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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근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박원근 (서울남노회,이수중앙교회,목사) 2011-06-18 (토) 15:55 12년전 3155  

제목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시103:8-14, 마 22:34-40

여자 음성으로 노래하는 가수를 우리는 카스트라토( castrato)라고 부릅니다. 원래 카스트라토는 소년 시절의 미성이 성인이 된 후에도 변치 않도록 거세당한 남자 가수를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천사 소리처럼 아름다운 소년의 음성은 사춘기를 거치면서 굵고 강하게 변합니다. 하나님께 좀 더 아름다운 노래를 바치길 원했던 로마가톨릭 교황청은 1562년부터 소년합창단원들을 거세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흔히 거세라면 절대권력 자인 왕이 자신의 여자들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궁중 남자들의 남성을 지워버린 내시를 연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일이 거룩한 교회에서도 자행되었던 것입니다. 1903년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금지되기까지 카스트라토는 무려 340년이나 계속된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거세당한 카스트라토의 찬양을 기뻐 받으셨겠습니까? 하나님이 인간에게 변성기를 주신 것은 인간의 성장과 더불어 목소리 또한 어른스럽게 성장하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남의 귀한 집 자식들을 성 불구자로 만드는 폭력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꽃봉오리 같은 어린 소년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세의 폭력을 가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누구에게 무슨 짓인들 하지 못했겠습니까?

프랑스나 스위스 같은 유럽 사람들의 집에는 창틀마다 으레 예쁜 꽃들이 매달려 있습니다. 자기 집 안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 꽃들을 집주인이 정성스럽게 가꾸는 것은 집 바깥에 있는 타인을 위한 따뜻한 배려입니다. 그곳의 집들이 마치 그림엽서처럼 한결같이, 예쁘고도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단순히 집 모양이 아름다워서가 아닙니다. 꽃 한 송이라도 타인을 배려하려는 그들의 이웃 사랑하는 마음이 집 밖에까지 여과 없이 배어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남을 위하고 사랑하는 이와 같은 넉넉하고 따뜻한 마음이 어디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까?

우리 크리스천이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추구해야할 궁극적인 지향점은 무엇이어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3일 전 일입니다. 주님과의 논쟁에서 사두개인들이 망신을 당했다는 말을 들은 한 율법사가 예수님의 콧대를 꺾어 놓을 심상으로 찾아와 “예수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나이까?”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22:37-40) 여기에서 예수님은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에 명시된 율법의 핵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종교를 만들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근본을 놓쳐버린 유대교, 하나님을 가장 열심히 섬긴다고 자랑하면서도 실상은 하나님을 너무나 멀리 떠나 버린 유대교 지도자들, 그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려고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을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 주님은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10:45)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 죽으려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사랑은 언제나 인간 사랑과 분리할 수 없는 똑 같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와는 정반대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한답시고 얼마 많은 인간들을 희생시켜왔습니까? 그래서 로마 가톨릭 교황청은 “하나님에게 좋은 찬양을 드리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힘이 없는 어린 소년쯤이야 얼마든지 거세해도 좋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둘째도 그와 같다’는 말씀은 ‘둘째라고 해서 첫째만 못한 것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그 비중과 가치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의 질문에 대한 자신의 대답을 이렇게 마무리하셨습니다. “이 두 계명에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본뜻이 들어 있느니라.”( 마22:40)

여기에서 예수님은 구약성경이 율법서와 예언서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은 모두 ‘하나님 사랑’과 ‘인간사랑’이라는 두 기둥의 터 위에 세워졌음을 밝혀주셨습니다. 주님의 이 답변 앞에서 주님을 올무에 빠트리려 했던 율법사는 그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의 정곡이요, 핵심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인간사랑’은 예수님께서 시종일관 강조하신 말씀이었습니다만, 그것은 예수님이 특별히 창안해낸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의 계약, 율법의 십계명, 선지자들의 예언 등 구약성서 전체에서 요구하신 일관된 요구요, 명령이었습니다.

