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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근

한 몸으로 부르셨습니다.

박원근 (서울남노회,이수중앙교회,목사) 2011-11-20 (일) 09:24 12년전 3722  

제목 :한 몸으로 부르셨습니다.

시 133:1-3, 골 3:12-15

몇 년 전 미국에 가서 경험한 일입니다. 여신도들이 모여서 구역예배를 들이고 식사를 하면서 음식에 관한 이야길 하고 있었습니다. “순두부는 어떻게 만들지?” “걱정하지 마! 마켓에 가면 종류별로 팩에 넣어 팔아! 물만 붓고 끓이기만 하면 돼!” “혹시 불고기 양념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역시 양념을 사서하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 나와 있는데 굳이 시간들이고 힘들게 손수 할 필요가 무엇이냐?’는 말이었습니다. 그분들의 이야길 들으면서 ‘참 편리해 졌구나!’ ‘그렇게 해도 되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제 머리를 맴돌았습니다. 맞벌이 생활이 대부분인 요즈음 예전 어머니들처럼 음식 하나하나에 시간과 정성을 쏟을 여유는 없을 것입니다. 손쉽게 조리할 상품이 나와서 신세대 주부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세태가 가족들을 위해 재료를 준비하고 온갖 양념을 넣어 맛을 내고 땀을 흘려 수고하고 정성을 들이는 모습이 사라져 가면서 점점 가족애도, 그 끈끈한 정도 덜해져 가는 것 같아 못내 아쉽습니다.

점점 냉랭한 가정이 늘어가고, 우울증에 빠진 사람이 증가하고, 참을성을 잃어 가는 것이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우리는 한 몸으로 살아가야 할 가족까지도 모래알처럼 무너져 내리는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지난 주 한국 보건사회 연구원과 사회 통합 위가 공동 조사한 보고서에 의하면 우리나라 72%의 여성들이 수명이 늘면서 늙은 남편이 부담스럽다고 응답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부부갈등을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인류는 세계화란 거센 풍랑 앞에서 국가니, 민족이니, 심지어 가족 공동체까지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사람이 국가나 민족, 가정 없이도 아름답고, 행복한 인생을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그의 지체로 불러 주셨다는 점이올시다. 우리는 한 형제로 연합하여 동거해야만 선하고 아름다워질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홀로 존재하는 단 독자가 아니라 언제나 삼위로 더불어 존재하시는 분이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말은 혼자서 거처할 수 없는 더불어 살아가야할 존재로 지어졌음을 뜻합니다. 성경은 함께 더불어 살아가며 함께 삶을 나누는 것을 교제(Fellowship)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세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첫째가 말씀선포요, 둘째는 친교(koinonia)요, 셋째가 봉사입니다. ‘교회는 친교가 중심이다.’는 말입니다. 실로 ‘예배도 이 친교 기능이 생명이다.’ 하겠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 교제를 통해서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은사를 받게 됩니다.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우리는 받은 은사를 함께 나누며 한 몸으로 소통하며, 살아갑니다. 여기에 생명이 있고, 기쁨과 평강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오늘의 교회는 성도의 교제와 친교를 강조하면서도 한 몸으로, 한 형제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까? 이미 성도의 교제가 하나님과 거룩한 만남이 살아져버렸고, 인간의 사교모임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교제나 친교를 서로 필요에 따라 만나서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함께 어울리며, 음식을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쯤으로 가볍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배 후에 친교 시간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다과나 음료가 있으니 함께 듭시다. 참여해주세요”하는 의미로 받아드립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교제는 이렇게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교제란 함께 삶을 나누고, 생명을 나누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교제는 이기적이 아닌 이타적인 사랑 가운데서만 가능합니다. 이러한 사랑이 있을 때 진실한 나눔이 이루어지고, 섬김과 희생으로 위로와 용기, 소망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야 요. 자신을 내어주고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교제와 사귐과 친교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 가운데서만 친교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사랑의 실천은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교제와 사랑의 실천은 무리 가운데서는 아예 불가능해요. 무리들은 떡은 함께 나눌 수 있지만, 몸을 함께 나눌 수는 없어요. 문화는 생활을 공유할 수는 있어도, 삶을 공유할 수는 없습니다. 무리는 함께 당을 지를 수는 있지만, 결코 형제나 자매, 친구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한 가족이 될 수 있고, 함께 친구로 살 수 있는 소수의 제자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제자의 수를 늘릴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열두 명을 고집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어요. 지금 많은 사람들이 대 교회를 선호합니다. 그러나 대 교회는 진정한 교제와 친교를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실로 사람들이 대 교회를 선호하는 것은 한 형제로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무리로 사는 것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교회 원로목사였던 고 옥함흠 목사님은 소천하시기 몇 해 전 주일예배 설교에서 “성경을 보면 다수는 허수고, 무리는 허상이었습니다. 내가 그것을 알기에 예수님처럼 소수를 제자로 만들겠다고 제자 삼는 목회를 시작했습니다만, 이렇게 큰 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내가 제자훈련에 목숨 걸었다고 떠들고 다녔지만, 실상은 이벤트에 목숨을 건채 덩치만을 키우고 문어발식 확장을 하는 목사는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에 제 가슴에 비수를 찌르는 듯합니다.”며 탄식했습니다. 대교회는 성공이 아니라 실패란 말입니다. 목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적인 돌봄인데 대교회는 조직과 프로그램으로 돌봄을 대치시켜 버릴 수밖에 없다는 탄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함께 하겠다는 엄청난 축복을 약속해주셨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18:20)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많이 모여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작게 모이는 것은 항상 죄송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성이 있습니다. 실은 그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어요. 이 말씀의 참됨 뜻은 이렇습니다. “수천, 수만 명, 서로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무리들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곳에는 내가 함께 할 수가 없단다. 서로가 이름도 알고, 얼굴도 잘 아는 친분이 두터워 사랑하는 사람 2,30명이 한 가족처럼, 한 형제처럼, 모여 서로 사랑하며 예배드리는 그 곳에라야 나와 교제가 가능할 수 있단다.” 이런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하는 곳에 계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진정한 교제가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까? 첫째로 진정한 교제는 서로가 서로에게 진실해질 때, 진실이 있는 곳에서 가능하게 됩니다. 상대방에게 자신의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진솔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합니다. 진실이 있어야만 서로의 마음이 열리게 됩니다.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고, 실패를 고백하고, 잘못을 시인하고, 상처를 나누고, 기도를 부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진실이 결여되어 있는 교회가 너무도 많습니다. 참 모습을 숨기고, 가식적이고, 자기를 방어하고, 변명하고, 그러면 마음이 열리지가 않아요.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대화가 불가능해집니다. 이런 사람은 속은 썩어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자신의 삶이 장미 빛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진정한 교제가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요일 1:7-8) 사람들은 자신의 허물이 들어 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속이고, 감추려합니다. 우리가 어두움 가운데서 살 때는 그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빛 가운데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빛 가운데로 나오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두움에 숨어살면서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를 원한다면 빛 가운데로 나와야합니다. 가면을 벗어던져야합니다. 진실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둘째로 진정한 교제를 위해서는 긍휼이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래야 나도 주님처럼 용서할 수가 있어요. 우리가 용서받고, 용서하지 않고는 교제는 불가능합니다. 소통이 일어날 수가 없어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와 관계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다면, 긍휼히 여겨야합니다. 실수가 드러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실수가 덮어지는 곳이 있어요. 노아의 실수는 함이라는 아들 앞에서는 들어 났어요. 그러나 샘과 야벳이란 아들 앞에서는 덮어졌습니다. 긍휼이 있는 곳에서는 어떠한 실수나 허물도 덮어집니다. 그러나 긍휼이 없으면 실수와 허물은 들어 나요. 들어 날 뿐만 아니라, 더 크게 과장되어 부풀려집니다.

