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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

실재의 탐구 - 전도서를 읽음

김재준 (기타,,목사) 2011-03-09 (수) 10:58 13년전 4906  
                                실재의 탐구―전도서를 읽음


「落穗」(1934년 10월 5일)





                                                                                                       김재준 목사



1. 현대인처럼 생명의 충실을 갈망하면서도 생명의 공허를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저들은 분주하다. 피비린내 나는 '경쟁'을 계속한다. 그러나 저들이 만들어 놓은 커다란 공각(空殼)을 채워 넣을 생명의 샘을 찾지 못하였으매 거기에는 평화도 없고, 희열도 없고, 창조의 기쁨도 없다. 현대인의 내면 생활을 가장 예리하게 비판한 명저라는 『도덕 서론』(A Praface to Morals)을 쓴 월터 리프만(Walter Lippmann)은 이렇게 말하였다.


"저들이 잠깐 걸음을 멈추고, 왜 자기가 그렇게 분주해야 할 것이며 또 그렇게 분주하면 결국 얻는 것이 무엇인가를 정사반문(靜思反問)한다면 '자기도 알지 못하노라'고 자백 안 할 수 없을 것이다. 저들의 대다수는 향락의 지주망(蜘蛛網)에 걸려서 자기에게 닥쳐오는 사건의 의미와 가치를 판단하기도 전에 벌써 그 사건을 수리해 버릴 수밖에 없이 되었다. 저들의 생활에는 엄격한 도덕적 표준이 그 권위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절충된 여론과 유행이 있을 뿐이며 저들의 세계에는 엄연 불가침의 목적을 가진 주재자가 있어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육체적, 정치적, 경제적 사변의 기계적 필연이 있을 뿐이며 저들은 저들 자신이 만고의 대경륜 안에서 그 위대한 극적 대단원을 위하여 활동하는 한 목적 의지를 가진 배우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현대 문명이란 한 굉장한 기계의 틈바구니에 끼어 도는 한 기계적 존재라고밖에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저들이 만일 뜻없이 대로로 달음박질하던 그 걸음을 멈추고 좀더 깊게 생각한다면 이 일 하는 것이 저 일 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며 무슨 일 하는 것이 아무 일도 안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심각한 의혹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리하여 혹은 허무를 운위(云謂)하고 그 생활은 퇴패(頹敗), 번민 그렇지 않으면 단편적, 기계적인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옛날 '코헬렛'(전도자[傳道者])의 심정 그대로를 발견한다.

전도서! 이것은 체계 선 철리(哲理)를 말한 것도 아니며 심오한 신앙을 말한 것도 아니라 다만 '생의 의의'를 찾아 실재의 세계를 더듬어 빈들에 헤매던 순례자의 피 엉킨 속임없는 기록이라고 봄이 가(可)한 것이다.


2. 그는 우선 자연과 인생의 만반사위(萬般事爲)에서 그 무의미하고 끝없는 윤회를 발견하였다.


"땅은 영원히 머물러 있고 해는 뜨고 해는 지되 제 뜨던 곳으로 달음질치도다."


하는 탄식으로 시작하여 "바람은 남으로 가고 또 북으로 돌아와 쉬임 없이 불어도 결국은 제 길을 따라 돌아들 뿐이요 강물은 쉬임 없이 바다로 흘러들되 바다는 그 때문에 차본 적이 없으니"(1:5-7) 모든 것은 오직 같은 곳을 헤맬 뿐이요 아무러한 창조적 희열도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만사는 오직 피곤과 권태, 말로 못할 피곤과 권태! 눈은 보기에 만족이 없고 귀는 듣기에 참[充滿]이 없도다" 하였다.


인간에는 목적도 없고 진보도 없고 오직 끝없는 순환이 있을 뿐이매,


"이미 있은 일이 장차 이룰 일이며, 이미 이룬 일이 장차 이룰 일이라. 해 아래 새것이란 하나 없도다."


