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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근

네가나를 사랑하느냐?

박원근 (서울남노회,이수중앙교회,목사) 2011-05-22 (일) 08:38 12년전 4377  

제목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시 18:1-6, 요 21:15-17

사랑이라는 말은 늘 상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 매력적인 말입니다. 그 이유는 사랑에는 신비롭고도, 창조적인 능력이 듬뿍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왔다간 사람 중에 누가 가장 크고,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까? 그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분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게 되자 제자들은 본업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 밤은 불행한 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밤을 지새워 고기를 잡아보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피곤하고, 지치고, 허기진 채로 기진맥진해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절망이었습니다.

이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바닷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조반을 준비해서 추위에 떨고 있던 제자들의 몸을 녹여주시고, 굶주린 배를 채워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참 이상한 일은 예수님이 베드로의 이름을 여기에서는 시몬이라고 부르고 계시다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이 동생 안드레의 전도를 받고 첫 대면을 했을 때, “너의 이름이 시몬이다 만은 장차 베드로라 하리라”고 이름을 바꾸어주신 일이 있습니다. 까마득하게 오래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시몬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크게 기뻐하시면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갈대 인생, 시몬이 예수님을 통해서 반석 인생, 베드로로 거듭나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지어주신 베드로라는 이름 대신에 당신을 따르기 이전의 이름인 시몬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그러니 베드로의 마음이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한 때, 자기가 예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자부했던 베드로, 자타가 베드로를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베드로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도 물고기 잡으려 갈 수밖에 없었으니 그는 반석은 고사하고 돌멩이도 될 수 없는 갈대인생, 시몬인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너는 더 이상 베드로가 아니라 시몬 일뿐이다”는 말씀을 꼭 해주셔야했습니다. 그 시몬이 베드로가 되기 위해서는 다시 소명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수님이라면 베드로에게 한 마디 더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시몬아, 네가 모든 사람이 다 나를 버릴지라도 너만은 나를 버리지 않겠다고 말했지, 죽을지라도 나를 따르겠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내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심신 당부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는 잠만 자다가 나를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다니, 그것도 창검을 든 병사들 앞에 서라면 모르겠다. 계집종 앞에서 그렇게도 비겁하게 무너져버릴 수가 있단 말이더냐?”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시몬의 아픈 마음을 건드리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이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그의 아픈 과거를 물으셨다면, 그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이렇게 말하면서 슬픈 기색을 띠고 떠났을 것입니다. 이 때, 베드로에게 필요한 것은 책망이 아닙니다. 오직 사랑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그의 실패에 대해서 묻는 대신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사랑을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을 통해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부인한 것은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은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능력이 부족하거나 용기가 없어서도 아닙니다. 오직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떠나지 않습니다. 언제나 함께합니다. 언제나 하나가 됩니다. 이것이 사랑의 신비요 사랑의 능력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하나 되게 합니다. 아픈 사람을 사랑하면 나도 아파지고, 기쁜 사람을 사랑하면 나도 기뻐집니다. 우는 사람 사랑하면 나도 울게 되고, 웃는 사람을 사랑하면 나도 덩 달라 웃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그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보다 자기 생명을 더 사랑한 거예요.

이 때 열 두 제자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는 제자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베드로만이라도 그 길을 가야했습니다. 그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저는 얼마 전에 가정 문제로 찾아온 한 자매님과 상담한 일이 있습니다. 어려운 사정을 다 듣고 난 후에 “정말로 남편을 사랑하시는데 남편이 그러시는 겁니까?”하고 물었더니 대답을 못하는 거예요. 이런 경우에 많은 사람들이 “글세요. 저도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는데 이 대답에 문제가 많습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거든요. 나 자신보다도, 내 생명보다도 상대방을 더 사랑해 보세요. 무엇이 문제 될 것이 있겠습니까? 모든 문제들은 상대방보다 나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사람들은 근본적인 문제는 잃어버리고 성격이다, 돈이다, 명예다 하며 복잡하게 얽히게 되는데 근본적인 문제는 사랑의 결핍에 있습니다. 사랑하면 모든 문제가 다 소화되어버립니다. 이 세상에 사랑으로 소화해 낼 수 없는 문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풀 수 없는 문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거예요. 너에게 지금 나에 대한 사랑이 있느냐? 그러면 지금 네 마음의 번민도 곧 사라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문제는 사랑으로 풀어야합니다. 사랑은 운명을 같이하게도 하고, 생명을 바칠 정도로 엄청난 힘과 용기를 줍니다. 그러기에 사랑보다 더 무섭고 강한 것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인생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까? 그렇다면 사랑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첫 번째 질문을 하십니다.“나는 네가 부인하고 떠났을지라도 여전히 너를 사랑한단다. 나는 너를 사랑하기에 십자가상에서 생명을 주었다. 내가 너를 사랑한 것처럼 너도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느냐?” 아카페하고 묻으십니다. 사랑이란 언제나 최상의 것을 요구하는 법입니다. 사랑은 받는 것도 최고를 원하지만, 주는 것 역시 최고를 원합니다. 사랑에는 차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사랑에는 시샘이 있고, 시기가 있고, 질투가 뒤따르게 되는 법이올시다.

