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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근

제일 귀한 선물은 사랑입니다.

박원근 (서울남노회,이수중앙교회,목사) 2011-04-30 (토) 14:39 12년전 3391  

제목 : 제일 귀한 선물은 사랑입니다.

마태22:34-40, 고전13:9-13

고린도교회는 성령의 은사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기와 질투, 분열과 당쟁을 일삼는 미성숙한 교회였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들은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면서, 산을 옮길만한 믿음 있음을 자랑했습니다. 구제를 열심히 하고, 주님을 위해서라면 자심의 몸이라도 불살라 받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대단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순교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헌신의 최고봉이요, 절정입니다. 요한 사도는 계시록에서 “순교자는 하나님 나라의 별과 같다”고 극찬한 바 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은 순교자를 신앙의 영웅으로 추앙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내 몸을 화형 장에 내던져 순교의 제물이 되게 한다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모셨던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최후를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인생의 주제가 무엇인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삶의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죽을 때까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될, 꼭 붙들고 가야할 것이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면서도 마지막 최후까지 놓지 않고 붙들고 계셨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젊은 남녀가 한밤중에 드라이브를 하다가 숲 속에 차를 멈추고 사랑의 밀어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폭력배가 들어 닥친 것입니다. 차 문을 부수고 남자를 끌어내 흉기를 휘두르며 몰매를 때렸습니다. 그는 사력을 다해 허겁지겁 그 현장에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자기 애인을 폭력배들에게 홀로 남겨두고 말입니다. 폭력배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 남자는 자기 애인에게 얼마나 뜨거운 사랑의 고백을 했겠습니까? “죽도록 당신만을 사랑하겠다고, 죽어서도 당신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겠노라고, 당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느냐?”고, 이렇게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백은 잠시 후에 허망한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끝까지 사랑하기가 이렇게도 어려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그러지를 않았습니까? 그는 스승인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하겠노라”고, “다 버리고 주님을 떠난다 해도 나만은 끝까지 따르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 가야바의 법정, 한 계집 종 앞에서 그의 맹세는 허무하게 무너져버렸습니다. 우리가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이 이렇게도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왜 끝까지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한 때 대학생들에게 회자되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정말 멋있게 잘 생긴 남학생이 옷은 잘 입었지만 보기에도 민망하리만큼 못생긴 여학생과 데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학생들이 이렇게 수군거립니다. “저 여자애, 아버지가 재벌인가 봐.” 잠시 후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대단히 예쁘게 잘 생긴 여학생이 자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추남의 남학생과 데이트를 합니다. 그러자 학생들은 이렇게 수군거립니다. “저 남학생사법고시에 붙었나 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의 사랑이 이렇게 조건적이고 상황적일 때가 많지를 않습니까? 정말 한심한 것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러워들 합니다. 그래 가지고 어떻게 끝까지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조건이나 상황을 사랑하는 것이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조건이나 상황이 변하게 될 때, 사랑은 맥없이 무너져버립니다.

지금 예수님을 둘러싸고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 밤이 지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본인은 알 것이 아닙니까?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십자가의 죽음이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한 죽음인지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절박한 순간에 당신 살 궁리부터 했어야지 않겠습니까? 흉기를 휘두르는 폭력배의 손에 애인을 버려두고 도망친 남자처럼, 그 절대 절명의 순간에 예수님께서 당신 살길을 모색했다고 해서 누가 비난하고, 욕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 절박한 순간에 당신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을 생각하셨습니다. 당신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을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신지 아세요. 삶의 목적과 주제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인생의 의미요,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3)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말입니다. 다 의미를 잃고 말아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도 십자가를 지신 것도 모두가 사랑을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사랑을 빼버린다면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이 왜 그렇게도 소중한 것입니까? 사랑이란 관계입니다. 관계는 곧 생명줄이야 요.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관계가 끊어져 버립니다. 그러면 다 끝나버리고 마는 거예요. 관계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사랑은 관계요, 사랑은 그 관계를 좋고 아름답게 최상의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아름다운 관계에서 생명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춰요. 거기에 행복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비극은 사랑이 실종되어 가는데 있습니다. 경쟁과 성취, 성공이 사랑을 몰아내 버렸어요. 일이 사랑의 자리를 차지해버렸고, 바쁘다는 이유로 관계를 희생시켜 왔습니다. 그러는 사이 일이, 성공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왜 인생의 목적을 사랑에 두어야 하고,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지켜가야 하는 것입니까?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13) 이 땅에 사랑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가장 오래 영향을 끼치는 것은 우리의 성취나, 성공, 재산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테레사( Mother Teresa) 수녀가 말했듯이 ‘우리가 무엇을 하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일에 얼마만큼 사랑을 쏟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의 임종 순간을 지켜보았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졸업장이나 재산 문서, 자격증이나 보물을 보여 달라는 사람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들이 다시 한 번 보고 떠나길 원했던 것은 그가 생전에 사랑하고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결국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생의 성패를 사랑으로 평가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척도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믿음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사랑이야 요. 사랑이 없으면 믿음은 빈껍데기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천국에서 나의 직업, 지위, 성취, 재산, 가족관계를 물어 보시지 않을 것입니다. “주리는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물을 주었느냐? 나그네 된 자들을 영접하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입혀 주었느냐? 병든 자들을 돌아보고, 옥에 갇힌 자들을 찾아가 주었느냐?” ......사랑했느냐를 물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너희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 것입니까? 사랑의 가장 좋은 표현은 시간입니다. 우리는 하루 24시간을 무엇을 위해 사용합니까? 무엇에 우선순위 제1번을 두고 사십니까? 시간은 우리가 받은 가장 귀하고 소중한 선물입니다. 우리는 돈을 더 많이 벌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을 더 많이 만들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똑같이 하루를 24시간 살 수 밖에 없어요. 우리가 산다는 것은 시간을 사는 것이기에, 시간은 곧 생명입니다. 사랑의 본질은 상대방에게 나를 얼마만큼 줄 수 있느냐가 관권입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주어야 하는 가장 큰 선물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이점을 남자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많은 남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제 아내와 아이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저는 그들이 해달라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해줍니다. 그런데도 불평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더 해주어야 하는 것입니까?” 남자들은 가족보다도 일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족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족 편에서 볼 때는 자기들이 우선순위에서 항상 일에 밀려나게 될 때 “도대체 나는 뭐냐?”고 불평하게 됩니다. 가족이 원하는 것은 일이나 돈이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오늘이 어린이 주일이 아닙니까? 이 이야기를 잘 들으셔야합니다. 하루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농구를 하자고 공을 가지고 와서 조릅니다. 아버지는 “오늘은 바빠서 안 되겠다. 너 혼자 가서 놀아라. 다음 날 또 와서 조릅니다. 아빠, 오늘은 농구 같이 하자. 오늘은 아빠가 너무 피곤해서, 좀 쉬어야겠다. 친구들과 놀아라. 아이가 자라서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오늘 학교에서 연구수업이 있는데, 제가 발표를 합니다. 학교에서 아버지를 꼭 모시고 오라고 했어요. 그래, 오늘은 할 일이 많구나! 너의 어머니 하고 가도록 해라.”