그리고 만일 어느 누가 무슨 새것을 발견했노라고 떠든대야 결국 알고 보면 역사 이전부터 있던 일이요, 오직 그 기록이 민멸(泯滅)된 것뿐이다(1:10, 11). 세상만사가 새것이 없고 또 새것이 없을 것이니 오직 같은 것의 순환, 순환, 순환일 뿐이다. 그러면 이 순환의 의의는 과여하(果如何)? 오직 허무, 허공! "헛되고 헛되어 허무 중의 허무로다. 모든 것이 오직 헛된 것뿐이로다" 하는 것이 그의 인생관이다.


3. 그러면 그는 이 인생관이 당연한 결론이라 하여 이에 그대로 주저앉은 비겁한 일종의 허무주의자였던가 하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는 탐구를 더하고 관찰을 더하여 오직 실재를 찾아 순례의 걸음을 이어나간 용감한 진리의 탐구자였다.

그는 예언자들과 같이 지평선 저쪽을 넘겨다보는 종교적 열정을 원하지도 않았으며 이스라엘 민족의 특별한 몽소(蒙召)를 자랑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경험과 관찰을 통하여 오직 현실 그대로의 인생을 응시하려 한 것이었다. 세상의 비겁나약한 학도들은 진리를 탐구하는 마당에 있어서 좀더 명료한 사색을 원한다는 것보다도 아예 사색의 중임(重任)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까닭에 혹은 재래(在來)의 전통적 독단에 의거하여 스스로 안일을 탐하여 혹은 독단만을 가지고 사색의 자유를 탄압하여 조금이라도 전통에서 벗어난 생각이면 모조리 부도덕 혹은 위험시하는 실례가 불황매거(不遑枚擧)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은 이렇듯 정궤(正軌)에서 벗어난 전도자의 '허무철학'을 그의 가장 진지한 진리탐구의 기록으로 인(認)하여 정전(正典) 중에 편입할 만한 사상적 아량을 가진 자들임을 기뻐 안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이 허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세계에서 실재를 사모하여 형극의 길을 더듬고 있다. 우선 그는 '지혜'의 길을 찾아보았다. 무지의 산이 안전(眼前)에 가로막혀서 실재가 허무로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실천철학의 문을 더듬어 그때 세대에서 가장 높은 지식과 지혜의 소유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얻은 바 지혜와 지식은 정당한 보수를 받지 못하였다. 알면 알수록, 무지는 그 영역을 넓히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번뇌만 불어갈 뿐이다. "꾸부러진 것을 펼 도리 없고 부족한 것을 보충할 길 없으니" 사람의 지혜와 지식이란 무의미한 수고일 것뿐이다.


"지혜가 많으매 번뇌가 많고 지식이 더하매 고통이 더하니 알게라 이 또한 바람잡이었도다."


4. 그는 다시 거세(擧世)가 여수지추하(如水之趨下)로 급급히 추구하고 있는 소위 '행복', 향락, 특히 육적 향락의 길을 더듬어 보았다. 그는 이미 얻은 지혜와 판단력을 잃지 않는 한에서 최대한도의 향락을 소유하였다. 그에게는 대궐이 있고 포도원, 공원이 아름다웠으며 비복(婢僕)과 우양(牛羊)이 구름같이 모이고 금은이 산적한데 그 속에는 음악이 있고 미녀가 있어 세속의 영화가 기극(其極)에 달하였다(2:4-10).

그러나 한번 걸음을 돌이켜 그 걸어온 자취, 그 건설한 사업을 점검하는 때 모든 것은 일장춘몽! 거기에 남은 것은 오직 정욕의 불길에 타다가 남은 한 무더기 사회(死灰)뿐이었다.


"보아라, 모든 것은 헛되어 바람잡는 것 같으니 해 아래 유익한 것 하나 없도다."