신구약성서 전체가 이 두 계명의 토대 위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 사랑’과 ‘인간사랑’은 동전의 양면처럼 불가불리의 관계를 가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반드시 인간 사랑에 귀결되어야 하고, 인간을 사랑한다면 그 동인은 항상 하나님 사랑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인간사랑’은 크리스천의 의무요, 삶의 목적이요, 생의 동기가 되어야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하나님 사랑의 길이만큼 정확하게 인간 사랑으로 연결되어져야 합니다. 그 길이가 단축되거나 단절되어 가지고는 진정한 의미에서 크리스천이라 말 할 수 없습니다. 산이 높으면 반드시 그 계곡은 그에 정비례해서 깊은 법입니다. 높은 산 밑의 호수는 작은 산이나 평지의 호수보다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깊습니다.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그에 비례해서 인간을 많이 사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면서도 성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낮고 낮은 이 땅에 오시기까지 성부 하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십자가에서 인간을 위해 생명까지 주셨습니다. 다윗왕은 이와 같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주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18:1-2)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 하리요.( 시27:1)

이상은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한 시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거기에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끼어들 틈이 없었습니다. 다윗의 하나님 사랑은 늘 최상의 사랑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의 신앙은 ‘나의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오늘 아침에도 동녘에서 해가 떠오르게 하시는 것입니까? 나를 위해서입니다. 왜 밤하늘에 저토록 무수한 별들을 빛나게 하시는 것입니까? 혹 밤길을 걷게 될지도 모를 나를 위해서입니다. 믿습니까? 이처럼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은 ‘오직 나의 하나님’일 뿐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가득 찬 고백과 감동적인 체험은 그리스도인에게는 필수적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신앙이 있어야합니다. 이것이 결여된 신앙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이어서 사상누각일 뿐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일이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신앙의 동기요, 시발점일 뿐이라는 것, 결코 목적지거나 종착점일 수는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문제는 나를 하나님 사랑의 종점으로 삼으려는데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나에게서 끝나버릴 경우 그 신앙은 독선적인 신앙이 됩니다. 그리고 기복신앙이 되고 말아요. 자신을 ‘하나님 사랑’의 종점으로 삼는 신앙은 인간의 욕망과 이기주의만을 부추깁니다. 하나님의 뜻을 죽이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 사랑은 단지 자신의 소원이나 욕망을 이루기 위한 방편이나 수단일 뿐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웃을 착취하고 폭행하는 일도 서슴없이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한 때 천주교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소년들을 거세하는 일까지 서슴없이 한 것이 아닙니까?

다윗의 신앙은 ‘나의 하나님’을 찬양하는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합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8:1)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103:12-14) 다윗의 ‘나의 하나님’ 신앙은 ‘우리 하나님’ 신앙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하나님 사랑’은 ‘인간사랑’으로 강이 되어 흐릅니다. 우리가 다윗을 메시아 신앙의 모델로 삼는 까닭도 바로 이점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다윗은 그 사랑으로 자기 백성을 사랑했습니다. 나아가 원수인 대적까지도 끌어 앉아 친구가 되게 했습니다. 다윗은 스스로 ‘하나님 사랑’의 종착역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평생 은혜와 축복의 통로로 살았습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만인의 은혜와 축복의 통로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주기도문을 보십시오. 시작부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였습니다........“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주님께서는 ‘나’만이 아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로다.”( 롬1:14) 우리는 여기에서 바울의 ‘하나님 사랑’은 그의 높이만큼이나 ‘인간사랑’도 깊어진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그의 ‘인간사랑’을 보십시오. 차별이 없습니다. 모두를 다 포함하고 있지를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인간사랑은 차별이 없어야 하고, 모두를 다 포함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왕따를 시켜서는 안 됩니다. 내 취향과 내 코드에 맞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그것을 가지고 어찌 사랑이라 말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5:20) 그들의 과오가 무엇입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강도만나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형제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인간의 생명을 희생시켜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제사장이나 레위인 보다도 율법을 지키는데 더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억매이지 않은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나 죽어가는 형제에게 자비를 베풀어 살렸습니다. 종교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만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사람에게 고통을 주거나 도움을 줄 수 없는 종교라면, 그 종교는 이미 죽어버린 생명 없는 종교입니다. 그런 종교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입니다.

추운 겨울 한 노인이 골목에 쪼그리고 앉아 떨고 있었습니다. 마틴은 자기 외투 절반을 짤라 ‘형제여! 평안하라.’고 인사를 하고, 건너 줍니다. 그 날 밤이었습니다. 꿈에 하늘 보좌에 예수님이 앉아 계신 것이 보였습니다. 주님은 마틴의 외투 절반을 걸치고 계셨습니다. 그것을 본 천사가 묻습니다. 주님, 그 외투는 누가 준 것입니까? ‘어젯밤 나의 형제, 마틴이 나에게 입혀준 것이라오.’ 주님은 무척이나 행복해 보이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곧 우리 주님께 한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사랑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나의 도움이 필요한 어려운 이웃들을 사랑하는 일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야합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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