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
 
 
 

[Logic] 가말리엘과 딜레마, 4대강 논리의 패착

신솔문 (전북동노회,임실전원교회,목사) 2010-06-23 (수) 09:03 13년전 5215  

사도들이 피살당하게 생겼을 때 율법 교사인 가말리엘이 의회원들에게 딜레마 논증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구해줍니다(행 5:34-39). 이렇게 좋은 바리새인도 있습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예수님께 제시된 딜레마 논증들은 예수님의 비판으로 성공하지 못했지만, 가말리엘이 제시한 이 딜레마는 의회원들이 설득 당했으니 성공한 논증인 셈입니다.

삼박한 느낌을 주는 논증 형식인 딜레마를 사용했다고 해서 '만사형통'은 아닙니다. 전제들과 결론의 논리적 지지 관계는 '완전'(타당)하더라도, 청자(聽者)들에게 전제들 모두가 참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또 하나의 조건이 충족되지 못하면 결국 실패한 논증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정당화된 전제를 사용하거나 자신의 전제들을 정당화시키는 작업이 딜레마 논증에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가말리엘의 논증은 그 점에서 잘 구성되어 있습니다.

대강(大綱)의 논증 구조를 표준 형식으로 살펴보겠습니다(기초 개념을 나중에 한번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그래도 표준 형식을 읽을 수는 있어야겠죠? 번호 붙은 문장이 논증 속에 있는 전제나 결론입니다. 전제나 결론 사이는 선[bar]으로 구별합니다. 또한 전제와 결론은 상대적입니다. 다른 전제의 결론이었던 것이 다른 결론의 전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역할을 하는 진술을 중간 결론이라고 합니다. 번호 앞에 '*' 붙은 것은 논증 제시자가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 논증에 사실상 들어있는 진술을 말합니다. 숨은 전제 혹은 숨은 결론이라고 하지요.)


[A]

1. 드다가 죽으니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모두 흩어졌다.

2. 유다가 죽으니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모두 흩어졌다.

-----------------------------------------

3. 만일 선동이 사람에게 난 것이면, (결국) 망한다.


[B]

3. 만일 선동이 사람에게 난 것이면, (결국) 망한다.

4. 만일 선동이 하나님에게 난 것이면, (결국) 막을 수 없다.

*5. 선동이 사람에게 나든지 하나님에게 난다.

-----------------------------------------

*6. 선동은 결국 망하거나 결국 막을 수 없거나이다.

 

[C]

*6. 선동은 결국 망하거나 결국 막을 수 없거나이다.

-----------------------------------------

7. 사도들을 내버려 두어야한다.


 

가말리엘 논증의 핵심에 딜레마 논증 B에 있습니다. "*5"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든지 아니든지" 정도의 의미이므로 의회원들에게 문제되지 않았을 겁니다. "4" 역시 의회원이 거부할 수 없는 주장이었을 겁니다. 이의(異議)가 생길수도 있는데 가말리엘은 기다렸다는 듯이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봐 두렵다"는 말로 제거해 버립니다(구체적인 해설은 생략하겠습니다).

결국 이 논증의 성패는 "3"을 얼마나 정당화하느냐에 좌우됩니다. 만약 덜렁 3번 전제만 언급했다면 아마 여기에서 설득력 '누수'가 생겼을 겁니다. 4번은 상당히 긴 시간을 설정했을 때 그 진리성이 담보됩니다. 한 논증 속에 있으니 일관성에 따라 3번 전제도 시간에 대한 같은 설정을 한다고 보아야합니다. 그러나 이 진술에 관한 한, 사람들은 단기간을 떠올립니다. '적'이 먼 미래가 아닌 내 눈 앞에서 파멸되는 것을 보기 원하지요. 결국 망하기야 하겠지만 정말 원하는 것은 곧 망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심리를 잘 파악한 가말리엘은 그러한 이의를 [A] 논증을 통해 처리해버립니다. 생생한 사례를 들어 사람에게 난 것은 놔둬도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지요.

딜레마 논증을 사용하되 전제들의 진리성에 제기될 수 있는 것을 예상하고 미리 차단해버린 가말리엘의 논증 구성력 때문에 논란 없이 의회원들을 설득한 것으로 보입니다.

가말리엘의 논증이 의회원들에게 완벽한(건전한) 논증이었을까요?

사례로 정당화하는 것이 으레 그렇듯 [A] 논증의 반례를 얼마든지 댈 수가 있습니다. 전형적으로 사람에서 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오래 간 사례를 들거나, 사람에게 난 것이라도 할지라도 다른 사람의 '개입'을 통해 망한다고 반박하면 되는 것이지요.

가말리엘을 향한 이런 까다로운 반론을 잠재우게 한 것은 논증 자체의 우수성이 아니라, 가말리엘 자신의 인품이었다고 봐야 합니다. "온 백성에게서 존경을 받는"(5:34) 상황이 논증의 설득력을 세우는 기초가 된 것입니다.


'4대강 논리'할 때 '논리'는 "논증"을 의미합니다.

4대강 논리가 소위 우파인 저 같은 사람에게도 먹혀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말리엘 논증과 정반대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4대강 사업 내용의 핵심은 운하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설명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운하의 무모성은 결판이 난 논쟁이고요. 운하를 숨긴 채 '4대강 논리'를 세우니 논증이 부실해질 수밖에요.

사실 더 큰 문제는 논증 자체보다는 논증을 제시하는 사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후자는 4대강 논증에만 국한되지 않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뢰성은 카메라 앞 '연기'같은 임기응변으로 형성되지 않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논증의 설득력/논증 제시자 관계는 설교의 호소력/설교자 관계가 비슷합니다.

젠장, 남 이야기가 아니었군요.


hi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츲ҺڻȰ ⵵ ȸ ѱ⵶ȸȸȸ ()ظ ѽŴѵȸ μȸڿȸ ȸ б ѽŴб ûȸȸ ŵȸ ŵȸ ȸÿ ѱ⵶ȸȸͽп