얼마나 무섭고 떨리는 고백인가? 지식만능, 과학만능의 망상 아래에서 오직 현상만을 보고 실재를 볼 줄 모르며 오직 단편, 찰나만을 알고 영원을 사모할 줄 모르는 사람, 오직 이욕(利慾)과 육적 행복, 향락을 추구하여 피비린내 나는 살벌을 감행하는 사람은 이제 이 '전도자'의 고백에 귀를 기울이고 이 전도자의 경험을 나누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5. 지혜의 세계, 향락의 세계에서 오직 공허감만을 깊게 한 '전도자'는 다시 한번 세상을 보았다. 세상은 그래도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세상은 그래도 순환하고 있다. 의미야 있든 없든 움직이는 그 자체, 순환하는 그 자체, 존재한 그 자체는 실재로 볼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서 그는 숙명론적 우주관, 인생관으로 기울어졌다.

삼라만상은 오직 기정(旣定)의 철칙에 얽매여 그 안에서 그 소정의 코스를 운행하고 있는 것뿐이다. '나는 때', '죽는 때'를 어쩔 수 없으며 '심는 때', '거두는 때'가 또한 변할 바 못된다. 자연계가 이 철칙하에서 운행됨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각 개인의 심리작용까지도 그러하여 '웃는 때', '우는 때', '즐기는 때', '노하는 때'가 모두 심리적 철칙하에서 되는 한 필연적 결과이며 사회적 사실이 또한 그러하여 '전쟁하는 때', '평화하는 때'가 다 정한 대로 오는 것뿐이다(3:1-8)라고 그는 말하였다.

그러고 보니 현대 대다수의 과학자, 실험심리학자, 유물론적 역사관의 주창자들은 결국 이 '전도자'의 심정을 부연한 것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님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물론 무신론자는 아니었다. 이 모든 철칙의 배후에는 신의 예정이 계심을 시인하였다. 그러나 그 주재자이신 신은 오직 차디찬 집권자이어서 인정에 끌리며 인류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시는 이는 아니었다.


6. 이렇게 숙명적이요 필연적인 우주와 인생이라 할지라도 만일 그것이 도덕적 필연이라면 거기에는 새로운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는 우선 인간사회에서 도덕의 여행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헛된 것이었다.


"나는 해 아래서 되는 온갖 압박을 다시 한번 돌이켜 살폈노라. 나는 눌린 자의 눈물을 보았노라. 그러나 안위자(安慰者)는 있지 않더라. 저들을 압박하는 자는 더욱 강포하더라. 그러나 안위자는 있지 않더라."


이렇게 압박만 있고 신원자(伸寃者)는 볼 수 없는 데다가 인인간(隣人間)에 질투가 있고(4:4-6) 군민간(君民間)에 격리(隔離)가 있어(4:13-16) 만민의 환호리에 왕위에 오른 현군도 고독과 원망중에 여생을 마치게 되는 것이 당시의 사회상이었다.

그러나 만일 현재의 이런 불공평이 있다 할지라도 어느 기간 후에 각기 그 소행에 대한 도덕적 보응을 받는다면 문제는 또한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악인의 보응받는 의인도 있고 의인의 보응받는 악인도 있으니 이 또한 헛되다고 나는 말하노라"(8:14).


그리하여 하나님은 의로 통치하신다고 볼 수 없게 되었다. 세상에는 도덕적 통치는 있지 않다. 그러나 어느 반면에는 또한 도덕적 보응이 아주 없다고 볼 수 없는 것이었다(2:26). 그러므로 그는 비도덕적이라고 보이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하여 불평하거나 반역하는 태도는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신의(神意)의 신비 불가측임에 머리를 숙이고(7:24) "밤낮으로 자지 않고" 탐구할지라도 그 전모는 영원히 감추인 신비임을 탄식할 뿐이었다(8:16, 17).

