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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근

아낌없이 주신 사랑

박원근 (서울남노회,이수중앙교회,목사) 2011-12-10 (토) 11:35 12년전 4842  

제목 ; 아낌없이 주신 사랑

사 49:13-18, 롬 8:31-34

아들을 군대에만 보내도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리고 시립니까? 나라가 평화로운 때도 그런데, 만일 전시에 아들을 군대에 보낸다고 생각해봅시다. 이건 정말 기가 막힌 일이 아니겠습니까? 성탄절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탄절을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날이라고 경축하며, 기뻐합니다만, 하나님은 힘들고, 기가 막힌 날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사지로 보내는 날이었습니다. 죽으려 가는 외아들을 전송하신 날이 바로 성탄절이란 말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닌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가는 아들을 전송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미국에 이런 통계가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들을 전쟁터에 내보내고 근심하다가 심장병에 걸려 죽은 부모의 숫자가 전사한 군인 수보다 더 많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마음도 갈기갈기 찢겨지고 절통해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구원을 위해서였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여 하나님 자녀 삼기 위해 독생자를 사지로 내모신 것입니다. 이날이 성탄절입니다. 이처럼 망극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 생각으로는 하나님이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낼 때 얼마나 가슴이 아리고 시리셨겠나?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기꺼이 보내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증언을 들어보세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사랑하면 아까운 것이 없어요.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아까워하지 않고 다 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크기를 측정해 보길 원한다면 이런 방법으로 해보면 틀림이 없어요.

여기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단돈 몇 만원도 아까워하는데, 또 한 사람은 수 억 원까지도 아까워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 사랑의 온도 차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의인도 아닌 죄인인 우리를 위해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고 주셨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엄청난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절대적이고 무한한 사랑, 아카페라고 말합니다.

이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실감할 수 있는 예가 성경에 나와요.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제단에 이삭을 묶어 놓고 칼로 목을 치려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뭐라고 말씀하신지 아십니까?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창22:16) 성탄절 올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 시험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있어요. 그것은 후에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얘들아,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내게 바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을까를 한번 생각해 보났느냐? 내가 내 아들, 독생자 예수를 보내는 일은 그보다 더 힘들었단다. 그러나 너희를 사랑하기에 아끼지 않고 보냈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받쳤을 뿐입니다.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오신 성탄과 십자가의 죽음을 항상 오버랩 시켜서 봐야합니다. 성탄은 십자가를 전제로 했기 때문입니다. 흔히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의 증표를 교환할 때, 귀금속을 사용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하나는 값이 비싸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주고받는 이러한 증표는 잃어버리거나 사라질 수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달라요. 없어지지 않아요. 영원합니다. 예수님보다 더 확실한 사랑의 증표가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가치를 환산할 수 없을 만큼 귀하고 영원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요일3:1) 사도 바울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엡2:4)라며 탄복했습니다. 우리도 금번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에 감복해야하겠습니다. 감복해야하겠습니다. 독생자를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가 있어야 성탄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은 사람입니다. 아무 의미도 모른 채, 흥청거리는 휴일로 성탄절을 보내는 일은 공허한 일이야요. 정말 안타까운 일은 많은 사람들이 성탄을 크리스마스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X-Mas로 보내는 일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성탄절이 세속적인 쾌락과 타락의 절기로 변질되어 범죄율과 사생아 출산을 증가시키는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성탄절을 흥청거림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감사하는 절기로 보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성탄의 은총을 입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가져야할 기본적인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승리의 확신과 사랑의 헌신으로 요약됩니다. 성탄을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은 일종의 승리의 보증서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분이라면 우리의 일생을 넉넉히 책임져 주실 것을 확신해도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감격하여 외쳤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8:31-32)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고 주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범사를 책임져 주신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이 나에게 안겨주신 종합선물 세트와 같습니다. 어렵게 살던 어린 시절, 명절이나 귀한 손님이 오실 때 사다주시는 종합선물 세트, 기가 막힌 선물이 아닙니까? 상자를 열어보면 과자, 사탕, 껌, 재리, 초코렛, 비스켙 등 평소 그렇게도 먹고 싶어 했던 갖가지 선물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예수님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필요한 모든 것을 예수님과 함께 다 주십니다. 이 세상뿐만 아냐요, 내세까지도 보장해주셨습니다. 믿으십니까? 예수님을 주셨으니 이미 다 주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받았으면 다 받은 거예요. 이것을 믿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확신할 수가 있어요. 혹시 나에게 고난과 아픔이 실패와 연단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까? 누구 게나 십자가는 있기 마련입니다. 아직 최선의 때가 안 돼서, 아직은 연단이 필요해서 당분간 유보하시는 것일 뿐입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승리의 복을 주신다는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설령 우리는 낙심하고 일시 하나님을 포기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잊거나, 포기하실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독생자의 생명을 지불하고 사신 나인데, 어찌 포기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하도록 결코 방치해 두실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나서가 아냐요.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아주 당당하게 승리를 확신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8:35, 37)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근심 걱정이나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산다면 정말 창피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우리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실 만큼 큰 사랑을 가지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성탄의 의미를 안다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어찌 의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때 우리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 사랑은 몰인정하고, 강박하고, 이기적인 나를 변화시켜 사랑의 사람으로 헌신하며 살도록 만듭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고후 5:14)”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강권한다.’는 말은 ‘끌어당긴다.’는 뜻이야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그 사랑에 이끌려 우리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헌신의 사람으로 재탄생시켜줘요.