누구의 인생이든 인생이란 종종 흔들리고, 넘어지며, 괘도를 이탈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인생이 제 자리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긍휼이 필요합니다. 용서가 필요하단 말입니다. 진정한 교제를 위해서 우리는 서로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하고, 긍휼을 받아드릴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는 용서를 받고 용서를 해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용서 없이 교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형제를 일곱 번씩 이른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베드로는 주님을 모른다고 저주까지 하는 잘못을 범하고도 주님의 용서를 믿었기에 다시 회개하고 돌아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주님의 용서를 믿지 못했기 때문에 자결하고 만 거예요. 베드로와 가룟유다의 차이는 결국 주님의 용서를 믿을 수 있었느냐 없었느냐에 따라서 결정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교제의 필수조건입니다. 인간이란 불완전한 죄인입니다. 그러기에 장시간 함께 하다보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상처를 주고받기 마련입니다. 용서할 수 없다면, 그 관계는 필연적으로 깨어질 수밖에 없어요. 그러기에 바울 사도가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 골3:13)고 했어요.

셋째로 진정한 교제는 상대방의 고통을 나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게 하고, 그 고통에 동참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진정한 교제는 서로 공감하는데 있어요. “나는 네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나도 똑같이 느낀다.”고 말 할 수 있어야합니다. 이것을 ‘감정이입’이라고 해요.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골3:12) 내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거룩한 백성이라면, 마땅히 긍휼과 자비,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의 옷을 입어야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공감을 통해서 내 감정의 정당성을 인정받게 될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감정을 확인해주고, 이해해 줄 수 있어요. 우리들의 교제는 공감을 통해서 하나가 됩니다. 성도의 교제는 나눔의 교제에서 섬김의 교제로, 섬김의 교제에서 공감의 교제로 발전해가요. 그러기에 주님께서 “너희가 나와 교제하기를 원한다면,( 따르려거든)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좇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위해서 자신을 포기하고 대신 죽을 수 있을 때, 우리의 교제는 최고봉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한 성도의 교제를 원하십니까? 항상 나 자신과 상대에게 진실하십시오. 상대방을 긍휼히 여겨 보세요. 공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형제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낄 수가 있어요. 그 때 아픔을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진정한 교제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고난 받는 모든 이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어 주셨어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이 주님과 공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의 배에서는 주님의 위로가 샘솟아요. 우리가 이러한 교제에 참여하게 될 때, 우리는 한 몸으로 부름 받은 한 형제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 와요. 의와 평강과 기쁨이 샘솟고 파도처럼 출렁일 것입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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