이렇게 사람이 지혜가 미치지 않는 세계를 필연이라고 보는 것은 하나님 편에 서서 보는 한 추단이다. 만일 이것을 사람 편에서 본다면 이 필연은 오직 주책없는 한 우연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다시금 해 아래를 살펴보니 경주가 반드시 빠른 자의 것이 아니며 전쟁이 반드시 힘센 자의 것이 아니더라. 지자가 반드시 먹을 것 얻는 것도 아니며 철인이 반드시 부자 됨도 아니더라. 고기가 벗어 못날 그물에 걸림같이 새가 올무에 걸려듬같이 때와 우연이 저들 위에 덮치는 것뿐이더라"(9:11, 12).


7. 그런데 불가해 중의 불가해, 비도덕적인 것 중의 비도덕적인 것은 '죽음'이라는 사실이었다. 이 '죽음'이란 것은 지혜와 무지를 가리지 않으며 의인과 악인을 분간하지 않는다. 지혜로운 자는 눈이 밝고 무지한 자는 어둡다 하자. 그러나,


"저들 쌍방에 똑같은 사변이 임함을 내가 깨달았노라. 그리하여 내 혼자 말이 미련한 자에게 임하는 그것이 내게도 그대로 임할 것이니 그러면 내가 왜 더 지혜로웠던고. 아아 지혜로운 자가 미련한 자와 똑같이 죽으리로다"(2:14, 15).


"한 가지 사변이 모든 자에게 똑같이 임하나니 의인에게와 불의한 자에게, 선인에게와 악인에게, 깨끗한 자에게와 더러운 자에게 희생 안 드리는 자에게, 어진 이에게 임하는 그것이 죄인에게, 맹세하는 자에게 오는 그것이 맹세하지 않는 자에게도, 해 아래서 모든 중에 이것이 악운이니 모든 자에게 똑같이 임함이로다."


이렇게 현세만을 보는 때 죽음이란 불가해, 비도덕적 폭군이었다. 그러나 만일 현세의 피안, 죽음의 저쪽 나라에서 공평한 보응을 받는다면 어떨까? 하지마는 이것은 현금(現今)의 '전도자', 차디찬 현실만을 보려는 그에게는 손조차 댈 수 없는 제목이었다.


"짐승에게 임하는 일이 인생에게도 임하다니 임하는 사변은 둘 다 일반이로다. 이도 죽고 저도 죽어 한 호흡을 가졌으니 인생이 짐승보다 나은 것 없으매 둘이 다 똑같이 헛된 것뿐이로다. 둘이 똑같이 한 곳을 가나니 다같이 흙에서 나서 다같이 흙으로 돌아가도다. 누가 알리오.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3:9-21).


현실주의자인 그로서는 개인의 영혼불멸을 운위할 수도 없었으며 논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8. 그는 현실의 관찰을 통하여 '인생의 의의'를 발견하려고 이리 더듬고 저리 더듬었으나 결국 '공허감'만 더한 것뿐이었다. 그는 인생의 미래에 대하여 개인적으로나 국민적으로나 하등 소망을 가지지 못하였으며 현재의 생 자체에 대해서도 아무 낙관적, 열정적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어떤 때에는 "오래 전에 죽은 이가 아직껏 산 이보다 훨씬 더 행복스럽다"(4:2, 3)고 한 적도 없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아주 생을 부정하고 사를 찬미하기에는 그는 너무나 현실적이었다. 생의 의의가 없다면 사에는 더구나 의의 없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빛은 참으로 감미(甘美)한 것이어서 눈으로 태양을 보는 것은 유쾌한 일이로다"(11:4) 하는 생의 쾌락을 말하였으며,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9:4)고도 단언한 것이다.

의미야 있든 없든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나으니 아마도 살자 하고서야 미련하게 어렵게 살 것은 무어냐? 될 수 있는 대로 지혜롭게 유쾌하게, 죽음 오는 때까지 걱정 놓고 살아볼 것이 아닌가? 이런 견지에서 그는 이에 유익한 실제적 교훈과 지혜를 많이 기술하였다(5-7, 11장).