하나님의 사랑은 마치 자석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자석은 아무 것이나 끌어당기지 않고 쇠붙이만 끌어당겨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그래서 예수님의 성탄과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그 역시 하나님의 사랑에 이끌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낌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격하는 사람은 자기도 아낌없이 자신을 하나님께 받치는 헌신적인 삶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앞두고 한 여인이 그 사랑에 감복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마리아가 300데나리온이나 하는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닦아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돈은 노동자가 일 년 동안을 쉬지 않고 일해서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큰돈이었어요. 그녀의 결혼 지참금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마리아가 그 큰돈을 아낌없이 주님께 바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사랑에 이끌렸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절정은 사랑의 헌신에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그 사랑에 감격하여 어떻게 하면 주님께 헌신할 수 있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을 지니고 사는 것이 성숙한 신앙의 모습니다. 이런 찬송가 가사가 있지를 않습니까? “늘 울어도 그 큰 은혜 다 갚을 수 없네. 나, 주님께 몸 바쳐서 주의 일 힘쓰리.”

초창기 한국교회 성도들의 아름다운 신앙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1907년 평양에서 대부흥운동이 있었을 때, 주님의 사랑에 감복된 성도들이 주님께 무엇인가를 바치고 싶은데 바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저 두 다리를 쭉 뻗고 “주님 미안해요, 주님 죄송해요. 하면서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참 신앙에서 우러나온 사랑이요, 헌신이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눈부신 발전은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눈물겨운 헌신의 열매입니다. 이러한 헌신 때문에 교회도 성장하고 성도들도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미래교회와 우리 후손들의 축복을 위해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눈물겹게 헌신해야하겠습니다. 2011년도 크리스마스는 사랑을 베푸는 헌신의 날로 보냅시다. 우리는 헌신으로 축복의 씨를 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의 남은 생애를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성탄에 담긴 사랑이 그것을 증언해줍니다. 나 자신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서 염려하며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도 우리 주님처럼 아낌없는 사랑을 바쳐 헌신하며 섬기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의 힘과 능력이 되사 더욱 풍성한 것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님과 함께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복이 너무나 많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몸을 그리스도에게 바쳐 헌신하면 하나님께서는 건강을 더하여주십니다. 시간을 바쳐 헌신하면, 우리의 시간들을 평강으로 채워 주십니다. 물질을 바쳐 헌신하면 영적인 복까지 넘치게 하십니다. 재능을 바쳐 헌신하게 되면 우리를 더욱 존귀하게 만들어주십니다. 그 약속이 바로 마태복음 6장 33절이 야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했는데, 하나님은 이 세상나라까지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이 독생자를 사지로 떠나보내신 날입니다. 그것은 억지로 했어도 큰 사랑인데, 아낌없이 하셨으니 얼마나 크고 놀라운 사랑입니까? 이것이 바로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징표가 바로 성탄절이란 말입니다. 그 사랑이 이미 여러분들과 저를 구원했고 장차 천국에 갈 때까지 우리의 승리를 보장해 줄 것입니다. 그 사랑에 이끌려 아낌없이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복 받은 성도가 되길 축원합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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