광교회,목사) 2012-07-30 (월) 14:03 11년전 13858  

실족케 하지 말라

마태복음 18:5-9

오늘 말씀에 소자 중 하나라도 실족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실족'이라는 말입니다. 남을 넘어뜨린다는 뜻과(16:23), 혹은 남을 오해하게 만든다는 뜻(17:27)을 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남을 잘못 판단하게 하여 낭패하게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신앙적으로 남을 넘어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심방을 하면서 가족들의 과거 신앙 경력을 꼭 물어봅니다. 비록 현재는 교회 생활을 하지 않는 가족일지라도 과거에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던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러한 사람들 중에는 상당한 은혜를 체험하고 제직이나 교사 혹은 성가대원으로 봉사 생활을 하던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왜 현재는 교회 생활을 하지 않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교회 생활 중 남에게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교회를 그만두었다고 말합니다. 말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 물질로 상처를 입은 사람들, 부도덕한 행실로 말미암아 상처를 입은 사람들, 다툼과 분쟁으로 상처를 입은 사람들... 이모저모로 실족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남을 넘어뜨리는 결과는 큰 비극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이 세상은 실족케 하는 일로 말미암아 화가 있다고 했습니다. 화가 있다는 말은 단순히 이 세상에서 불행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의 말씀에 보면 영원한 불, 혹은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남에게 걸려 넘어졌든지 스스로 넘어졌든지 신앙에 실족한 결과는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때 주님 앞에 서서 남들이 나를 넘어뜨려서 신앙을 팔아먹었노라고 변명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실족케 만드는 사람도 화가 있지만, 실족하는 자 자신도 화가 있습니다. 법정에서 죄인을 처벌할 때에 주범이 있고 공범이 있습니다. 주범은 대개 범죄를 앞장서서 꾸민 사람이고, 공범은 이 범죄에 동참한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주범만 죄인이고 공범이 무죄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가끔 많은 범죄자들로부터 자신의 범죄가 사회 탓이라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그것은 가장 무책임한 말입니다. 굶는다고 모두 남의 것을 훔쳐야 되나요? 속상하다고 남에게 분풀이를 해야 됩니까? 유혹받았다고 해서 꼭 범죄에 빠져들어야만 되나요? 남들이 잘못된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꼭 내가 신앙을 버릴 이유가 됩니까? 모든 범죄의 일차적인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로마서 1:32은 분명히 말합니다. 모든 죄는 사형이다! 왜냐하면 범죄의 책임이 본인에게 있기 때문이고, 그 범죄의 상대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실족하는 사람과 실족시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주범과 공범들로 충만합니다. 국가법을 어긴 죄인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어긴 불신앙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을 신앙에서 떠나게 하는 자들이나, 이유야 어떻든지 간에 신앙에서 떠난 사람들은 실족으로 인하여 화를 당한 사람들입니다.

소자 한사람을 넘어뜨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위대한 자를 실족시키지 말라고 하지 않고, '소자' 하나를 실족시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소자란 말은 첫째로 어린 아이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둘째 의미는 어린 아이처럼 소홀히 취급되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누가복음 4:18-19에 보면, 주님이 오신 목적을 이렇게 말합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 남에게 멸시받는 사람들입니다. 비천하고, 가진 것이 없고, 대접받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곧 소자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상대해야 될 사람들은 세상에서 위대하고 명성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끔 유명 인사들이 예수 믿는 것을 대단한 것처럼 여기고 자랑합니다. 간증 집회를 했다 하면 무슨 유명한 가수요, 배우요, 전직 고관들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 믿는 것이 창경원에 원숭이 구경하는 것처럼 신기한 일인가요? 교회가 무슨 유명 인사 끌어들이는 곳입니까? 사실 우리가 진정 관심을 가져야 될 사람들은 무명하고 비천한 사람들입니다. 사마리아 성의 열 문둥이, 열두 해를 혈루로 고생하던 여인, 갈릴리의 순진한 어부들,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 베다니의 가난한 고아들 나사로 남매, 백부장의 하인, 나인 성 과부의 아들, 간질병 걸린 아들....이 주님이 만난 사람들입니다. 작은 소자 중 하나가 구원 받는 것! 그것이 주님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고관대작의 신앙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미미한 한사람 한사람의 신앙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높은 사람, 학식 많은 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설교하고,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비천한 사람 하나가 실족지 않고 신앙에 서도록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세상적으로 큰 자 넘어지는 데만 관심 갖지 말고, 작은 자 넘어지는 것에 관심을 갖기 바랍니다.