많은 세월이 흘려서 아들이 결혼을 하고, 모회사 중역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정년퇴직을 하고 이제 노후를 한가롭게 집에서 보냅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오늘은 네 어머니 생일인데 조금 일찍 왔으면 좋겠다. 가족끼리 저녁 식사나 같이 하자. 일이 너무나 바빠서요. 주일 오후에 하면 어떨까요. 할 수 없지, 그러면 주일 저녁 식사로 하자. 주일이 되었습니다. 아버님, 미안합니다. 오늘은 외국에서 회사 일로 손님이 오는데 제가 나가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렸습니다. “이젠 내가 더 살 것 같지 않구나! 건강이 예전 같지를 않아! 너희 동생 내외, 누나 내외까지 오는 연휴에는 2박 3일쯤 제주도나 같이 같다 오도록 하자. 그렇게 하시죠. 여행 전 날이었습니다. 아버님, 내일 저는 못갑니다. 바쁜 일이 생겼어요. 아버지는 아들이 떠난 후에 곰곰이 지난날들을 회상해봅니다. 자식, 어쩌면 그렇게도 지 애비를 닮았는지! 지난 날 내가 항상 그렇게 말했지! 나는 바쁘다고! 늙은 아버지는 쓰디쓴 미소를 짓고 쓸쓸하게 돌아서야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고도 무엇을 내어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어주는 일 없이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선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당신 자신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값진 선물이나 맛있는 음식이 아닙니다.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시간을 내주어야합니다. 부모는 자기 자신을 자식들에게 내줘 그들이 먹도록 해야 합니다. 자식은 부모를 먹어야 성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내줘 우리로 하여금 먹도록 하시지 않았습니까? 성만찬을 할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결국 주다보면 생명까지 주게 됩니다. 우리는 나를 내줌으로써 상대방을 얻게 됩니다. 나를 내줌 없이는 상대방을 내 것으로 만들 수는 없는 일입니다. 결혼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내 것이 되는 줄 압니까? 천만에 말씀이야 요. 나를 내주는 일 없이는 결코 상대방은 내 것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기에 결혼하고도 한 몸이 되지 못하고, 이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내가 사랑해야할 시간은 바로 지금입니다. 성경은 강조해서 우리에게 말합니다. “네 인생에 가장 소중한 것을 지금 하라. 우리는 지금 사랑할 수 없다면, 영원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갑니다. 상황은 급변합니다. 나에게 내일이 있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가 있겠습니까? 언젠가 우리는 다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나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며 인생을 살았느냐? 무엇을 사랑하며 살았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들고, 영원히 살고 싶습니까? 사랑하십시오. 예수님은 공생애 3년만 일하시고도 불멸의 인생을 사실 수 있었습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분을 추종하는 신앙인이 이 땅에 15억이 넘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와 함께 영원할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십자가였습니다. 사랑이었어요.

예수님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잘 아는 춘향이와 심청 이를 보십시오. 그들은 우리 민족의 심성 한 가운데 지금도 살아서 숨 쉬고 있지를 않습니까? 그들은 우리 민족과 함께 영원할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그들은 실존하는 인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가문이 좋은 것도, 공부를 많이 한 것도, 돈이 많은 것도, 출세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가장 소중한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생명을 바쳤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생의 주제가 사랑이라는 것, 사랑만이 영원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영원히 사시길 원하십니까? 지금 곧 사랑하십시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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