어떤 시인이 이렇게 말했다지를 않습니까? 새장 안에 들어 있는 새를 바라보면서 “제발 너는 내가 볼 때만 울어다오.” 이처럼 사랑이란 최상의 것으로서 나만 사랑해야 된다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에게서 최상의 사랑을 찾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누구에게나 최상의 사랑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기에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나 하나만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를 사랑하신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사람 중에 나만 사랑하는 것처럼 최고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동료 목사님들에게서 “하나님은 박목사를 너무 많이 사랑하신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되는데 저도 그것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내편이시며, 저는 늘 상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어야합니다. 아직도 이런 경험 없이 인생을 사시는 분이 계시다면, 하나님을 사랑해 보세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두 번째 질문을 하셨습니다.

첫 번째 질문이 “다른 사람들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질문이었다고 한다면 두 번째 질문은 “너 자신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질문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질문입니다. 둘 다 아카페 사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거예요.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언제나 나 자신입니다. 언제나 나를 부인하지 못해서 주님을 따르는데 실패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도 바로 나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다 주고도 모자라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자존심이 살아서 큰 소리가 나고, 손해 보는 것이 분해서 심기가 불편해진다면 아직도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자기는 소멸되고, 증발되어 버립니다.

베드로에게 하신 주님의 세 번째 질문도 역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 번째 질문은 첫 번째, 두 번째 질문과는 차이가 큽니다. 예수님은 두 번의 질문을 통해서 최상의 사랑을 요구하셨습니다. 아카페 사랑을 요구하셨고, 자기 부정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이 영 신통치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아카페하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사랑한다는 말을 감히 못했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렇게 사랑을 시인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시인할 때 사용한 사랑이라는 말조차도 아카페가 아닌 필레아였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나는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신 것과 같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은 감히 엄두도 낼 수가 없습니다. 다만 친구로써 의리적인 애정을 약속해 드릴 뿐입니다.” 옛날의 베드로가 아니지 않습니까? 얼마 전까지 만해도 베드로는 자기가 예수님을 아카페한다고 생각하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다 주를 버리고 떠날지라도 자기만은 끝까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자만심은 한 계집종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주님에 대한 자기의 사랑이 얼마나 허세였고, 거짓이었던가를 뼈저리게 체험했던 베드로는 겸손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겸손해질 때에만, 사랑은 참되고 진실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확인하신 후에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는 소명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사랑하는 자에게 사명을 맡기십니다. 사랑이 있는 사람만이 사명을 위해 헌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할 때, 지혜가 생기고, 능력이 주어지고, 용기가 생깁니다. 참 사랑은 사명의 사람이 되게 하고, 받은바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하는 힘이요, 능력인 것입니다.

사랑이란 내가 사랑하는 자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나도 소중히 여기게 만듭니다. 제가 잘 아는 권사님 한 분이 계십니다. 이 권사님의 남편은 장로님인데 직장이 없었습니다. 권사님이 양품점을 하셔서 어렵게 생활을 꾸려가는 가정입니다. 장로님은 거의 사진작가라고 불리 울만큼 카메라를 사랑하며 오랫동안 취미생활을 해왔습니다. 장로님이 카메라를 잃어버리자 빚을 내서 사줄 정도였습니다. “생활도 어려우신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우리 장로님에게서 카메라를 빼앗는 것은 죽으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는 거예요. 남편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아내도 소중히 여기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가장 사랑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양이 아닙니까? 길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 생명을 바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 당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내 양을 부탁한다.”고 하신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당신의 제자로 불러주신 것도 잃어버린 양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임을 잊지 마세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주님의 간절한 요구를 어찌 모른다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지금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양을 부탁한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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