요즘은 대형화의 시대입니다. 대형화 시대에 작은 자들은 멸시와 천대를 각오해야합니다. 서글픈 것은 교회조차도 대형화의 유행을 타고 있다는 점입니다. 교인들 마다 대형화에 휩쓸려서 작은 자에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습니다. 강물에 자갈 밀려가듯이 신앙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밀려다닙니다. 소자들이 실족하는지 죽어 자빠지는지 살필 길이 없습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최근에 미래학자인 엘빈 토플러의 인터뷰 내용을 들어보았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지금은 대형화가 사회 발전의 한 현상이지만 장차는 소형화 개인화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합디다. 우리가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닐 때 보다 지금은 학급당 인원이 열명 이상 줄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학급당 인원은 심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교실에는 열두 명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어떤 예배당에는 목자와 양이 대부분 안면도 모르면서 앉아 있습니다. 말세의 징조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전히 작은 자 한사람이 넘어지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교회는 마땅히 작은 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실족케 하는 원인을 없애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이 가장 좋은 신앙을 가졌다고 자부합니다. 자신이 가장 신앙적으로 옳고, 자신이 가장 신앙이 좋고, 자신이 가장 고상하고, 자신은 결점이 적고, 장점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남들은 다 잘못된 신앙을 가졌고, 잘못된 행동을 하고, 결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점이 비극의 원인입니다. 오늘 말씀에 남을 실족케 하지 말라고 하니까, 남의 얘기인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바로 지금 너희가 남을 실족시키고 있지 않느냐! 바로 지금 너희가 남을 시험에 들게 하고, 남을 유혹하고, 남의 신앙을 약하게 만들지 않았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을 넘어뜨립니다. 고의적으로 남을 넘어뜨리려고 해서 넘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행동 하나가 남을 실족케 합니다.

언젠가 모 교회 사모님이 기도 때문에 혼난 적이 있습니다. 새벽 기도 중에 기도를 하는데 자신도 모르게 크게 소리를 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목사에게 항의를 했어요. 사모님이 자기를 교회에서 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집에 와서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언제 남을 나가라고 기도한 적이 있느냐? 그랬더니 펄쩍 뛰면서 어떻게 그런 기도를 할 수가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래서 다시 물었어요. 곰곰히 생각해보라. 무슨 뜻이든지 간에 나간다는 의미의 기도를 한적이 없는가? 그랬더니 한참 생각하더니 배꼽을 쥐고 웃습니다. 최근에 취업하러 해외에 꼭 나가기를 원하시는 집사님이 계신데 비자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아서 그것을 놓고 한참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같이 웃었습니다. 좌우간 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느냐? 다음부터는 중얼 중얼 기도하고 한국말로 기도하지 말라고 부탁했습니다. 교인들 중에는 꼭 자기가 눈 똥을 자기가 밟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실족하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꼭 의도적으로 남을 넘어뜨리지는 않더라도, 무의식중에라도 남을 넘어뜨리지 않게 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 제자들에게 매우 심각한 명령을 하십니다. 성직자가 되겠다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선 제자들입니다. 남보다 위대한 자가 되고 싶어하는 제자들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구해내기 위해서 나선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남을 전도하고 남을 천국으로 인도하려고 하기 전에 할 일이 있습니다. 먼저 작은 자 하나라도 넘어뜨리지 않는 인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지도자가 되기 전에 먼저 남을 실족케 만드는 결점을 과감하게 잘라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손과 발을 잘라 버리고 눈을 뽑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결점이 많습니다. 個性이 너무 강해요. 이 개성을 요즘 아이들은 개같은 성질을 줄여서 한 말이라고 합니다. 개같은 성질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 손짓 발짓 하나하나에 남들이 실족합니다. 남이 나를 마음 아프게 한 것만 생각지 말고, 내가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을 생각하세요. 남의 눈에 티끌만 찾아내지 말고 내 눈의 대들보를 뽑아내세요. 말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하세요. 표정 하나하나를 조심해야 합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한다면 우리는 피차 넘어지고 자빠지다가 볼일 못봅니다. 실족하고 나서 남을 탓하는 사람이나, 남을 실족케 한 사람이나 각자 자신을 먼저 뜯어 고쳐야 됩니다.