그의 기술한 지혜와 교훈은 현실생활을 좀더 자미(滋味)스럽게 하기 위한 한 방편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요, 영원한 진리와 불변의 도덕적 권위에 근거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극히 천박한 것이 많으며 또 기회주의적인 것도 많다. 왜냐하면,


"그러므로 너무 의롭지 말고 너무 지혜롭지도 말라. (그 때문에) 곤고당할 건 무어냐? 너무 악하지도 말고 너무 미련하지도 말라. 네 때가 이르기 전에 죽을 건 무어냐?"


한 것 같은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야 별것 없으니 "현재를 향락하라", "네 몫에 태인 이 짧은 일생중 먹고 마시고 하나님의 작정해 주신 쾌락을 누릴 수 있는 데까지 누리라"고 재삼 고조(高潮)하였다(2:24-26, 3:13, 5:18, 8:15, 11:8-10). 그리고 이를 성취하기 위하여 될 수 있는 대로 지혜를 구하라. 우주와 인생의 궁극적 실재나 절대의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지혜가 아니라 현실생활을 좀더 자미롭게 할 실제적 지혜를 구하라고 부탁한 것이다.


9. 그러나 이렇게 현실적인 그에게도 신앙적 일면이 발로됨을 볼 수 있으니 아마도 현실생활만을 충실케 하며 즐겁게 함에도 창조주인 하나님을 제외하고서는 성취할 길 없음을 깨달은 까닭인가 한다. "네 나이 젊었을 때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라" 한 일구(一句)는 사상적 연락(連絡)으로 보든지 문맥상으로 보든지 심히 부자연하여 후인의 삽입한 것으로 인(認)하는 학자가 많으나 사상적 연락의 부족한 것은 전체를 통하여 한두 곳뿐이 아니니 이 구절만을 꼬집어 말하는 것은 불온당하다. 차라리 작자 자신의 사상적 추이로 간주함이 가할 것이다. 그리고 현실생활의 희락 중에서 결국 종교적 희열, 창조주를 기억하는 희열이 모든 희열보다도 더욱 뛰어남을 인정 안 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그리하여 그는 그의 순례기를 끝막으려 할 때 이렇게 말한다.


"젊었을 때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라. 불운의 날이 임하기 전에 그리고 '내게는 낙이 없노라'고 말할 세월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과 별에서 빛이 떠나며 비온 후 구름이 거두기 전에, 집 지키는 자 떨고 힘쓰는 자 굽혀지는 때, 맷돌 가는 비자가 적고 한가하며 유리창으로 내다보는 부인이 빛을 잃을 때, 통한 거리에 문이 닫히고 맷돌 소리가 낮아지는 때, 지껄이는 새소리 약하여지고 노래의 딸들이 둔해지는 때, 높은 곳을 두려워하고 한길 걷기도 무서워하는 때, 은줄이 끊어지고 금잔이 깨어지기 전에, 샘물 가에서 물병이 부서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상하기 전에"(7:1-7).


이렇게 각일각으로 닥쳐오는 죽음의 검은 그림자를 응시한 전도자는 모든 이론, 모든 지혜를 다 내어 놓고 오직 '네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한마디 말밖에 부탁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을 떠나 인생은 있지 못한다. "결론으로 통틀어 말하노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라. 이것은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대개 하나님께서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에 대하여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12:13, 14) 하고 그는 결국 하나님께로 더듬어 들었다. 길 잃었던 양, 집 떠난 탕자 돌아오는 발걸음을 우리는 여기서 찾아보고 눈물로 맞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렇다. 하나님 안에 쉴 때까지는 우리에게 안심이 없을 것이다. 때는 지금 생이냐, 사냐 하는 위기에 처해 있다. 현대인은 모름지기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모여 속죄의 은총을 통하여 새로운 자아를 받아야 할 것이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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