손이 범죄케 하거든 손을 자르고, 발이 범죄케 하거든 발을 잘라버려야 합니다. 눈이 범죄케 하거든 눈을 뽑아 버려야 합니다. 이 땅에는 온 몸이 멀쩡하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육체가 건강해서 육체의 힘만 믿고 살다가 지옥에 간다면 차라리 병들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낫습니다. 두 손이 멀쩡해서 놀음하고 폭력을 휘두른 다면 두 손을 자르고 조용히 살다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낫습니다. 두 발이 멀쩡해서 간음하러 다니고, 강도짓 하러 다닌다면 차라리 두발 자르고 천국에 가는 것이 낫습니다. 혀가 멀쩡해서 이말 저말 남을 시험에 빠뜨리고 지옥에 가게 한다면 차라리 혀를 자르고 벙어리고 천국 가는 것이 낫습니다. 지식이 많아서 걸림돌이 된다면 차라리 백치가 되어 천국에 가는 것이 낫습니다. 실제로 그런다면 온전한 사람 하나도 없겠습니다만 그런 각오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 지체 속에 있는 모든 실족의 원인들을 뽑아내 버려야 합니다.

남을 실족케 한 사람들은 어떤 처벌을 받나요? 오늘 말씀에 보니까,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깊은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사형법에는 이렇게 물에 빠뜨려 죽이는 사형 방법이 없습니다. 시리아나 그리이스 로마의 사형법입니다. 특히 아버지를 죽인 원수, 혹은 사회의 공공 안녕을 파괴한 자를 죽일때 적용한 사형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극형을 받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무엇보다 낫다는 말일까요? 살아서 남을 실족케 하느니보다 차라리 죽어서 걸림돌이 되지 않는 것이 낫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0:28에 보면 몸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지옥 불에 던지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육체가 깊은 바다에 빠져서 죽고 영혼이라도 구원 받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을 셋으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꼭 필요한 사람, 둘째는 있으나 마나 한 사람, 셋째는 있어서는 안될 사람. 오늘 주님은 남을 실족케 하는 사람은 있어서는 안되는 사람으로 분류합니다. 존재의 가치를 상실한 신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가정도 만드셨습니다. 이웃과 이웃을 만드시고 연합하여 살도록 하셨습니다. 전쟁이나 하고 남을 죽이라고 만들지는 않으셨습니다. 강도짓이나 하고 간음하면서 불행을 만들어 내라고 인간을 만들지는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존재의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죄악 세상에 교회를 만드신 주님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우리로 하여금 이 시대에 남보다 앞서서 예수를 믿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훈련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높아지기 위한 경쟁을 벌이고, 남을 시험에 들게 한다면 신자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신자입니다.

오늘 우리는 두 가지 결심을 하고 교회를 떠나야 합니다.

첫째는, 소자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는 작은 자들의 것입니다. 목에 힘주고 다니는 자들의 소유가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은 낮고 비천하고 작은 자들을 살피는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오늘 이 교회에 어느 지위 높은 사람이 와서 앉아 있는지를 살피지 말고, 어떤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람이 와서 앉아 있는지 살피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이런 작은 자를 실족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높은 자의 눈치 보다가 낮은 자를 놓치지 말고, 가진 자를 살피다가 못가진 자를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실족케 하는 일은 무의식중에도 일어납니다. 우리의 못된 인간성 때문에 부지중에 남들이 실족합니다. 우리는 피차 자신을 살펴서 서로가 남을 넘어뜨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는 주님의 심정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서로의 신앙을 세워주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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